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통(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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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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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고회 (竹林高會) | ||||||
오세재 | 이담지 | 이인로 | 임춘 | 조통 | 함순 | 황보항 |
1. 개요[편집]
조통(趙通, 1143~?)은 무신정권 시기 중국의 죽림칠현을 따라서 만든 죽림고회의 인원 중 하나였다. 자는 역락(亦樂).
2. 생애[편집]
몸과 뼈대가 크고 단단하며 경사와 백가서를 두루 꿰뚫어 명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불러 물었으며, 시험에 급제하고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정언을 지내다가 고공낭중 태자문학으로 옮겼다.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본국을 힐난한 것이 있어 3년 동안 붙잡혀 있다가 금나라 사람들이 그의 재주를 아껴 돌아가도록 했다. 1197년에 금나라에 파견되었다가 1198년에 귀국했고 1199년에는 장작소감을 지내고 동경에서 정방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지와 함께 회유를 위해 파견되었다
1200년에는 소부감을 지내다가 이당적과 함께 진주안무사로 파견되었고 훗날 지서북면유수사가 되어 마음이 너그럽고 어질면서 검소함을 받들었고, 다른 사람을 대하기를 믿음으로 했다. 관직은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벼슬에 물러나 죽림고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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