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충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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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冲甲
1250년(고종 37) ~ 1321년(충숙왕 8)
1. 개요[편집]
카다안의 침입 당시 엄청난 활약으로 치악성을 지킨 고려의 장수이다. 본관은 원주(原州 원성백계),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카다안의 침입 당시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맹장이지만 안타깝게 공적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다. 이는 카다안의 침입 자체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탓이 큰데, 현재는 카다안의 침입이 반란에 실패한 몽골의 잔당 도적떼들의 침입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고려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역설적으로 카다안의 침입을 듣보잡급 사건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원충갑인데 그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후에 벌어진 홍건적의 침공을 넘어서는 피해와 파장이 고려에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엄청난 전공을 세운 후 이를 바탕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약했던 점은 척준경과 비슷하다. 다만 척준경은 인간계를 아득하게 초월한 무력에 비해 정치적 능력이 많이 떨어졌던 탓에 말년이 좋지 못했던 반면, 원충갑은 정치적인 수완도 뛰어나서 상대적으로 평온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 생애[편집]
1250년 중원도(中原道) 원주(현 강원도 원주시)에서 아버지 원민성(元敏成)의 무녀독남,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지방의 계수관시(界首官試)에 합격하여 향공(鄕貢)이 되었으며, 이어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고향인 원주의 별초(別抄)에 들어가 무관으로 근무했다.
그 뒤 그는 원주 치악성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여기서 평생을 그냥 이름없는 무관으로 지낼 뻔했지만, 1291년 그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하다고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원나라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1290년 1월 카다안을 위시로 한 반군들이 고려에 쳐들어온다. 그들은 충렬왕의 병크와 맞물려 고려 중앙군을 연달아 격파하는 동시에 각지를 약탈하는 등 위세를 떨친다. 침입이 시작된지 1년 후인 1291년 1월 그들은 양주의 양근성을 함락하고 원충갑이 근무하던 치악성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여기서 원충갑의 전설적인 활약이 시작된다.
카다안 반군 50명이 치악성 주변을 약탈하려 하자 원충갑이 보병 6명을 이끌고 기습해 말 8필을 노획하였고, 그후 적장인 도라도가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나오자 이번에는 7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기습을 가해 적병 400명을 격퇴하고 말 25필을 획득하는 미친 전공을 세웠다. 이에 상관인 방호별감 복규는 이 전공에 매우 기뻐하며 획득한 말 25필을 모두 원충갑에게 하사했다.
그후 합단적(카다안 잔당세력)은 치악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지만, 원충갑은 항복서신을 가지고 온 사절의 목을 베며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적은 치악성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치악성은 함락직전까지 가게 된다. 이 때 원충갑은 판관 조신을 위시로 한 3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합단적 무리들을 공격했고 이어 100명의 결사대가 지원을 온다. 이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적장 도라도를 전사시키고 적병의 거의 절반을 전사시키는 전공을 세우게 된다. 원충갑의 미친 활약에 기세가 꺾인 합단적은 결국 치악성 점령을 포기하고 달아난다.
카다안의 침입 항목에 있듯이 이 치악성 전투 이후 전세는 확실하게 역전된다. 합단적은 치악성 전투 이후에도 고려에서 5개월 정도를 더 버티면서 약탈을 계속했지만 원나라에서 온 구원군과 고려군에게 계속 쫓겨다니면서 거의 비적떼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카다안의 침입이 진압된 후 원충갑은 무려 6계단을 승진해서 삼사우윤이라는 벼슬을 제수받아 중앙 정계에 진출할 길이 열리게 된다. 조정에 출사한 원충갑은 무인 출신답게 충렬왕과 충선왕의 부자간 대립 속에서 충선왕 일파의 일종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한다.[1] 1303년 충선왕비인 계국대장공주의 2차 개가책동 사태와 관련하여 충선왕 일파가 원 조정에 석주를 고발하는 글을 올려 단사관 테무르부카가 석주를 압송하기 위해 고려로 들어왔는데, 원충갑은 충렬왕의 만류를 가볍게 씹고 테무르부카를 찾아가 당시 권세를 믿고 여러 불법을 저지르던 충렬왕의 측근 오기(오잠)를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이후 조정 신료 수백명이 원충갑을 따라서 오기를 탄핵했음에도 테무르부카는 오기에게 뇌물을 받고 그냥 원나라로 돌아가버린다. 이렇게 되자 오기는 오기대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충렬왕 옆에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충선왕의 최측근인 홍자번도 오기가 자신을 언제 해칠지 몰라 두려워하며 집안에 틀어박히는 묘한 대치상태가 이루어진다.
결국 선수를 치기로 결심한 홍자번은 김심과 함께 삼군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왕궁으로 쳐들어가는데, 이때 홍자번이 앞세운 인물이 원충갑이었다. 원충갑은 왕궁을 포위한 뒤 충렬왕에게 오기를 내어놓으라고 협박했고 오기가 나오지 않자 호군 오현량, 최숙천 등을 시켜 그를 강제로 끌어내어 원나라로 압송하게 했다.
자세한 사항은 계국대장공주 항목의 제2차 개가책동 부분 참고.
1307년 충선왕이 지지한 카이산이 충렬왕이 지지한 아난다를 제거하며 원나라의 황위다툼이 일단락되자 충렬왕과 충선왕의 다툼도 사실상 충선왕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원충갑은 충선왕에 의해 응양군 상호군(상장군)으로 임명되고 카다안의 침입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성분용정난광국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321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기타[편집]
고려가 멸망한 뒤 세워진 조선왕조는 충의를 강조하던 왕조였기 때문에 조선후기 현종 때 원충갑의 충의를 인정해 그를 원주 충렬사에 배향했다.
그의 직계후손들 중 1명은 원충갑 본인과는 정반대인 최악의 졸장으로 악명 높은 원균이다. 그나마 동생인 원연과 원전이 왜군을 상대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면서 조상의 체면을 세워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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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충갑 입장에서는 카다안의 침입때 비겁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준 충렬왕에게 당연히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