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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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중기의 문관으로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나 영웅서사시 동명왕편 등을 썼으며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즉흥시를 쓰기로 유명했다.
최씨 무신정권에 지나치게 아부를 한 부역자라는 평가도 있으나 벼슬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이해해주는 입장도 있다.
한국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문인인 동시에, 몽골과의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규보는 74세까지 즉 사망하기 하루 전까지 외교문서를 다룰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또 무신정권의 책임자인 최우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는 황제에게 보내는 공식적인 표문보다는 서한식 외교문서를 통해 거침없는 대몽외교를 펼쳤고 외교적 성과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 안장리. 이규보의 대몽외교문서에 대한 문학적 분석. 고려시대 외교문서와 사행시문. 118P.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20년 06월 30일 제1판 1쇄 발행
이규보에 관한 기록은 풍부한 편으로 『고려사』 이규보 열전, 이규보 묘지명, 『동국이상국집』 등이 있다.
2. 경력[편집]
3. 생애[편집]
3.1. 초기[편집]
현 경기도 여주시 출생으로 여주 이씨 가문 소속이다. 증조부는 이은백(李殷伯), 조부는 이화(李和), 아버지는 이윤수(李允綏), 어머니는 금란군군(金蘭郡君) 김씨다.[3]
본래의 이름은 인저(仁氐)로 부친은 호부낭중을 역임한 중앙 관료였다. 초년기에는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인데 어렸을 적부터 시문에 뛰어나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실전에서는 약했는지 과거 시험에 3번이나 떨어진 경력이 있다. 본인도 공부 안 했다는 걸 인정했는지 이 때는 술 때문에 망했다고 고백했다. 이렇게 적으면 N수생 이미지일 듯한데 15세, 18세, 20세 때 과거를 치렀다.
22세 때 4번째로 과거를 보게 되었는데 시험 전날 꿈에서 문장을 관장하는 별인 규성(奎星)의 화신이 나타나서 "합격이요."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결국 과거에서 규성의 말대로 장원으로 합격했는데 이후 '규성이 결과를 알려준 은혜를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규보(奎報)'로 바꾸었다고 한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기는 했는데 합격자들 사이의 석차가 꼴찌였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합격을 취소하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혼나기도 했고 전례도 없었기 때문에 취소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합격을 해서 당시 축하 파티를 벌였는데 이규보가 자리에서 "내가 지금은 꼴찌지만 나중에 혹시 문생들 양성할 사람이 될지 어찌 알아요?"라고 주사를 부려 손님들이 비웃었다는 일화가 있다.
3.2. 관직 생활[편집]
명종 말년에 자기 스스로 추천서를 써서 재상들에게 보냈고 재상들 역시 이규보를 명종에게 추천했으나 이규보를 싫어했던 사람이 있어서 등용되지 못했다. 그후 몇 년 간 저술 활동을 하다가 32세 때 전주의 하급관리로 임명되어 벼슬을 얻었는데 1년 3개월 만에 교체되었다. 상관이 재물을 탐하는 것에 대해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가 높으신 분들 눈 밖에 나버렸다.
그렇게 30대를 보냈는데 이규보 본인이 문집에서 밝힌 바로는 30대에 이미 귀 밑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그 사이 경상도 지역에서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아직 임관되지 못한 사람 중에서 종군 문관을 뽑으려고 했는데 이규보는 여기 자원해서 약 1년 정도 반란 토벌군에서 종군했다. 정식 직함은 '병마녹사 겸 수제'. 그런데 반란군 토벌 후 돌아온 뒤에 다른 사람들은 다 논공행상으로 벼슬이나 포상을 받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규보만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관리들이 왕에게 추천하여 직한림원에 임명되기는 했는데 그나마도 임시직. 실무는 모르면서 글만 좋은 백면서생도 아니고 나름대로 간언도 하고 일선에서 고생해가며 공을 세웠는데도 여주 출신 한미한 가문 소생이라는 이유로 바닥을 전전하며 젊은 시절이 다가버렸다.
이렇게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이규보에게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니, 이의민 이후 당대 최고 권력자에 오른 최충헌이 이규보에게 문장을 적게 했는데, 특유의 문장력을 선보이며 최충헌을 감탄시켰던 것. 최충헌은 이규보의 한림원 벼슬을 정규직으로 바꿔주었고 이후로도 최충헌의 초청을 받아 문장을 지어 올림으로써 최충헌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마침내 이규보가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여몽전쟁기에 고려 조정을 총괄하는 재상 직에 올랐다. 재능에 비해 비교적 늦게 출세한 대기만성형 인물. 다만 그러다보니 최우의 강화도 천도에 찬성하는 등 문제가 많은 "최비어천가" 행보를 보인 것이 다소 흠이라면 흠. 사실 보잘 것 없는 뒷배경 때문에 늘 뒷전에 밀렸다가 최씨들의 눈에 들어 겨우 출세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다.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최비어천가'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시의 내용이 현실과 너무 괴리감이 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완전히 무시되는 등 최씨 정권 관련 찬양 정도가 매우 심했다. 정작 여몽전쟁 동안 최씨 정권은 백성들의 삶을 망가뜨리는데 누구보다도 앞장 선 내부의 적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여몽전쟁을 제대로 이끌어 항쟁하는 것이나 여몽전쟁에서 빨리 항복이라도 해서 피해 최소화를 노려볼 생각도 없었다. 당시 최씨 정권이 이런 어정쩡한 태도로 몽골과 대립하면서 질질 끈 이유는 몽골이 진짜로 이길 경우 권력을 잃을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4] 그래서 몽골이 쳐들어와서 국토와 백성들의 삶을 짓밟고 최씨 정권이 질 좋은 병사들은 죄다 사병화를 시켜버려서 나머지 관군들의 질적 저하가 이어졌다. 실제로 관군화된 최씨 정권의 사병들(야별초)은 최씨 정권이 실권을 쥔 동안 몽골군과 대치한 적이 5번 정도인데, '한계성 전투'의 경우 여몽전쟁 시기에 같은 고려인끼리 싸운 것들이다. 사병들 중에서도 사병에서 벗어나 몽골군과 싸우는 관군에게 참여하려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최씨 정권에게 막혀서 이들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례는 최씨 정권이 몽골에게 왜 어중간한 태도로 저항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최우의 글씨를 칭찬하며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추켜세운 사람도 바로 이규보였다. 후대 유학자들에게 본인 특유의 문장력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규보는 행보나 성품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듣진 못했다. 현대로 친다면 서정주와 비슷한 평가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문학적, 현실적으로 가치가 높아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자주 실리는 편이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낮은 직책 전전하며 고생하고, 토벌군에 종군하여 참담한 실상도 봤던 이규보의 글에는 문인으로서는 현실을 다룬 이야기가 많다. 자신도 그렇고, 문학 세계도 그런 편이다. 다만, '최씨정권'이라는 강력한 벽으로 인해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
3.3. 최후[편집]
여몽전쟁 당시 조정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와 전쟁이 한창이던 1241년(고려 고종 28) 10월 8일(음력 9월 2일) 향년 74세(고려사』 열전 기준)로 세상을 떠났다.(『고려사』 기록) 당시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로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의 고위직이었는데, 링크를 건 기록이나 '열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죽기 5년 전부터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해 치사(致仕)했으나 사명(辭命, 한 나라의 사신(使臣)이나 사자(使者)로서 명령(命令)을 받들어 외교(外交) 무대(舞臺)에서 응대(應對)하는 역할)은 오히려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녹봉도 예전처럼 했다고 전할 정도로 조정에서 그의 문장력을 높이 산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묘는 현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길직리 산 115)에 자리잡고 있으며 인천광역시 기념물(제15호)[5] 로 지정되어 있다. 슬하에 아들 네 명(이관(李灌)·이함(李涵)·이징(李澄)·이제(李濟))을 뒀으며, 손자 이익배(李益培)는 따로 열전이 있다.
4. 작품[편집]
- 경설: 패관 문학 중 하나. 거사의 흐린 거울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거울'에 빗대어 설명한다.
- 국선생전: 고려시대 유행하던 산문문학 중 하나인 가전체로 쓰여진 소설. 술을 의인화하여 주인공으로 삼았다. 임춘의 국순전과는 달리 술의 긍정적인 요소를 부각했다.
- 동명왕편: 동명성왕 신화를 읊은 영웅 서사 한시. 현재까지 확인되는 한국 최고(最古)의 기록 서사시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6] 게다가 현재는 이미 실전된, 삼국사기 이전의 고려시대 정사였던 구삼국사의 내용을 모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도 지대하다. 본시(本詩) 기준 5언 고체 282구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사실 서사시 하면 으레 떠올리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등 고대 서사시, 신곡, 실낙원 같은 중세 서양 서사시에 비하면 그 한 장(章) 분량에나 미치려나 싶은 수준으로 매우 간략하다. 내용도 다소 신화적 색채가 강해지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이 익히 아는 주몽신화의 내용이라 읽기 간단하다.[7] 본시의 구절마다 구삼국사의 내용을 인용하여 주해를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한국 서사시 장르의 전통이 되어 후대의 <제왕운기>, 조선 건국을 다룬 영웅 서사시 용비어천가의 형식으로도 수용되었다. 여담으로 이 작품을 지었을 때 이규보는 26세였다.
- 도소녀: 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작품.
- 슬견설: 이(벌레)와 개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손님과 논쟁을 한 것을 적은 수필. 오늘날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며 동물학대 또는 개고기 관련 소식이 뜨면 자주 인용이 되는 글이다. '뒤집어 읽기를 통한 깨달음'이라는 작품에서는 슬견설 전체를 인용하여 슬견설의 주제를 편견을 버리고 폭 넓은 견해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글쓴이가 말한다.
- 주뢰설: 뇌물을 주지 않아 배가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 당대의 극심한 정치적 부패를 우회적으로 까는 이야기이다.
-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 유가대사 경조라고 하는 고승과 박소년의 사랑 이야기다. 박소년의 영특한 재주 및 아름다운 외모와 공공상인의 고매한 정신세계가 만나서 서로 부합하게 되자, 이들에게는 남녀 사이의 연정을 뛰어넘는 동성애적 감성과 관계가 형성된다.
‘이 소년은 총명한 천성에다 / 해박한 학식까지 마냥 간직해 / 마치 봄철의 윤택한 숲 같고 / 또 둥근 보름달과도 같네 / 침실에서 이불을 함께하니 정이 진실로 도탑다 / 궁중의 대식(對食)을 본받은들 뭐가 해로우랴.’
- 칠현설: 이인로가 포함된 죽림고회의 모임에 갔다가 깽판친 이야기로 무신정권기에 낙심한 문인들인 이인로 등이 죽림고회라고 해서 술 마시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들은 해좌칠현 혹은 대놓고 죽림칠현이라고 불렸는데, 이규보는 이들중 오세재와 인연이 깊어서 같이 드나들었다. 그런데 오세재는 가난 때문에 경주에 머무르다가 가장 빨리 죽었다. 때문에 이규보에게 가입하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규보는 혜강이 죽은 이후에 죽림칠현에 누가 가입했다는 소리는 못들어봤다고 하면서, 누군가 왕융 같은 이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가 했다고 한다. 이 글이 바로 이규보의 '칠현설'이다.
말하자면 죽림고회의 구성원들은 젊은 이규보의 문재(文才)를 높게 평가하여 (마침 이규보와 친하던 오세재의 빈 자리를 대신하여) 자신들의 모임에 들어오겠냐고 제안했는데, 이규보는 '칠현이 정원이 정해진 벼슬자리도 아닌데 한 자리 비었다고 보충한다는건 무슨 소리냐?' 고 비꼬는 것으로 대답했고, 여기까지는 듣는 사람들도 재치있는 대답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이규보는 이에서 멈추지 않고 '여러분들 (진나라의) 죽림칠현 따라하는거 좋아하시는데, 이러다 왕융이 한 짓도 따라하는 사람 나오겠네?' 라고 거듭 비웃어 다들 불쾌하게 만든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좋게 보면 이국의 유명인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허세와 허영을 풍자한 것이지만 어쨌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인 이들을 별 이유도 없이 심하게 조롱한 것이고, 후일 이규보 자신도 이런 행적을 약간은 민망하게 여겼는지 '젊은 시절에는 미친 짓을 하고 다녔다'고 기록한 것이다. 다르게 보면 젊은 시절 관운이 잘 풀리지 않던 이규보의 방황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또 이렇게 보면 후일 출세운이 트이고 난 이후 이규보의 행적은 남들보고 혹시 위선자가 되지 않겠느냐고까지 조롱하던 젊은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았음이 씁쓸한 점.
- 영정중월: 5언절구. 해를 품은 달에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인식된 시.
- 절화행: 악부체 시.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 여귀꽃과 백로
- 청강사자현부전
-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괴토실설, 壞土室說)
- 소연명(小硯銘)
벼루여 벼루여, 네가 작다 하나 너의 부끄러움이 아니로다. 네 비록 한 치쯤 되는 웅덩이지만, 끝없는 뜻을 쓰게 하노라. 내 키가 비록 여섯 자[13] 나 되지만, 사업(事業)은 너를 빌려야 이뤄진다. 벼루여, 나와 너는 함께 돌아가리니, 살아도 너 때문이요, 죽어도 너 때문이라.
- 득흑묘아와 책묘라는 작품도 있는데 고양이를 기르면서 느낀 감상을 적은 것이다.
5. 기타[편집]
-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구삼국사의 동명왕편을 동국이상국집에 수록한 것으로 이를 삼국사기의 동명성왕본기와 비교할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라에 대해서도 박인범, 설총, 최치원 등 훌륭한 인재를 배출해 천년 문명국가를 이루었다고 높게 평가했으며 특히 최치원을 높이 평가해 최치원이 당서 열전에 실리지 않은 것을 아쉬워하는 글을 동국이상국집에 남기기도 했다.
-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가 있고 그 외에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바로 술, 시, 거문고를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풍류인다운 면모. 이 사람의 문집이 바로 <동국이상국집>으로 아래에 열거된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 들어 있다.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된 이규보의 시는 무려 2천여 수에 이른다고 한다.
- 여러모로 국문학계와 한문학계에서는 고려-조선 시대 문학사에서 따로 한 장을 구성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 당시 고려나 조선에서는 사장이 융성하여 시의 기교를 닦는 것이 극에 달했었는데, 이규보는 그런 송시풍의 시체나 용사를 쓰는 것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힐난하며 고려에 맞는 문체와 신어를 주장하며 애용했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한문학비평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그의 문학논평인 논시중미지약언과 답전리지논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이유로 당대시인 중 용사를 중요시했던 이인로와 대비되는 인물로 반드시 언급된다. 여말의 국문학계의 위치는 가히 조선의 셰익스피어급.
- 1999년도 도쿄대학 입시 국어(한문편)에서 그의 '동국이상국집'이 출제되기도 했다.
- '유아무와 인생지한有我無蛙 人生之恨'
'유아무와 인생지한有我無蛙 人生之恨'
이규보가 과거에 낙방하고 있을 때에, 집 문에 이 글귀를 붙였다. 왕(대부분은 명종이 언급된다)이 암행을 나갔을 때, 이 글을 보고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주변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노래를 잘 부르는 꾀꼬리에게 까마귀가 찾아와서 두루미를 심판으로 노래 대결을 하자고 청했다. 꾀꼬리는 쾌히 승락하고 3일간 노래 연습을 했는데, 까마귀는 노래는 부르지 않고 논밭을 뒤지면서 개구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잡은 개구리 3마리를 두루미에게 주었다. 3일 후, 노래 대결을 하자 두루미는 승자를
라는 것이다. 왕이 이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과거를 열면서 '유아무와 인생지한'을 시제로 내걸어서 이규보가 장원을 했다.||
라는 일화가 떠돌고 있다. "내 한 몸은 있으되 개구리(뇌물)가 없는 게 인생의 한"이라는 표현을 통해 과거제가 비리로 얼룩져 있어 뇌물이 없는 자신은 급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풍자한 것. 물론 이건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지만, 재미있는 것은 두루미 혹은 학이 악역이라는 것이다.
- 토실을 허물어 버린 설로 그의 위선적 가치관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이규보 한 사람만은 아니다' 라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으나, 물론 이규보와 같이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는 것에 혐오감을 보이거나, 자신이 아랫사람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이 편리함을 누리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인물, 즉 소위 말하는 꼰대 부류의 인물이 드물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위 '꼰대질'이 비판받지 않을 이유도 없다. 항변으로써는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은 것. 여담으로 마찬가지로 후대인 조선의 시성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도 인품이나 관료로서의 능력은 수준 미달이었다보니 많이 거론된다.
- 북한에서는 의외로 이규보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는 모양이다. #
- 역사에 기록된 집사이기도 하다. 검은 고양이를 길렀다. 고양이를 기르면서 쓴 시가 득흑묘아와 책묘인데 득흑묘아는 고양이를 기르면서 고양이가 쥐를 잘 잡아달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고 책묘는 고양이가 잡으라는 쥐는 안잡고 곳간의 고기나 빼먹는 것을 보고 고양이를 꾸짖는 내용이다.
6. 대중매체[편집]
6.1. 드라마[편집]
6.2. 게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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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도 유명한지 코에이의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도 고려의 문신으로 계속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시나리오 2에서[15] 한반도 지역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며 정치 C, 전투 D, 지도 D, 매력 B로 고만고만한 능력치에 비교적 높은 매력이 인상적이다. 징기스칸 4의 경우 능력치는 정치 63, 전투 37, 지모 74이고 한글판에서는 85로 한글판에서 능력치가 상향되었다. 고증오류가 있는데 원래 출생년도는 1168년이지만 게임에서는 1178년으로 나온다. 오리지널 시나리오1에서는 한반도 지역의 재야 인재, PK 시나리오 1에서는 고려 고종의 신하로 등장하는데 지모가 높게 잡혀 있어 등용 특기를 가진 최충헌과 더불어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나 무사시보 벤케이를 고려의 장수로 영입하거나 몽골로 가서 자무카의 부하인데 충성도가 낮은 제베와 무카리[16] , 징기스칸의 영역인 오논으로 들어간 다음 지모가 낮아서 충성도를 깎기 쉬운 수부타이, 친자 논란 때문에 충성도가 낮은 주치를 빼올 수 있다. PK 시나리오 1에서는 김경손으로 정복 활동을 하기는 버겁지만 대신 이규보로 간첩 활동을 해서 세이브를 해놓은 다음 주변의 우수한 장수들을 빼낼 수 있다. 금나라의 완안진화상, 몽골 제국의 타향 장수라서 충성도가 쉽게 떨어지고 고려와 동일한 중국 문화권이라서 배반 커맨드 1방에 넘어올 수도 있는 야율초재, 장유, 사천택을 데려온 뒤 야율초재도 간첩 유닛으로 돌려서 회령에 있는 팔팔한 10대 청소년이며 수명도 긴 무장인 쿠빌라이와 훌라구를 데려오자. 고려에서 먼 사마르칸트에 있지만 가도가 깔려 있어서 이동이 수월하고 아버지 주치와 마찬가지로 초기 충성도가 낮은 바투를 유언비어로 충성도를 깎고 배반으로 빼와도 된다.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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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고려 양광도 강화현이었지만 이 곳으로 천도하면서 도(都)로 승격되었다. 이는 광종이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로 개명했던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2] 임금의 칙령, 조령, 제령 등을 서문화하는 부서.[3] 이상 이규보 묘지명 기록.[4] 이 당시 국왕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을 쥔 최우는 몽골의 1차 침공 때 방어선 역할을 하던 귀주성과 자주성에게 항복을 강요했는데 권력을 잃을게 무서워서였다. 귀주성과 자주성에 수도인 개경의 병력을 보태면 1차 침공을 시전하던 몽골군을 물리칠 여력이 있었는데 이길 기회를 스스로 날려먹은 것. 이래놓고 최우는 몽골의 2차 침공의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놓고서는 몽골의 3차 침공 당시 강화도에 틀어박혀서 국가 사정은 뒷전으로 하고 사치부리고 놀았다. 이규보는 이런 최우에게 열심히 아첨해왔던 것이다.[5] 2021년 문화재에 부여된 지정 번호 폐지.[6] 흔히 '본풀이'라 불리는 서사무가(巫歌)는 엄밀히 말해서 구전되다가 근래에 와서야 기록된 노래이기 때문에 서사시가 아니다. 서사시는 기록문학이기 때문.[7] 사실 한문 문화권 전반적으로 서구에 비해 서사시 전통이 별로 발달하지 못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동북아의 보편문자인 한자가 장편 서사시를 쓰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자는 내용(의미)를 보존하는 데는 훌륭하지만 음성을 보존하기엔 상당히 어려웠다. 한시가 압운이니 평측이니 자수니를 따지며 극단적으로 간결하고 형식적인 장르로 발달한 것도 그러한 글자의 태생적 약점을 극복하고 운율을 구성해내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반대로 이렇게 많은 의미가 글자 하나하나마다 들어있고 한 글자 한 글자가 중시되다보니 함축의 기법은 극도로 발달하였고, 한 단어나 심하면 한 글자만으로 전대의 역사적 사례 및 경전의 구절과 함의 등을 그대로 가지고 오는 전고적 상징 기법이 필수요소화 되었다. 한시는 짧은 5언절구 하나도 대부분 그 안에 중국사 전고나 전통적 상징, 이전 명 시인의 글귀 등을 읽어낼 수 있는 문학적 코드로 빽빽한데 이는 이러한 문화권의 보편문자가 지니는 특성에 기인한다.[8] 오세재[9] 동도는 당시 동경으로 불렸던 경주로, 오세재의 외가가 있었다. 오세재는 이곳으로 가서 말직을 지내다가 생활고로 죽었다. 경주로 놀러간 것이 아니다.[10] 이담지[11] 혜강과 완적은 7현중에서 비교적 일찍 죽었다. 특히 혜강은 관직에 오르지 않고 사마씨 정권에 항거하다가 처형당했다.[12] 이를 죽림칠현의 핵심이 될 인물이라고 오역한 글도 있다. 그것도 문학사 관련해서. 사실은 본문에도 나오지만 왕융의 고사이다. 왕융은 자기집 자두를 팔면서 그 씨를 가져다가 싹을 틔울까 싶어서 자두 씨에 모두 구멍을 뚫었다는 쪼잔한 일화가 유명할 정도로 죽림칠현의 이름에 먹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죽림고회에 참석한 이들 보고, 지금은 나름대로 관직을 떠나서 유유자적한다고 하지만 뒤에 왕융처럼 행동할 인물이 없으란 보장이 있느냐고 돌직구를 던지는 장면이다.[13] 이규보의 키가 180cm나 되는 것이다.[14] 그런데 고려의 고종과 동일한 얼굴이다. 그나마 비스코 정식발매판에서 새로 추가된 것이고 원판 파워업키트에서는 클론무장 얼굴로 뜬다.[15] 내수판에서는 유저 시나리오에서도 등장한다.[16] 무카리는 정확히 말하면 자무카의 영역인 고르고낙의 재야 장수라서 보통은 자무카가 징기스칸보다 먼저 영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