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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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칠기




국가무형문화재 제10호 이형만 나전장의 나전칠기 제작 모습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손대현 옻칠장의 나전칠기 제작 모습


KBS 월드의 홍보 영상

파일:나전칠기.jpg
1. 개요
2. 역사
3. 현대
4. 나전 장신구
5. 기타


1. 개요[편집]


나전칠기()는 야광패(貝), 전복조개 등 특정한 조개류의 껍질을 잘라 모양을 내어 붙이고 옻칠한 기물을 가리킨다. 보통은 나무제품에 장식하고 옻칠했지만 금속제품에 장식한 경우도 있다. 옛부터 한국, 중국, 일본에서 제작했는데 삼국 공통으로 나전이라고 부른다. '나전칠기'라는 명칭에서 라/나() 자는 '소라', 전() 자는 '장식하다'라는 뜻이다. 풀이하면 '소라로 장식하고 옻칠한 기구'란 의미가 된다. 나전칠기 제작 기법에서 사용하는 조개류를 소라라고 싸잡아서 표현한 듯.

여기서 장식으로 사용하는 조개 껍질은 안쪽이 진주질 성분 때문에 영롱하게 반짝이는데, 이렇게 공예용으로 사용하는 조개 껍질 조각을 순우리말로 '자개', 자개를 기물의 표면에 장식하는 행위를 '자개박이'라고 부른다. 또한 나전칠기를 '자개공예'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전에 많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전복껍질 자체가 희소성이 있고, 비싼 재료는 아니지만 수공으로 나전가구 하나를 만들어 완성하기 까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다.


2. 역사[편집]


자개를 이용하여 장식한 물건 중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은 수메르 문명의 왕릉에서 출토한 우르의 군기와 우르의 전승기념비이다.

유래는 분명치 않으나, 중국에서는 상나라 때부터 나전칠기를 만들고 당나라 시기에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평탈기법에 가까운 나전칠기를 발견하고 삼국사기에 칠전(漆典)이라고 하는 관청이 신라에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엔 나전칠기를 널리 제작하고 있지 않았나 짐작할 수 있다. 신라 때의 나전 유물로 국보 제140호 나전 화문 동경이 현존한다.

고려시대의 기록인 고려도경조선시대동국문헌비고에 고려 나전칠기와 관련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문종 시기에는 송나라거란에게 나전칠기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특징으로 복채법(伏彩法)과 금속선을 들 수 있다.
파일:나전6.jpg
파일:나전상세.jpg
고려 시대의 나전칠기는 촘촘히 배열하는 기법으로 여백을 거의 두지 않아 세밀하고 화려했다. 특히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로 출장 후 작성한 보고서인 고려도경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나전은 가피 세밀하하여 귀하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서긍이 전반적으로 고려를 굉장히 깔보는 시선으로 작성했던 것을 보면 고려 나전 기술의 우수성을 볼 수 있다.
장식의 재료는 자개, 대모(바다거북 껍질), 금속선을 사용했으며 몇 mm밖에 안되는 패턴을 반복해서 넣고 그 테두리엔 두줄로 된
금속선을 꼬아서 박아넣은 것이 고려시대 나전의 특징이다. 국화와 덩굴(당초)무늬, 모란등을 넣었다.
현재 고려시대 나전칠기는 전세계에 20여점이 있으며, 대부분이 경전을 담아두던 경전함이 남아있고 일본에 있다.
꽃의 색채을 표현하기 위해 대모에 복채하는 기법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파일:20230103_224034.jpg
삼성미술관 리움이 기존에 일본 개인이 소장하던 나전을 사들인 이후, 국내에서 소장하여 공개한 고려시대 나전은 7점이다. 리움 소장 나전 팔각형 함은 도상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전기의 양식도 섞여서 여말선초에 제작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파일:나전칠국화당초문반.jpg
리움미술관 소장의 작품 중에는 고려시대의 나전 장식이 된 붓도 소장이 되어있다. 굉장히 귀하고 특이하며, 본디 일본 사립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작품으로 보인다.
파일:나전환수.jpg
2023년 고려시대 13세기 나전국화덩굴무늬상자가 일본 개인에게서 환수되었다. 복권기금을 사용하여 환수되었고, 130년 동안 일본 개인 소장가의 집안 창고에서 소장하다가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문화재청이 매입한 유물인데, 형태가 다른 고려시대 나전경함과는 다르다. 보존상태는 매우 뛰어나서 진품이 확실하다면 최소 보물로 등재될 유물.

3. 현대[편집]


근대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나전칠기가 과거에 비해 쇠퇴했고, 이왕직(李王職) 소관의 미술품제작소에 소속된 나전부에서 나전칠기를 제작했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일상용도보다도 공예품으로서 상품적 가치를 인정받아 조선 및 일본 상류층 간 기념품, 답례품 등으로 인기가 있었다.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 당시에도 나전을 출품하여 수상을 하기도 했고 구미지역으로 수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전칠기 명맥이 끊긴건 아닌지라 현대로 들어서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고, 지금도 기능장을 중심으로 나전칠기를 만든다. 다만 제작과정이 매우 복잡하고 길며, 수공예 작업으로 할 수밖에 없고 피부에 유독하고 악취가 나는 칠을 쓰기 때문에 기피되는 기술이라 한다.

만들기 어려운 만큼 나전칠기, 특히 대형물인 자개장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여 안방에 놓을 만한 여러 자짜리 장롱은 가격이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장롱, 화장대, 협탁 등을 풀 세트로 장만하려면 6~7천만 원에서 1억 가까이 한다. 이토록 비싼 물건이 대중적으로 잘 팔리기도 어렵고, 게다가 근대에 나전칠기업이 쇠퇴기를 겪으면서 옻칠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에서 개발한 저렴한 캐슈칠이 국내로 도입되면서 나전칠기의 품질이 매우 낮아졌다.

정작 캐슈칠을 개발한 일본에서는 현재 인체 유해성 때문에 캐슈칠을 사용하는 곳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도료의 재질이 옻칠, 캐슈칠, 우레탄 중 어떤 것인지 명확히 표기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도 옻칠 대신 캐슈칠을 발라놓고 옻칠이라고 광고하며 비싼 가격으로 파는 곳들이 있다. 간혹 나전칠기에서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냄새가 나는 칠기는 백이면 백 옻칠이 아닌 캐슈칠을 바른 저품질 상품이라고 보면 된다. 진짜 옻칠로 만든 제품은 코를 가까이 대고 맡아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는다.


4. 나전 장신구[편집]


실제 전복껍데기를 가공한 나전으로 귀걸이, 목걸이 등 장신구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무지개 빛깔로 반사하여 반짝이는 점이 큰 매력이라 실제로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전복껍데기 자체가 매우 흔하기 때문에 자개 조각 한두 개 정도는 나전칠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곳을 견학하면 공짜로 얻을 수 있다. 다만 조개 껍질 특성상 사파이어, 에메랄드, 자수정 등의 보석에 비해서는 재질 자체가 물러서 흠집이 나기 쉬우며, 비누, 땀, 샴푸 등 화학물질에도 상대적으로 예민한 편이어서 관리를 잘 해주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 한다. 그냥 공기 중에 가만히 보관만 한다면 문제 없이 오래간다.


5. 기타[편집]


중국나전
일본나전
베트남나전

한국나전칠기박물관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에 있다. 관장은 전직 국회의원 손혜원이다.

배재대학교에 나전칠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칠기공예과'가 존재했지만 2012년에 5개 단과대학을 통합하는 과정 중에서 사라졌다. 해당 학과의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반대하고 대외적으로도 여러 가지 우려가 나왔지만 대학 측에서 강행하였다.[1]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옵션으로 고려했으나 진품은 너무 비싸고, 모조품은 폼이 안 나서 반려당했다.

MBC 소품실에 있는 각종 대도구, 소도구 중 가장 비싼 소품이 바로 이 자개장이라고 한다. 시가 5천만 원 가량으로 인어아가씨 등 MBC 일일연속극에서 부잣집 안방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이라고 한다.

인간문화재 김태희 선생의 고급 자개장이 전두환 연희동 자택 응접실에 있다가 매물로 나왔다. 해당 작품은 김태희 명인이 생존해 있던 1984년 완성했는데 그 당시에 이미 시가 3억 원[2]이었으며 1987년 일해재단을 거쳐 전두환 연희동 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일본 드라마 추리극 바티스타 나전미궁에서 병원 노인들이 나전을 만들어서 병원을 돕고자 하고 안락사하는 옥상의 방에 나전장식이 있다.

동양의 칠기가 서양으로도 알려진 것은 생각보다 오래 전 일이다. 17세기 시누아즈리자포네스크가 유행하던 시절에 처음으로 서양으로 알려졌으며 특히 일본 칠기는 광택 있는 검정 칠기판 위에 금과 은으로 모티브를 그려넣은 화려함으로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동양의 칠기가 유명해지면서 서양인들은 그 비법을 알아내려 노력했는데, 이후 유럽으로 칠의 비법을 소개한 사람은 18세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이자 아마추어 식물학자인 피에르 댕카르빌(Pierre Nicolas Le Chéron d'Incarville, 1706-1757)이다. 그는 '중국 칠에 대해서'라는 연구서를 발표해 칠의 성분이 '치수'라는 나무에서 추출한 진액임을 밝혀내었다. 이 치수가 바로 옻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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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 아펜젤러국제학부, 공연영상학부의 연극영화학 전공도 함께 사라졌다.[2]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가격이 9500만 원, 복권 당첨금이 1억 원 하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