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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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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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朴齊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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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장군으로 명종 때 주로 활약한 인물이다.
2. 생애[편집]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고 그 잔당들이 가주(嘉州), 위주(渭州), 태주(泰州), 연주(漣州), 순주(順州) 등에서 노략질을 하며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았다. 이에 조정은 여러 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실패하였다.
박제검과 김중갑은 작전을 짜 이들을 토벌하려 했다. 박제검의 군대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들은 이미 주민들을 통해 관군의 동향을 알고 있었기에 박제검의 군대가 공격만 하면 박제검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이에 관군들의 사기는 저하되었고 적은 승기를 잡았다 생각하여 연주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약탈만 하며 지내다 보니 약탈하기 쉬운 집들은 이미 다 약탈되었고 성은 함락시키기 쉽지 않았다. 이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박제검은 이들을 회유하였으며 결국 박제검에게 항복하였다. 박제검은 항복한 이들에게 너희들도 모두 임금의 자식이라고 위로하였으며 이들은 이후 귀주와 연주 등지에 나누어 생업에 종사케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우두머리인 광수(光秀), 김보(金甫),사진(思進), 식단(軾端), 계훈(戒訓)에게는 말을 주어 개경에 가게 하였다. 이들은 개경에 가 각각 관직을 받았다. 광수는 교위(校尉), 김보는 섭교위(攝校尉), 사진, 식단, 계훈은 대정(隊正)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진국(進國)은 끝까지 박제검에게 항복하지 않았고 박제검은 군사를 보내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박제검의 아들로는 박보광(朴葆光)이 있으며 성격이 굉장히 난폭하였다. 이소응의 아내를 뒤따르는 계집종이 생강을 가진 것을 보고 달라하였으나 종은 생강을 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박보광이 계집종을 때리고 욕을 하였다. 이소응의 아내는 크게 분노하였고 종들과 함께 박제검의 집에 가 박보광을 죽이려 했으나 박보광을 비롯한 집안 사람들 모두가 집에 없었다. 이소응의 사위는 경대승의 동생이었고 이 사건은 중방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후 박제검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박제검이 여러 장군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불쌍하게 보여 결국 복직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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