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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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 초기의 문신.
고려사에 기록된 문하시중 중 최초의 인물이다.
시무 28조로 잘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927년 신라 경애왕 치세에 서라벌에서 최은함(崔殷含)[3] 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라 골품은 6두품으로 최치원의 손자이고 최언위의 재종손[4] 이다. 고작 3개월 갓난아기일 때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서라벌을 침공해 경애왕을 죽이고 도시를 약탈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 최승로를 아버지 최은함이 서라벌 동쪽에 있는 중생사(衆生寺)[5] 라는 절에 숨겨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개경으로 상경했다. 12세 때 태조에게 불려갔는데 <논어>를 술술 읽어내 태조가 감탄했다고 하며 이 때 학생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해 고려 초기의 문신으로 활동했다.
제6대 성종 때인 982년 시무 28조를 올렸는데 이를 통해 유교 지상주의 정책을 제시하였다. 이후 성종은 최승로를 총애하여 최승로가 "나이가 많고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물러나고 싶다"고 여러 번을 청했지만 성종은 요청을 거절하고 "계속 일하라"고 몰아붙였고 결국 989년 5월에 사망했다.
<보한집> 권상에는 최승로의 문집 '금중잡저시고(禁中雜著詩藁)'가 일부 발췌되어 기록되어 있다. 금중잡저시고는 최소 1254년 <보한집>이 완성될 때까지는 전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중잡저시고에 기록된 시는 '장생전백엽두견화(長生殿後百葉杜鵑花)', '사선장입당문자겸분내고주과(謝宣獎入唐文字兼頒內庫酒果)', '백제진백악찬(百濟進白鵲讚)'과 '동지신죽(東池新竹)'이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1] 봉지인 청하(淸河)는 지금의 경남 하동군이다.[2] 덕종이 추증함. 2품 1등위.[3] 경주 최씨 대동보에서는 최치원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역사서 등에서는 최치원과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 경주 최씨는 최은함의 아들 최승로와 최윤로로부터 분파되기 때문에 경주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다. <삼국유사>에서 그가 최치원의 아들이라면 최승로를 최치원을 닮은 손자라고 기술했을 것인데 삼국유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므로 실질적으로 그가 아들인지 알 수 없다. 최승로 이후부터는 선계가 분명해진다.[4] 사촌 형제의 손자[5] 중생사는 지금도 경상북도 경주시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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