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공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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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公仁
(? ~ 1137)
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남평현 사람으로 초명은 문공미(文公美)다. 산기상시 문익의 장남으로 문공원, 가관(可觀)[1] , 문공유의 형이고 문극겸의 백부다.
2. 생애[편집]
2.1. 예종 시기[편집]
문공인은 아름답고(雅麗) 부드러웠기에(柔曼) 시중 최사추의 딸과 결혼한다. 과거에 급제하고 직사관이 되는데, 처음에는 가세가 한미했지만 다른 문벌귀족과도 통혼을 거듭한다. 호부원외랑에 임명돼 요에 가는데 자신을 접객하는 이에게 백동(白銅), 나전기(螺鈿器), 서화와 병풍, 부채 등 진기한 문물을 선물한다. 사신으로서 문공인이 요에 물품을 전한 것은 곧 관례가 돼, 요에서 고려 사신들에게 선물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는다. 추밀원 우부승선에 오르고, 예종 10년(1115)에는 왕자지가 송에 사신으로 갈 때 호부시랑으로서 부사로 따라간다. 부유하고 사치스러웠던 두사람은 치장을 과시하며 서로 꾸미는 데에 힘쓴다.
예종 12년(1117) 전중소감 우승선 겸 태차우찬선, 예종 17년(1122) 3월에는 예빈소경 추밀원지주사에 임명된다.
2.2. 인종 시기[편집]
인종이 즉위한 1122년 5월에 추밀원부사로 승진한다. 문공인은 한안인, 이자량, 최홍재와 함께 추밀원에 있었는데 이자겸의 권세에 의지한 이자량, 최홍재와는 갈등을 빚는다. 한안인이 이자겸이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팔았다는 말을 성내(省內)에 떠들고 다니다가 이것이 이자겸의 귀에 들어가 둘의 갈등이 표면화된다. 이에 한안인이 이자겸을 두려워해 휴가를 내고 집에 있었는데, 문공인은 한안인의 친척동생 정극영, 한안인의 매부 이영 등과 한안인의 집에서 자주 모임을 가지고 밤 늦게 헤어진다.
최사전과 이자량, 최홍재가 이자겸에게 한안인, 문공인 등이 자주 모이는 것을 참소하니 이자겸은 문공인 등이 자신에게 위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결국 이자겸이 둘의 죄를 만들어냈고 문공인은 12월에 충주로 유배된다. 한안인의 일가뿐 아니라 정극영, 이영의 가족 중에서도 연좌돼 유배되거나 파직된 이들이 있었고, 문공인의 경우 동생 문공유가 유배된다.
이자겸이 쫓겨난 뒤에는 인종 5년(1127) 4월 이부상서로 복직한다. 같은 해 6월에는 예부상서 지제고, 12월에는 동지추밀원사에 오른다. 인종 6년(1128)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최유(崔濡)와 함께 이원철(李元哲)등 29인을 급제시킨다. 문공인은 이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1129), 판상서형부사(1130)를 지냈으며 재상인 참지정사(1130)로 승진한다. 또 승진을 거듭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오른다.
문공인이 재상에 오른 시기에 승려 묘청이 활동하며 서경 천도를 주장한다. 문공인의 동생 문공유는 묘청을 요사스러운 사람(妖人)이라고 비난하는데, 문공인은 정반대로 묘청을 성인(聖人)으로 여기며 그에게 동조한다. 인종 10년(1132)에는 평장사 최홍재[2] , 묘청의 뜻에 함께한 임경청(林景淸)과 셋이서 서경의 궁궐 중수를 감독하기도 한다.
인종 13년(1135) 묘청의 일당 백수한(白壽翰) 앞으로 편지가 온다. 편지는 백수한의 친구들이 보내 백수한의 아들이 가져온 것으로, 그 내용은 서경에 반란이 일어났으니 몰래 빠져나오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백수한은 편지의 내용을 인종에게 보고했고, 인종은 문공인에게 편지를 보인다. 평장사 문공인은 "이 일은 가히 의심스러우니, 진위를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잠시 숨기십시오."[3] 라고 말하며 백수한을 두둔한다. 그러나 군졸의 증언에 따라 서경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확실해졌고, 재추가 논의한 끝에 원수 김부식이 서경의 반란 세력을 효유하려 떠나게 된다.
묘청이 서경 사람들에 의해 참수되고 투항한 대부경 윤첨(尹瞻)이 김부식의 친서를 가지고 녹사 백녹진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온다. 그 내용은 윤첨을 후하게 대접해 스스로 뉘우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상 문공인은 최유, 한유충과 함께 반란 진압에 늑장을 부린 김부식을 비판하며 윤첨은 옥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부(兩府)와 대간이 한뜻으로 투항자를 하옥하고 극형으로 다스릴 것을 간하니 결국 문공인의 뜻대로 투항자들은 처벌을 받는다. 투항자에 대한 강경 대응은 서경의 반군에 불안을 가져왔고, 조광 이하 서경 세력은 김부식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나간다.
이듬해 인종 14년(1136) 김부식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왔고, 묘청을 적극 지지했던 문공인은 여러 방향에서 탄핵을 받는다.
문공인이 묘청을 천거했으니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쳤습니다.[4]
간관의 탄핵, 『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에서 나오고 거북 등딱지와 옥이 궤짝 속에서 훼손됐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이옵니까? 서경의 반적이 모의한 지 오래되었으나, 한두 대신이 이를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로 그 역모를 믿고 성하게 했으니, 오늘날의 환난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밝은 결단을 내리시어 그 당여를 주살하십시오.[5]
중서사인 이지저와 좌상시 이중의 상소, 『고려사』 권95, 이지저 열전.
이지저와 이중이 "한두 대신(一二大臣)", "그 당여(其黨與)"라고 한 것은 문공인과 임경청을 저격한 것이다. 결국 문공인은 수태위 판국자감사로 좌천됐으며, 얼마 뒤인 인종 15년(1137) 12월 15일(음력)에 죽는다. 사후 인종으로부터 충의(忠懿)의 시호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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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익의 삼남. 가관은 법명으로 조계종의 대선사가 된다.[2] 인종 초부터 재상이었던 최홍재는 이자겸에게 아첨하며 관직이 평장사에 오르고 권세가 커지더니, 결국 이자겸의 견제로 인종 2년(1124) 승주 욕지도로 유배된다. 이자겸이 쫓겨난 뒤에는 한안인의 죽음에 책임을 묻는 간관의 논박으로 이자겸이 쫓아낸 사람 중 가장 늦게 개경으로 소환된다.[3] 是事可疑, 難究眞僞, 姑閟之.[4] 公仁薦用妙淸, 以至誤國, 流毒生靈.[5] 虎兕出於柙, 龜玉毁於櫝, 是誰之過? 西賊之謀久矣, 一二大臣非獨不防閑, 反信其謀而張之, 致今日之患. 請賜明斷, 誅其黨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