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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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의 제30대 군주.
고려식 휘는 '저'(㫝), 몽골식 휘는 '미스겐도르지'(迷思監朶兒只).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정왕'(忠定王)이다.
시호는 원나라에서 내려준 '충정'만이 존재하고, 폐위된 군주라 고려 조정에서는 시호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충정왕이라 부르지 않는 경우에는 '폐왕 저', 혹은 '저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지막 '충'자 돌림 임금이기도 하다.[2]
2. 생애[편집]
제28대 충혜왕의 차남으로 제2비인 희비 윤씨 소생인데 즉위 전에는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으로 불렸다가 선왕이자 이복형제였던 충목왕이 어린 나이에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고려의 제30대 국왕이 되었다. 이때 섭정 자리를 놓고 충혜왕의 제1비 덕녕공주와 희비 윤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이 벌어졌는데 덕녕공주는 고려의 다른 왕들과 달리 충혜왕이 첫 혼인으로 맞은 부인[3] 에다가 원나라 황족이기까지 했으므로 자연스레 섭정은 덕녕공주가 하게 되었다. 그러다 충정왕 2년인 1350년 덕녕공주가 원나라로 떠나면서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4]
선왕인 충목왕이 영리했다고는하나 연달아 어린 임금이 즉위한 나머지, 충목왕 말기부터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심해졌고[5][6]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 일파의 전횡이 매우 심각했는데, 더 큰 문제는 안으로만 혼잡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꽤 어지러웠다는 것이다. 한반도 주변 상황을 보더라도 원나라마저 혼란기에 접어든 무렵이었고, 특히 일본 열도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2명의 천황이 대립하는 난보쿠초 시대의 혼란기가 와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거의 상실[7] 되고 말았다. 이 틈을 타 세력이 커진 왜구의 침입이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졌으며, 특히 1350년 무렵 이들의 침략과 약탈 등이 100여 회가 넘을 정도로 폭발적인 활동을 벌였는데 아예 이 해의 간지를 따서 경인왜구(庚寅倭寇)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렇듯 고려가 내우외환에 시달리자 고려 내부에서는 어린 임금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니 그를 교체하여 국면의 전환을 노려보고자 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충목왕이 승하했을 때 충정왕과 함께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로 꼽혔으며, 충정왕과는 다르게 이미 장성한 나이였던 강릉대군 왕기[8] 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급기야 윤택, 이승로를 중심으로 하여 도당에서 정식으로 원나라에 요청한 후, 고려 국왕 교체가 전격 결정되었고 이에 폐위된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 숙부 강릉대군이 임금이 되자 폐주 충정왕은 향년 16세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당하는 비운을 맞았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공민왕이 독살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유명무실한 자리인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국왕이라 하더라도 쿠데타처럼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정부 기관에서 국왕의 폐위를 의결하여 상국의 재가를 받아 집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고려 국왕이라는 자리가 무신정권 시기의 고려 국왕보다도 더 허약한 허수아비 자리였음을 증명한다.
3. 평가[편집]
《고려사》에 의하면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폭군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충정왕 본인이 부왕 충혜왕이 막장 행각을 일삼다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알았을 것이고, 승자인 공민왕 측에서 폐위의 정당성을 위해 조작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는 반론도 있다. 특히 《고려사》 <충정왕 세가>를 읽어보면 사망 기사에 딸린 대목 외에는 폭정에 대한 기록이 없기도 하고, 또한 결정적으로 이 기록 외에는 교차검증이 되는 내용도 없어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嘗夜 王與近侍 相戲謔達曙 或以墨 灑侍學官衣。或有近女而行者 便生妬心 雖宰相 至見撞擊 往往以鐵椎 擊人幾死 或於冬月 取冰雪水 和凍飯食人 狂悖類此。
밤에 왕이 근시(近侍)와 함께 새벽까지 장난질을 친 일도 있으며 때로는 시학관(侍學官)의 옷에다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여자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을 보면 질투심을 일으켜 그가 비록 재상이라도 마구 때렸으며 쇠몽둥이로 사람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드는 일도 있었고 때로는 한 겨울에 얼어붙은 밥에 얼음물을 부어 사람에게 먹이는 등 광패한 행동을 일삼았다.
《고려사》 충정왕 3년
《동국통감》에서는 동정적인 태도로 충정왕에 대한 평을 내렸는데 자기 수명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그의 독살을 주도한 것으로 지목받는 공민왕을 깠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충목왕(忠穆王)·충정왕(忠定王)은 모두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덕녕공주(德寧公主)와 희비(禧妃)가 어머니라는 존귀한 위치로 안에서 권세를 부리고, 간신(奸臣)과 외척(外戚)은 밖에서 권세를 부리니, 두 임금이 비록 영리한 자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또 충정왕의 때를 당하여 강릉대군(江陵大君)은 직접 숙부가 되므로 국인(國人)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또 원나라의 후원이 있었는데, 여러 윤씨(尹氏)들이 이런 사정을 돌아보지 않고 당파를 만들어 사욕을 부렸으므로, 화근(禍根)을 빚어서 마침내 왕으로 하여금 불행히 짐독(鴆毒)의 살해를 당하게 하였으니, 슬프다.” 하였다.
《동국통감》 제45권 충정왕 3년 신묘년
4. 기타[편집]
- 《개성 왕씨 족보》에 의하면 시중공 왕제(王濟)라는 서자가 있었다고 하며, 실제로 개성 왕씨 집안에 왕제의 후손을 자처하는 시중공파가 있다. 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같은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오직 《개성 왕씨 족보》에서만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때 편찬된 사서라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기록하지 않았거나 아예 《고려실록》에서부터 누락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래 족보 자체가 위조나 과장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 곤란하고, 시중공 왕제가 실존 인물이라고 해도 생모에 대한 기록도 불분명할 정도로 출신이 미약한 서자이기 때문에 별 문제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모가 정식으로 후궁이 되지 못한 이름없는 궁녀일 수도 있다.[9]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폐가입진[10] 을 명분으로 일어선 나라였기 때문에 만약에 시중공 왕제가 충정왕의 자손이라면 공민왕보다도 정통성이 높다는 문제가 생긴다. '시중'이라는 호칭은 충정왕때 없었고, 공민왕때 가야 다시 생겨난다. 애초에 시중은 최고 재상직으로 왕자가 맡기에는 부적합한 직책이다.[11][12]
5.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최영주가 연기했다. 평범한 어린아이로 나오다가 역사대로 폐위되는데 어머니인 희비 윤씨에게 휘둘렸지만 폐위된 후 쫓겨날 때 행렬을 막고 통곡하는 백성들이 화를 당하는 걸 막기 위해 수레에서 나와 "내 길을 막지 마라. 내가 내 길을 막던 너희들을 잊지 않을 것이니, 그만하면 됐다."고 말한 뒤 수레 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그나마 군주다운 모습. 후에 기황후 측의 모략으로 독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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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제23대 고종 치세때 '강도 강화군'으로 승격되어 제1수도가 되었지만 제25대 충렬왕 치세때 '강화현'으로 강등되었다.[2] 공민왕의 '공민' 시호는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이다.[3] 제25대 충렬왕부터 제27대 충숙왕까지는 모두 다른 비를 들인 상태에서 원나라 공주를 제1비로 들였다. 제28대 충혜왕과 제31대 공민왕만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혼인한 적이 없었다.[4] 이후 공민왕 치세때 다시 고려로 귀국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5] 그나마 충목왕때는 덕녕공주가 섭정했기에 권문세족들을 견제라도 할 수 있었지만, 충정왕 즉위 이후에는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다시 날뛰기 시작한 듯 하다. 충정왕때 권력을 남용한 대표적인 인물이 희비 윤씨의 오빠인 윤시우였다. 그는 어린 왕의 외숙부라는 명분으로 인사권을 휘둘렀고, 공공연한 비리를 저질렀는데 충정왕이 폐위당한 뒤 이제현에 의해 유배되었고 이후 제주도 순문사로 기용되었으나 토착 세력들의 반발인 목호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6] 그나마 개혁을 했다던 덕녕공주도 자기 친위 세력의 전횡에는 눈을 감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충목왕 시대의 한계점이라면 한계점이었다.[7] 남북조시대 초기에는 그랬다. 발호한 왜구들이 한반도와 중국 동부 해안을 약탈하면서 재미를 보기 시작하자 남북조는 이들을 고용하게 되었고, 심지어 규슈가 중심지가 되었는데 열세였던 남조 측에서 직접 정규군을 이끌고 해적질을 하기도 했다.[8] 제27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의 2남이며, 제28대 충혜왕의 동생인 동시에 제30대 충정왕에게는 숙부가 된다.[9] 실제로 《고려사》 <열전>에는 왕자나 왕녀라고 해도 모계의 신분이 낮은 경우, 따로 실리지 않기도 했다.[10] 제31대 공민왕의 혈통이 끊기고 더이상 왕위를 계승할 왕씨가 없어서 신씨가 왕이 된 상황을 말한다.[11] 만약 시중공 왕제가 실존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1350년에서 1352년 사이 태어났을 것이며 아버지를 폐위시킨 공민왕의 재위시기까지는 숨죽여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혈통이 불안한 우왕이 즉위하면서 왕제 또한 종실에 편입되고 중앙정치에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공양왕이 폐위되는 1392년까지는 시간이 있기에, 실제 문하시중직을 잠깐이나마 맡아보았거나, 실직이 아닌 검교(명예직을 의미)문하시중을 역임했거나, 아니면 생전이 아닌 사후에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을 가능성 또한 있다. 다만 고려 말기의 혼란으로 그가 시중직을 맡았거나 추증된 기록 자체는 유실되었을 수 있다.[12] 다만 종친이 시중직을 맡은 기록은 적어도 고려사에는 없으며, 고려 말기 종친이 맡을 수 있는 직책은 명예직인 판문하부사(기존에 종친이 다수 역임했던 중서령과 상서령이 합쳐진 직책)가 전부였다. 물론 당시 고려가 혼란기라 기존에 확립한 정치체계가 무너지고 있었으며, 시중직 또한 2개(문하시중, 수시중)로 쪼개졌기에 그런 부분을 감안할 여지는 있다. 왕제가 실존했더라면 실제 문하시중/수시중에 보임된 적이 있는지, 또한 봉지명(평양, 양양 등)이 아닌 직책명(시중)이 작위(공)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