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련(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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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鍊
(1215 ~ 1278)
1. 개요[편집]
고려의 인물으로 고종(高宗) 2년(1215년)에 태어났다. 광산김씨 14세손이며 계파는 양간공파이다. 해양현(海陽縣[1] , 광주광역시) 출신이며, 자(字) 는 기지(器之)이며,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본관은 광산 김씨이다.
2. 생애[편집]
원종 10년(1269) 원부, 이창경과 함께 추밀원부사에 오른다. 원종 11년(1270) 6월 개경 환도를 거부하는 배중손 등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추밀원부사 김련은 참지정사 채정, 도병마녹사 강지소와 함께, 추격해오는 기병을 따돌리고 교동도 포구를 통해 빠져나온다.
이 해에 원에 입조하고 귀국하는 태자를 시중한 부카(不花), 맹기(孟祺)가 이듬해 1월에 돌아가는데, 추밀원부사 김련이 왕의 청혼하는 표문을 들고 그들을 따라 원에 간다. 같은 해 고려에서 관노 숭겸(崇謙) 등이 반란을 일으켜 강화도의 삼별초군에 합류하려 했다기에 원세조는 일단 이 요청을 거절한다.
2월 김련이 원에 있을 때 김련의 딸이 다루가치 톡토르의 며느리로 간택된다. 재상의 딸과 결혼시키겠다고 고집했기에 원종이 후보를 제시했는데, 톡토르가 고운 얼굴의 여성 중에서 골라(選姿色) 김련의 딸로 정한 것이다. 사서에서 김련은 풍채가 아름다웠다(美風)고 평하니 김련 일가의 외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김련의 집에는 그 딸과 결혼한 데릴사위가 이미 있었으나 다루가치의 아들과 결혼이 결정되자 두려워해 도망쳐버린다.
김련은 3월에 고려에 돌아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밝힌다. 원종 14년(1273) 지문하성사, 원종 15년(1274) 참지정사에 오른 김련은 충렬왕 17년(1278)에 5월에 죽었다.
3. 가족관계[편집]
- 조부: 김원의(金元義[2] -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 부: 김평
- 처: 유씨 - 조산대부 추밀원좌부승지(朝散大夫 樞密院左副承旨) 유홍(庾弘)의 딸과 결혼해 여러 자녀를 뒀다.
- 아들: 김지숙
- 손자: 김인근
- 손자: 김인연
- 딸: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김씨 - 사위: 추성진력안정공신 삼중대광 남양부원군(推誠陳力安定功臣 三重大匡 南陽府院君) 홍규(洪奎)
- 아들: 김지숙
- 처: 유씨 - 조산대부 추밀원좌부승지(朝散大夫 樞密院左副承旨) 유홍(庾弘)의 딸과 결혼해 여러 자녀를 뒀다.
- 부: 김평
4. 관직[편집]
- 문하녹사(門下錄事)
- 병부시랑(兵部侍郞)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 형부상서(刑部尙書)
-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
- 지도첨의(知都僉議)
-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金紫光祿大夫 參知政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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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995년(성종 14) 해양현(海陽縣)으로 바꾸었으며, 해양현으로 1259년까지 사용되었다.[2] 金元義(김원의) 1147~1217 본관 해양(海陽). 시호 경간(景簡). 1170년(의종 24) 명종이 영립될 때 우중금(右中禁)으로 어가(御駕)를 수종한 공으로 대교(隊校)에 올랐다. 1174년(명종 4)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별장(別將)에 올랐다. 이어 우군병마녹사(右軍兵馬錄事)로 남도의 난을 토벌하고, 낭장(郞將)에 승진하였다.1181년 운중도감세사(雲中道監稅使), 1188년 전라도안찰사를 역임하고, 1196년 장군으로 급사중(給事中)을 겸하고 대장군이 되었다. 1208년(희종 4) 수사공 ·좌복야 ·삼사판사(守司空左僕射三司判事)에 이르렀다. 1212년(강종 1) 예부판사,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 ·병부판사(門下侍郞平章事兵部判事)가 되고, 1215년(고종 2) 치사하였다. 성품이 과욕(寡慾) ·공렴(公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