최유(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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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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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崔濡
(? ~ 1364)
고려 말의 간신. 본관은 용궁.[1]
모든 매국노가 그렇듯이 당연히 족보에서도 제명처리 되어있다.
2. 충정왕 즉위[편집]
충정왕 즉위 때 공을 세워 참리[2]
첨의부의 종 2품 관리
3. 원나라에서[편집]
원나라에서 지내면서 고려를 해칠 궁리만 하고 있었는데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순제에게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 나라이니 당연히 반란을 진압할 군사를 보내 주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해 순제의 명령을 받고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에게 10만 대군을 내놓으라고 하였고 후에 중강감승으로 승진한 후 다시 고려에 와서 군사를 빨리 보내고 창을 만들 재료를 달라고 하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유를 잘 다스렸고 벼슬에다가 '용선 부원군'이라는 작위를 주었다.
4. 고려 침입[편집]
기황후에게 접근해 고려에 쳐들어갈 수 있도록 군사를 출병시켜달라고 하였고 '공민왕이 옥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명목으로 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세운 다음 의주를 지나 고려에 쳐들어갔으나 최영과 이성계의 군대에게 대패하고 원으로 도망쳤다.
5. 최후[편집]
원나라로 쫓겨난 최유는 10만의 군사만 있으면 고려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떨었지만 그 당시 원나라는 많이 쇠약해져 고려를 정복할 힘이 없었으며 원나라 신하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결국 최유는 공민왕의 요청으로 고려로 압송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여담이지만 한국사에서 제대로 참교육을 당한 매국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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