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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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雍
(? ~ 1292)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 개명하기 전 이름은 최기(崔夔)이고, 자는 대화(大和)다.
2. 생애[편집]
어린 시절부터 배우기를 좋아해 뜻이 같은 이(同志) 10명과 10년동안 독서하기로 약속한다. 다른 사람들은 몇 년이 채 되기도 전에 독서를 포기했으나, 최옹은 10년을 완독해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고 아는 것이 많아 막힘이 없다는 칭찬을 듣는다. 고종 시기 과거에 급제해 대관승에 보임되고 승진을 거듭해 전리좌랑에 이른다.
최옹은 태손(충렬왕)의 스승이 되는데 충렬왕은 즉위한 뒤에도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최옹을 중용한다. 충렬왕 6년(1280) 정랑 최옹은 김제, 방유 등과 함께 경사교수에 임명된다. 또 국자사업에 잉명된 뒤에는 날마다 충렬왕에게 『통감』을 강론한다. 국학전주, 세자궁령 등을 역임하는데 눈에 원예(圓翳, '원예내장'이라고도 하는 백내장의 일종)가 생겨 끝내 전고(典誥)의 벼슬에 이르지는 못한다.
생전에 학도를 모아 가르쳤는데 귀한 가문의 자제들만 주로 받으니 한미한 집안 출신은 적었다. 문생 김보의(金保宜)가 과거에 급제하는데 최옹이 제자의 차술(借述, 다른 이의 작품을 옮겨적는 부정행위)을 도왔기 때문에 비웃음을 산다.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로 은퇴하고 충렬왕 18년(1292) 윤6월에 죽는다.
3. 가족관계[편집]
최옹은 고려 중기의 문인 최유청의 후손으로 최유청의 7남 최양(崔讓)의 손자다. 아버지의 이름은 사서에 확인되지 않는다.
장남 최원중은 여러 묘지명의 찬자로 이름을 남긴다. 충렬왕 29년인 1303년에는 승사랑 서부부령(升仕郞 西部副令)을 지내고 있었음이 확인되며,[1] 충숙왕 원년인 1313년에는 이미 정순대부 판전교시사 예문관직제학 동지춘추관사(正順大夫 判典校寺事 藝文館直提學 同知春秋館事)로 은퇴했다.[2]
차남 최원직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유훈이자 명언을 아들에게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생전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고, 그 아들 최영의 활약으로 중대광 판문하사 동원부원군(重大匡 判門下事 東原府院君)에 추증된다.
- 본인: 최옹
- 아들: 최원중(崔元中)
- 아들: 최원직(崔元直)
- 손자: 최영(崔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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