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덤프버전 :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북한/경제/역사



이 문서는 나무위키의 이 토론에서 문서명을 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로 하기(으)로 합의되었습니다.
타 위키에서의 합의내용이 더위키에서 강제되지는 않지만 문서를 편집하실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김일성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일생
생애
정책
군면리 대폐합 · 공작기계새끼치기운동 · 남북기본합의서 · 조소동맹조약 · 조중동맹조약 · 조중변계조약 · 천리마 운동 · 청산리 방법 · 4대 군사노선 · 7.4 남북 공동 성명 · 1980년대의 경제 정책 · 8.3 인민소비품 생산 운동
우상화 사업
조선인민혁명군 · 보천보 전투 · 주체사상 · 구호나무 · 도서정리사업 · 김일성장군의 노래
가족
아버지 김형직 · 어머니 강반석 · 본처 한성희 · 이처 김정숙 · 삼처 김성애 · 남동생 김철주 · 남동생 김영주 · 아들 김정일 · 아들 김만일 · 아들 김평일 · 아들 김영일 · 아들 김현 · 딸 김경희 · 딸 김백연
사건사고
훙치허 전투 · 6.25 전쟁(평양시 학살 사건) · 8월 종파사건 · 1.21 사태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 ·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임수경 방북 사건 ·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저서
세기와 더불어
어록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기타
조선로동당 · 인민대학습당 · 북조선인민위원회 · 김일성종합대학 · 김일성군사종합대학 · 김일성광장 · 김일성훈장 · 김일성상 · 김일성화 · 김일성 암살설 · 김일성 가짜설 · 김일성 시계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기
람홍색공화국기 ·
국장
국장 · >

국가
애국가 ·

국화
목란꽃 ·

국수
천리마 ·

국조
까치 ·

국견
풍산개 ·

국주
평양소주
역사
역사 전반
지리
관서 · 관북 · 해서 · 관동
인문환경
한민족 (북한인) · 문화어 · 행정구역 (주소체계) · 교통
인물 ·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사상·이념
이념 전반 · 최고존엄 · 백두산절세위인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주체사상 (사회주의 대가정론) · 배움의 천리길 · 수령결사옹위정신 · 피포위 의식 · 대조선적대시정책 · 자력갱생 · 강성대국 · 지상락원 · 우리식 인권
정치·안보
정치 전반 · 조선로동당 · 국무위원회 · 최고인민회의 · 따뜻한 환영의 음악
외교 전반 · 남북관계 (아프리카 외교전) · 남북러관계 · 남북통일 · 대북제재
조선인민군 (육군 / 해군 / 공군 / 전략군) · 군복 · 열악한 현실 (빈곤함 / 수송능력) · 징병제 · 핵개발 · 미사일 개발 · 열병식 · 대남 도발 (원인) · 대남공작기관 (남파공작원)
사법·규범
사법 전반 · 중앙검찰소 · 중앙재판소 · 사회안전성 · 국가보위성 · 보위국
교시 ·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 · 조선로동당규약 · 사회주의헌법
경제
경제 전반 · 경제사 (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 북한 원 · 북한의 국채 · 지하자원 · 산업 · 돈주 · 장마당 · 북한산 상품 · 주체농법 · 비날론 · 8.3 인민소비품 · 조선우편 · IT (휴대전화 / 게임 / 이동통신 / 광명망) · 아파트
사회
공민증 · 조선로동당당원증 · 계급 (기본 군중 / 복잡한 군중 / 적대계급잔여분자) · 조선소년단 · 궐기대회 · 생활총화 · 초상휘장 · 1호 사진 · 훈장 · 인권 · 려행증 · 주체의학 · 금당 2호 · 정치범수용소 (형성 / 실상) · 납북 · 월북 · 탈북
문화
문화 전반 · 요리 · 기호식품 · 노래 · 창작물 (콘텐츠 목록 / 북한 영화) · 스포츠 (축구 대표팀) · 관광 (개성 / 금강산) · 북한의 한국 묘사 · 북한 유튜브 채널 · 소해금
기타
주체년호 · 공휴일 · 한반도의 지도자 목록 · 북한이탈주민 · 대북송금 · 북한 관련 뉴스 (2016년 / 2017년 / 2018년 / 2019년 / 2020년 / 2021년 / 2022년 / 2023년) · 북한의 국가장
둘러보기 틀
역사
역사
행정구역
광역행정구역 (평양시 / 개성시 / 남포시 / 라선시 / 강원도 / 자강도 / 량강도 / 평안남도 / 평안북도 / 함경남도 / 함경북도 / 황해남도 / 황해북도)
지도자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인물
최고지도자 · 지도자의 배우자 · 당 총비서 · 국가원수 · 최고사령관 · 당 중앙위 위원 · 국무위원 · 인민군 지휘관
내각성원 · 내각총리 · 중앙재판소장 · 국가계획위원장 · 국방상 · 국가보위상 · 사회안전상 · 외무상 · 국가과학원장 · 김대 총장 겸 고등교육상 · 당 도당 책임비서 · 지방인민위원장 (평양시 인민위원장)
제도
법규범 · 주민착취제도 · 사회계급 · 훈장
기관
최고통치기관 · 당 대회 · 최고사령관 예하 기관 · 당 조직 · 당 중앙위 전문부서 · 헌법기관 · 행정조직 · 외곽단체 · 해외 단체 · 학교 · 대학 · 예술체육단체 · 이동통신사 · 신문
자연
산지 · · 하천 · 해안 · 온천
건축
평양 길거리 · 신도시 · 일반철도 · 도시철도 · 고속도로 · 공항 · 항구
공공청사 · 평양 · 지방 · 유적 · 체제선전 · 사회기반 · 산업 · 보건의료 · 예술체육 · 버스터미널 · 교정시설 · 정치범수용소
군사
무기체계 · 군계급 · 군단 · 미사일 · 핵·WMD
기타
공휴일 · · 스마트폰



1. 개요
2. 배경
3. 목록
3.2.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임수경 방북 사건
3.2.1. 경제적 타격
3.2.2. 사회적 타격
3.4. 사리원카리비료공장(사리원카리비료련합기업소)
3.7. 대규모 군사력 증강
3.8. 우상화
4. 종합



1. 개요[편집]


북한에서 1980년대 중후반에 걸쳐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실패한 정책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1970년대부터 망조가 드리운 북한 경제는 체제의 모순과 80년대의 온갖 실책, 그리고 90년대 이후 냉전의 종식과 함께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실패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기근으로 이어진다.


2. 배경[편집]


북한은 김일성이 절대권력을 가지기 이전만 해도 공산주의식 계획경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8월 종파사건,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 도서정리사업으로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이 확립되면서, 1970년대 전후로 북한과 조선로동당은 완전히 김일성 집안의 소유로 전락하고 말았다.

공산당 특유의 견제구조도 없어진 상황에서 김일성김정일의 후계체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 1970년대에 3대혁명소조운동과 각종 속도전으로 경제성과를 내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주먹구구식 경제시스템 하에선 별다른 경제적 성과를 낼 수 없었고 더군다나 과도한 군사비와 우상화 그리고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북한 경제는 막대한 외채더미에 휩싸여 침체기로에 접어들었다.

그 와중에 대한민국은 연평균 8% 이상의 고도 성장을 누리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있었고 대한민국과 체제경쟁중인 상황에서 김일성은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970년대부터 계획되었던 주요 경제 프로젝트들을 대규모로 진행해 체제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동시에 경제 성과를 내세워 체제를 결속시키고자 했다.

3. 목록[편집]



3.1. 서해갑문[편집]


파일:attachment/NK-Hafen_Nampo.jpg

서해갑문은 북한 남포시(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진남포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7.8km 길이의 방조제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사실 서해안은 워낙 조차가 커서 조차를 극복할 시설(예를 들어 뜬다리부두 같은)이 필요하다.[1] 특히 남포 같은 큰 항구라면 국가 단위의 물동량을 수용해야 하는 만큼 갑문 설치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당장 남한도 인천에 갑문이 설치돼 있는 상황.

그러나 문제는 서해갑문이 부실 공사, 날림 공사, 무리한 공사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함으로써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인민군 육군 군단 4~5개에 달하는 군 병력(20만 명)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다. 이 공사는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에 겨우 완공하였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 김일성의 지시로 어떻게든 완공 일자를 당겨야만 했기에 그때서야 겨우 완공된 것이다. 이럴 바엔 자력갱생을 하지 않고 선진국[2]에게 공사를 의뢰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날림으로 공사하느라 발생한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틈이 벌어지고 물이 새어들어오고 갑문이 망가지면서 유지보수를 위해 남는 게 군 인력인 북한에서는 육군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는 상황이 현재진행중이다. 게다가 완공된 이후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통일하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즉 북한에서는 돈을 들여 공사를 해 생산량을 줄였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큰 뻘짓이었는지 남한 특수부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시로 침투할까봐 지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그나마 하구둑으로서의 순기능은 하고 있으니 후술할 사례들과 비교하면 서해갑문은 훨씬 양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북한은 해외 정보를 틀어막은 채 이 서해갑문을 '20세기의 기적', '공업이 발전되였다고 하는 나라들에서도 반세기, 아니 몇 세기에 걸쳐 건설하여야 할 세계 굴지의 건축물'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당연히 북한이탈주민들은 남한에서 인천대교를 보고는 하나같이 이 '몇세기에 걸쳐 건설하여야 할 건축물'이 인천대교와 비교하는 것조차 민망하다고 비판하고 있다.[3]


3.2.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임수경 방북 사건 [편집]




{{{#!wiki style="color:black,white;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주요 역사적 사건
김일성
시대

해방 (1945)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1945)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설립 (1946) · 북조선인민위원회 설립 (1947) · 최고인민회의 설립 (19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1948) · 북·남조선로동당 합당 (1949) · 6.25 전쟁 (1950~1953) · 박헌영-리승엽 간첩 사건 (1953~1955) · 8월 종파사건 (1956) ·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 (1958) · 재일교포 북송 (1959~1984) · 조소동맹조약 (1961) · 조중동맹조약 (1961) · 갑산파 숙청 사건 (1967) · 1.21 사태 (1968) ·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1968) ·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1968)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 · 사회주의헌법 제정 (1972) ·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76) ·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 ·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 · 제13차 평양세계학생축전 (1989) · 남북기본합의서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 · 제1차 북핵 위기 (1993~1994) · 서울불바다 발언 사건 (1993) · 김일성 사망 (1994)
김정일
시대

남북정상회담 무산 (1994) · 고난의 행군 (1994~2000) · 북미 제네바 합의 (1994) ·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1996) · 심화조 사건 (1997~2000) · 제1연평해전 (1999) · 남북정상회담 (2000) · 조미 코뮤니케 (2000) · 제2연평해전 (2002) ·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 (2002) · 조일 평양선언 (2002) · 6자회담 (2003~2009) · 제1차 핵실험 (2006) · 2007 남북정상회담 (2007) · 제2차 핵실험 (2009) · 화폐개혁 (2009) · 천안함 피격 사건 (2010) · 연평도 포격전 (2010) · 김정일 사망 (2011)
김정은
시대

제3차 핵실험 (2013) · 장성택 처형 사건 (2013) · 5.30 조치 (2014) · 제4차 핵실험 (2016) · 제5차 핵실험 (2016) · 김정남 피살 사건 (2017) · 제6차 핵실험 (2017) · 남북정상회담 (평양공동선언) (2018) · 북미정상회담 (2018~2019) ·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 (2020) · 코로나 대유행 (2022)
역사왜곡*
항일무장투쟁
타도제국주의동맹 (1926) · 카륜회의 (1930) · 명월구회의 (1931) · 조선인민혁명군 (1932) · 민생단 사건 (1932~1936) · 남호두회의 (1936) · 미혼진회의 (1936) · 동강회의 (1936) · 조국광복회 (1936)
6.25 전쟁
전쟁 발발 책임 · 승패 인식
백두혈통
우상화

김응우 (제너럴 셔먼호 사건) · 김형직 · 강반석 · 김정숙 · 김정일 출생지 왜곡
관련 서적
미제와 일제의 조선침략 죄행 ·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 세기와 더불어 · 조선력사
*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상위 둘러보기 틀로 이동하기


축전 개최 당시 사진들 아카이브

세계청년학생축전(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 약칭 WFYS)은 세계민주청년연맹 주최로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와 좌익계열 청년들의 행사로, 냉전 시기 제3세계공산권 국가에서 주로 개최되었다.[4] 특히 1989년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남한의 1988 서울 올림픽에 자극을 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한 행사였다.[5]

북한은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 1987년부터 축전준비위원회를 두어 막대한 시설 투자와 준비에 열을 다해 177개 국가, 약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북한 정부도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했다고 선전할 정도였다. '5대륙 청춘들 평양으로 오네' 등의 노래까지 만들어서 선전했으니...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런 세력과시는 신흥국 경기 대회 항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3.2.1. 경제적 타격[편집]


그러나 가뜩이나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든 행사를 무리하게 연속 개최하다보니 북한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평양국제비행장 확장, 광복거리 조성, 류경호텔릉라도5월1일경기장 건설, 평양내 고층아파트 건설[6] 등 여러가지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시의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라 부동산 개발로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으면 세계 곳곳에서 손님들은 많이 불러왔는데 재울 곳이 부족해서 동구권 출신 학생들은 평양 부근 선로상에 침대열차를 정차시키고 거기서 숙박시켰다고 한다.[7] 동구권 나라들은 사회주의 형제국가들이기 때문에 북한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물론 1990년대 이후로는 사정이 확 달라져서 2000년대에 평양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2018~19년 부동산 침체기 이전까지는 부동산 개발로 각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부동산 개발을 통해 돈을 왕창 벌어왔다고는 하지만 이때는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사실 개혁개방 정책을 펴던 중국조차도 이때는 부동산 배급제를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행사를 통해 자국을 홍보해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주의 국가들의 관광단을 초청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까 버는 건 10원 한 장 없고 그냥 돈만 잡아먹는 등골 브레이커였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당연히 손해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서울올림픽이 선수촌 아파트 분양으로 제법 쏠쏠하게 흑자를 냈고 한국에 대한 모습 제고를 통해 이후 관광 활성화의 시발점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선진국조차도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나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처럼 국제대회가 충분한 경제효과를 부르지 못해 개최도시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북한은 올림픽보다도 수익이 안 나는 대회에 온 나라의 재정을 영끌했으니 그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북한은 이미 지나치게 과도한 군사비 부담과 충분한 물적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은 관료적 계획경제의 모순으로 인해 저성장 상태에 놓여있었고, 과도한 행사 비용 부담으로 인해 휘청거리게 된다. 사실 북한 뿐만 아니라 당대 동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동유럽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공장을 짓겠다고 서방으로부터 외채를 잔뜩 빌렸다가[8] 기름값 폭등과 이자율 상승으로 돈을 제때 갚기 힘들어진 영향이 큰 반면에 북한은 군사비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때 외국인들을 위해서 찍어낸 '외화와바꾼돈표'에 의해서 일종의 통화량 팽창으로 북한의 외환경제는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어 소련 붕괴, 자연재해와 더불어서 고난의 행군을 불러오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3.2.2. 사회적 타격[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수경 방북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북한은 이로서 본의 아니게 대놓고 체제경쟁 패배를 인증했다. 당시 외국어대학생인 임수경남한 사람으로서 민간통일운동으로 참석하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동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수경은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만큼 남북한 주민들 모두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임수경에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오히려 통제사회인 북한의 일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북한에선 청바지를 미 제국주의 상징으로 선전했는데, 정작 통일투사로 선전했던 임수경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또 임수경은 아무런 사전 원고 없이 사람만 모이면 하는 즉석 연설을 하기도 했고, 김일성 생가 만경대 순례를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수행원이 겨우겨우 설득을 하고나서야 간신히 방문했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공개석상에서 "북한 체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수경의 행동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방북자가 북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세계 학생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 역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좌파 청년들 눈 앞에서 임수경의 돌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명철김일성대 교수 등 1990년대 탈북자들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임수경 충격이다. 임수경을 보고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축전이 끝난 후 북한 정부에서 사상무장을 다시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한동안 통제가 강화되었다고 한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서울을 대거 방문한 북한 기자단은 당시에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수경의 집을 방문하여 임수경의 부모와 인터뷰하여 남한 체제를 비판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뉴스를 본 북한 주민들은 ‘정치범이 수감당하고도 가족이 멀쩡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 남한에서도 민주화 이전에는 비공식적으로 연좌제가 시행되었으며 6공 초기에도 그 잔재가 남아있어 임수경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그의 가족에게도 완전히 불이익이 없지는 않았다.[9] 그럼에도 정치범이 수감되면 그 정치범의 3족을 모조리 정치범수용소에 가두는 법적인 연좌제를 공식적으로 시행하는 북한에 비하면 해를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북한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중산층에 불과하다는 가정집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을 내놓은 데 대한 것과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진 것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선 외국인들이 다닐 법한 길에 위치한 가정집들에 통조림을 두어개씩 나누어주며 "혹시 외국인 손님을 받을 일이 있으면 대접하라"라고 지시했다. 한 마디로 북한에선 통조림이 부의 상징인 셈.

그나마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아서 행사가 끝나면 그 때까지 참았다가 반납 안하고 먹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경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런 선전물품들의 가치가 워낙 올라가 소모되지 않았으면 도로 회수하고 있다. 외국인 왔다 가서 깠다고 뻥치고 먹어버리려 해도 북한에선 외국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감시 겸 가이드가 붙어서 얘들이 그런 사람 온 적 없다고 해버리면 처벌받아서 그런 짓은 못 한다. 그런데 임수경 집의 냉장고에선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고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까지 내왔으니, 그런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남측의 가정식단을 보면 눈이 돌아가다 못해 빠질 듯[10]

사실 임수경은 당시 한국 기준으로 봐도 잘 사는 집 출신이긴 했다. 그 당시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11] 부친이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허나 북한 입장에선 혁명열사가 부르주아라고 말할 수가 없었고, 그야말로 혹 붙여주려고 왔다가 되려 자기한테 혹 붙이고 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 전에 5년형을 북한 언론이 비판할 때부터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그럼 사형이 아니란 말이냐?"였다고 한다. 판문점으로 남쪽에 돌아가는 임수경을 보고 "아이고 저 새파란 처녀가 죽으러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을 정도. 당시 이를 본 북한 예술인 김용도 경악했고 우리가 속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북한 사람도 많았다. 결국 김용도 이후 중국으로 가서 잠적하고 몇 해 안 가 90년 초반에 탈북해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가 써서 한때 제법 팔린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책자에서도 임수경을 언급했다.

더구나 김일성은 생전에 함경도 사람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할 정도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반감이 높은 것도 존재한다. 남한에서도 영호남 지역갈등 같은 지역감정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가지만 특정 지역 출신의 고위직 진출 금지 같은 끔찍한 상황은 결코 공공연하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임수경은 북한으로 치면 반역죄인인데 요덕 제15호 관리소아오지 탄광으로 간 것이면 그나마 행운이고 실제론 무시무시한 총살형이 반기는 판국에 총살은 커녕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사실을 볼 때[12] 북한에서 볼 땐 이만한 컬처 쇼크도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지금으로부터 34여 년 전인 데다가 한국이 본격적으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도 훨씬 전이던 1989년[13] 북한 주민들은 남북한의 차이를 실감하고 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3.3.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순천화학련합기업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83년에 설립된 후, 2010년에는 '순천화학련합기업소'로 변경됐다.


3.4. 사리원카리비료공장(사리원카리비료련합기업소)[편집]


황해북도 봉산군에 위치한 공장. 청단군에 대량으로 매장된 카리[14]장석을 원료로 하여 카리 비료 51만 톤, 내화(耐火)재료인 알루미나 42만 톤, 시멘트 1만 톤 등을 생산할 수 있는 대단위 공장으로써[15], 북한 농업의 고질적인 화학비료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1986년 9월에 착공, 5년 6개월만인 92년 4월, 1단계 공사를 마쳤다.[16]. 그러나, 전력사정 악화로 공장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였으며, 2단계 공사는 자본 부족으로 삽도 뜨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건설 사업은 흐지부지 되어 공장은 흉물로 방치되었다. 최근, 김정은은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2단계 건설과 함께 사리원카리비료공장 건설을 언급하며,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로 특별히 강조하였다.[17] 그러나, 30년간 흉물로 방치되어온 공장을 어떻게 재가동 할 지는 미지수.

3.5. 류경호텔[편집]


무려 34년 동안 호텔 대신 애물단지 역할만 하고 있는 평양의 마천루이다. 자세한 것은 내용 참조.

1987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1989년 콘크리트 골조만 완성된 채 20년 가까이 방치되었다가 2008~2011년 공사를 거쳐 2011년 외장 공사가 24년 만에 완공되었다. 그럼에도 류경호텔의 내부 공사는 시작하기는 커녕 첫 삽도 들지 못했고, 오히려 겉면에 LED를 붙여 야경을 과시하는 외관 과시용으로만 쓸 계획이라 영원히 미완성 건물로 남게 되었다. 이렇듯 북한 입장에서도 견디기 힘든 흑역사였던지라 서해갑문과 정반대로 북한의 대외 선전에서 류경호텔만큼은 언급을 거의 안 할 지경이라고 하면 말 다한 셈이다.

3.6. 1984년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편집]


다른 경우들이 주로 북의 돈과 자재를 털어먹었다면, 이 경우는 북의 비축미를 털어먹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많은 탈북민들이 이 사건 이후 "조금 남은 쌀까지 싸그리 모아다 보내는 바람에 창고가 텅텅 비었다"는 식으로 증언할 정도이다.


3.7. 대규모 군사력 증강[편집]


남한이 자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율곡사업을 통해 군사력을 크게 증진시키자 김일성은 큰 위기감을 가지고 막대한 국방비를 투자해버렸다. 중국으로부터는 J-7 전투기 30대, J-6 전투기 100대, Q-5 공격기 40대, 실크웜 대함미사일과 다수의 고속정들을 사들였고 소련으로부터도 S-200 지대공미사일 4개 포대, S-125 지대공미사일 8개 포대, MiG-29 전투기 14대, MiG-23 전투기 60대, Su-25 공격기 36대 등의 막대한 군수물자들을 도입해버렸다. 여기에다가 병력을 100만[18]으로 늘려버리고 천마호 전차들을 1,000대 이상 생산해버렸다.

그러나 군대는 결국 평시에는 마땅한 재화를 생산할 수 없는 조직이다. 안그래도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규모가 한참 열세인 상황에서 자국의 경제사정과는 맞지 않는 대규모 군사력 증강 프로젝트를 개시해버렸고 거기다가 노동인구들까지 북한군에 흡수되면서 북한의 잠재력이 완전히 깎여나갔다. 여기에 1990년대가 도래하자 북한에게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동구권과 소련이 붕괴되면서 막대한 군사력은 그대로 돈만 퍼먹는 하마가 되었고 북한 경제가 파탄나는데에 일조하게 되었다.


3.8. 우상화[편집]


사실 북한은 1960년대만 해도 동구권에서 제작된 해외 영화를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었고 북한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소련의 최신가요를 길거리에서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정치적 자유는 몰라도 사회적 자유는 제한적으로나마 보장된 사회였다.[19] 그러나 김일성이 1967년에 마르크스 책까지 검열 대상이 된 도서정리사업을 시작한 이후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1974년에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로 추대되면서 북한 사회는 1970년대부터 경직된 개인숭배 사회로 퇴행해버렸다.

특히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과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 국가의 막대한 돈을 끌어모아 전국에 수 만개의 김일성 동상을 건설하고 혁명사적지들을 구성했다. 뿐 만 아니라 우상화 시설 건설에 다수의 북한 주민들이 동원되면서 인민경제는 파탄이 나버렸다. 1990년 기준으로 북한은 국가예산의 19%를 우상화에 지출해버렸다. # 우상화는 별다른 경제적 파급효과를 발생시키지 못했고 이는 결국 북한 국가 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졌다.

그 정점은 김일성 사후 금수산태양궁전 리모델링 과정에서였다. 강철환의 주장에 의하면 리모델링 비용에만 9억 달러의 비용이 소모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4. 종합[편집]


서해갑문 건설에 약 70억 달러,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로 약 60억 달러, 그리고 비날론 공장 증설로 약 100억 달러, 총합 230억 달러를 허무하게 낭비한[20][21] 북한 경제는 이 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북한이 낭비해버린 수십억 달러의 국방비 투자+우상화 시설 건립까지 합하면 북한 경제가 입은 손실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2023년 현재까지도 북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겨우 버텨나가고 있는 게 더 신기할 정도.그저 독하다 독해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삽질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였는데, 다른 사업은 유동성 자산이나 현물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 비용은 당연히 외국인들을 초청해 이것저것 가판대에 행사 같은 걸 벌여야 했던만큼 얄짤없이 외화 현금[22]이었다. 즉, 60억 달러라는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셈. 당시 북한의 1년 예산은 넉넉하게 잡아도 40억 달러인걸 감안하면 국가 1년 예산 이상을 축제하느라 날려버린 것이다. 또한 육류, 쌀, 밀, 채소 등 비축하고 있던 식량마저 외국인들 먹고 재우는데 소비하였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배급 체제마저 붕괴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90년부터 함경남북도 자강도 양강도에서 배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불어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붕괴함으로 인해 무역길이 막히며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저급한 북한 제품을 구매해줬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더군다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우에는 경제 상황이 너무도 나쁜데다[23] 거기에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이 친한반북 성향이라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공산권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소득이 크게 신장했으나 아직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전체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인구가 훨씬 적은 일본 경제력의 반은커녕 1/8에 불과했고,[24] 인구 600만에 불과한 홍콩이 중국 경제력의 1/5, 인구 2,000만으로 역시 성 하나 수준인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였던 시절이었으며, 한국의 경우는 90%였다. 더군다나 다른 국가에 수출하기에는 북한 제품의 품질이 심각하게 낮았고 이미 북한보다도 값싸게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넘쳐나다보니 경쟁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1993년에는 그토록 추진해 왔던 제3차 7개년 계획도 실패했고, 여기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초하게 되는 동시에 북한 외부에서 북한 체제의 실상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반성은커녕 아직도 이 실책들을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25] 사실 반성했다면 지금 그 꼴 날 리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수령절대주의라는 주체사상의 이념 문제가 걸린다는 것. 여기에 대한 실책을 인정할 경우 주체사상의 해석 여지에 따라 '백두혈통'이 스스로에게 인민재판을 당한 뒤 인민의 손에 죽어야 하는[26]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의 정치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을 제대로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독재국가의 최대 약점인 소수의 높으신 분들이 저지른 오판과 무능이 나라 전체를 시궁창으로 몰아넣는 위험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06:47:53에 나무위키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례로 서해안의 인천항서울과 붙어 있음에도 조차 때문에 하역량이 부산항심하게(거의 4배) 밀린다. 물론 서울은 물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업 기능을 상실한 서비스 기능 위주의 도시이고, 부산항싱가포르처럼 입지가 심히 좋은 것이 보다 근본적인 격차의 원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인천항은 수도권 위주의 물동량을 담당하지만 부산항은 대한민국 전국의 물동량을 담당한다. 게다가 부산항에는 철도(부산진역)와 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자가 전국으로 수송되기에 편리하다는 점도 부산이 인천에 크게 앞서는 원인 중 하나. 다만 문제는 이런 부산항조차 최근 유행인 초대형 선박이 접안하기에는 얕다고 준설 요구가 들어오는 판이라는 점인데 하물며 조차가 큰 서해안은 이런한 문제가 더욱 부각된다.[2] 원래 북한에선 당시 소련에게 서해갑문의 설계와 시공 감리를 의뢰했으나, 소련의 건설 당국에선 '이거 지어봤자 장기적으로 보면 여러 측면에서 손해가 큰데 왜 하냐'며 거부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이걸 소련이 건설 기술 노출을 우려해서 안 해주는 거라 곡해했고, 이런 식으로 김일성에게 보고해서 공사가 강행됐다.[3] 참고로 인천대교 길이는 서해갑문의 3배 가량(21.38km)이나 되니 탈북자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더구나 인천대교는 서해갑문보다도 짧은 4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4] 지금도 이 행사는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데 이 평양축전 후로 공산권이 붕괴되어버리면서 1993년에 열리지 못하다가 1997년 쿠바 아바나, 2001년 알제리 알제, 2005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2013년 에콰도르 키토, 2017년 러시아 소치 등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2021년은 코로나 상황으로 개최되지 못했다. 현재의 위상은 동구권 붕괴 전에 미치지 못한다.[5] 북한은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올림픽 개최는 체제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공동 개최 같은 것을 주장하거나 항공기 폭파 테러를 벌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단독 개최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우방이나 다름없던 중국소련까지 참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뒷목잡기를 시전하게 만들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일본, 그 외의 우방국들이 평양 올림픽에 참석해 축하해주고, 각종 협력을 약속한 정도의 충격일 듯.[6] 사실 고층아파트 건설자체는 북한에서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다. 당시 북한도 한국처럼 막 베이비붐 세대들이 집을 마련해야할 시기가 온지라 고층아파트 건설이 당연히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예산 부족으로 거의 맥이 끊겼다는 게 문제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부동산 개발업이 활성화되면서 고층아파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가격대가 너무 비싸고 부실공사도 판을 친다는 문제점이 있다.[7] 김길선 기자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증언한 내용. 사실 주택의 공급부족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8] 덕택에 단기적으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다. 그 이후가 문제였지만...[9] 실제로 월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월북자와 납북자의 가족은 사회적으로 막대한 차별을 받았다.[10] 취소선을 쳐놨지만, 당장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충격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푸짐하고 풍요로운 음식들과 식문화다. 웬만한 당간부보다도 수준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아쉬움과 탄식을 하기도 하는데 남한 주민들이 먹는 음식들을 북에 보내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 따지고 보면 이밥에 고깃국도 한국은 진작에 달성한지 수십 년도 넘은 것을 넘어 맛집 탐방이 유행인 상황이다.(...)[11] 1980년대 말, 한국 정부가 교육용 컴퓨터를 지정할 때 16비트 컴퓨터값이 크게 떨어졌는데, 16비트 XT, AT 기준으로 올림픽 전이라면 100만 원대에서 200만 원 정도가 신문 카탈로그 표시 가격. 올림픽 뒤에는 100만 원 잡고 XT라면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세트가 100만 원 안쪽이었다고 보면 얼추 비슷하다. 8비트라면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본체 30만 원대 + 모니터 30만 원대에서 조금 더 하는 수준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지금과 물가나 소득수준이 다르므로 지금의 100만 원과는 가치가 다르다. 일례로 당시 라면이나 죠스바 가격은 100원 정도였다. 지금만큼이나 교육열이 심하던 시절이라서, 정부가 컴퓨터교육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자식있는 가정에서는 집에 자동차는 없어도 자식 컴퓨터는 사주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부유층의 기준은 컴퓨터 같은 자식 교육용 비싼 장난감보다는 아파트에 사느냐(1기 신도시가 지어질 때였다)와 어떤 차를 모느냐가 확실하다. 이런 것 따지지 않아도 당시 사회에서 부친의 직장 직위가 이미 부유층이라 봐도 되지만.[12] 그러나 의원 당선 이후 방북 당시에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탈북 대학생에게 변절자라고 폭언하여 비판받았고 동시에 정치인의 자질도 의심받아 20대 총선 때 출마는 커녕 소속 정당에서도 쫓겨나면서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나버렸다.[13] 즉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다가(6.29 선언이 있던 1987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겨우 2년밖에 안 됐을 때다), 경제적으로도 비록 경제성장률은 높았을 지언정 아직 부족한 게 많았던 중진국 시절이었으며, 한국이 공식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임수경의 방북 13년 후인 2002년(세계은행이 한국을 고소득 국가로 간주하기 시작한 해가 2002년이다) 들어와서야였다.[14] 칼륨을 의미하며, 칼륨의 일본식 발음과 유사하다. '청산가리'의 '가리'가 이 뜻이다.[15]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122300329109016&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12-23&officeId=00032&pageNo=9&printNo=14267&publishType=00010[16]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40400099209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4-04&officeId=00009&pageNo=9&printNo=8072&publishType=00020[17]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c27dac8c-d480c5b4bcf4b294-bd81d55c-bb3cac00/priceindex-06152020132005.html[18] 80년대에 들어서 군복무 기간을 10년 이상으로 늘려버렸다. 70년대까진 북한군은 50만 명 정도로 65만 명 선을 유지하던 국군에 비해 규모가 적었다.[19] 이와 비슷하게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도 70년대 중반까지는 서구권 문화를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해외여행을 2년에 한 번씩 허가해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20] 참고로 1990년의 북한 GDP는 147억 달러에 불과했고, 2021년 기준으로도 북한의 GDP는 168억 달러도 되지 않는다.(...) #(상단의 시계 아이콘을 누름으로서 통계 시점을 변경할 수 있다) 그러니까 북한은 자기 1.5년 GDP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당장 콩고민주공화국도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가 겨우(???) 1년 GDP와 맞먹는 돈을 해외로 빼돌려서 극빈국으로 전락한 것인데 1년 GDP보다도 많은 돈을 낭비한 북한의 경제가 멀쩡히 유지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21] 실제로는 이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증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전술한 세 시설들 외에도 류경호텔과 국방비, 지도자 일가 우상화 등에 들어간 돈까지 합치면...[22] 당시 북한 외교관이었던 고영환의 증언에 따르면, 대금 지급용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온 외교관이 동원됐다고 한다. 북한 내 금융 기관이 보유한 현금을 모조리 꺼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련, 중국, 아프리카 등 당시 북한이 외화국고금으로 예치한 현금을 인출해 축전총국에 갖다주고 그걸 다시 항공사나 무역사에 지급하느라 외무성의 본래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23] 1992년 당시 물가 상승률이 공식통계로 2000%에 달했던 상황이었고 이후로 물가 상승률은 낮아졌지만 빈곤율은 엄청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새로 민영화된 기업에서 세금 체납과 임금 체불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던지라 정부에서 연금이나 공무원 급여도 체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기업도 임금 체불을 해서 임금 대신에 물건을 대신 받아서 팔아치워야 했던 일이 다반사였으며 학교에서도 겨울철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소련 시절에 국가 차원에서 대중들에게 별장을 지급해서 별장이 대중화되어있던 관계로 도시민들과 농민들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최소한 먹고살 만큼의 농작물을 자체 수확할 수 있었기에 북한처럼 식량난을 겪지는 않았다. 물론 북한도 텃밭 농사를 장려하기는 했지만 국토면적의 차이와 농사를 짓기에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기는 힘들었다.[24] 다만 당시 일본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GDP를 다 합쳐도 일본 한 국가에 못 미쳤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25] 상술한 서해갑문에 대한 자화자찬만 봐도 북한의 현실 인식이 얼마나 뒤떨어졌는지를 보인다. 심지어 우리민족끼리에서는 류경호텔을 비판하는 것은 외부의 '악선전'이라고 우긴 적도 있다.(...)[26] 참고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존경한 것으로 유명한 독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