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란 듀란

덤프버전 :





듀란 듀란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5ARYZvK4L2afx8AcWcf6kF-1.jpg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펼치기 · 접기 ]
이름
듀란 듀란
Duran Duran

헌액 부문
공연자 (Performers)
멤버
사이먼 르 봉, 존 테일러, 닉 로즈, 로저 테일러, [전 멤버: 앤디 테일러, 워렌 쿠쿠룰로]
입성 연도
2022년
후보선정 연도
후보자격 연도
2007년




파일:Grammy.svg
그래미 어워드
2회 수상




역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파일:MTV Video Music Awards_Logo.png
평생 공로 상
제18회
(2001년)


제20회
(2003년)


제23회
(2006년)

U2

듀란 듀란

하이프 윌리엄스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결성
1978년
데뷔
1981년 Duran Duran
장르
뉴웨이브, 신스팝, 팝 록
현 멤버
Simon Le Bon (사이먼 르 봉, 보컬)
John Taylor (존 테일러, 베이스)
Nick Rhodes (닉 로즈, 키보드)
Roger Taylor (로저 테일러, 드럼)

전 멤버
Andy Taylor (앤디 테일러, 기타)
Warren Cuccurullo (워렌 쿠쿠룰로, 기타)
Sterling Campbell (스털링 캠벨, 드럼)

공식채널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팬사이트
MEET EL DURAN DURAN
포토
포토 갤러리
내한공연
1989.2.11 / 2008.4.17 / 2012.3.12

1. 소개
2. 역사
2.1. 1980년대
2.2. 1990년대
2.3. 2000년대
2.4. 2010년대
2.5. 2020년대
3. 멤버
3.1. 현재 멤버
3.2. 전 멤버
4. 음반 목록
5. 뮤직 비디오
6.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기록
7. 비평
7.1. 외모로 인한 저평가된 실력
7.2. 정치적 성향에 대한 오해
7.3. 여러 장르의 폭 넓은 수용으로 인한 오해
7.4. 결론
8. 여담
9. 관련 사이트




1. 소개[편집]


80년대 FAB FIVE 전성기 시절의 모습

파일:ddtiger.jpg

Simon Le Bon (보컬) John Taylor (베이스) Andy Taylor (기타) Roger Taylor (드럼) Nick Rhodes (키보드)

영국의 5인조 뉴웨이브, 뉴 로맨틱 그룹. 이름의 유래는 1968년작 컬트 에로틱 SF 영화 "바바렐라(Barbarella)"의 악당인 듀란 듀란 박사(Dr. Durand Durand)이다. 1980년대, 즉 MTV를 필두로 한 영미권 팝 음악의 황금기 시절에 뛰어난 비쥬얼과 시대를 선도하는 세련된 음악 스타일로 80년대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0년대 신스팝의 최전성기를 이끈 그룹으로 꼽힌다. 또한 A-ha와 함께 뛰어난 외모로 인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기도 했다. 비틀즈의 The Fab Four 별명을 이어받은 영광의 The Fab Five 시절에 팝계의 최정상까지 올라갔었고 멤버 탈퇴와 음악계의 변화 속에 힘든 시기도 겪었으나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며 2021년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밴드이다. 2020년 정식 오리지널 멤버로 밴드가 결성된지 40주년을 맞이했으며 2021년 10월 22일 발매된 15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Future Past는 그들의 데뷔 앨범 Duran Duran 발매 4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명언이 떠오르는 살아있는 전설로서 후배 밴드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으며 어릴 적 듀란듀란에 얽힌 추억을 가진 중년들에게 특별한 감정을 전해주는 밴드이기도 하다. 본 조비와 함께 롱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파일:hwof2.jp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새겨진 Duran Duran

파일:dd201500005.jpg 2015년도 Paper Gods 앨범 시절의 모습[1]

2021년 5월 19일에 신곡 Invisible을 공개했다. 뮤직비디오는 인공지능 헉슬리를 활용해 제작했다.

2021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신곡 'Invisible'을 최초로 선보였다.[2]

2. 역사[편집]



2.1. 1980년대[편집]


▣ FAB FIVE 시절

1978년 버밍엄 출신의 닉 로즈(Nick Rhodes, 키보드), 존 테일러(John Taylor, 베이스)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여러 차례의 멤버 교체 후에 로저 테일러(Roger Taylor, 드럼)[3]을 영입, 그 후 앤디 테일러(Andy Taylor, 기타)와 사이먼 르봉(Simon Le Bon, 보컬)을 차례로 영입함으로써 정식 그룹이 완성된다.


1981년 2월에 듀란 듀란의 첫 싱글 앨범 Planet Earth가 영국에서 발매되었다. 영국 차트에서 12위, 호주 차트에서 8위를 기록했다. 당시에 밴드가 추구하던 뉴 로맨틱스 사운드의 좋은 예를 보여주며 Russell Mulcahy 감독이 제작한 Planet Earth 뮤직 비디오에는 뉴 로맨틱스적인 감성이 잘 나타난 패션을 담았다. 이 곡은 2020년 롤링스톤지에서 역대 위대한 데뷔 싱글 100곡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링크

같은 해 4월에 두번째 싱글 앨범 Careless Memories가 발매되어 영국 차트 37위에 올랐으나 부진한 성적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다음 싱글곡은 EMI가 선택하지 않고 밴드에게 선택 결정권을 주도록 하여 Girls On Film이 세번째 싱글 곡으로 선택되었다. 이 곡은 젊은 신인 밴드로서는 노련한 펑키 리듬감을 보여준 곡이며 선정적인 뮤직 비디오를 예상하지 못했던 국내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다.[4]

1981년 6월 정규 데뷔 앨범 Duran Duran을 발매하였다. 미국에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1981년 6월 영국 차트 3위를 기록하여 118주 동안 차트에 머물렀다. Rio(1982) 앨범의 미국에서 성공 덕분에 데뷔앨범은 1983년에 미국에서 재발매되었는데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싱글이 수록되어있다.

1981년 11월에 4번째 싱글 My Own Way를 발매했고 영국 싱글 차트 14위, 호주 싱글 차트 10위를 기록했다.

  • 앨범 차트:[5] 빌보드 (10위)[6], 영국 (3위)
  • 싱글 차트:[7] Planet Earth (영국 12위), Careless Memories (영국 37위), Girls On Film (영국 5위), My Own Way (영국 14위),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8] (빌보드 4위, 영국 1위)


1982년 5월에 2집 Rio가 발매되었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는 2위, 빌보드 앨범 차트는 6위까지 올랐다. 앨범 발매 초기에는 미국에서 반응이 미지근했으나 데이비드 커셴봄(David Kershenbaum)이 프로듀서 및 리믹스한 댄스 버젼들이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리고 MTV에서 그들의 뮤직 비디오를 적극적으로 방송하면서 미국 흥행에 불을 지피게 된다. 이러한 전략적인 홍보 활동으로 Rio 앨범은 미국 시장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크게 성공해 The Beatles, The Rolling Stones 시대에 이은 세컨드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선봉장에 서게 된다.

Hungry Like The Wolf (빌보드 핫 100 차트 3위, 영국 싱글 차트 5위), Rio (빌보드 핫 100 차트 14위, 영국 싱글 차트 9위), Save A Prayer는 1982년도에 영국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으나 미국에서는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다. 1985년도에 스페셜 버젼으로 뒤늦게 싱글이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에서 16위까지 올랐다.

듀란듀란이 전세계적인 밴드로 급상승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1~2집 대표곡들의 뮤직 비디오를 담은 First 11 Videos가 1983년 3월에 발매되어 1984년 제26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비디오앨범, 최우수 단편비디오 그래미 상을 수상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6위), 영국 (2위)
  • 싱글 차트: My Own Way (영국 14위), Hungry Like The Wolf (빌보드 3위, 영국 5위), Save A Prayer (빌보드 16위 [9], 영국 2위), Rio (빌보드 14위, 영국 9위)


2집의 대성공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밴드는 매우 지친 상태였다. 강행군 속에도 창의성은 멈추지 않았고 1983년 11월 3집 Seven And The Ragged Tiger가 전세계 발매된다. 영국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앨범 차트 8위에 올랐으며 1984년 1월에 플래티넘, 1991년 11월에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 앨범으로 듀란 듀란 음악에 입문한 국내 올드 팬들이 많을 텐데 1~2집의 업비트 곡들에 스며있던 풋풋한 분위기를 정제하여 세련미를 지향하는 10~20대의 취향에 강하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다른 4~5인조 밴드들과 차별화되는 음악적인 주관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움을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음악성을 맞출 수 있는 창작의 역량을 증명한 앨범이다.

The Reflex는 이들의 첫 빌보드 핫 100 1위곡이었으며 1984년 빌보드 연말 차트 16위에 올랐다.[10] Union Of The Snake는 빌보드 핫 100 3위, 1984년 빌보드 연말 차트 50위권 안에 들었다. New Moon On Monday 역시 빌보드 핫 100 10위를 기록하고 1984년 빌보드 연말차트 96위를 차지했다. 이 세 히트곡 모두가 1984년 미국에서 제일 크게 히트한 100곡 안에 들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technicolordreams70.files.wordpress.com/rolling-stone-cover-volume-414-2-2-1984-duran-duran.jpg

당시에 세계 팝시장의 큰 이슈 중 하나는 듀란듀란의 행보였음을 반영하듯이 롤링스톤 매거진 1984년 2월호 표지 모델을 장식한다.

  • 앨범 차트: 빌보드 (8위), 영국 (1위)
  • 싱글 차트: The Reflex (빌보드 1위, 영국 1위), New Moon On Monday (빌보드 10위, 영국 9위), Union Of The Snake (빌보드 3위, 영국 3위)


1983년 11월부터 다음해까지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일본에서의 Sing Blue Silver 투어로 듀란듀란 신드롬을 일으킨다. 북미 투어의 주요 장면들을 편집하여 Sing Blue Silver 다큐멘터리 비디오와 정규 라이브 앨범 Arena를 발매한다.

Arena는 1984년 11월에 발매된 라이브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1985년 2월에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할 정도로 당시에 그들의 인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The Wild Boys 싱글은 Arena 앨범에 수록되었으며 미국과 영국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다.

  • 앨범 차트: 빌보드 (4위), 영국 (6위)
  • 싱글 차트: The Wild Boys (빌보드 2위, 영국 2위)

Duran Duran - Careless Memories
(As The Light Go Down 뮤직 비디오 중에서)

Sing Blue Silver 투어 중에 미국 오클랜드, 캘리포니아 콘서트를 촬영한 뮤직 비디오 As The Lights Go Down은 1984년에 MTV 외에 여러 음악 채널에서 방송되었고 2010년에 정식 뮤비로 발매되었다. 이것을 영화처럼 만든 뮤직 비디오가 Arena (An Absurb Notion)이며 Arena (An Absurb Notion)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The Making Of Arena도 1985년도에 발매되었다.

▣ 끝없는 비상(飛上) 뒤에 드리워진 분열의 그림자


1985년 5월에는 007 시리즈의 14번째 영화 A View To A Kill 주제가를 발표했고 그 해 7월 13일,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하는 (2주 연속 1위) 기염을 토하며 인기의 절정에 도달했다. (007 시리즈 사운드트랙 최초 빌보드 차트 1위) 제43회 골든글로브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으나 Lionel Richie의 Say you, Say me (영화 백야 주제가, 빌보드 4주 연속 1위)에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

당시 듀란듀란은 흥행이 담보된 잘생긴 외모의 할리우드 영화배우 같은 이미지와 007 영화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음악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음악 제작팀에서 듀란듀란에게 주제가를 맡긴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파일:liveaid85.jpg 1980년대 The Fab 5의 마지막 공연

A View To A Kill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오른 1985년 7월 13일에 Live Aid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듀란듀란 멤버들이 모였다. 파워스테이션은 앨범 발매 이후였고 아르카디아는 앨범 발매를 준비 중인 시점이었다. 오랜만에 5인조로 만나 치룬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5인조 활동 공백으로 인해 호흡이 맞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고 각자의 음악성을 추구하다 만나 서로의 이질감을 확인해야만 했다. 세계 팝계의 정상에 오른 최고의 날,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위해 다시 만났지만 영화 속 운명의 장난처럼 80년대 The Fab Five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싱글 차트: A View To A Kill (빌보드 1위, 영국 2위)

▣ SIDE PROJECT (Arcadia VS The Power Station)

투어의 피로감으로 다음 듀란듀란 앨범 녹음이 보류된 휴식기에 계속 활동하길 원했던 멤버들은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길 원했고 그렇게 밴드는 알카디아(아르카디아)와 파워 스테이션 두 프로젝트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11][12]

파일:powerstation.jpg The Power Station 공식 뮤비

더 파워 스테이션의 발단은 존의 우상들인 David Bowie, Bryan Ferry를 사로잡은 뮤즈이자 모델 겸 가수인 Bebe Buell[13]과 존이 데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이미 The Cars의 재능있는 리더 Ric Ocasek의 서포트를 받아 음반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T. Rex의 Bang A Gong (Get It On)을 부르고 싶어했는데, 존은 그녀를 서포팅해주기 위한 밴드를 구상했다. 그는 작곡 중이었던 Some Like It Hot을 앤디에게 보여주며 함께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 프로젝트는 시크 멤버들과 만나면서[14] Robert Palmer, Mick Jagger, Billy Idol, Mars Williams, Richard Butler (The Psychedelic Furs), Mick Ronson 등의 뮤지션들과 함께 각기 다른 보컬이 각각의 트랙을 담당하는 빅 브라더라는 이름의 펑크와 록앤롤이 믹스된 슈퍼밴드를 구상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존은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초기 구상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 된 그들의 프로젝트는 로버트 파머를 리드 보컬로 하는 더 파워 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의 밴드로, 1985년 3월, 하드 락, 펑크(Funk), 소울 요소가 혼합된 동명 타이틀 앨범 The Power Station을 발매하게된다.

로버트 파머의 중후한 보이스 컬러는 밴드의 곡에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으며 소울 감성으로 락 스타일의 곡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가창력을 보여줘 슈퍼밴드라는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해냈다. 존 테일러와 토니 톰슨의 리듬 섹션 궁합은 음색부터 환상적인 조화를 이뤄냈고 앤디 테일러의 와일드한 기타 스타일 또한 파워 스테이션의 에너지가 넘치고 선이 굵은 사운드를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6위), 영국 (12위)
  • 싱글 차트: Some Like It Hot (빌보드 6위, 영국 14위), Get It On (빌보드 9위, 영국 22위), Communication (빌보드 34위, 영국 75위)


존과 앤디가 파워 스테이션을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자 사이먼, 닉, 로저[15]는 아르카디아를 결성하게 된다. 이렇게 두 밴드는 서로 다른 성격의 스타일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된다. 파워 스테이션은 외부 멤버를 영입해 화려한 구성을 이뤘다면 아르카디아는 새 멤버 대신에 특급 세션으로 보강하며 파워 스테이션과 경쟁에 균형을 맞췄다.

Alex Sadkin과 밴드 멤버가 공동 프로듀서를 담당한 So Red The Rose 앨범을 1985년 11월에 발표하게 되는데 듀란듀란의 뉴웨이브적인 요소를 계승하여 심화시켰으며 The Promise, Lady Ice 곡에서는 프로그레시브적인 요소까지 확장하는 실험성을 선보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르카디아는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결과물이 아니라 파워 스테이션 결성에 따라 급조된 프로젝트였음에 불구하고 좋은 퀄리티의 곡들로 앨범을 채웠다. 이를 통해 듀란듀란 멤버들의 음악 수준과 집중력을 엿볼 수 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23위), 영국 (30위)
  • 싱글 차트: Election Day (빌보드 6위, 영국 7위), Goodbye Is Forever (빌보드 33위), The Promise (영국 37위), The Flame (영국 58위)

▣ 밴드 해체 위기설을 불식시킨 3인조 체제


사이드 프로젝트 이후 다시 앨범을 준비하려던 밴드는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의 피로감과 향수병으로 인한 탈퇴와 솔로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기타리스트 앤디 테일러의 지지부진한 합류라는 이중고를 겪었다. 기타와 드럼의 부재에 시달린 밴드는 사이먼 르 봉, 닉 로즈, 존 테일러의 3인조로 정식 멤버를 축소하되 기타리스트 워렌 쿠쿠룰로(Warren Cuccurullo)[16]와 드러머 스티브 페론(Steve Ferrone)을 세션으로 영입하여 활동하는 강수를 둔다. 사실, 이때 영화 나인 하프 위크 주제곡인 'I do What I do'로 개인 활동을 하던 존 테일러도 탈퇴를 시도했었으나, 멤버들의 끈질긴 설득 끝에 일단은 듀란 듀란에 남기로 했다고 한다.

워렌 쿠쿠롤로는 검증된 기타리스트답게 앤디 테일러가 초기에만 잠시 손대고 미처 채우지 못한 공백을 잘 메꿔나가며 새 앨범을 녹음해냈고 1986년 11월에 4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Notorious를 발매했다.[17] 시크 출신 기타리스트 Nile Rodgers가 프로듀서를 담당한 앨범답게 펑크(Funk)의 색채를 강하게 입힌 곡들이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펑크의 비중을 높였고 혼 섹션을 리듬 파트로 적극 활용한 것이 기존 듀란 듀란 사운드와 크게 차별화된 변화였다. 그리고 아르카디아와 파워 스테이션 사운드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음악성이 변화하는데 작용하였다.

Notorious 앨범의 첫번째 싱글인 Notorious는 뉴웨이브 감각을 Funk와 결합시킨 명곡이고 Skin Trade,[18] So Misled, Meet El Presidente는 듀란듀란 스타일의 펑키 사운드인데 앨범 발매 당시 10대가 주류를 이루던 팬들에겐 (아직 다양한 음악을 접한 경험이 적다보니) 쉽게 수용하기 힘든 점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Vertigo는 뉴웨이브 뮤지션들이 즐겨쓰는 Synth 리프 위에 알앤비 감성이 흐르고 있으며 몽환적인 사운드의 American Science와 함께 들을수록 중독성이 있는 곡이다. A Matter Of Feeling은 국내에서 인기 있었던 발라드이며 Andy Taylor의 기타가 녹음된 곡이다.[19]

앨범 발매 직후 두달만에 플래티넘을 기록하였고 싱글 Notorious는 빌보드 핫 100 2위까지 오르며 3인조 축소 후 겪게 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켰다. 그러나 10대들의 아이돌 이미지 탈피 시도, 변화된 음악성, 최고 전성기를 함께 했던 멤버 인원의 축소 등은 Fab Five 시절을 그리워하며 아쉬움을 가진 팬층과 3인조 체제에도 변함없이 열광하는 충성 팬층으로 나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12위), 영국 (16위)
  • 싱글 차트: Notorious (빌보드 2위, 영국 7위), Skin Trade (빌보드 39위, 영국 22위), Meet El Presidente (빌보드 70위, 영국 24위)


1988년 다섯번째 정규 앨범 Big Thing을 발매했다. 이 앨범의 리드 싱글 I Don't Want Your Love는 사이먼 르 봉이 처음으로 'Love'라는 단어를 사용한 가사였다. 링크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 영국 차트 14위, 심지어는 1989년 빌보드 연말 차트 70위권 안에 들며 여전히 히트 메이커로서 영향력을 보였지만 기존의 듀란 듀란의 성과에 비교하자면 아쉬운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All She Wants Is는 역시 듀란듀란이라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충분히 감각적인 곡이었으나 기대만큼 빌보드 싱글 차트 상위권에 진입하지 못했다. 헤비 메탈 스타일의 신스 리프와 댄서블한 하우스 뮤직 스타일의 리듬을 뼈대로 만들었고 반복적인 후렴구를 잘 만든 수작이다. 워렌 쿠쿠룰로의 기타 또한 곡 분위기에 맞게 잘 녹여냈으며 뮤직 비디오는 Arcadia의 Missing 뮤직 비디오를 연상 시킨다. 두 뮤직 비디오 모두 Dean Chamberlain 감독이 제작한 것이다.

다음 싱글 Do You Believe In Shame?천카이거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맡았다. 이 곡은 사이먼 르 봉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1987년에 마약으로 급사한 절친을 추모하는 3부작 중 첫번째였기 때문이다. 링크[20] I Don't Want Your Love, All She Wants Is 싱글보다 더욱 낮은 순위에 랭크되었으며, 앨범 판매량에서는 골드를 기록했고 처음으로 플래티넘을 얻지 못하여 하락된 인기의 현실을 맞이해야만 했다.[21]

시대가 변하여 80년대 말 들어서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동료 밴드들은 하나씩 몰락해가는 시대였다. 듀란듀란은 기존의 뉴 웨이브, 신스팝의 하향세와 아이돌 이미지를 실험적인 아티스트 노선과 하우스 음악과의 장르적인 접목을 실시하며 대응해나갔지만 시대는 이미 힙합, R&B, 뉴 잭 스윙 류의 흑인 음악과 얼터너티브 락의 시대로 막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24위), 영국 (15위)
  • 싱글 차트: I Don't Want Your Love (빌보드 4위, 영국 14위), All She Want Is (빌보드 22위, 영국 9위), Do You Believe In Shame? (빌보드 72위, 영국 30위)

파일:내한공연1.jpg

팝 시장의 본토 미국에서 흥행 성적은 예전보다 못했지만 국내 듀란 듀란 팬들에겐 뜻 깊은 앨범이 Big Thing일 것이다. 앨범 홍보 투어 일정 중에 대한민국이 포함되어 1989년 2월 11일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첫 내한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녹화 영상을 보면 한국 소녀 팬들의 뜨거운 함성을 들을 수 있다.

여담으로 녹화 영상 자막을 보면 가사 번역이 생뚱맞다. 제목과 가사 첫 부분만 의역을 해서 내보냈는데, Big Thing 앨범의 수록곡인 'Do you Belive in Shame'은 '사랑은 부끄러운 게 아니야'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And if love can conquer all then why Do we only feel the pain?'지난 날은 모두 나의 잘못이었어요\'라고 바뀌어서 나온다. 분명 사이먼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지금은 없는 내 친구에게 바친다'라고 말했지만, 이 발언은 전혀 번역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친구의 사인이 좀 그렇다 보니 저런 식으로 개작한 듯하다.[22] 물론, 사이먼이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졌다는 배경 지식을 알고 보면 개작을 하신 분이 그 점까지 반영했을지도 모른다. 암튼 사연을 알고 보면, 사이먼이 왜 침통한 표정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이 앨범의 또 다른 수록곡인 Drug(It’s Just a State Of Mind)도 서울 공연 세트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데, 마약 퇴치 메시지를 담은 곡으로 내가 마약보다 더 재밌게 놀아 줄 수 있다는 콘셉트라고 한다. 다만, 우리나라 방송국에선 제목 때문에 오해를 살 수 있다고 걱정했는지 'No Drug(약은 이제 그만)'이라고 제목을 바꿔 버렸는데, 방송 자막을 보면, 그래도 가사 내용은 사이먼의 의도에 가깝게 의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2.2. 1990년대[편집]


▣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세션으로 Duran Duran에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워렌 쿠쿠룰로와 드러머 스털링 캠벨은 정식 멤버가 되어 작곡에도 참여한 앨범 Liberty를 1990년 8월에 발표한다. 1990년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는 46위까지 올랐고 판매량 역시 예전 정규 앨범들에 비하면 저조했다. 첫번째 싱글 곡 Violence Of Summer는 영국 싱글 차트 20위, 빌보드 핫 100 차트 64위를 기록했으며 Serious는 영국 싱글 차트 48위를 기록했다. (일본 싱글 차트에서는 6위)

앨범 수록곡들은 듀란듀란의 기대치에 비한다면 히트곡으로 밀어줄만한 곡이 없었고 밴드 이미지 또한 과거에 비해 평범해진 느낌을 전해준다. 사이먼 르본과 존 테일러도 앨범 작업 과정에 미흡한 부분들이 있었음을 회고했다. 게다가 밴드 역사상 처음으로 홍보 투어조차 하지않는 것을 결정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평론가들은 정체성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매우 인색한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아래에 언급된 곡들을 들어보면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떠오르는 앨범이 Liberty라 할 수 있다.

First Impression은 듀란듀란 곡을 잘 모르는 하드 락 팬들이 들어도 호감을 가질만한 곡이며 (특히 워렌 쿠쿠룰로의 열정적인 기타 솔로가 인상적이다.) Serious 또한 시대의 유행을 타지 않는 준수한 곡이다. 블루지한 느낌이 가미된 Liberty, 전작 Big Thing 앨범의 슬로우한 곡의 분위기를 비트감있게 살린 My Antarctica, 80년대 전성기 시절의 센스가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Venice Drowning 등은 리듬 전개와 악기의 특성을 살려 편곡하는 능력이 프로페셔널함을 느끼게 한다.

리버티 앨범은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앨범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두보 전진을 위한 한보 후퇴이자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밤의 시간이었다.


▣ 제2의 전성기


Liberty 앨범의 공식 활동을 접은 이후 1991년부터 다음 스튜디오 앨범 작업에 들어갔다. 1992년 초에 앨범은 거의 완성이 되었으나 앨범 홍보가 미진하여 발매일을 미루게 된다. Ordinary World가 복사된 음원이 미국 라디오 방송의 전파를 타면서 청취자들의 호응을 얻어내자 1992년 12월에 미국에서 싱글 Ordinary World를 서둘러 발매했다.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어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랭크되었으며 1993년 3월에 미국에서 골드를 기록했다.
노래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웨딩 드레스도 화제가 되어 똑같이 주문 제작을 하여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도 있었다고 한다. [23] 이 드레스는 줄리 베넷 모스의 작품이다. 링크
Ordinary World 뮤직비디오는 결혼식장을 배경으로 했기에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노래로만 여기기 쉽지만,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곡의 가사는 사이먼이 죽은 친구를 추모하여 쓴 3부작 중 두번째였다. 친구를 잃은 슬픔을 추스르고 평범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마음을 담은 내용이다. 당시 사이먼은 가사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서 멤버들도 이 곡이 고인에게 헌정된 곡임은 알지 못했으나, 2000년에 어느 팬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친구를 기리는 3부작 중 두 번째였다고 언급하면서 비로소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링크 이 발언은 2005년 공개된 이들의 런던 라이브 DVD에 담긴 인터뷰에도 언급돼 있다.링크 [24]

웨딩 앨범 20주년이 되는 해인 2013년에 나온 특집 기사에서 닉 로즈가 밝힌 바에 따르면, 녹음 당시 워렌과 으로 합주를 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사이먼이 끼어들어 보컬과 멜로디를 추가했다고 한다. 또한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은 비틀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링크

잊힌줄만 알았던 듀란듀란에 대한 관심이 모아진 가운데 1993년 2월에 밴드의 큰 전환점인 The Wedding Album이 발매 되었다. 영국 앨범 차트 4위,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7위에 오르면서 (미국에서 발매된지 4개월만에 플래티넘 기록) 몇년 간의 침체기를 깨고 변화무상한 음악 시장에서 다시 두각을 나타내는 저력을 나타냈다.

1993년 3월에 두번째 싱글로 발매된 Come Undone 또한 빌보드 싱글 차트 7위를 차지 하면서 가장 화려한 컴백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곡은 원래 닉 로즈와 워렌 쿠쿠룰로가 자신들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라, 듀란 듀란 앨범에 수록할 계획은 없었다. 워렌은 보컬로는 밴드 '부시'의 보컬 게빈 로즈데일[25]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사이먼 르 봉이 데모 버전을 듣고 매우 맘에 들어하며, 자신의 아내인 야스민의 생일 선물로 지은 가사와 멜로디를 추가해 곡을 완성했다.# 참고로 가사를 쓴 날은 199210월 29일로 아내인 야스민 르 봉이 만 28세가 된 날이었다. 이 뒷얘기는 2000년에 공개된 BBC 다큐멘터리 Wild Boys: The Story of Duran Duran에 나온다. 링크

사실 앨범은 1992년 초에 이미 완성됐으나, 발매 일정이 뒤로 미뤄진 상황에서 갑작스레 추가된 곡이다 보니 정작 스튜디오에는 존 테일러가 없었다. 닉은 존이 베이스 부분을 연주해 주길 바랐지만, 스튜디오는 런던에 있었고, 당시 존은 주어진 일을 마치고 LA에 있는 신혼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갑자기 불러낼 수가 없었다. 대신 존은 나중에 뮤비를 촬영할 때 얼굴을 비췄고, 라이브에서는 베이스 파트를 아름답게 연주해 주었다고 닉 로즈가 밝혔다. #

존 테일러는 웨딩 앨범 발매 전부터 듀란듀란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고 탈퇴를 고민하고 있었으나 앨범의 성공에 힘입어 잔류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Liberty 앨범부터 정식 멤버가 된 워렌 쿠쿠룰로는 Ordinary World, Come Undone의 감성적인 기타 사운드로 앨범이 히트하는데 공헌하며 앤디 테일러 탈퇴 이후 빈자리처럼 느껴졌던 기타리스트의 자리를 책임져줄 적임자이자 작곡가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1993년 8월에 세번째 싱글 Too Much Information을 발매했다. 과잉된 정보의 제공으로 현대인을 수동적으로 살게 만드는 미국과 영국의 주요 미디어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빌보드 싱글 차트 45위, 영국 싱글 차트 35위까지 올랐으며 다소 공격적인 성향이 가미된 얼터네이티브 락을 신디사이저의 귀재, 지성적인 기타리스트, 천재성이 엿보이는 베이시스트가 건재하고 있는 듀란듀란이 작곡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들려준다. 드럼은 노토리어스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던 Steve Ferrone이 녹음했다.

그 외에 주요곡 소개를 하면 라틴 음악 스타일의 Breath After Breath는 브라질 뮤지션 Milton Nascimento이 보컬로 참여했다. Feme Fatale Velvet Underground의 곡을 커버했는데 정규 스튜디오 앨범에 처음으로 커버곡을 수록했다.[26]

Sin Of The City는 1990년 클럽 '해피랜드'에서 벌어진 묻지마 방화 살인 사건을 다룬 곡으로, 도입부에 한국어가 잠깐 나온다는 점에서 한국 팬들에게 특별히 기억되고 있는 곡이다. [27] 이 사건은 뉴욕 브롱크스에서 영업 중이던 '해피랜드'라는 클럽에 실직자인 남미 이민자 남성이 클럽 직원인 전 여자 친구에게 앙심을 품고 불을 지른 사건으로 8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생존자는 겨우 6명이었다. # 이 클럽은 비상구조차 마련되지 않아 명백히 소방법을 위반했는데, 이 곡의 제목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전세계적으로 치뤄진 Dilate Your Mind Tour, No Ordinary World Tour, An Acoustic Evening Tour 등이 예전 공연들과 큰 차이점이라면 언플러그의 비중을 높였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 언플러그 라이브가 유행이었던 점을 공연 컨셉에 적극 활용했을 것이다. 1993년 11월, MTV 언플러그드 시리즈에 드디어 듀란듀란이 초대되어 그들의 히트 곡들을 어쿠스틱으로 재해석하여 밴드의 높은 수준을 보여줬다. # 1994년에 Extraordinary World 뮤직 비디오를 발매했다. 밴드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Liberty, The Wedding 앨범에 수록된 6곡의 뮤직 비디오가 수록되어 있다.

Fab Five 시절이 막을 내린 이후 새로운 음악성을 찾기 위해 Notorious 앨범부터 Liberty 앨범까지 시도했던 노력이 평론가들에게 과소 평가되었으나 The Wedding Album은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있는 평론가들이 트집을 잡기에 곤란한 완숙미를 지니고 있었다. 대중성 뿐만 아니라 음악성을 평가 받을 때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이 골고루 우수함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부터 비로소 대중성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음악성을 가진 밴드로서 인정 받게 되었고 80년대 음악성까지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부류가 생겨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제2의 전성기를 꽃 피운 웨딩 앨범의 히트는 듀란듀란의 새로운 팬층이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파일:hwof.jpg

1993년 8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Hollywood Walk of Fame)에 Duran Duran 이름이 새겨짐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음악 스타로 각인되었다.

1994년에는 영국에서 작곡에 관해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이보 노벨로 어워즈에서 'Ordinary World'로 'PRS MOST PERFORMED WORK' 부문을 수상했다. 이 곡은 그 외에도 'BEST SONG MUSICALLY AND LYRICALLY' 부문 후보에도 들었다. #

  • 앨범 차트: 빌보드 (7위), 영국 (4위)
  • 싱글 차트: Ordinary World (빌보드 3위, 영국 6위) Come Undone (빌보드 7위, 영국 13위) Too Much Information (빌보드 45위, 영국 35위)


▣ Thank You 헌정 앨범 발매


1995년 4월에 8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Thank You를 발표한다. 듀란듀란에게 영감을 준 뮤지션들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헌정 커버 앨범이다. 즉흥적인 기획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며 웨딩 앨범을 작업하는 기간에도 틈이 나는대로 Thank You 앨범 곡들을 작업하고 있었다.

1995년 3월에 첫 싱글로 발매된 Perfect Day는 영국 싱글 차트 28위까지 올랐다. Velvet Underground 출신의 Lou Reed의 곡을 커버한 것이며 웨딩 앨범에서 커버했던 Velvet Underground의 Femme Fatale을 믹스한 버젼은 B-Side에 수록되었다. 로저 테일러가 드럼 세션으로 참여해 녹음했고 [28] 뮤직 비디오에도 등장했다. Lou Reed에게 최고의 커버 곡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링크

1995년 6월에 발표한 두번째 싱글 White Lines는 마약 퇴치 메시지를 담은 원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영국 싱글 차트 17위까지 올랐다. White Lines라는 제목자체가 코카인을 흡입하기 위해 가루를 모아서 줄처럼 정렬해 놓은 것을 뜻하는 은어이다.[29] 원곡의 메시지가 마약 퇴치이다 보니, 사이먼은 이 곡을 부르기 전에 마약 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Grandmaster Flash & Melle Mel의 원곡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락 에너지가 넘치는 사운드로 탈바꿈시켰으며, 뮤직 비디오에는 실제로 원곡자인 Melle Mel이 출연했다.

Sly & The Family Stone의 I Want to Take You Higher와 The Temptations의 Ball Of Confusion 역시 흑인 감성이 충만한 자유분방한 느낌의 곡인데 듀란듀란은 워렌 쿠쿠룰로의 락 기타 스타일이 중심이 되어 원곡을 재해석했다.

Led Zeppelin의 곡을 커버한 Thank You는 영화 With Honors 사운드 트랙 (1994)과 Led Zeppelin의 트리뷰트 앨범 Encomium (1995)에 짧은 버젼으로 수록되기도 했다. The Doors의 명곡 Crystal Ship은 짧지만 강한 임펙트를 남겨주는 곡인데 Perfect Day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리메이크 곡이다. Sing Blue Silver 가사가 삽입된 Driven By는 이 앨범의 유일한 신곡이며 Chauffeur를 연상시킨다. 1993년 Rock Life 공연에서 Crystal Ship과 함께 이미 라이브로 선보였던 곡이었다.

앨범 수록곡들만 보자면 사이먼 르본 특유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여전히 들을수 있고 원곡을 90년대 감성으로 색다르게 리메이크했다. 빌보드 앨범 차트 19위, 앨범 판매량은 1995년에 골드를 기록하여 커버 앨범의 기대치에 비한다면 좋은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커버 앨범의 특성상 듀란듀란의 제2의 전성기를 이어가기엔 앨범 홍보 및 투어에 있어서 분명한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매우 중요한 시점에 신곡들이 담긴 정규 앨범의 자리를 커버 앨범으로 대신해야만 했는지 타이밍이 무척 아쉬움을 남기는 시대였다.

웨딩 앨범 전부터 탈퇴를 고민하던 존 테일러는 Thank You 앨범 활동에 만족하지 못했고 Punk Rock을 표방하던 Neurotic Outsiders 밴드에 가입하여 1996년도에 앨범을 발표하였다. 솔로 앨범 준비까지 하면서 결국 1997년 1월, 팬미팅에서 듀란듀란 공식 탈퇴를 발표하여 전세계 듀라니즈들은 존 테일러의 탈퇴가 현실이 되는 큰 아픔을 얻게 되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19위), 영국 (12위)
  • 싱글 차트: Perfect Day (빌보드 101위, 영국 28위) White Lines (영국 17위)[30]


▣ 존 테일러의 탈퇴와 두 번째 3인조 체제


앞서 언급되었듯이 웨딩 앨범 전부터 탈퇴를 고민했던 존 테일러는 1991년에 첫 결혼을 한 것을 계기로 한때 마약도 끊고 가정에 충실하려 했으나, 웨딩 앨범 투어 후반에 가서는 예전의 악습을 반복하게 됐고, 결국 1994년 연말에 모든 것을 정리할 각오로 재활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그가 1997년에 공식 탈퇴를 선언하자, 이번엔 닉 로즈, 사이먼 르봉, 워렌 쿠쿠룰로만 남아 또 다시 3인조 체제가 되었다.

이 해에 앨범 <Medazzaland>를 발표하였는데, 미국에서만 발매되고, 영국에서는 발매되지 않은 단 하나의 앨범이다. 사실은 1995년부터 작업 중인 앨범이었으나, 존이 8월까지만 스튜디오에서 함께하고, 듀란 듀란을 떠나기로 했다.# 즉, 대중 앞에서 공식 탈퇴를 선언한 것이 1997년 1월이었던 것이지, 이때 이미 멤버들은 존이 떠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록곡인 'Electric Barbarella'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에서 공식적인 다운로드와 판매를 시작한 싱글이다. 이 앨범에는 친구의 죽음을 추모하는 3부작을 마무리하는 Out of My Mind가 수록됐다. 뮤직비디오는 프라하의 고성에서 촬영되었고, 의상도 18세기 귀족들을 연상케 하는 스타일이라 매우 고풍스러운 호러 영화 분위기를 띤다.

<Medazzaland>는 존이 앨범 녹음 중반에 탈퇴한 영향으로 음악적 방향이 매우 달라진 앨범이다. 원래는 존이 맡았던 베이스 기타도 워렌이 연주했다. 이 앨범에서 원래 존이 연주한 베이스 트랙은 'Medazzaland ', 'Big Bang Generation', 'So Long Suicide'및 'Midnight Sun'에만 남아 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58위)
  • 싱글 차트: Electric Barbarella (빌보드 52위, 영국 23위) Out Of My Mind (영국 21위)



2.3. 2000년대[편집]



Medazzaland 앨범의 성과 부진을 이유로 데뷔 때부터 함께 했던 EMI Capitol과 계약을 끝내고 Hollywood 레코드로 옮긴 후 2000년 6월에 Pop Trash 앨범을 발표했다. 팝을 쓰레기라고 비판하는 앨범명은 팝스타로서 부와 명예를 얻었던 자신들의 과거까지 포함시켜야하는 자기부정의 모순을 갖고 있다.

음악성은 Medazzaland 앨범과 흡사한데 중요한 원인은 사운드의 큰 뼈대였던 베이시스트 존 테일러의 탈퇴로 인한 후유증이었다. 창단 멤버인 존 테일러의 부재로 인해 사이먼에게는 매우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링크 닉 로즈 또한 그동안 작업한 앨범 중에서 가장 어려웠다고 밝혔다. 사이먼은 창작의 의욕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닉과 워렌의 비중도가 예전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닉과 워렌의 사이드 프로젝트였던 TV Mania의 곡 재료들을 모티브로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Pop Trash 앨범의 프로듀서는 TV Mania였기 때문에 사실상 기획부터 제작까지 닉과 워렌이 주도했다고 봐야한다. 90년대에 앨범으로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TV Mania의 곡들을 편곡하여 사이먼의 보컬이 입혀진 것이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첫 번째 싱글 Someone Else Not Me는 MTV와 VH1에 최초로 방송된 플래시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된 디지털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이며 영국 차트 53위를 기록했다. 세기말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Last Day On Earth의 싱글 CD는 일본에서만 발매되었고 Playing With Uranium는 이탈리아에서만 음반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라디오 방송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최악의 앨범 판매량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지만 공연 매진 사례가 많아 관객 동원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리고 영국 Pop Trash 투어에서는 세계 최초로 증강 현실 기술을 콘서트에 도입하는 시도까지 했었다. 90년대 듀란듀란 사운드의 중심에 서있던 기타리스트 워렌 쿠쿠룰로는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듀란듀란과 15년 동안의 여정을 마쳐야 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135위), 영국 (53위)
  • 싱글 차트: Someone Else Not Me (영국 53위)


▣ Fab 5의 재결합

파일:2002dd.jpg
FAB 5 재결합 기념 포스터 (2002년)

2001년, 다시 연락이 닿은 오리지널 멤버들이 오랜 만에 다시 회포를 풀며 새 앨범을 준비했다. 링크 이로 인해 웨딩 앨범의 성공을 이끌었던 워렌 쿠쿠룰로는 밴드를 나가게 되었다.[31] 그 해부터 합숙을 시작해 2004년 10월 발표한 <Astronaut> 앨범은 영국 차트 3 위, 미국 차트 17 위에 올라 이들의 부활을 알렸으며, 앨범 발매 전 해인 2003년에 시작한 결성 25주년 투어는 매진을 기록해 흥행에 성공했다.



Astronaut 앨범 발매 한 달 전에 첫 싱글 (Reach Up For The) Sunrise를 전세계에 발매하였고 영국 5위, 빌보드 핫 100에서 89위까지 올랐다. (빌보드 댄스 클럽 송 차트는 1위 기록) 2004년 4월 웸블리 아레나에서 열렸던 공연을 녹화하여 Fab Five의 재결합 공연에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을 담아 2005년 Live From London (DVD)을 발매하였고 미국에서 골드 판매를 기록했다. 2005년 1월에 두 번째 싱글 What Happens Tomorrow를 발표하여 영국 차트 11위, 빌보드 댄스 클럽 송 차트 2위에 올랐다. 2006년 8월에 나온 세 번째 싱글 Nice는 음반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음원 다운로드 형식으로 나왔다.

3인조로 활동했던 Medazzaland와 Pop Trash 두 장의 앨범은 듀란듀란 밴드의 이미지를 대중적인 색깔에서 특정 취향의 마니아적인 색깔로 전환시켰다. 그것을 다시 대중적인 색깔의 밴드로 급전환시킨 앨범이 Astronaut이다. 마니아 취향의 밴드로 변질되어 밴드의 수명을 마감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가 깊어지기 전에 Fab 5 재결합이라는 핫 이슈를 가지고 메이저 밴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팝 음악계의 메이저로 복귀한 듀란듀란은 수많은 앨범 홍보 투어와 방송 활동 등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으며 2003년 MTV에서 평생 공로상과 2004년 영국 브릿 어워드에서 음악 공로상을 수상했다.

  • 앨범 차트: 빌보드 (17위), 영국 (3위)
  • 싱글 차트: (Reach Up For The) Sunrise (빌보드 89위, 영국 5위) What Happens Tomorrow (영국 11위)


▣ 앤디 테일러 탈퇴 후 다시 4인조로

하지만 2006년 앤디 테일러는 또 다시 탈퇴를 선언한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는데, 원래부터 닉 로즈와는 음악적 견해 차가 심해 갈등이 많았다. 물론 이것이 창의적인 충돌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낳을 때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앤디와 닉 사이의 애증에 대해서는 앤디 테일러가 응한 이 인터뷰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이 시기에 앤디가 부친상을 당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미 1985년에 유명인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껴 듀란 듀란을 전격 탈퇴했던 앤디였다. 재결합 후 다시 유명인으로서 사는 것은 앤디에겐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32] 이후 듀란 듀란은 기타리스트 자리는 공석으로 하고 지금까지 4인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탈퇴 원인에는 새 정규앨범 준비 과정에도 있었다. 2005년 9월부터 앤디는 Reportage (임시 앨범명)의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과 모여 작업했었고 2006년에 발매할 계획이었다.[33] 락 스타일의 데모 곡들을 소니 뮤직에 제출했을 때 리드 싱글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고 락보다는 Timbaland와 함께 작업하여 팝 스타일로 제작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2006년 9월에 Timbaland, Nate "Danja" Hills, Justin Timberlake가 프로듀서를 맡기 위해 밴드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앨범 방향의 변화에 앤디는 불만을 갖고 있었고 멤버들과 언쟁이 심해졌다. 세션에도 불참하는 그의 독자적인 행동에 나머지 멤버는 실망감을 드러냈고 [34] 그 해 10월 25일에 듀란듀란 공식 홈페이지에 앤디의 공식 탈퇴를 발표하게 된다.

Dominic Brown (Dom Brown)은 앤디 테일러의 자리를 대신하여 정식으로 세션 기타리스트를 맡게 되었다. (2004년에 앤디 테일러가 아플 때에 그를 대신하여 잠시 공연을 함께 했었다.)



Reportage의 흔적은 지우고 다시 새롭게 앨범 작업을 시작하였다. 2007년 11월에 12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Red Carpet Massacre (RCM이라고도 한다) 를 발매했으며 빌보드 36위, 영국 44위까지 올랐다. 싱글은 Falling Down 한 장만을 발매했고 영국 52위, 빌보드 Hot Adult Top 40 Airplay 차트에서 25위를 기록했다. 눈에 띄는 점은 유럽 국가 중 특히 듀란듀란의 인기가 높은 이탈리아에서 싱글 차트 2위를 기록했다. 'Falling Down'은 슈퍼모델이 재활원에 간다는 콘셉트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 뮤비에서 멤버들은 재활원 의사 역할로 등장한다. #

팀발랜드, 네이트 힐스, 저스틴 팀버레이크를 프로듀서로 기용하여 그들 특유의 힙합, 댄스, 알앤비 비트를 적극 수용한 히트곡을 원했던 목적을 차트 성적으로 보답 받지는 못했으나 Falling Down,[35] Nite-Runner[36] 두 곡은 듀란듀란의 베스트 곡에 포함되어도 괜찮은 곡들이다. 원래 첫 번째 싱글이 될 뻔했고 앨범 수록곡 중 가장 인상적인 Nite-Runner의 싱글과 뮤직 비디오를 제작 안한 부분은 의외의 결정이었다.


파일:2008korea.jpg

2007년 10월 말, 미국 월링포드 지역부터 시작된 RCM 투어는 북미, 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아시아 지역을 순회하였다. 2008년 아시아 지역 투어에 대한민국이 포함되었고 4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두 번째 공연을 치른다. 1989년 첫 번째 공연 이후 19년만의 내한공연이었다. 원래 공연 중간에 Electro Set을 진행하고 싶었는데 공연장 사정이 좋지 못해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렉트로닉 밴드로 변신하여 듀란듀란의 새로운 면모를 느낄 수 있는 Electro Set은 공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앤디가 탈퇴하는 불협화음 속에 앨범 방향을 전면 수정하여 새로 제작해야했고 본인들의 음악 성향과 어울리지 않을 듯한 뮤지션들을 프로듀서로 기용하여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루는데 실패했지만 확실히 임팩트가 있는 한 곡 이상은 건질 수 있는 앨범이다. 그리고 내한 공연 덕분에 Big Thing 앨범과 함께 한국 팬들에게 뜻 깊은 앨범이기도 하다.

  • 앨범 차트: 빌보드 (36위), 영국 (44위)
  • 싱글 차트: Falling Down (영국 52위)


파일:duranmark.jpg
Duran Duran과 Mark Ronson (2008년)

2008년 7월 파리에서 공연했던 Smirnoff ExperienceMark Ronson이 게스트로 초청되어 파트너 관계를 드러냈고[37] 2009년 3월부터 마크 론슨을 프로듀서로 기용하여 공동 제작으로 다음 정규 스튜디오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2.4. 2010년대[편집]



어릴적부터 듀란듀란을 우상으로 여겼던 열성팬이자 거물급 프로듀서로 유명세를 치르던 마크 론슨과 손을 잡고 18개월 동안 앨범 작업을 하였다. 2010년 가을부터 새 앨범 발매 소식을 적극 홍보하기 시작했고 싱글 All You Need Is Now 음원을 12월 8일 아이튠즈를 통해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했다. (무료 다운이기 때문에 차트 기록은 없다) 정규 스튜디오 앨범을 음반으로 발매하기 전에 트랙 리스트를 9곡으로 줄인 디지털 음원을 2010년 12월 21일에 먼저 오픈하였다.

팬들이 새 앨범 수록곡의 뮤직 비디오를 직접 제작하여 우승자를 가리는 콘테스트를 개최하는 신선한 아이디어의 마케팅을 진행했다. Genero TV Contest

14곡이 담긴 13 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의 All You Need Is Now 음반은 2011년 3월 18일부터 4월 4일에 거쳐 아프리카를 제외한 대륙에서 발매되었다. [38] 영국 앨범 차트 11위, 빌보드 200 앨범 차트 29위, (주요 레이블 소속이 아닌 앨범을 대상으로 하는) 미국 인디펜던트 앨범 차트 6위를 기록했다.

첫 번째 싱글 All You Need Is Now의 뮤직 비디오 감독은 Nick Egan이 맡았으며 2011년 미국에서 정식 발매되어 빌보드 성인 팝송 차트에서 38위를 기록했다. 2500장 한정판 7인치 싱글로 발매되었던 두 번째 싱글 Girl Panic은 슈퍼모델 Naomi Campbell이 사이먼 르 봉, Cindy Crawford가 존 테일러, Helena Christensen이 로저 테일러, Eva Herzigova가 닉 로즈, Yasmin Le Bon (사이먼의 와이프) 은 그냥 기타리스트 역할을 연기하는 뮤직 비디오로 관심을 끌었다.[39] 뮤비에서 실제 듀란 듀란 멤버들은 모델들이 숙박하고 있는 호텔의 직원으로 까메오 출연한다. 감독은 Jonas Akerlund이며 촬영 장소는 런던 Savoy 호텔이다. Save A Prayer를 연상시키는 인트로를 가진 Leave A Light On은 3번째 싱글이며 영국에서 라디오 홍보용 CD로 발매되어 빌보드 성인 팝송 차트에서 31위까지 올랐다.

2004년 듀란듀란의 리유니온 투어의 오프닝 공연을 맡은 바 있던 Scissor Sisters의 보컬리스트 Ana Matronic이 랩 보컬로 참여한 Safe (In The Heat Of The Moment)는 Chic 느낌의 디스코 사운드를 들려준다. 흑인 R&B 보컬리스트 Kelis가 보컬로 참여한 The Man Who Stole The Leopard는 2집 수록곡 Chauffeur를 연상시키는 곡이며 영화 The Collector (1965)에서 모티브를 얻었다[40]

여름 바다의 낭만이 생각나는 Mediterranea는 사이먼의 감성적인 코러스, 세션 기타리스트 Dom Brown의 역량이 서정적인 감동을 준다. 또 하나의 서정적인 곡 Before The Rain은 큰 스케일이 느껴지는 비장미가 인상적이다. 바로크 시대의 영국 작곡가 Henry Purcell을 존경하는 사이먼의 취향이 반영된 곡이다.

80년대 초기 듀란듀란의 뉴웨이브 스타일을 여러 업비트 곡들에 차용했다. Blame The Machines, Being Followed, Too Bad You're So Beautiful 등등 존 테일러의 역동적인 베이스 플레이와 세션 기타리스트 돔 브라운의 톤 메이킹과 리듬 악센트의 표현 방식의 조화가 더욱 1, 2집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그들이 데뷔한 이후 30여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세련되게 발전한 신디사이저 음색과 믹싱 환경이 듀란듀란의 사운드를 예쁘게 포장하더라도 뿌리까지 숨길 수 없었다.

프로듀서 마크 론슨은 새 앨범을 제작할 당시에는 음악성의 색깔을 80년대 전성기 시절의 두 정규 앨범 2집 Rio (1982)와 3집 Seven And The Ragged Tiger (1983) 사이에 속하는 사운드를 재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결과물은 포지션을 변경하여 1집과 2집의 경계선에 속하는 사운드였다.

2000년대 초 오리지널 멤버 재결합 이후부터 80년대 전성기 사운드와 트랜드를 얼마나 잘 융합시키느냐에 관한 문제는 자의든 타의든 듀란듀란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숙제였다. 보수적이면서도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팬들의 바람이 지나친 욕심이라 할 수 있을까? 20세기에 유행이 지난 뉴웨이브 뮤직 장르를 계승하여 발전시켜나가길 바라는 팬들의 염원이 뉴웨이브의 화신 (化身)이라는 명예 훈장 속에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과거 전성기 사운드와 트랜드의 융합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1990년대 이후 발표했던 정규 스튜디오 앨범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파일:2012korea.jpg
역사적인 3번째 내한공연이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렸다. (2012.3.12)

Live 2011 (A Diamond In The Mind)는 LP, CD, DVD, Blu-ray 네가지 형식으로 2012년도에 발매되었으며 All You Needs Is Now Tour 중에서 2011년 12월 16일 영국 맨체스터의 MEN Arena에서 열린 공연을 녹화한 것이다. 그리고 2011년 3월 23일 미국 로스엔젤렌스 Mayan 극장에서 열린 공연을 녹화하여 David Lynch 감독 제작으로 Unstaged 뮤직 비디오를 2014년도에 DVD 발매하였다.

  • 앨범 차트: 빌보드 (29위), 영국 (11위)


2014년 3월, 듀란듀란의 새 정규 스튜디오 앨범에 Red Hot Chili Peppers의 기타리스트 John Frusciante가 참여한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작업실에서 작업한 트랙을 듀란듀란과 인터넷 전송하며 공유했으며 듀란듀란 멤버들은 결과물에 만족스러움을 나타냈다. 그가 Paper Gods 앨범에 참여한 곡은 다음과 같다. What Are The Chances?, Butterfly Girl, The Universe Alone, Northern Lights

2014년 3월부터 Mr.Hudson과 런던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 작업을 시작했고 2014년 8월에 Nile Rodgers, Mark Ronson도 합류하였다. 80년대 듀란듀란 전성기 시절을 함께 했던 나일 로저스는 듀란듀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음악 선배였고 마크 론슨은 어릴 적부터 듀란듀란을 우상으로 여겼으며 그들에게 영감을 받은 음악 후배였다. 듀란듀란을 중심으로 제작 파트너로서 한자리에 모여 전작 All You Need Is Now 앨범 못지않은 음악을 기대하게 하였다, Reportage 앨범[41]부터 어시던트, 엔지니어 등으로 인연을 맺었던 Joshua Blair가 새 앨범에서는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2015년 6월 24일에 14번째 정규 스튜디오 앨범 Paper Gods를 아이튠즈에서 디지털 음원으로 미리 판매하였다. Janelle Monáe와 Nile Rodgers가 참여한 첫 번째 싱글 Pressure Off는 2015년 6월 19일에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Music에서 처음으로 발매했고 빌보드 Hot Adult Top 40 Airplay에서 33위까지 올랐다. Nick Egan 감독이 제작한 뮤직 비디오만 보더라도 대중성을 겨냥했음을 알 수 있다. 미스터 허드슨, 나일 로저스, 마크 론슨과 함께 곡을 제작했는데 펑키한 감각이 뛰어난 나일 로저스와 마크 론슨의 음악성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수긍할 수 있는 사운드를 들려준다.

두 번째 싱글로 발표된 발라드 What Are The Chances?는 Davide Rossi와 Josh Blair가 현악 파트를 편곡했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존 프루시안테가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곡이며 2015년 8월에 idolator.com에 최초 공개되었다.

2015년 9월 11일 드디어 Paper Gods 앨범이 정식 발매되었다. Wedding 앨범 이후 22년 만에 빌보드 200 앨범 차트에서 10위까지 오르며 1980년대, 1990년대 2010년대 도합 세 시대에 탑10 앨범을 가지게 된 밴드가 되었다. 영국 앨범 차트는 5위에 올라 9번째 톱 5 앨범이 되었으며 40년 연속 톱 5앨범을 기록한 소수의 밴드들 중 하나가 되었다.

Paper Gods, Only In Dreams, The Universe Alone 3곡에서 보여주는 듀란듀란의 음악적인 역량은 넓이와 깊이에 있어서 장인의 경지에 올랐음을 체감하게 된다.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음악에 접목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온 여러 음악 분야를 통해 쌓아온 내공이 대곡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 표현력의 자유를 얻은 경지에 올랐다.

Paper Gods 앨범 발매 1주년을 맞이하여 Nick Egan과 Snorri Bros가 뮤직 비디오로 제작한 Last Night In The City는 캐나다 출신의 여가수 Kiesza를 피쳐링하였다. You Kill Me With Silence는 허드슨과 첫 번째 작곡 세션의 결과물로 나온 곡인데 로저 테일러의 드럼을 중심으로 아이디어가 나왔다. 80년대 댄스 음악을 듣는 기분이 드는 Danceophobia는 Lindsay Lohan이 간주 부분의 나레이션에 참여했으며 댄스 공포증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역할을 맡았다. 그 외에 곡들 역시 댄스 뮤직 성향의 곡들로 채워져 있다.

듀란듀란 팬이라면 친숙한 그림들이 콜라주 형식으로 제작된 앨범 커버만 보면 이번 앨범에서도 80년대 전성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운드로 가득 차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법도 하지만 앨범 커버가 수록곡의 정체성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2015년 9월부터 시작된 Paper Gods 투어 일정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장기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Paper Gods 시절의 공연 활동에 관한 설명은 글보다는 여기를 통해 소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공연은 역시 백문불여일견이다.

  • 앨범 차트: 빌보드 (10위), 영국 (5위)


2018년 11월부터 다음 정규 스튜디오 앨범을 위해 곡을 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도 듀란듀란과 공동 프로듀서 (Mark Ronson , Erol Alkan, Giorgio Moroder) 체제로 제작하였다. 듀란듀란 결성 4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가을에 발매할 계획을 세웠다. 듀란듀란 최초의 역사는 1978년부터 시작하지만 1980년도에 마지막 멤버로 사이먼이 가입하면서 Fab Five가 결성되면서부터 제대로 된 듀란듀란의 역사가 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5. 2020년대[편집]


그러나 2020년 초 겨울에 코로나가 세계적인 문제로 퍼지면서 존 테일러는 코로나에 감염되었다. 다행히 금방 완치되어 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다. 코로나 악재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스튜디오를 이용할 수 없었고 새 앨범 발매일은 2021년으로 연기하였다. 2021년 역시 데뷔 앨범이 발매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Duran Duran 40' 캐치프레이즈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dd40.jpg


2021년 1월 8일에 David Bowie의 곡을 커버한 Five Years 싱글을 다운로드 음원으로 발표했다. 뮤직 비디오 감독은 Gavin Elder이며 영상에 등장하는 피아니스트는 데이비드 보위와 오랫동안 밴드 활동을 했던 Mike Garson이다. 마이크는 데이비드 보위가 타계한지 5년이 되는 2021년 1월에 데이비드 보위를 추모하는 온라인 콘서트를 열었다. [42] 듀란듀란은 뮤직 비디오까지 제작하여 데이비드 보위에게 존경심을 나타냈다.

5월 18일에 새로운 정규 스튜디오 앨범 Future Past 발매 예정일을 (2021년 10월 22일) 발표했고 5월 19일에 새로운 싱글 Invisible 뮤직 비디오를 유튜브에 최초 공개했다. 뮤직 비디오는 인공지능 Huxley로 제작했다. 5월 23일에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 초청되어 런던에서 Invisible을 공연했으며 Blur의 기타리스트 Graham Coxon이 세션으로 무대 위에 함께 올랐다. 7월 9일 미국 NBC 방송사의 Today Show에서 신곡 Give It All Up을 선보였다.

8월 5일에 More Joy를 디지털 싱글로 발표했다. Duran Duran이 Graham Coxon, Erol Alkan과 잼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곡이며 닉 로즈는 일본의 옛날 오락 게임을 떠올리게하는 사운드라고 하였다. 일본 여성 목소리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에 멤버들이 찬성하여 일본 여성 밴드 Chai가 참여하였다.

8월 31일에 디지털 싱글 Aniversary이 발매되었다. 기념일 제목의 의미가 나타내듯이 2020년과 2021년은 듀란듀란에겐 여러 의미에서 기념할만한 이벤트가 있었다. 2020년은 정식 멤버가 결성된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며 2021년은 정식 데뷔앨범 Duran Duran (1981) 발매와 첫 미국 투어가 이뤄진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19일에는 유튜브를 통해 Aniversary 공식 뮤직 비디오를 방송하였다.

9월달에는 영국에서 연이은 공연을 소화했다. 9월 15일 O2 Institute Birmingham, 9월 17일 Scarborough Open Air Theatre, 9월 19일 Newport의 Seaclose Park에서 열린 Isle Of Wight Festival, 9월 25일 런던에서 열린 Global Citizen Live 등등

9월 24일 새로운 디지털 싱글 Tonight United를 발표했다, 이 곡은 디스코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Giordio Moroder가 작곡했다. 10월 20일 스웨덴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Tove Lo가 피처링한 Give It All Up 싱글을 정식 발매했다. 10월 22일로 발매 예정되었던 15번째 공식 스튜디오 앨범 Future Past가 스탠다드와 3곡의 보너스 트랙 (Velvet Newton, Lauching Boy, Invocation)이 담긴 디럭스 에디션 버젼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파일:2022 rockhall.jpg
- 2022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명단 -
New York Dolls, Duran Duran, kate Bush, Carly Simon, Rage Against The Machine, Eminem, MC5, Lionel Richie, Devo, Beck, Eurythmics, Dolly Parton, Donnie Warwick, A Tribe Called Quest, Judas Priest, Pat Benatar, Fela Kuti

듀란듀란은 2022년 2월 2일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링크 듀란 듀란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전 멤버 앤디 테일러와 워렌 쿠쿠룰로가 오리지널 라인업으로 지명되었고 사이먼 르본은 그들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링크 사이먼 르 본과 존 테일러는 201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후보로 지명된 Roxy Music 소개하기 위해 참석한 바 있었다. 이 행사의 초대 손님이었지만 3년 후인 2022년 5월 4일 드디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그들은 40년 이상의 밴드 역사동안 이뤄낸 업적을 인정 받는 주인공이 되었다.링크

2022년 6월 4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여왕 즉위 70주년을 축하는 Platinum Jubilee 행사에 초대되어 버킹엄 궁전에서 공연하였다. 듀란 듀란은 영국 왕실과 인연이 깊은 편인데 故 다이애나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왕세자비가 살아 생전 가장 좋아하는 밴드였었고 2007년 그녀를 추모하는 콘서트 행사 Concert For Diana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3. 멤버[편집]



3.1. 현재 멤버[편집]




사이먼 르 봉 (르 본)[43]
Simon Le Bon

파일:Simon-simon-le-bon-22935087-601-771.jpg
이름
사이먼 존 찰스 르봉 (Simon John Charles Le Bon)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58년 10월 27일 (65세)
잉글랜드 하트퍼드셔주 부시

신체
188cm
직업
보컬, 작사가, 작곡가
악기
보컬
종교
무종교
재적기간
1980~현재
결혼
야스민 르 봉 (1985 ~ 현재)
가족
딸 앰버 르 봉[44] (1989년)
사진
포토 갤러리

프랑스계 영국인[45]이며, 밴드의 중심 보컬과 작사를 맡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외모와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며, 결정적으로 라이브 실력이 상당하다.[46] 이미 환갑을 넘겼지만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남자판 뱅글스의 Susanna Hoffs라고 보아도 될 듯.[47] 엄청난 미중년...아니 미노년이다. 요트 경주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에는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 아역 모델로 등장했고, 대학에서는 드라마를 전공했다. 링크

포지션이 리드 보컬이라 해외 매체에선 종종 프론트맨으로 소개된다. 사실 영문 위키에서도 리드 보컬 = 프론트맨이라 정의하긴 한다.# 그리고 이 프론트맨리더를 겸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우리나라에선 프론트맨이란 단어를 리더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사이먼이 듀란 듀란의 리더라고 알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음악적 방향을 이끌어 가는 실질적인 리더는 밴드의 공동 창설자인 닉 로즈이며, 존 테일러 또한 그런 점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애초에 듀란 듀란을 시작한 것은 존 테일러와 닉 로즈이고, 사이먼은 이들에 의해 뽑힌 보컬리스트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작 존 테일러가 90년대 후반에 자기가 만든 밴드를 그만 뒀을 때, 닉 로즈와 더불어 터줏대감처럼 밴드를 꾸준히 지킨 것은 사이먼이었고, 게다가 연장자로서 든든한 맏형 노릇도 톡톡히 했기 때문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뭔가 리더스러운 이미지가 있는 듯하다. 사실 80년대 중반 듀란 듀란 해체설이 돌았을 때 존 테일러를 설득해 밴드에 남도록 한 게 사이먼이었다.
2집 리오 수록곡인 'Hold Back The Rain'은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방황하는 존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렇듯 동료의 멘탈까지 챙겼다.
공교롭게도 그는 3형제 중 맏이로 밴드에서뿐만 아니라 친형제 중에서도 맏형이다.

듀란 듀란의 보컬이 된 계기는 전 여친의 소개였다고 한다. 원래 듀란 듀란의 보컬이 탈퇴하여 보컬 자리가 공석이 되자, 전 여친이 그에게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했다 한다. 그는 오디션을 보는 날 틈틈이 쓴 시를 적은 노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노트에 기록된 시가 나중에 듀란 듀란 음반에 실린 가사가 되었다. 참고로 그가 쓴 가사는 난해하기로 악명이 높은데, 이는 짐 모리슨이 쓴 가사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사의 주제도 범상치가 않았는데, 데뷔곡인 'Planet Earth'감각적인 뮤직비디오 영상과는 달리, 지구 종말 후 상황을 다뤘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폭탄이 떨어져도 춤을 추는 밴드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빌보드 핫 100 1위를 했던 The Reflex는 그야말로 의식의 흐름으로 써서 자기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1989년 내한 공연을 우리나라 지상파에서 방영해 줬을 때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반사작용이라는 식으로 건전가요스럽게 개사당한 자막을 내보내기도 했으나, 보통 무의식이 반영되는 행동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여담으로 2021년 더 가디언 기사에 누군가가 맥주 주문 목격담 댓글을 달아 소소한 화제가 되었다. 작성자는 몇 년 전 파리에서 사이먼이 기네스 2잔과 라거 한 잔, 그리고 안주로는 밀전병 과자의 일종인 파파덤을 주문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으며, 여기에 나도 파리에서 그를 봤다는 대댓글이 달렸는데, 사이먼이 맥주를 주문했다는 것 자체에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원래 사이먼 르 봉 하면 비싼 와인만을 즐긴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남들이랑 똑같이 맥주를 마시고 소박한 안주를 곁들이며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 영국인 종특 어디 안간다는 얘기다.


존 테일러
John Taylor

파일:jt.jpg
이름
나이젤 존 테일러 (Nigel John Taylor)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60년 6월 20일 (63세)
잉글랜드 웨스트미들랜즈주 솔리헐

신체
188cm | 70kg | B형
직업
베이시스트,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악기
베이스 기타, 보컬, 기타
종교
무종교[48]
재적기간
1978~1997, 2001~현재
결혼
아만다 드 카드네[49] (1991 ~ 1995)
젤라 내쉬[50] (1999 ~ 현재)

가족
딸 애틀랜타 누[51] (1992년)
솔로활동
미디어
사진
포토 갤러리

1978년, 대학동기 스티븐 더피(Stephen Duffy)와 밴드를 최초로 조직했으며, 얼마 후 영국의 의무교육을 마친 만 16세의 소꿉친구 닉 로즈가 가세했다.[52] 듀란 듀란이라는 밴드명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Girls In Film을 Girls On Film으로 제안하는등 여러모로 타고난 센스를 지닌 멤버로서, Fab5 이전 초기엔 기타리스트였으나 곧 베이시스트로 전환했다.

본래 일반 대중들에게는 존재감이 약한 것이 베이시스트이지만, 이 경우는 애초에 창단 멤버인 데다가, 빼어난 외모까지 더해져 듀란 듀란 하면 존 테일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80년대 초 우리 언론에서도 리더는 닉 로즈이지만, 스타는 존 테일러이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옛날 기사이다 보니 훌쭉 큰 키에 여자를 무색케 하는 섬세한 얼굴, 화사한 의상, 구름 같은 헤어 스타일 같은 예스러운 표현이 눈에 띈다.

그는 일찌기 비쥬얼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며 다른 정치색이 짙은 밴드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음악자체에 포커스를 두고 즐기는 심미적 연유의 ‘Escapism’으로 듀란듀란만의 차별화된 철학과 방향성을 확고히 했다. 밴드를 만든 마스터마인드답게, 그 당시 음악계의 ‘외모와 실력은 반비례한다’는 식의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초기 인터뷰에서 “The looks’re important”라는 용감한 발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당시 영국 뮤직비지니스계의 비쥬얼적 어필의 결여를 지적하며 자신들의 방향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음악적 자신감에서 비롯된 신념에 찬 이 신인의 초기 인터뷰들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첫번째 링크 비디오의 0:15에서 시작되는 이 질문에서 죤이 “but the music is main”이라고 하기 전, “The looks’re important”라고 할때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사이먼의 표정이 재미있다.링크 링크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저평가받은 인물 1순위로 꼽힌다. 생각보다 잘 연주하는 정도가 아니라 천재성이 엿보이는 비범한 록 베이시스트라 할 수 있다. 듀란듀란과 파워스테이션의 앨범을 진지하게 들어보면 베이스 라인과 리듬을 만드는 감각이 비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드록, 헤비메탈 계열 연주자들도 듀란듀란의 음악은 싫어할 지라도, 존의 빼어난 베이스라인과 연주력 만큼은 인정할 정도이다. 베이시스트 지망생들은 존 테일러의 음악을 꼭 들어보시길 바란다. 듀란 듀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본인의 연주 레슨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링크

원조 너드답게 다방면의 덕력을 갖고있는데 그의 제임스 본드 덕력으로 007 시리즈 중 하나인 007 뷰 투 어 킬의 주제곡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우연히 파티장에서 만난 영화 제작자 Albert R. Broccoli에게 "주제곡을 부를 좋은 가수를 못 찾았느냐"고 지나가듯이 던진 제안이 시초가 되었다. 이 제안을 흥미롭게 여긴 제작자는 존 배리를 듀란 듀란에게 소개하여 협업이 성사됐다. 이 곡이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성공한 덕후. 훗날 존 배리는 존 테일러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그는 나보다 내가 한 일을 더 잘 안다"고 즐거워했다. 링크

남다른 감각과 식견은 몇가지 파이오니어적 결과로도 보여진다. 더 파워스테이션의 Some Like It Hot 뮤직비디오에서는 클라인펠터 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트랜스젠더 모델인 캐럴라인 코시를 직접 캐스팅해서 이 뮤직비디오를 트랜스젠더가 출연한 최초의 뮤직비디오로 남겼다.#[53]
이 뮤비가 2015년에 유튜브 공식 채널에 올라왔을 때는 뮤비 설명에 모델이 트랜스젠더란 언급이 있으나, 80년대 당시엔 지금처럼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미지를 내세우고자 일부러 소수자를 캐스팅하던 시절이 아니었고, 오히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당사자에 대한 예의였다. 이미 유어 아이즈 온리 출연 직후 아우팅을 당해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던 그녀였다.[54] 그래서 캐럴라인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은 그녀의 입장을 존중해 대외적으로는 비밀에 붙여졌으나, 기레기들이 그녀가 존과 앤디를 속이고 뮤직비디오에 캐스팅된 것이라고 주작을 하자, 캐럴라인 본인이 해명했다. 링크 존 테일러를 비롯한 더 파워스테이션 멤버들은 그녀를 완벽하게 존중해 주었고, 촬영은 매우 즐거웠다고 한다.[55]

또한 mp3 상용화 되지 않았던 시절, 자신의 솔로 활동의 음악판매에 mp3를 이용하여 최초로 mp3를 사용하여 음악을 판매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이로인해, 그는 2009년, UCLA Engineering’s 40th Anniversary of the Internet 심포지엄에서 강연을 갖기도 했다. 링크

2012년에 회고록을 냈다. [56] 그의 너드 기질에서 비롯된 박학다식함과 그만의 유머가 돋보이는 이 회고록은 전성기의 록앤롤 라이프 스타일과 갱생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특유의 예민함과 섬세함으로 수놓아진 어휘로 자신을 형성하게 했던 어린시절, 가족, 배경 등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들려준다. 이것은 2020년 롤링스톤이 선정한 위대한 록 회고록 50 중 13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링크 [57]

또한 2013년에 'Experience, Strength and Hope Award'를 수상하기도 했는데, 이 상은 중독에서 회복되는 과정을 진솔하게 고백한 회고록을 대상으로 한다. 링크 그 연장선상에서 중독 치료를 돕는 자선 단체 일을 맡고 있으며#, 강연도 나간다고 한다.

외동아들이라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는데, 십대 시절에 만난 닉 로즈를 비롯해 듀란 듀란 멤버들을 형제처럼 여긴다고 한다.링크

본인의 말에 따르면 학창시절엔 스포츠와 담을 쌓고 내성적인 너드였으며 잘생기지도 않아서 듀란 듀란 활동을 하기 전에는 모솔이었다고 한다.[58] 소위 마이너스 시력인 심한 근시라 도수 높은 안경을 썼는데, 초기 밴드 오디션을 거쳐간 한명인 Elayne Griffiths(럼러너 식구 중 한명이자 닉의 당시 여친, 후에 Alex Sadkin의 연인이 됨)의 권유로 콘택트 렌즈를 착용하자 환골탈태했다고. 여신강림 여주와 비슷한 케이스 다만 렌즈 분실 사건을 계기로 라식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데빌 메이 크라이의 캐릭터인 단테의 모델이라고 한다. 링크
일본 소녀만화가 시미즈 레이코의 초기 단편들에 빠짐 없이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한다.


닉 로즈
Nick Rhodes

파일:Nick-0018.jpg
이름
니콜라스 제임스 베이츠 (Nicholas James Bates)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62년 6월 8일 (61세)
잉글랜드 버밍엄

직업
키보디스트, 작곡가, 프로듀서
악기
키보드
종교
무종교
재적기간
1978~현재
사진
포토 갤러리

11세 겨울, 13세였던 존 테일러와 만난 것이 현 듀란 듀란의 시초가 되었다. 존 테일러에 따르면, 너드였던 자신과 달리, 닉은 이미 여자 친구가 있었으며 둘 다 별 용기도 필요 없이 쉬폰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창단 멤버이며,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키보디스트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존 테일러와 함께 비쥬얼과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듀란 듀란의 이미지에도 공헌했다. 80년대 후반까지는 스타일리스트도 없이 자체적으로 의상을 코디했다고 한다. #
듀란 듀란이란 밴드 명칭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59]

창단 멤버이자, 밴드의 방향을 정하는 역할을 하다 보니, 80년대 초 우리 언론에서는 닉을 리더로 소개하기도 했다. #

2004년 <Astronaut> 앨범 투어를 계기로 멤버들이 'The Controller'란 별명을 지어 주었다. 2021년, 듀란 듀란 공식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생일 축하 메시지에 'our favourite Controller'라고 언급되어 있다.

존과 마찬가지로 외동아들이다. 두 사람은 십대 시절 쌍둥이와도 같은 기묘한 취향의 일치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젊은 시절엔 굵직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메이크업을 한 포토제닉한 외모로 독자적인 팬층이 두터웠다. 지금은 백발이라 앤디 워홀을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앤디 워홀을 자신의 멘토로 여기며 존경하고 따랐으며, 워홀 생전에 친분도 있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처럼 실제로도 이성적인 면이 있었는데, 80년대 초 서구권에 코카인이 만연했을 때[60]에도 같은 멤버인 드러머 로저 테일러[61]와 더불어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던 멤버였다. 21살에 더 이상 마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자신에게 특별한 문제가 일어났던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통제불능 상태가 될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고 링크[62] 닉의 고집불통 bossy 기질과 마약을 혐오하는 성향은 음악적 견해 차로 듀란 듀란을 다시 탈퇴한 앤디가 2008년 출간한 회고록, 그리고 존이 2012년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 드러난다.[63] 여담으로 20대 후반에는 이미 금연했다. 링크[64]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아이라인을 그리는 메이크업을 고수한다. 그런데 드물게 아이 라인이 없는 사진도 발견된다. 이 사진은 40대 때 모습이다. 그리고 메이크업이 연한 2019년 사진은 50대 후반 모습이다.[65] 쌩얼이거나 메이크업이 연할 때는 정반대로 온화한 분위기를 풍긴다.

1984년에 미국인인 백화점 상속녀이자 모델 출신인 Julie Anne Friedman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지만, 1992년에 이혼했다. 이후 재혼하지 않았다.


로저 테일러
Roger Taylor

이름
로저 앤드류 테일러 (Roger Andrew Taylor)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60년 4월 26일 (63세)
잉글랜드 버밍엄 네철스

직업
드러머, 작곡가
악기
드럼
종교
무종교
재적기간
1979~1986, 1994~1995, 2001~현재
사진
포토 갤러리

퀸의 로저 테일러와는 동명이인이다. 듀란듀란의 로저 테일러도 나름 유명한 인물이다. 라이브 연주시 진지한 표정으로 박진감 있게 드러밍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80년대 Fab 5 전성기를 누리면서 쉴 틈 없는 바쁜 일정에 지쳐 음악계를 오랜 세월 떠났었지만 2001년 다시 듀란듀란에 복귀하여 어느덧 20년을 멤버들과 함께 하고 있다. 튀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나 이비자에서 DJ셋으로 무대에 서기도 하는 의외의 모습도 있다. 아스톤 빌라의 팬

이들을 대표하는 모습 중 하나인 머리에 두른 수건은 로저 테일러의 순간적인 아이디어로 시작됐다. 1981년에 공연을 앞두고 탈의실에 있었을 때 너무 더워 머리에 땀이 흐르자 로저가 즉석에서 수건을 둘렀고 다른 멤버들도 따라했다고 한다. 펀코에서 출시한 듀란 듀란 피규어는 이 시절 모습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디어를 낸 로저만 머리에 수건이 없다.

이외 라일락 타임 리더로 활동중인 스테판 더피도 극 초기 멤버였다. 다만 EMI와 계약하기도 전에 빠져나가서 Fab 5에 속하진 않는다.


3.2. 전 멤버[편집]




앤디 테일러
Andy Taylor

이름
앤드류 아서 테일러 (Andrew Arthur Taylor)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61년 2월 16일 (63세)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 타인머스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악기
기타, 보컬
결혼
Tracey Wilson (1982~현재)
재적기간
1980~1986, 2001~2006
솔로활동
미디어
사진
포토 갤러리

1980년, 음악잡지에서 기타리스트를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듀란 듀란의 기타리스트로 합류하여 전성기인 Fav 5 시절을 함께했다. 1986년 노토리어스 앨범 직전에 탈퇴했다가 2001년에 재합류했으나, 2006년에 이미 만들어 놓은 앨범이 업계의 사정으로 엎어지자 다시 탈퇴했다.
2008년에 회고록을 냈다.
현재 이비자 섬에 있는 스튜디오 시설이 갖춰진 본인 소유 호텔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이 기사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린 것이라 재정 관련 얘기가 많은데, 나름 똑부러지게 관리하여 빚 걱정 없이 잘살고 있는 듯하다. #


워렌 쿠쿠룰로
Warren Cuccurullo

이름
워렌 브루스 쿠쿠룰로 (Warren Bruce Cuccurullo)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생
1956년 12월 8일 (67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직업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악기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 보컬
재적기간
1986~2001
솔로활동
미디어
사진
포토 갤러리

Missing Persons 와 Frank Zappa 밴드를 거친 두뇌파 기타리스트로, 1993년 듀란듀란의 제 2의 전성기를 열어준 The Wedding 앨범의 Ordinary World와 Come Undone의 메인 작곡가이자 인상적인 기타 리프와 솔로의 주인공이며 프로그레시브 록에서 신스팝까지 장르적 스펙트럼이 가장 다양했던 멤버이다.


스털링 캠벨
Sterling Campbell

이름
스털링 캠벨 (Sterling Campbell)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생
1964년 5월 3일 (59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직업
작곡가, 드러머
악기
드럼
재적기간
1988~1991

세션 드러머 출신. 데이비드 보위신디 로퍼의 투어 세션으로 오래 활동한 실력파로 토니 톰슨이 병으로 빠진 Chic의 드러머로 합류한 적도 있다. 현재는 미국의 고참 뉴웨이브 밴드인 The B-52's와 소울 어사일럼[66]의 드러머로도 활동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파룬궁을 수련중이다. 90년대에는 베이징까지 가서 파룬궁 진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타당하고 진압된 적도 있는 모양.


4. 음반 목록[편집]






5. 뮤직 비디오[편집]



* 정규 뮤직비디오 소개 및 감상 - 발매일 순서대로 정리 (PC) (모바일)
* 정규 뮤직비디오 감상 - 곡명 순서대로 정리 (PC) (모바일)


6.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 기록[편집]


  • 01위 - The Reflex (1984) [67] A View To A Kill (1985) [68]
  • 02위 - The Wild Boys (1984)[69] Notorious (1986)
  • 03위 - Hungry Like The Wolf (1982)[70] Union Of The Snake (1983) Ordinary World (1993)
  • 04위 -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 (1983) I Don't Want Your Love (1988)
  • 07위 - Come Undone (1993)
  • 10위 - New Moon on Monday (1984)
  • 14위 - Rio (1982)
  • 16위 - Save A Prayer (1985)[71]
  • 22위 - All She Want Is (1988)
  • 39위 - Skin Trade (1987)
  • 45위 - Too Much Information (1993)
  • 52위 - Electric Barbarella (1997)
  • 64위 - Violence Of Summer (Love's Taking Over) (1990)
  • 70위 - Meet El Presidente (1987)
  • 72위 - Do You Believe In Shame? (1989)
  • 89위 - (Reach Up For The) Sunrise (2004)

7. 비평[편집]


이들이 초기에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던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7.1. 외모로 인한 저평가된 실력[편집]


첫번째는 멤버들의 수려한 용모 덕분에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게 되자, 음악평론가들이 이들은 밴드로서 인정하지 않고 1970년대의 베이 시티 롤러스, 1990년대의 테이크 댓, 21세기 초의 JLS[72], 더 원티드와 같은 보이밴드 계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존재로만 분류했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음악평론가들의 마초성, 꼰대 기질로 인해 틴팝에 대한 인식 자체가 좋지 않았다. 흔히 젊고 상큼한 보이밴드에 비유되는 건 칭찬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듀란 듀란의 경우는 그냥 꽃미남들이 밴드 콘셉트에 따라 악기 잡고 화보 찍었다고 오해받아 왔기 때문에 모욕에 가까운 분류였다. # 그런데 정작 멤버가 폼으로 악기를 든 밴드는 따로 있었다.

물론, 테이크 댓 같은 경우는 게리 발로우의 작사 작곡 실력이 높은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저 계보에 들어가는 인물들은 당대의 10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는 것을 빼면 음악적으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이 계보를 보면, 1970년대 팝록 밴드인 베이 시티 롤러스를 제외하면 연주를 하는 밴드가 아니다. 명색이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록밴드임에도, 록의 계보에는 넣지 않고 댄스가 중심이 된 보이밴드 계보로만 묶는 것은 이들을 록밴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1980년대 초 매체 기사 중에는 존 테일러가 연주보다는 옷에 신경쓴다고 말했다는 단순 가십성 주작 기사도 있었다 한다.

더군다나 애초에 듀란 듀란은 자체적으로 멤버를 모아 결성한 밴드지, 회사에서 기획한 밴드가 아니었다.[73] 이미 멤버들끼리 정한 콘셉트와 음악적 방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음악을 만들고 스타일링을 하여 지역 라이브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서서히 팬층을 다져 왔으며, 결국은 음반사 계약으로 연결돼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1978년에 밴드를 결성한 후 데뷔 앨범을 내기까지 3년이 걸렸다.

즉, 회사에서 정해준 콘셉트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들이 콘셉트를 정해 회사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이먼 르본은 2011년 The Quietus 인터뷰에서 "더 원티드 등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멤버가 모아진 상업적인 그룹이고 멤버들은 퍼포머일 뿐이다"라고 불쾌해했다.[74] 한 마디로, 우리나라로 치면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자기네들이 직접 만든 음악으로 활동하던 인디 밴드가 흥해서 대형기획사에 들어간 것인데, 멤버들이 너무 잘생긴 나머지 기획사에서 비쥬얼이 뛰어난 사람들만 일부러 뽑아서 악기 가르치고 밴드 콘셉트로 제작한 아이돌이라 오해한 것과 비슷하다.[75] 이렇다 보니 이들이 연주자로서 뚜렷한 정체성과 주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 그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이들이 라이브 연주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2011년 The Quietus 인터뷰에서 드러나는데, 팀발랜드와의 협업에 대해 존 테일러는 부정적으로 언급한다. 그 이유는 힙합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팀발랜드가 실제 연주 레코딩에 대해 감을 못 잡아서라고 한다.[76]

2011년 The Quietus 인터뷰에서 이들이 해명한 바에 따르면, 애초에 10대 소녀들을 겨냥한 음악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 팬층을 확보한 예술 지향적인 록 밴드를 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Girls on Firm 같은 곡은 포르노 산업을 풍자하는 의미였고[77], 그래서 뮤직비디오도 애초엔 성인들이 드나드는 클럽에 상영할 목적으로만 제작했으나, 나중에 MTV를 통해 방영되면서 대박을 친다.

이 때문에 듀란 듀란은 1980년대의 흔한 비디오형 스타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지금은 아이돌만 해도 워낙 경쟁이 치열해서 외모는 물론 가창력과 춤그리고 인성까지 완벽한 인재가 요구되지만, 저때는 MTV 초창기라 뮤직비디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기 쉬웠는데, 더군다나 'Girls on Firm'은 야한 장면이 있는 뮤직비디오였으니 노이즈 마케팅으로 뜬 밴드라 인식되기 쉬웠던 것. 이에 대해 사이먼 르봉은 뮤직비디오 논란이 자기가 쓴 가사의 메시지를 가렸다고 아쉬워했다.

사실, 이들의 음악적 뿌리는 록시 뮤직 같은 글램 록 밴드[78]펑크 록에 있었다.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이들의 화려한 비쥬얼도 여기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너무 잘생겨서 오히려 손해본 밴드...


7.2. 정치적 성향에 대한 오해[편집]


두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인데, 이들이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리오 뮤직비디오로 인해 요트 유람을 즐기며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는 토리당 지지자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당시 영국은 마가렛 대처영국 보수당 집권 시기였고 마가렛 대처는 고질적인 영국병을 고치기 위해 강경한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의 피해가 컸는데, 듀란 듀란이 데뷔하던 시절은 기득권에 반기를 든 펑크 록과 같은 장르가 힘을 얻던 시기였다.

상기에 있는, 듀란 듀란이 토리당 지지자라는 이미지가 씌인 것은 음악 저널리스트인 폴 몰리(Paul Morley)가 1982년에 쓴 글 때문에 생긴 프레임인데, 그 이전 해인 1981년 버밍엄 폭동 당일 이들이 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참고로 폭동 기간인 1981년 7월 11일은 이들의 투어 일정이 잡혀 있었다. #[79]

이에 대해 29년 후 멤버들이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해명했다. 사이먼 르봉은 마리 앙투와네트의 망언으로 잘못 알려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를 언급하면서, 당시엔 자신들의 일에 집중해야만 했고, 폭동에 쓰는 에너지를 다른 곳에 돌리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한다.[80] 그게 그 시절 상황에 대해 듀란 듀란이 대응한 핵심적인 부분이었고 훗날 그들의 대응에는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다며, 저널리스트가 쓴 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닉 로즈는 It's absolutely apocryphal to suggest that we didn't care what was going on.(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났든 상관하지 않았다고 암시한 그 글은 명백한 거짓이다)라며 좀 더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버밍엄이 자기네 고향인데 그럴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한편, 존 테일러는 당시에 자기네들이 좀 더 저항적이지 않았던 것이 사람들을 실망시켰던 것 같다고 말했다. 링크

여담으로 1980년대 초 이들은 당시 영국의 세율로 인하여 무려 70%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절세를 원한 회사 측의 의도와 맞물려 1983년에 1년간 거주지를 프랑스로 옮겼지만, 그럼에도 50%의 세금을 꼬박 꼬박 납부했다. 참고로 2021년 현재 OECD 최고 소득세율 평균은 40%대이니 저 시절 영국의 세율이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시절 세금 망명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프랑스 혁명 당시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호화판 생활과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대표격으로 비난받던 마리 앙투와네트도 날조의 희생자였다.


7.3. 여러 장르의 폭 넓은 수용으로 인한 오해[편집]


세번째는 듀란 듀란은 여러 장르를 폭 넓게 수용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섹스 피스톨즈펑크 록Chic디스코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지금에는 이런 크로스오버가 당연시되지만, 당시의 비판만 해도 록 음악도 아니고 댄스 음악도 아니고 도 아닌 정체성없는 음악이라고 비판받는 요인이었다.[81]링크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1980년대 서구권에서 크로스오버에 대한 배척은 음악적 정체성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헤게모니 다툼과도 같은 것이었다. '디스코 폭파의 밤' 문서에도 나오듯이, 백인 록 매니아들 사이에서 흑인 문화에서 파생된 디스코는 눈엣가시였고 그 열풍을 이끈 Chic은 유독 미움을 받았는데, 록커들이 디스코 팬임을 자처하며 이를 적극 도입하는 게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당장 '디스코 폭파의 밤'에 대한 나일 로저스의 반응만 보더라도 "이건 마치 나치서적 소각과 같다. 이젠 록 음악과 재즈의 고향 미국에서 디스코라는 단어도 말하기 뭐하게 됐군."이라며 통탄하기도 했다. 결국 미국의 경우 1980년대의 글램 메탈(혹은 팝 메탈)이 명맥을 이었긴 했지만 이들의 안티테제인 얼터너티브 록(혹은 그런지)이 메인스트림에서 최후로 인기를 얻으며 록음악의 시대를 종언했고, 영국 역시 다르지는 않아서 1980년대 초 뉴웨이브의 인기는 있었지만 이도 유행이 식었고 1990년대 들어 브릿팝 전쟁 시기를 거쳐 록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최후의 시대를 지나며 그 세가 작아지고 만다.

대한민국에서는 록음악이 비주류라 록커 하면 유행에 상관없이 고고하게 음악적 소신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있었고, 특히 너바나커트 코베인으로 인해 그런 이미지가 강한데[82], 영미권에서는 1970년대 말 디스코 폭파의 밤 사건은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인한 광란이라 평하며 현재 시점에선 록 매니아들에 대한 평가가 좋지만은 않다고 한다. 해당 문서에도 나오듯, 1980년대 이후 이후 빌보드 차트에서 흑인 음악의 강세가 시작되어 결국 21세기 들어 힙합과 컨템포러리 R&B가 대세가 된 게 이에 대한 반란이란 해석도 있을 정도. 크로스오버 뮤직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고 레트로 리바이벌의 흐름으로 인해 2020년에는 오히려 디스코가 재조명됐고, 따라서 해당 시대의 음악이었던 듀란 듀란의 음악도 현재의 트렌드와 맞닿아 있다는 평가도 있다.

디스코적인 색채가 짙은 이들의 음악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블러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Parklife 앨범의 수록곡 'Girls & Boys'의 베이스 연주는 듀란 듀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베이시스트인 알렉스 제임스가 밝힌 적이 있었다. 여담으로 2011년 GQ 어워드에서 듀란 듀란이 평생 공로상을 받았을 때 시상자로 나온 사람이 알렉스 제임스이다. 영상

7.4. 결론[편집]


한편, 이와 관련해 해외의 어느 게시판에서 토론이 벌어진 적도 있다. 링크 토론 발제자는 더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가 듀란 듀란은 우리가 싫어한 1980년대의 모든 것을 대표한다(“But they represented everything we hated: the whole glamorous 80s, consumer bullshit; this horrorshow that we were up against.")고 발언한 것을 인용하며, 듀란 듀란은 당시에 왜 경멸을 받았느냐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일단 주류 대중들, 심지어 학부모님들 사이에서는 반응이 좋았으나, 미디어에 워낙 많이 노출되었고 관심의 초점도 음악보다는 외모에 맞춰져 있다 보니 취향이 다른 사람들(주로 백인 남성 메탈 팬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있었다 한다. 참고로 당시는 유튜브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라서 자기가 원하는 뮤직비디오나 곡을 언제든지 검색해 감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MTV에서 이들의 뮤비를 줄창 틀어대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봐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MTV의 수혜자란 부정적 인식이 생긴 것이다. 다만 이런 남성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숨듣명 취급을 받아서 겉으로만 싫어하는 척하다 결국은 팬이 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겉으로는 안티였다 뒤늦게 입덕한 남성팬들의 참회의 댓글은 듀란 듀란 관련 기사 댓글창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또한 이들을 유명하게 만든 Rio의 뮤직비디오가 이들의 대표 이미지가 되어 일종의 선입견이 만들어진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음악과 뮤직비디오는 잘 만들어졌지만 앞서 언급된 부유층 이미지로 인해 마거릿 대처를 위한 밴드라는 프레임이 씌워졌으며, 가사 자체가 무거운 내용은 아니라서 별 내용 없이 보기 좋은 이미지만 선사한다는 선입견이 씌워졌다. 그리고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한 The Reflex는 가사 자체가 아예 맥락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가 더해졌다.

하지만, 이는 초기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들로 인한 선입견으로, 앞 항목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사이먼 르봉이 세상을 떠난 친구를 기리며 가사를 쓴 3부작처럼 진지한 내용을 담은 곡들도 있다. 다만, 그중 2부작인 'Ordinary World'[83]를 제외하면 대중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 그 점이 잘 알려지지 않은 편.[84]

또한 듀란 듀란이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협업한 곡인 'Falling Down'은 뮤직비디오는 알코올 중독 치료소에서 패션쇼를 벌이는 셀럽 여성 콘셉트이며 멤버들은 이곳의 의사로 등장하는데, 가사의 내용은 모든 것을 잃었다가 추락한 한 남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셀프 디스적인 성격이 있다. 뮤비에서 의사로 등장하는 멤버들이 환자 앞에서 이 가사로 공연을 하니 본인들의 흑역사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내용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리오 뮤비와는 달리 매체 노출 회수가 적어서 인지도가 낮다.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이들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2집 리오도 요트, 샴페인, 고급 양복 같은 화려한 이미지로만 수놓아진 앨범이 결코 아니었다. 이 앨범의 수록곡인 'Hold back the rain'은 앨범 녹음 당시 폭음과 코카인에 빠진 존 테일러를 걱정하던 사이먼 르본이 존 테일러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으나, 가사에서 저격 대상이 된 당사자인 존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하고 은유적인 가사 탓인지 그냥 춤추기 좋은 댄스팝처럼 인식되어 왔었다.[85]

어쨌든 수많은 헤이터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은 팝과 록계에 나름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는 뉴 메탈 밴드인 의 조나단 데이비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유튜브에 조나단 데이비스가 커버한 'The Chauffeur'가 올라와 있다(...) 링크

8. 여담[편집]



  • 음악 실력도 실력이지만, 밴드 구성원들의 무척 잘생긴 외모로 한때는 소녀팬들 엄청 끌고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베이스 존 테일러는 후리후리한 만화같은 잘생김, 키보드 닉 로즈는 차가운 잘생김, 보컬 사이먼은 야성적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잘생김, 로저 테일러의 부드러운 잘생김, 앤디 테일러의 앳되고 친근한 느낌의 잘생김 등등.[86] 심지어는 얼굴 때문에 실력이 덜 평가받는 느낌이 있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 사실 그들의 여러 노래를 들어 보면 스킬과 스타일을 갖춘 창조적인 뮤지션임을 알수있다.


  • 1988 올림픽 이후 팝스타들의 내한공연이 이어졌는데 듀란듀란은 1989년 이후 여러번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다. 1980년대를 주름잡는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다보니 이들을 좋아하던 국내 소녀팬들도 꽤 많았고, 그 중에는 아예 락음악에 심취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국내 뮤지션 중에서는 소찬휘윤상[87], 방시혁 등이 듀란 듀란의 상당한 팬으로 알려져있다.

  • 모던 토킹의 국내 발매 음반에 포함된 당시 평론가가 써놓은 글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여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듀란 듀란이었다고 한다. 2위는 A-ha, 3위는 Wham!, 4위가 그 조사를 언급한 이유인 모던 토킹.


  • 스피드 그래퍼 오프닝에 이전에 발표한 "Girls on Film"이 쓰이기도 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인물 사미르 듀란을 연속으로 클릭하면 "듀란이라고요. 듀란, 듀란! (I've told you my name it's Duran, Duran!)"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이 그룹 듀란듀란의 패러디이다. 또 듀란 듀란의 대표곡들의 제목을 패러디한 "제발, 어서 말씀해 주세요. (Please please, tell me now.)"[88], "제가 알아둘 게 있습니까? (Is there something I should know?)"라는 대사도 있다.

  • 자우림의 20세기 소년소녀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20세기를 빛낸 비틀즈마돈나 등이 나오는데 "듀란 듀란의 노래" 라는 가사도 나온다.

  • 015B가 2012년에 발표한 디지털 싱글 '80'에서도 "듀란 듀란과 컬처 클럽[89]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너희들은 모를걸"이란 가사가 나온다. 제목 그대로 1980년대 뮤지션들과 음악에 대한 추억을 담은 노래다. 다음 가사가 "지금은 없는 마이클 잭슨"

  • 러시아 락밴드 키노의 리더이자 작곡을 담당한 빅토르 초이의 생전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당시 서구 락밴드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 중 대표로 제시된 게 듀란 듀란이다.

  • 토르 : 라그나로크에서 브루스 배너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 듀란 듀란의 Rio 앨범재킷이 그려져 있다. 브루스꺼가 아니라 토니꺼라서 좀 낀다

  • 닥터 후 뉴 시즌 7 8화에서 소련 과학자가 Hungry Like The Wolf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 1994년식 로버 메트로의 특별사양 리오/리오 그란데의 광고는 듀란 듀란의 Rio를 사운드트랙으로 삼았으며, 구매 고객에게 사운드트랙을 나눠 주는 특전도 주어졌다.#

  • 삼립식품이 1980년대에 만든 빵중에 듀란듀란이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이름을 딴듯 하다. CM은 킹콩을 패러디했다. 1985년 광고라 영상 상태가 흐리지만 내용을 볼 수 있다.


  • 스타워즈 이후 팬픽션 문화를 부흥시킨, 최초의 밴드로 꼽힌다. 사이먼 르 봉은 자신과 존 테일러를 커플로 엮은 팬픽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경악했다 한다. 심지어 이 팬픽에는 그의 평생 동반자인 야스민 르 봉까지 등장했는데, 사이먼이 야스민 몰래 존과 바람을 피우는 설정이었다고(...) 그런데 본인들이 실제로 무대에서 키스를 하긴 했다(...) 2011년 인터뷰에서 사이먼은 이와 관련하여 미혼 시절 어떤 여성과 있었던 일화를 털어놨는데, 그 여성은 자신을 흥분시키려면 다른 남성과 진한 키스를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다. 링크 그런데 2003년 인터뷰에서 야스민 르 봉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는 존이 자기와 사귀려 했던 적이 있었다 한다.링크 하지만 존이 다른 모델에게로 관심을 돌려 다행히도 삼각관계는 피했다. 존은 이후 슈퍼 모델 르네 시몬센과 80년대 말까지 동거하였다.

  • 이탈리아에서 유독 인기가 높은 밴드이기도 하다. 미국 차트 성적이 하락했을 때에도 이탈리아 차트에선 건재했다. 링크 이는 유럽이 나라마다 음악 취향이 다르기 때문인데, 유로피언 댄스곡이 강세인 이탈리아였기에 이 점이 롱런의 비결이기도 하다.

  • 더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가 이들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그가 혐오한 1980년대의 모든 것(호사스러움, 허튼 소리 등등)을 상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링크 본인의 말에 따르면 슬프게도 듀란 듀란은 더 큐어의 팬이라 자신의 공연에 자주 왔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뭔가 어색한 분위기로 닉 로즈에게 사인을 해 주는 로버트 스미스의 인증샷이 있다. 그런데 2015년 기사를 보면 로버트 스미스가 이들이 출연하는 락 페스티벌을 관람했다 한다.

9. 관련 사이트[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4 11:14:08에 나무위키 듀란 듀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왼쪽부터 Roger Taylor (드럼), John Taylor (베이스), Simon Le Bon (보컬), Nick Rhodes (키보드)[2] 기타 세션은 블러그레이엄 콕슨이 맡았다. 이날 무대에서 과거 히트곡인 'Notorious'도 라이브로 공연했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곡이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가 빠진 3인조 체제 시절 곡이란 것이다. 로저는 자기가 없던 시절 곡을 연주한 셈.[3] 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는 다르다![4] 1980년대에는 부모님 방 또는 거실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는 집이 많았기 때문에 걸스 온 필름 비디오는 부모님 몰래 봐야만했다(...). 무삭제 원작을 Night Version, 편집된 버젼을 Day Version이라고 했다. 1980년대에 10대 국내 팬들이 성적인 표현이 충만한 나이트 버전을 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이트 버전이 실렸던 First 11 Videos(1983)를 통해 Duran Duran 뮤직비디오를 주로 접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해외 앨범들을 빽판으로 들어야했던 시절인데 하물며 뮤직비디오를 접할 수 있는 미디어 매체는 극히 한정적이었던 시절이었다. First 11 Videos에 함께 실렸던 Chauffeur 뮤직비디오 역시 1980년대 당시 한국 정서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이질감을 주는 영상으로 문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유튜브에서는 Girls On Film (Day Version)만 검색되고 있으며 Chauffeur 뮤비는 시청 연령 제한이 걸려 있다.[5] 빌보드 200을 간략히 빌보드로 표기[6] 1983년 미국에서 재발매된 데뷔앨범이 빌보드 앨범 차트 10위에 올랐다.[7] 빌보드 핫 100을 빌보드로 간략히 표기[8] 1983년 싱글로 발매되었고 1983년 재발매된 데뷔 앨범에 수록[9] 1982년에는 미국 싱글 발매가 없었고 1985년에 스페셜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16위 랭크[10] 그 해 1위가 Prince의 "When Doves Cry", 그 해 2위가 Tina Turner의 "What's Love Got to Do with It", 3위가 Paul McCartneyMichael Jackson의 "Say Say Say", 4위가 그 해 아주 크게 히트한 영화 "Footloose"의 사운드트랙이었던 Kenny Loggins의 "Footloose", 5위가 Phil Collins의 "Against All Odds (Take a Look at Me Now)", 6위가 Van Halen의 "Jump", 7위가 Lionel Richie의 "Hello", 8위가 Yes의 "Owner of a Lonely Heart", 9위가 Ray Parker Jr의 "Ghostbusters", 10위가 Culture Club의 "Karma Chameleon", 11위가 존 웨이트의 "Missing You", 12위가 Lionel Richie의 "All Night Long (All Night)", 13위가 데니스 윌리엄스의 "Let's Hear It for the Boy", 14위가 Bruce Springsteen의 "Dancing in the Dark", 바로 위의 15위가 Cyndi Lauper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이었다. 이를 보면 이 곡이 당시 미국에서 얼마나 크게 히트했는지 알 수 있다. 1980년대 자체가 미국 음악 시장 역사상 제일 살벌하고 복잡하고 변화하고 다양하던 때이지만 1984년은 그 중에서도 제일 치열한 해 중 하나였다. 듀란 듀란의 명성을 보여 주는 부분.[11] 흥행 성적 결과는 앤디 테일러와 존 테일러가 주축이던 슈퍼 밴드 파워 스테이션의 승리였다. 펑크(funk) 성향이면서도 당대 트렌드를 잘 맞춰나간 밴드였고 참여 멤버부터 이미 솔로가수로 이름이 높던 로버트 팔머Chic의 리듬 파트를 책임지던 당대 최고 베테랑 드러머 중 하나인 토니 톰슨이라는 거물들을 데려왔다.[12] 다만 알카디아 역시 "Election Day"라는 뉴웨이브 히트곡을 내놓았다. 빌보드 핫 100에서 6위에 들고 1986년 빌보드 연말차트 90위 권에 들었었다.[13] 록 스타와의 화려한 연애사로 인해 본업보다는 연관 검색어로 소환되곤 한다(...).#여담으로 베베 뷰엘은 Steven Tyler 사이에서 Liv Tyler를 낳았다.[14] 시크의 드러머 Tony Thompson은 파워 스테이션 멤버가 되었고 베이시스트 Bernard Edwards는 프로듀서와 매니저를 맡았다.[15] 로저 테일러는 아르카디아 앨범 녹음에는 참여했으나 뮤직 비디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16] 당대의 세션들이 모였던 Missing Persons, Frank Zappa 밴드 출신의 기교파 기타리스트이며 90년에는 코무로 테츠야의 솔로 라이브에도 세션으로 참여했었다.[17] 국내에서는 라이브 앨범 Arena를 스튜디오 앨범과 구분하지 않고 4집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듀란듀란 올드 팬들은 여전히 Notorious 앨범을 5집이라고 연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18] 국내에서는 Skin Trade가 심의에 걸려 앨범에 수록되지 못했었다[19] 노토리어스 앨범의 기타 파트는 작업 초기에 앤디가 참여한 부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어떤 기타 연주의 흔적을 남겼는지 정확하게 알려져있지 않은 편이다.[20] 2부는 1992년에 발표한 히트곡 'Ordinary World', 3부는 'Out Of My Mind'였다. 사이먼은 훗날 인터뷰에서 만약 그 전날 밤에 그를 불러냈더라면 그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거라며 자책했다.[21] 데뷔 앨범은 1983년에 골드, 1985년에 플래티넘을 획득했다[22] 참고로 저 당시엔 팝송 가사도 사전 검열을 해서 발매 여부를 결정하던 시기였다.[23] 사족으로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결혼식장은 LA 코리아타운 근처의 산마리노에 위치해있으며, 초반에 사진 찍는 사람과 중간중간 나오는 직원이 재미교포라 한다.[24] Live From London (DVD)는 2004년 공연을 녹화했으며 2005년에 발매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Ordinary World 정보를 담은 링크처럼 2004 Live From London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2004년의 의미는 공연년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세상에 공개된 발매년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25] 우리나라에선 그웬 스테파니의 전 남편으로 유명한 인물이다.[26] 싱글 음반에서는 데뷔 초에 David Bowie의 Fame 커버곡을 수록했었다.(1981년 두번째 싱글 음반 Careless Memories의 B-side)[27] 1992년 초에 런던의 스튜디오에서 녹음 중이던 듀란듀란을 한국의 여성 팬들이 방문했는데 듀란듀란이 즉흥적으로 요청하여 한국어를 녹음하게 된 것이다.[28] Watching The Detectives 커버 곡 녹음에도 참여함[29] 그래서 원곡은 코카인 밀매 조직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나르코스: 멕시코의 주제곡으로 쓰였다.[30] 빌보드 핫 100에는 진입하지 못했으나 1995년도에 빌보드 핫 댄스 클럽 플레이 차트 5위에 올랐다.[31] 다만 워렌은 닉 로즈와 TV 매니아 프로젝트를 하여 음원을 공개했다.[32] 앤디는 1985년 Live Aid 다음 날에 마약도 끊고 듀란 듀란을 빠져나가 가정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만큼 가정을 1순위로 생각했다.[33] Michael Patterson이 프로듀서 담당[34] 앤디가 자서전에 밝힌 탈퇴의 결정적인 원인은 워킹 비자를 밴드 매니저먼트 측에서 마련하지 못해서라고 항변했다.[35] Duran Duran, Justin Timberlake 공동 작곡[36] Duran Duran, Timbaland, Nate Hills, Justin Timberlake 공동 작곡[37] 2010년 발매한 Mark Ronson의 앨범 Record Collection의 수록곡 Record Collection의 보컬과 키보드에 사이먼 르본과 닉 로즈가 참여하기도 했었다.[38] 유럽에서는 듀란듀란 자신들의 레이블인 Tapemodern 발매 (영국에서는 Allido 발매), 미국과 캐나다는 S-curve 레코드사에서 발매[39] 뮤비에서 야스민은 "I'm not Duran Duran"이라는 대사를 한다. 정식 멤버에 기타리스트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담으로 여기 나온 슈퍼모델들 중 큰 언니 격이다.[40] 박제된 나비 수집가 남성이 모르는 여인을 납치하여 사랑까지 수집하려는 비뚤어진 사랑과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이다.[41] Astronaut (2004) 다음 정규 스튜디오 앨범이 될 뻔했던 불운의 앨범이다[42] 데이비드 보위의 생일인 1월 8일에 콘서트를 열 계획이었으나 문제가 생겨 1월 9일부터 24시간동안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하였다. 듀란듀란이 Five Years 발매일을 1월 8일로 선택한 이유도 데이비드 보위의 생일이기 때문일 것이다.[43] 사이몬 르 봉 또는 사이먼 르 본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과거엔 영어 발음에 가까운 사이먼 르 본이 국내에서 일반적인 표현이었고 여전히 사이먼 르 본을 떠올리는 올드 팬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이먼 르 본 역시 틀린 표기법이 아니므로 르 본이라고 나무위키에 작성하면 르 봉을 정식 표기법으로 오해하고 르 본을 르 봉이라고 수정하는 경우가 있어서 구체적인 설명을 첨가하였다. 포털 사이트의 인물 정보에 프랑스식 발음인 르 봉이라고 쓰여있긴 하다. 그러나 Le Bon은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르 봉'으로 표기하더라도 이는 프랑스 인명 기준이며, Simon Le Bon처럼 프랑스계 영국인인 경우에는 어떻게 표기하는지는 정해지지 않아서 국내 주요 매체에도 '르 봉'과 '르 본'이 혼재된 상황이다. 본인 발음을 들어 보아도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어서 애매하다. 구글 사이트의 Simon Le Bon 인물 정보만 보더라도 세 명의 딸 이름에 르 봉 또는 르 본을 함께 표기하고 있다.[44] 슈퍼 모델이었던 어머니 야스민 르 봉의 영향을 받아 현재 패션 모델로 활동 중이다.[45] Le Bon 성씨는 영국에 정착한 위그노의 후손이다.[46] 라이브에서 고음처리를 뛰어나게 하고 젊은 시절에는 춤도 아주 잘췄다.[47] 이분도 1980년대 유명했던 밴드 뱅글스의 프런트맨이며, 이미 60대이지만, 40대로 보인다. 전성기였던 1980년대 중후반 모습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 봐도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48] 어린 시절에는 집안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였으나 성장하면서 냉담자가 되었다. 다만, 약물,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성 프란치스코 기도문의 의미를 재발견하였다고 한다.링크[49] 방송인이며 스트록스의 멤버인 닉 발렌시의 현재 부인이다. 아버지는 유명 카레이서이자 레이싱 프로그램 진행자인 알랭 드 카드네이며, 남동생인 알렉산더는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부계 집안이 프랑스인이다.[50] 7살 연상이지만, 부부 동반 사진을 보면 전혀 그렇게 안 보인다(...) 체구가 작아서 더 어려 보인다. 패션브랜드 쥬시꾸뛰르 창업자 중 한 명이다.[51] 십대 때부터 패션 모델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그 경험을 살려 패션 사업을 하고 있다.[52] 국내 위키에선 닉 로즈가 고등학교를 중퇴했다고 나오나, 사실은 의무 교육 과정이자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교육에 해당하는 중등 교육 과정만 마친 것이다. 영국 학제만 16세까지 의무 교육을 마친 후, 2년 간 대학 준비 과정인 식스폼을 거쳐 대학에 진학할지, 아니면 바로 사회에 진출할지를 선택한다. 해외 웹에선 닉이 A-leve 과정을 밟지 않았다고 나오는 것을 보면, 추가로 식스폼 과정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며 사실상 우리나라의 고졸과 비슷하다.[53] 캐럴라인 코시는 태어날 당시엔 남성으로 기록되었으나, X염색체가 두 개 더 많은 XXXY염색체를 갖고 태어나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 동시에 분비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1981년에 007 시리즈 영화 유어 아이즈 온리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54] 아우팅 후에도 일은 들어왔지만, 프릭쇼처럼 구경거리 취급을 당했다 한다.링크[55] 뮤비 촬영 현장 영상을 보면 멤버들은 그녀를 원래 여자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한다.[56] 재미있는 사실은 회고록 출간 당시 전처인 아만다 드 카드네가 전남편을 인터뷰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 회고록을 홍보해 줬다는 것이다. 이 인터뷰를 통해 존이 회고록에서 언급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전에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았음이 확인됐다. 아만다는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남편이 되어 주어서 감사하다며 훈훈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했다.링크[57] 앤디 테일러의 회고록에 따르면, 존은 그의 외모로 인해 EMI의 마케팅에 따라 pin-up 보이를 담당해야했으며 언론에 노출되는 모든 파티참석과 홍보가 필수였다. 존은 자신의 본래 수줍은 성격을 본명 나이즐과 함께 뒤로하길 원했고, 원래 알콜 맛 자체를 싫어해서 성인이 된 후 칵테일이나 좀 마실 수 있었는데, 술이 들어가면 대범해진다는 걸 알고 점점 술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직장이자 듀란 듀란의 데뷔 전 활동 무대였던 럼 러너 클럽은 코카인이 맥주처럼 흔해서 어렵지 않게 코카인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58] 인터넷에서 과사를 뒤져 보거나 앤디 테일러 회고록을 보면(앤디는 존의 첫인상을 스타일이 좋고 깡마른 unbelievably good looking…그러나 동그란 작은 안경 때문에 다소 geek로 보이는…으로 표현했다) 그의 너드미를 확인할 수 있다. 링크1 링크 2[59] 이는 앤디 워홀이 남긴 일기에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1986년 당시 로저와 앤디는 탈퇴했지만, 닉은 여전히 듀란 듀란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60]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가지만, 80년대 서구권에선 코카인이 부유층 인싸들이 즐길 만한 기호품으로 여겨져서 핫한 클럽에선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쉽게 접할 수 있었으며, 음악 업계에서도 묵인했다. 당시엔 코카인은 내성이 적어 헤로인과는 달리 위험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링크 심지어 BBC에서 창의력 증진을 이유로 제작진에게 코카인을 권했을 정도였으며, 이는 약 빨고 텔레토비 만들었다는 괴담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뮤지션들의 약물 복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90년대 중반 헤로인 열풍으로 인해 록커들 여럿이 사망하면서부터다. 이후 뮤지케어(musicare) 같은 단체가 생기면서 음악인들을 약물 중독 수렁에서 구하려는 움직임이 대두됐다.[61] 로저는 심지어 악명 높은 타블로이드에서도 저격을 안 했을 정도로 깨끗한 멤버였다. 듀란 듀란 멤버들의 코카인 복용이 처음 드러난 것은 1984년 타블로이드의 폭로였는데, 기사에서 로저는 아니라고 아예 못박았다.[62] 1984년 폭로 기사로 인해 앤디와 사이먼은 알몸 수색까지 받았으나, 마약이 발견되지 않아 무혐의로 종결됐다.링크 그 때문인지 한국 매체에선 아예 언급이 안 되었다. 이 보도로 홍역을 치렀던 앤디와 사이먼은 일찌감치 가정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이혼 한 번도 없는 모범적인 가정 생활을 하면서 추문과는 멀어졌다. 특히 앤디는 아내가 극심한 산후 우울증을 겪어 파경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식이 나처럼 어머니 없이 자라서는 안 된다며 아내에게 정성을 다하였다.링크[63] 존은 회고록에서 코카인 중독이 심해졌을 때 마약을 싫어하는 닉을 멀리한 적이 있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앤디의 회고록에서도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점이다.[64] 기사 링크에는 만 16세 때 흡연을 시작했다고 나와 있는데, 당시 영국의 법적 흡연 가능 연령은 만 16세였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성인이 된 후에야 담배를 배웠다가 아직 20대일 때 끊은 것과 비슷하다. # 2011년에 사이먼이 성대 부상을 겪은 이후엔 모든 멤버가 금연한 것으로 확인된다. 링크[65] 사진 속 여성은 여자친구인 Nefer Suvio로 20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 2021년 현재도 사귀고 있으며, 듀란 듀란 프로모 사진도 직접 찍어서 언론사에 제공한다.[66] Runaway Train이라는 곡으로 90년대초 유명했던 밴드[67] 상세 정보 The Reflex[68] 로저 무어의 마지막 007 영화인 "A View to a Kill" 의 메인 테마곡이다[69] 국내 격투마니아들에게 익숙한 노래인데, 종합격투기 선수 미르코 크로캅의 입장 음악이기 때문.[70] 사실상 지금의 듀란 듀란을 있게한 노래이다. 이 곡이 1983년 미국에서 아주 큰 인기를 끌며 듀란 듀란이 미국을 점령할 수 있었다. 1983년은 음악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해인데, Off the Wall으로 대성공했지만 남아있었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깨부수고 일반 케이블에 불과했던 MTVNBC, ABC, CBS 버금가는 메이저 방송사로 만들며 비디오 시대까지 연 마이클 잭슨, 또 그 마이클 잭슨이 깨부순 인종차별의 벽 덕분에 프린스 역시 대성공을 할 수 있었던 해이며, 컬처 클럽과 듀란 듀란이 미국 시장 진입 성공과 동시에 미국 시장을 점령했던 해이며, 몇 년 전 부터 미국에서 히트곡을 거둬 오고 있던 The Police가 그 해 미국에서 제일 큰 히트곡인 "Every Breath You Take"를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홀 앤 오츠는 1981년부터 이어온 최전성기를 계속 유지했으며, 이 외에도 Men at Work, 도나 서머, 데이빗 보위, Eurythmics, 빌리 조엘, 라이오넬 리치 등이 1983년 미국 음악 시장을 점령했다.[71] Save A Prayer는 1982년도에 미국에서는 싱글이 미발매되었고 1985년도에 스페셜 버젼 싱글이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차트 16위 기록[72] 뉴잭 스윙 같은 흑인 음악 장르를 중심으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그룹이다.[73] 국내에선 버즈, 일본에선 X JAPAN이 한때 이런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다.[74] 참고로 기사에 언급된 더 원티드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결성된 그룹이다. 그래서 사이먼이 테이크 댓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테이크 댓은 애초에 게리 발로우가 직접 만든 데모 테이프를 음반사에 보내던 중 제작자와 연결이 되어 멤버를 추가해 완성된 보이밴드라, 더 원티드처럼 제작자가 오디션으로 멤버를 뽑아 제작한 보이밴드와는 달리 멤버인 게리 발로우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75] 물론 우리나라 아이돌 기획사 연습생들이 철저한 훈련을 거쳐 치열한 경쟁을 뚫고 데뷔하는 걸 생각하면, 대형기획사에서 팀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 꼭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팀이라면, 악기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회사가 시켜서 억지로 연주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쉬울 것이다.[76] 스튜디오에 실제 기타, 베이스, 드럼을 들여놓으니 팀발랜드가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77] 가사를 보면 고된 촬영 현장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한마디로 자낳괴 가사.[78] 2019년에 록시 뮤직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되었을 때, 사이먼 르봉과 존 테일러가 연사로 등장하기도 했다.[79] 즉, 우리나라로 치면, 아이돌 그룹이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콘서트를 하는데, 길 건너편에서 민주노총이 집회를 하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물론 노조 집회와 폭동은 다르지만, 외국과 같은 폭동이 드문 대한민국 특성상 대규모 집회가 그와 비슷한 무게감이란 얘기다. 이런 상황이면 진보 매체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무색하게도 건너편 잠실구장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호화판 콘서트가 펼쳐졌다라는 식으로 헤드라인을 뽑을 것은 자명하다. 당연히 정치색이 강한 사람들 관점에선 눈엣가시였을 것이다.[80] 당시 이들은 음반사와 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생신인이었으니, 이미 정해진 공연 일정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같으면 정치적 입장이 문제가 아니라, 팬들의 안전 문제가 거론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영국의 역대 폭동들이 그렇듯, 이 폭동도 군중심리에서 동참한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어 우리 관점에선 기획사가 안전 불감증이라 비난받는다면 몰라도 연예인이 폭동에 공감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긴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와 영국의 문화 차이가 엿보이는 부분.[81] 여담으로 이와 관련해 사이먼 르봉은 자신의 딸은 조지 해리슨에 이어 테임 임팔라, 리틀 드래곤을 들을 것이라며, 자신의 딸은 특정 시대, 특정 장르에 충실하지 않다고 말했다.[82] 물론 한국에서 록음악이 비주류로 된 이유는 1970년대 중반 대마초 파동과 같은 정치적인 사건이 시초였긴 했다. 반사회적인 록 밴드들이 퇴폐문화를 조장한다는 투로 높으신 분들이 곱게 볼 리 만무했기 때문.[83] 이 곡은 이보 노벨로 어워즈의 'Best Song Musically and Lyrically' 부문 후보에도 들었다. 적어도 평단에서 사이먼이 쓴 가사를 무조건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84] 여담으로 이 3부작의 영감을 준 친구의 사인이 마약이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사이먼은 음악을 통해 지속적으로 마약 퇴치 메시지를 전달했다. 앞서도 언급되지만 'Drug' 같은 곡이 대표적. 문제는 노래가 뜨지 못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리오 뮤직비디오로 굳어진 향락적인 이미지만 깊숙이 박혀 버렸다(...)[85] 다만 존은 가사가 자기에 대한 내용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어쨌든 10여 년 뒤에는 중독에서 벗어나 사이먼의 간절한 바람에 부응했다.[86] 사실 앤디 테일러는 초반에 그렇게 비주얼로 주목받는 멤버는 아니었던지라... 일단 멤버 중 가장 왜소한 체격이다. 키도 가장 작은 168cm였는데, 평균보다도 작은 데다가 무대 전면에 함께 서는 사이먼과 존이 188cm의 장신이어서 무대에 선 모습을 보면 거의 아기처럼 보인다(...). 파워 스테이션 시절에는 존 테일러와 더불어 비주얼도 같이 담당했는데 혹자는 파워 스테이션이야말로 앤디 테일러의 진정한 테크닉과 댄서블한 그루브를 보여주는 무대라며 듀란에 머물기엔 아까운 인재라는 평도 내린 적이 있을 정도. [87] 중학교 때 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고. 삼촌에게 기타까지 배울 정도. 활동 초창기에는 베이시스트 존 테일러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하기도 했다.[88] 이 대사를 할 때는 원곡의 드럼 소리가 난다. 단, 감염된 듀란 버전에서는 드럼 소리가 나지 않는다.[89] Culture Club. 여장남자 컨셉으로 유명했던 보이 조지(Boy George)가 이끌었던 밴드. 당시 이들은 "컬처 클럽은 현대음악에 있어서 표절의 가장 진지한 형태이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표절을 잘한다." 발언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수많은 노래들을 재해석해서 히트공식에 맞춰서 재조립하는 게 이들의 작업방식이었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긴 한데 하여튼 노래는 끝내준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 덕분에 보이 조지는 작곡에 관해 권위를 인정받는 상인 이보 노벨로 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실제로 레퍼런스와 표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잘 나타내는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