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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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宗旦
(? ~ ?)
1. 개요[편집]
11-12세기 송 복주 출신 인물. 고려로 건너와서 예종과 인종을 섬겼다.
2. 생애[편집]
송에서는 과거에 합격해 태학에 들어갔고, 당시 3개 단위로 나뉜 중국의 국학 교육과정에서 최종과정인 상사(上舍)의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양절(兩浙, 절강성과 강소성)을 떠돌아다니다 개경으로 향하는 송 상인의 배에 몸을 실었다. 호종단은 중국에서 국학의 최종과정을 밟을 만큼 학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도교의 압승술(壓勝術)[1] 같은 잡다한 기예에도 능통했다.
당시 고려 임금 예종은 호종단을 총애해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 벼슬을 내렸고, 예종 6년(1111) 8월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 12월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를 제수했다. 예종 8년(1113)에는 좌정언(左正言)으로서 합문(閤門)에서 급제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일을 맡았다. 호종단은 예종 앞에서 강론하기도 했는데, 재위 12년(1117) 기거랑(起居郎) 관직에 있을 때 『서경』 「무일편」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호종단은 장서 관리, 경서 강론을 담당하는 보문각의 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음악에 빠진 예종이 노래를 잘 하는 기녀에게 상을 내렸는데, 국학의 학생 고효충(高孝冲)이 왕을 풍자하는 시를 지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 정극영(鄭克永)이 고효충의 풍자시에 관한 일을 아뢰자 예종은 언짢게 여겼다. 예종 15년(1120) 지공거 한안인과 동지공거 김부일이 감독한 과거 시험에 고효충이 응시하자 그를 내쫓고 하옥시켰는데, 호종단이 이때 예종에게 글을 올려 고효충을 변호한 덕에 석방되었다.
인종 4년(1126) 2월에는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서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 무장한 채로 궁성의 남문에 이른 척준경, 의장의 병사들에게 갑옷과 병장기를 두고 돌아가도록 선유(宣諭)했다. 병사들은 이중과 호종단이 시키는 대로 무장을 해제하는데, 척준경이 칼을 뽑으니 이중과 호종단은 쫓겨나고 병사들은 다시 무장하고 무력 시위를 계속했다.
3. 설화[편집]
제주도에는 호종단(고종달)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설화가 남아 전한다. 호종단은 풍수지리에 뛰어났는데, 왕명(또는 중국 시황제의 명)을 받고 탐라의 여러 마을을 돌면서 제주도의 혈맥을 끊고 다녔다는 것이다. # 호종단이 돌아가는 길에 비양도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됐다는 설화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적혔다.
차귀도(遮歸島)라는 이름은 섬의 신령이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歸)을 막았다(遮)고 해서 붙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7세기 조선 후기에 제주목사를 지낸 이원진(李元鎭)이 『탐라지』에서 이런 구전설화들에 역사적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속설에서 이르기를, "한라산 주신의 아들 계제는 살아서 성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명신이 됐다. 마침 호종단이 그 토지를 누르는 제사를 지내고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자 신이 매로 변해 돛대 위에서 날았는데, 갑자기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때려부수고 서쪽 경계인 비양도 암석 사이에 침몰시키니, 나라에서 그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을 기려 식읍을 내리고 광양왕으로 봉했으며 해마다 향과 비단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2]
4. 평가[편집]
호종단의 성품은 총명하고 민첩했으며 박학하고 문장에 능한데다 빼어나게 아름다워(楚楚) 스스로도 기쁨에 젖었다(自喜). 아울러 잡다한 기예에도 능해 압승술에 자못 뛰어났으니, 왕이 미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3]
『고려사』 권97, 호종단 열전.
유학자들에게서는 도술로 예종을 현혹했다는 이유로, 피지배층에게서는 탐라의 혈맥을 끊었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인물이다. 한편 파한집, 보한집 같은 당대 문인들의 저술에서도 이름이 보이는데, 부정적인 서술은 눈에 띄지 않는다.(예종은) 중국의 풍속을 흠모해 호종단을 믿고 썼으며, 그 말에 몹시 현혹돼 잘못함이 있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4]
『고려사』 권14, 이제현의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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