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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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文俊
(1120년 이전[1] ~ 1190)
1. 개요[편집]
고려 무신정권기의 문신. 대흥군 사람으로 시호는 정의(貞懿)다.
2. 생애[편집]
한문준은 부친 한유충이 "우리 가문을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아이로다."[2] 라고 말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났다. 인종 시기 과거에 급제하고 장주(長州), 장흥, 남원에서 부사를, 남경에서 부유수를 역임한다. 당대의 문인 오세재가 "남쪽으로는 세 군의 풍속을 되살리고, 동쪽으로는 한 주의 백성을 어루만졌다."라는 시를 읊으며 한문준의 선정을 칭찬핬는데, 당대 사람들이 사실대로 적었다(實錄)고 평가한다.
명종 시기, 무신정권에 들어서 한문준은 대부경에 임명된다. 명종 6년(1176) 대부경으로서 동지공거가 돼 지공거 예부상서 이문탁과 함께 34인을 선발한다. 곧이어 추밀원우승선으로 선발되고 추밀원부사로 승진한다. 명종 8년(1178)에는 지공거로서 우간의대부 이응초와 37인을 급제시킨다.
명종 9년(1179) 7월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추밀원의 문극겸(당시 추밀원사)과 한문준을 함께 탄핵해 한문준은 판사재시사로 좌천된다. 한문준은 이전에 한 무졸의 직무와 관련해 근심에 송유인을 찾아가 청탁한 일이 있었는데, 송유인이 이를 언급하며 탄핵한 것이었다. 문극겸은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고 탄핵됐는데, 한문준의 행동은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 문극겸은 상을 당했기 때문에 못 나온 것이었으니 송유인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은 것이다.[3] 그러나 한문준은 문극겸과 함께 명종을 찾아가 송유인의 뜻대로 자신들에게 벌을 줄 것을 청했고, 결국 둘은 좌천된 것이다.
송유인의 탄핵으로 인한 문극겸, 한문준의 좌천은 경대승의 정중부, 송유인 등 살해로 이어지는 나비 효과를 불러온다. 한문준은 경대승 집권기인 이듬해 명종 10년(1180) 재상인 참지정사[4] 로 승진한다. 이 시기 총재[5] 민영모와 판병부 이광정이 인사를 멋대로 단행했는데, 당시 무신들이 뇌물을 동원하거나 언쟁으로 인사 당담자들을 겁박해 높은 관직에 오르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승진 연한에 제한을 두고 이를 소급 적용할 것을 제안해 명종이 낭사의 간언을 따른다. 그런데 위의 상소를 올린 낭사도 뇌물을 수수하니, 참지정사 한문준은 보다못해 중서시랑평장사 최충렬과 함께 낭사를 비판한다.
여러 낭사는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놀라며 최충렬과 한문준의 말에 따지고 들지 못한다.전조(의종 시기)에는 문신이 각자 자기 뜻을 고집하며 사람을 평가하다 몰락했는데, 어찌 이전의 행적을 뒤따르려고 하는가?[6]
명종 12년(1182) 정당문학으로서 지공거가 돼 우산기상시 이지명과 함께 34인을 선발한다. 경대승이 병으로 죽은 뒤인 명종 13년(1183) 12월 한문준은 판병부사에 임명된다. 이의민이 중앙에 진출한 뒤인 명종 14년(1184) 12월, 한문준은 문하시랑평장사 판이부사로 승진해 총재로서 인사권을 손에 넣는다. 이 해의 인사가 있기 전 한문준은 재상의 반차(班次)에서 2위였다.[7] 명종 15년(1185) 별자리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핑계로 은퇴를 청하지만 명종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곧 70세가 돼서 은퇴했고 집에서 선비들과 시 짓고 술 마시면서 유유자적하다 명종 20년(1190) 8월 25일(음력) 죽는다. 명종은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한문준에게 시호를 내린다.
3. 대중 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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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가 일흔이 되기 전에 은퇴했다 하므로 최소한 1120년 이전 생이다.[2] 興吾門者, 必此兒也.[3] 복상중에는 왕을 호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오히려 예법에 맞는 행위였다.[4] 고려사 한문준 열전에 따르면 '참지정사 보문각태학사 판예부사'.[5] 중서문하성의 관직으로 판이부사를 겸함.[6] 前朝文臣各執己意, 臧否人物, 以至於敗, 何復踵往轍耶.[7] 한문준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한문준 다음은 문극겸, 최세보 순서였다. 문극겸의 사양으로 최세보가 대신 아상(亞相)인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에 오르며 문극겸은 태자태보에 임명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