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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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나는 오래 전서부터 한 번 평양을 방문하여 존경하는 김일성주석과 만나 민족의 미래에 관하여 기탄없는 대화를 교환할 수는 없을까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었습니다.
방북 후 평양공항의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성명
"전태일 열사여![4] 김상진 열사여![5] 장준하 열사여![6] 김태훈 열사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4학년. 1981년 서울대생의 침묵시위에 경찰이 교내까지 진입해 진압하자 이에 항의하여 투신 자결했다.] 황정하 열사여![7] 김의기 열사여![8] 김세진 열사여![9] 이재호 열사여![10] 이동수 열사여![11] 김경숙 열사여![12] 진성일 열사여![13] 강상철 열사여![14] 송광영 열사여![15] 박영진 열사여![16] 광주 2천여 영령이여! 박영두 열사여![17] 김종태 열사여![18] 박혜정 열사여![19] 표정두 열사여![20] 황보영국 열사여![21] 박종만 열사여![22] 홍기일 열사여![23] 박종철 열사여![24] 우종원 열사여![25] 김용권 열사여![26] 이한열 열사여![27] "
문 목사의 절절한 몸짓과 애절한 목소리가 영상으로 남아 있다. 이 영상은 영화 1987에 실리기도 했다.[29]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30] 소속의 목사, 한신대학교 [31] 교수, 성서학자[32] , 남북통일 운동가, 시인[33] , 작사가[34] . 문재린 목사-김신묵 사모의 아들이며, 배우 출신 정치인 문성근의 아버지이다.
부인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박용길 장로이며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다.[35]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늦은 나이에 운동권에 참여하면서 호를 '늦봄'이라고 지었다. 첫 사회 활동인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당시 이미 50대 후반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미국 유학을 거치고 한신대 신학교수로 재직하던 전형적인 개신교 목사였다. 현재 1994년 창립한 통일운동단체 '통일맞이-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초반 생애[편집]
흔히 북간도로 표현되는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明東村)[36] 에서 1918년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익환 목사 집안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윤동주 시인 집안, 김약연 집안 등과 함께 5가문이 집단적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용정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선인 공동체가 생겨난다. 자립과 개척성향이 강했던 명동촌의 분위기와 항일 민족의식을 지녔던 가풍의 영향을 받으며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 숭실중학교, 용정광명학교를 거쳤다.[37] 학창시절 당시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사촌형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 장준하, 정치인 정일권[38] 과 절친한 지인이었다고 한다.[39] 아들인 문성근은 무릎팍도사에 출연하여 "아버지가 윤동주, 장준하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있었다"며 "윤동주 장준하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젠 내 차례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40]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윤동주를 추모하며 헌정시 동주야를 쓰기도 했다.
동주야
너는 스물 아홉의 나이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 섰구나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수야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이후 평양신학교[41] 에 입학하려 했으나, 근본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평양신학교를 다니는 것보다는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 문재린(文在麟, 1896–1985)의 권유로 도쿄의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원래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을 중시하는 장로회 출신의 문익환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는 익숙하였으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비평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학교수의 충고를 받고 학문적인 영역으로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만주국 봉천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아들 문성근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인들에 대한 징병령이 내려지게 되자 "나는 일본을 위해서 죽을 수 없다"며 직접 신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난 뒤에 만주로 돌아갔다고 하며, 교장이 신학자로서의 양심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를 신고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42] 1944년에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박용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1947년 한국신학대학교[43] 를 졸업했다. 사실 문익환은 해방 이후 반공주의자였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서 살던 시절 중국 공산당의 탄압으로 인한 가족의 이주 그리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부친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49년에는 기독교반공청년단체에도 관여했을 정도. 물론 활발히 활동한건 아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미국 유학시절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자원입대, 미군통역장교로 활약하였다.[44] 이후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4년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귀국하여 연세대, 한신대 등에서 신학 강의를 하였다.
1970년대에는 공동번역성서 구약 번역에 참여했다.
2.2. 생애[편집]
좌측이 김일성.[45]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로 본연의 업무인 목사 겸 신학 교수로 활동했으나,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된 이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길로 접어든다.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1994년 77세로 사망할 때까지 생애 마지막 17년 중에서 5년 반을 밖에 있었고 11년 반을 교도소에서 살았다. 함석헌, 장준하와 함께 진보주의의 개신교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활동을 하던 가톨릭 대표인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 서울대교구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전주교구 문규현 바오로 신부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80년대 내내 재야 운동권 세력의 상징이었으며, 1980년대 말 격렬하게 대립하던 학생운동권 그룹에서 모두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사건은 위의 1989년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던 사건.[46] 이 사건은 이어지는 전대협의 임수경 방북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며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의 불씨를 당긴 사건이다. 실제 당시 김일성과의 합의 내용은 이후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남북공동선언에 거의 그대로 반복된다.#
그러나 그는 그가 활동한 단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대해 북한이 대남 공작용으로 이용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47] 말년에 일방적으로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판단한 범민련을 해산시키고 새로운 통일운동 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 노력의 일환이다. 그 외에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의 초대 회장(1989~1991)과 지도위원(1991~1993)을 지냈다.
한편 신학자로서도 계속해서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1988년부터 89년 사이에 기독교 잡지 <생활성서>에 진보 신학적 관점에서 구약성서의 각 권을 갖다 해설한 글들을 당시의 시국과 연관지어 연재한 바 있으며, 이것을 1990년에 <히브리 민중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하였다.
1991년에 나온 민중가요+찬양 모음집인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에도 감수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렇듯 말년에는 특히 통일 문제에 주력하다 1994년 1월 18일에 집을 나서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오후 8시 20분에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어머니 김신묵 여사는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남동생 문동환 목사도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훗날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부인 박용길 장로는 2011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2.3. 방북[편집]
1989년 3월 27일 북한을 무단으로 방문하여 3월 29일에 김일성을 만났고 합의서까지 체결했다. 그러나 문 목사가 북한 체제를 옹호하거나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바람직한 것이라 여겼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문 목사는 본인이 만든 범민련이 종북주의 경향을 보이자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 운동 기구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민주화를 가로막는 장벽, 그게 바로 분단이었습니다. 분단이 독재의 명분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이 하나의 운동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무단 방북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을 당시에 쓴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간한 것을 보면 문 목사는 분명히 북한의 체제도 사회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으며 남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체제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평등을 자유에 이르기까지 추구하고 남한은 자유를 평등에 이르기까지 추구함으로써 자유와 평등 모두가 온전히 실현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문 목사의 통일관이었다.[48] 그리고 문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주체사상'에 대해 무조건 칭송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말싸움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김일성은 그걸 다 들어줬다.[49] 또 문익환 목사가 주체사상은 수령이 아닌 인민을 위한 주체사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김일성은 그냥 넘어갔다.
문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서 몇 가지에 '합의'한 것은 맞지만, 이 합의는 엄연히 1991년의 남북 기본 합의서와 2000년의 6.15 공동선언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으로서,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내용은 단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김정일은 본인의 미출판된 회고록에서 김일성과 문익환의 면담에 대해서도 기록했는데. 여기서는 마치 문익환이 북한 주도의 통일을 옹호하는 사람인 것처럼 서술해놓고 있다.[50] 정작 북한에서는 문 목사가 1993년 출소 이후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 운동 단체를 조직하려고 하자 그를 눈엣가시로 여겼다.[51]
3. 기타[편집]
-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잠깐 등장한다.
- 아들인 배우 문성근이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기를, 성격이 시니컬한 면이 있어 한신대 신학생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문이꽝'[52] 이었다고 한다. 한 성격하는 분이셨기에 아들에게도 냉정하게 대한 적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53] 그래서인지 문성근은 아버지를 소개할 때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문익환 목사님 또는 문 목사님 혹은 대명사로 문 목사라고 3인칭으로 부른다. 이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씨도 비슷한데 장호권 씨도 아버지를 지칭할 때 장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 문성근이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문익환 목사와 똑같은 외모가 되어가고 있다.
-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과 이름이 비슷해서 오해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김흥국이 라디오 방송에서 이와 관련된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익환은 그 사람의 26대손이다.
- 문익환 목사의 행보와 업적에도 불구하고 # 잊혀지고 있는 상황이라 진보 개신교 입장에서는 답답함과 허탈감이 적지 않아 있는 것 같다.
- 전라남도 강진군에 늦봄의 이름을 딴 '늦봄 문익환 학교' 가 2006년 개교하였다.
- 문익환은 고령의 나이에 장기간 수감되었는데, 그 시절 법무부 장관이 김기춘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