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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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주마. 이름은 나리타산 후도손[5] 에서 따온 관명(소속을 나타내는 이름)인 나리타 + 아버지 말의 이름(Brian's Time)의 조합이다. 같은 어머니를 둔 비와 하야히데와는 반형제 지간으로, 유명한 명마였던 형조차도 뛰어넘는 당대 최강의 명마였으나 30세로 천수를 누린 형과는 달리 이른 나이에 부상으로 은퇴 후 요절까지 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말이다.
반형제인 비와 하야히데는 1993년 킷카상을 비롯해 G1 3승을 기록했고, JRA 1993년 연도대표마에 올랐다. 전형제인 비와 타케히데는 1998년 라디오탄파상(GIII)를 우승했다.
모마 퍼시피커스의 반형제 여동생 캣퀼(Catequil)은 팔레놉시스와 키즈나의 모마다. 특히 팔레놉시스는 부마가 같은 브라이언스 타임이므로 유전적으로 3/4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홋카이도의 하야타 목장에서 어미가 같은 반형제인 비와 하야히데가 태어난 다음 해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눈에 띄는 말은 아니었는데 점차 목장 관계자들에게 신체 능력을 높이 평가 받게 되었고 1992년 4월 비와 하야히데가 릿토 트레이닝 센터로 떠난 후 10월에 나리타 브라이언의 경주마로서의 조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조교사는 탄력, 등의 부드러움, 민첩성에 있어 비와 하야히데를 넘는 소질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조련 중 웅덩이를 보고 놀라는 겁 많은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이 후 마주 야마지 히데노리와 조교사 오쿠보 마사아키가 목장을 방문해 2400만엔에 나리타 브라이언을 구매했는데 조교사는 후에 이 때 비와 하야히데가 활약했던 시점이었다면 자신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5월에 릿토의 오쿠보 마사아키의 마방에 왔고 주전기수는 미나이 카츠미가 되었는데 처음 나리타 브라이언을 타 본 후 오구리 캡을 탔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데뷔 초반 겁이 많아 경기 중에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해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느낀 조교사 오쿠보는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했던 경주마 패싱 골이 코에 섀도우 롤을 장착하고 나서 성적이 안정되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6전 째인 교토 3세 스테이크스 때 부터 섀도우 롤을 장착했으며 이 후부터 나리타 브라이언의 상징이 된다. 이 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우승하면서 작년의 비와 하야히데가 받지 못했던 JRA상 최우수 3세 수말 상을 받는다.
1994년 클래식 시즌은 그야말로 동세대와는 다른 차원으로, 10년만의, 동시에 헤이세이 시대 첫번째의 클래식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이 중 사츠키상과 킷카상은 코스 레코드를 내며 압승. 특히 킷카상은 2번마와 무려 7마신 차로 들어와 "고독한 경주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현재 모든 클래식 3관마 중 2착과의 마신 차 합이 최대인데, 사츠키상 1.25마신 + 더비 1.75마신 + 킷카상 0.75마신으로 총합 3.75인 심볼리 루돌프를 한참 제치고 총합이 3.5 + 5 + 7 = 15.5이다.[6] 형 비와 하야히데와의 대결도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고 양쪽 진영에서도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했지만 비와 하야히데가 천황상 가을 후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마와의 첫 대결이었던 아리마 기념에서 단승 1.2배의 압도적인 인기에 부응하며 여걸 히시 아마존을 3마신차로 떨치고 또 다시 완승했다.[7] 이 때의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 경기를 뛸 때마다 편자가 눈에 띄게 닳아서 매번 갈아줘야 했다고 할 정도로 각력이 괴물같았다고 하고, 심볼리 루돌프를 담당했던 노히라 조교사가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선 브라이언이 위다'라고 했을 정도.[8]
1995년에 한신대상전을 우승한 후 고관절염이 발생, 10월에나 복귀했지만 무리한 복귀라는 말이 많았다. 주변의 걱정대로 천황상 가을에서 12착으로 대패하였고 나리타 브라이언 스스로도 이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눈물을 흘린 사진이 남아있다.[9] 이후 전성기의 기량을 찾지 못하며 하향세를 타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사상 최고의 G2 레이스 중 하나라 불리는 1996년 한신대상전에서 95년 연도 대표마인 마야노 탑건과의 승부에서 승리하며 팬들에게 부활을 꿈꾸게 했다.
마지막 승리를 장식했던 1996년의 한신대상전은 G2임에도 경기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역대 최강자의 부활 vs 현역 최강의 격돌이라는 면에서 큰 기대를 모았으며 실제로 팬들의 기대에 맞는 역대급 내용을 보여줬다. 이 대결을 보기 위해 토요일임에도 6만명 가까운 관중이 한신경마장을 찾았을 정도. 다른 경쟁자들을 멀리 내버려두고 초경합을 벌이는 승부를 벌이며 경마 팬들에게서 당대 역대급 경기라고 칭송받았으며,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경마 관계자들은 나리브의 경기력에 대해 의문을 가졌는데, 당시 마야노 탑건과의 대결을 보면 라스트 스퍼트의 접전 끝에 거의 코 끝 수 센티미터 차이로 승리하는데, 전성기 시절의 트레이드 마크로 5~7마신 이상의 격차를 내는 힘있는 주행을 뽐내던 그런 나리타 브라이언이 마지막 직선에서 '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이미 전성기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의미이다. 나리타 브라이언의 기수 타케 유타카도 경기 직후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말했지만, 열기가 가라앉은 후의 인터뷰에서는 '이기긴 했지만 아니라는 느낌도 있었다. 이 말의 전성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며 본심을 말했고, 탑건의 기수였던 타바라 세이키도 나리타 브라이언이 전성기였다면 탑건은 관중석까지 날아갔을 것이라며 이를 인정했다. 또한 3관 당시만 해도 경기 때마다 닳아있던 편자가 더 이상 닳지 않게 된 것에서 괴물같던 각력이 크게 쇠퇴해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뒤 열린 춘계 천황상에서 동갑내기 사쿠라 로렐[10] 에게 패배한다.
이어 1200m 단거리 대회인 타카마츠노미야배에 출주하는 기행을 선보인다. 나리타 브라이언이 출주한 1996년부터 타카마츠노미야배(이후 1998년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으로 명칭 변경)는 G2에서 G1급 레이스로 격상된 대신 경주거리가 2000m에서 1200m로 줄었는데, 스피드와 스태미너는 상충관계에 있기 때문에 경주마의 적정 경주 거리가 중요시되는 현대 경마에서 2,000m 이상에서만 뛴 말을 1200m 초단거리 레이스에 보낸다는 것은 무모하단 의견이 많았다. 사실 이 출주에는 진영 입장에서도 고심한 부분이었는데, 나리타 브라이언이 더는 60kg 가까운 근량을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근량 부담이 없는 경주 중에서 나리타 브라이언의 격에 맞는 레이스를 찾다 보니 타카마츠노미야 기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11] 아무튼 이때의 일로 당시 막 G1으로 승격되었음에도 출주마의 무게감이 떨어져 흥행에 고심하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은 왕년의 삼관마가 온다는 소식으로 매스컴을 통해 주목받으며 나리타 브라이언은 대회 내내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경주에선 4착으로 골인, 대회 직후 굴건염이 발생해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하고 나서는 종마가 되었는데, 2세대 자손이 일본 외에서 활약하며 종마가 된 암말도 있었지만, 은퇴 후 불과 2년 뒤인 1998년에 장폐색으로 인한 위장 파열로 안락사되어 자손을 널리 퍼트리지는 못했다.[14] 나리타 브라이언의 빠른 죽음과 비와 하야히데의 종마적 부진은 사설 트레이닝 센터[15][16] 건설 등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자금 사정이 위험해져 가던 생산지 하야타 목장의 경영에 치명상이 되어, 결국 목장은 2002년 11월 파산, 목장주는 씨수말 신디케이트의 자금 횡령죄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살게 되는 파국을 맞는다. 또한 나리타 브라이언 기념관은 유슌 스탤리온 스테이션 측에서 매입하여 유슌기념관[17] 으로 개명, 내부는 거의 오구리 캡 기념관 수준이 되어버렸다.
2008년산
데뷔 직후 발견된 문제는 항상 텐션이 높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며, 반면 겁이 많아 자기 그림자가 신경쓰여 경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전자는 짧은 간격으로 자주 출전시켜 에너지를 발산시키고, 후자는 섀도우 롤을 씌워 그림자를 보지 못하도록 대응했다. 후자는 나리타 브라이언의 심볼이 되었지만[18] , 전자는 혹사로 연결되어 고관절 부상의 원인이 되었다.
[각주]
1. 개요[편집]
94년, 국화상.
나리타 브라이언, 7마신 차의 충격.
무리에 정답이란 없다.
2011년 킷카상 CM
일본의 경주마. 이름은 나리타산 후도손[5] 에서 따온 관명(소속을 나타내는 이름)인 나리타 + 아버지 말의 이름(Brian's Time)의 조합이다. 같은 어머니를 둔 비와 하야히데와는 반형제 지간으로, 유명한 명마였던 형조차도 뛰어넘는 당대 최강의 명마였으나 30세로 천수를 누린 형과는 달리 이른 나이에 부상으로 은퇴 후 요절까지 하여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말이다.
2. 혈통[편집]
반형제인 비와 하야히데는 1993년 킷카상을 비롯해 G1 3승을 기록했고, JRA 1993년 연도대표마에 올랐다. 전형제인 비와 타케히데는 1998년 라디오탄파상(GIII)를 우승했다.
모마 퍼시피커스의 반형제 여동생 캣퀼(Catequil)은 팔레놉시스와 키즈나의 모마다. 특히 팔레놉시스는 부마가 같은 브라이언스 타임이므로 유전적으로 3/4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3. 생애[편집]
홋카이도의 하야타 목장에서 어미가 같은 반형제인 비와 하야히데가 태어난 다음 해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눈에 띄는 말은 아니었는데 점차 목장 관계자들에게 신체 능력을 높이 평가 받게 되었고 1992년 4월 비와 하야히데가 릿토 트레이닝 센터로 떠난 후 10월에 나리타 브라이언의 경주마로서의 조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조교사는 탄력, 등의 부드러움, 민첩성에 있어 비와 하야히데를 넘는 소질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편 조련 중 웅덩이를 보고 놀라는 겁 많은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이 후 마주 야마지 히데노리와 조교사 오쿠보 마사아키가 목장을 방문해 2400만엔에 나리타 브라이언을 구매했는데 조교사는 후에 이 때 비와 하야히데가 활약했던 시점이었다면 자신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3.1. 1993년(2세)[편집]
5월에 릿토의 오쿠보 마사아키의 마방에 왔고 주전기수는 미나이 카츠미가 되었는데 처음 나리타 브라이언을 타 본 후 오구리 캡을 탔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데뷔 초반 겁이 많아 경기 중에 자신의 그림자를 무서워해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느낀 조교사 오쿠보는 자신의 아버지가 관리했던 경주마 패싱 골이 코에 섀도우 롤을 장착하고 나서 성적이 안정되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6전 째인 교토 3세 스테이크스 때 부터 섀도우 롤을 장착했으며 이 후부터 나리타 브라이언의 상징이 된다. 이 후 아사히배 3세 스테이크스에서 우승하면서 작년의 비와 하야히데가 받지 못했던 JRA상 최우수 3세 수말 상을 받는다.
3.2. 1994년(3세)[편집]
1994년 클래식 시즌은 그야말로 동세대와는 다른 차원으로, 10년만의, 동시에 헤이세이 시대 첫번째의 클래식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으며 이 중 사츠키상과 킷카상은 코스 레코드를 내며 압승. 특히 킷카상은 2번마와 무려 7마신 차로 들어와 "고독한 경주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현재 모든 클래식 3관마 중 2착과의 마신 차 합이 최대인데, 사츠키상 1.25마신 + 더비 1.75마신 + 킷카상 0.75마신으로 총합 3.75인 심볼리 루돌프를 한참 제치고 총합이 3.5 + 5 + 7 = 15.5이다.[6] 형 비와 하야히데와의 대결도 대중들의 관심을 모았고 양쪽 진영에서도 서로를 라이벌로 인식했지만 비와 하야히데가 천황상 가을 후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고마와의 첫 대결이었던 아리마 기념에서 단승 1.2배의 압도적인 인기에 부응하며 여걸 히시 아마존을 3마신차로 떨치고 또 다시 완승했다.[7] 이 때의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 경기를 뛸 때마다 편자가 눈에 띄게 닳아서 매번 갈아줘야 했다고 할 정도로 각력이 괴물같았다고 하고, 심볼리 루돌프를 담당했던 노히라 조교사가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현시점에선 브라이언이 위다'라고 했을 정도.[8]
3.3. 1995년(4세)[편집]
1995년에 한신대상전을 우승한 후 고관절염이 발생, 10월에나 복귀했지만 무리한 복귀라는 말이 많았다. 주변의 걱정대로 천황상 가을에서 12착으로 대패하였고 나리타 브라이언 스스로도 이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눈물을 흘린 사진이 남아있다.[9] 이후 전성기의 기량을 찾지 못하며 하향세를 타게 되었다.
3.4. 1996년(5세)[편집]
그러한 와중에도 사상 최고의 G2 레이스 중 하나라 불리는 1996년 한신대상전에서 95년 연도 대표마인 마야노 탑건과의 승부에서 승리하며 팬들에게 부활을 꿈꾸게 했다.
마지막 승리를 장식했던 1996년의 한신대상전은 G2임에도 경기전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역대 최강자의 부활 vs 현역 최강의 격돌이라는 면에서 큰 기대를 모았으며 실제로 팬들의 기대에 맞는 역대급 내용을 보여줬다. 이 대결을 보기 위해 토요일임에도 6만명 가까운 관중이 한신경마장을 찾았을 정도. 다른 경쟁자들을 멀리 내버려두고 초경합을 벌이는 승부를 벌이며 경마 팬들에게서 당대 역대급 경기라고 칭송받았으며,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2022년 10월 JRA에서 진행한 '경마 명승부 열전'에서는 오구리 캡과 타마모 크로스의 1988년 아리마 기념, 그래스 원더와 스페셜 위크의 1999년 아리마 기념을 제치고 전체 90068표 중 8933표를 받으며 4위로 뽑혔다.
그러나 경마 관계자들은 나리브의 경기력에 대해 의문을 가졌는데, 당시 마야노 탑건과의 대결을 보면 라스트 스퍼트의 접전 끝에 거의 코 끝 수 센티미터 차이로 승리하는데, 전성기 시절의 트레이드 마크로 5~7마신 이상의 격차를 내는 힘있는 주행을 뽐내던 그런 나리타 브라이언이 마지막 직선에서 '접전'을 벌인다는 것은, 이미 전성기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의미이다. 나리타 브라이언의 기수 타케 유타카도 경기 직후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라고 말했지만, 열기가 가라앉은 후의 인터뷰에서는 '이기긴 했지만 아니라는 느낌도 있었다. 이 말의 전성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며 본심을 말했고, 탑건의 기수였던 타바라 세이키도 나리타 브라이언이 전성기였다면 탑건은 관중석까지 날아갔을 것이라며 이를 인정했다. 또한 3관 당시만 해도 경기 때마다 닳아있던 편자가 더 이상 닳지 않게 된 것에서 괴물같던 각력이 크게 쇠퇴해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얼마 뒤 열린 춘계 천황상에서 동갑내기 사쿠라 로렐[10] 에게 패배한다.
이어 1200m 단거리 대회인 타카마츠노미야배에 출주하는 기행을 선보인다. 나리타 브라이언이 출주한 1996년부터 타카마츠노미야배(이후 1998년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으로 명칭 변경)는 G2에서 G1급 레이스로 격상된 대신 경주거리가 2000m에서 1200m로 줄었는데, 스피드와 스태미너는 상충관계에 있기 때문에 경주마의 적정 경주 거리가 중요시되는 현대 경마에서 2,000m 이상에서만 뛴 말을 1200m 초단거리 레이스에 보낸다는 것은 무모하단 의견이 많았다. 사실 이 출주에는 진영 입장에서도 고심한 부분이었는데, 나리타 브라이언이 더는 60kg 가까운 근량을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근량 부담이 없는 경주 중에서 나리타 브라이언의 격에 맞는 레이스를 찾다 보니 타카마츠노미야 기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11] 아무튼 이때의 일로 당시 막 G1으로 승격되었음에도 출주마의 무게감이 떨어져 흥행에 고심하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은 왕년의 삼관마가 온다는 소식으로 매스컴을 통해 주목받으며 나리타 브라이언은 대회 내내 얼굴마담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경주에선 4착으로 골인, 대회 직후 굴건염이 발생해 그대로 은퇴했다.
3.5. 은퇴 후[편집]
[1] 심볼리 루돌프 이후 10년만이자 통산 5번째 트리플 크라운. 헤이세이 최초의 삼관마이기도 하다.[2] 당시 기준으로 8세.[3] 현 JRA상 최우수 2세 수말.[4] 현 JRA상 최우수 3세 수말.[5] 케이한 본선 코리엔역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는, 나리타산의 관서지역 별원인 명찰이다.[A] A B 중상마만 서술, 볼드 표시는 G1/Jpn1 우승마.[6] 참고로 모든 클래식 3관마의 2착과의 마신 차 합은 다음과 같다. 세인트 라이트 3+8+2.5=13.5, 신잔 0.75+1.25+2.5=4.5, 미스터 시비 0.5+1.75+3=5.25, 심볼리 루돌프 1.25+1.75+0.75=3.75, 나리타 브라이언 3.5+5+7=15.5, 딥 임팩트 2.5+5+2=9.5, 오르페브르 3+1.75+2.5=7.25, 콘트레일 0.5+3+0(목 차이)=3.5.(세인트 라이트와 신잔의 기록 출처는 위키이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7] 비와 하야히데가 부상으로 은퇴했기 때문에 중계를 맡은 관서 테레비의 아나운서 스기모토 키요시의 "동생은 괜찮다"는 코멘트가 많이 회자되었다.[8] 게임 위닝 포스트 시리즈에서는 말의 최중요 능력치로 스피드 능력이 있는데, 최대치는 80이지만 실질적으로 80을 달성한 말은 없고 79가 최고이며 그나마도 전부 외국말들 뿐이다. 일본산마 또는 지입마(즉, 플레이어가 소유할 수 있는 말) 중 최고치는 77인데 위닝포스트9 2022까지 포함해서 스피드 77을 달성한 플레이어 소유 가능마는 딥 임팩트와 엘 콘도르 파사, 그리고 이 나리타 브라이언 뿐이다. 심볼리 루돌프도 77 이지만 게임 특성 상 2회 차 부터 소유 가능하다고 한다. 즉, 수천마리의 말들을 등장시키며 능력을 수치화 시킨 게임에서도 스피드 능력은 일본역대 톱 4로 꼽을 정도로 고평가 받고 있다는 뜻. [9] 사실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 것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동물은 사람과 달리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10] 동기긴한데 클래식 시즌엔 연달아 병으로 장기간을 회복에 전념하느라 클래식 경주를 아예 뛰질 못했고,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고마 시즌에도 양다리 골절을 당해 1년을 또 회복하느라 보내는 등 굉장히 늦게 만개한 케이스. 그 때문에 아랫세대인 마야노 탑건, 마블러스 선데이와 3강을 이뤘고, 탑건에게 연도대표마를 뺏기긴 했지만 대체로 3강 중 최강자로 꼽혔다.[11] 사실 킷카상을 제외한 장거리 G1급 중상 경기를 승리한 삼관마는 이미 있지만, 단거리 중상을 승리한 삼관마는 없기에 최초로 단거리 중상을 승리한 삼관마라는 타이틀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고 한다.[12] 중앙경마 기준[13] 순위 - 2000년 224위, 2001년 58위, 2002년 38위, 2003년 57위, 2004년 134위, 2005년 139위, 2006년 234위, 2007년 494위
은퇴하고 나서는 종마가 되었는데, 2세대 자손이 일본 외에서 활약하며 종마가 된 암말도 있었지만, 은퇴 후 불과 2년 뒤인 1998년에 장폐색으로 인한 위장 파열로 안락사되어 자손을 널리 퍼트리지는 못했다.[14] 나리타 브라이언의 빠른 죽음과 비와 하야히데의 종마적 부진은 사설 트레이닝 센터[15][16] 건설 등의 공격적인 경영으로 자금 사정이 위험해져 가던 생산지 하야타 목장의 경영에 치명상이 되어, 결국 목장은 2002년 11월 파산, 목장주는 씨수말 신디케이트의 자금 횡령죄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살게 되는 파국을 맞는다. 또한 나리타 브라이언 기념관은 유슌 스탤리온 스테이션 측에서 매입하여 유슌기념관[17] 으로 개명, 내부는 거의 오구리 캡 기념관 수준이 되어버렸다.
3.5.1. 주요 Broodmare Sire (BMS) 산구[편집]
2008년산
- 올 애즈 원(아비 네오 유니버스) - 삿포로 2세 스테이크스(2010)
4. 경주 스타일[편집]
데뷔 직후 발견된 문제는 항상 텐션이 높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며, 반면 겁이 많아 자기 그림자가 신경쓰여 경주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는데, 전자는 짧은 간격으로 자주 출전시켜 에너지를 발산시키고, 후자는 섀도우 롤을 씌워 그림자를 보지 못하도록 대응했다. 후자는 나리타 브라이언의 심볼이 되었지만[18] , 전자는 혹사로 연결되어 고관절 부상의 원인이 되었다.
5. 기타[편집]
- 나리타 브라이언이 죽은 98년 10월부터 일본 경마계는 비극적인 일이 이어졌는데, 11월에는 사일런스 스즈카의 침묵의 일요일, 12월에는 스페셜 위크의 고향인 히다카타이요 목장의 화재로 스페셜 위크의 반형제 누나인 오스미 캔디를 포함한 암말 20여마리가 죽는 일이 이어졌다.
- 2000년 당시 일본에서 투표한 20세기 최고의 명마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위와 3위가 바로 스페셜 위크와 오구리 캡.
- 현역시절 라이벌 관계였던 히시 아마존을 사실 짝사랑한게 아니었냐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나리타 브라이언이 히시 아마존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종종 목격되었다던가, 은퇴하는 날엔 히시 아마존의 마방 근처에 데려왔더니 멍하니 히시 아마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고 있었다는 썰이 있는 등 경마팬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이야깃거리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하지만 둘의 교배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나리타 브라이언은 은퇴하고 2년만에 급사했고 히시 아마존은 97년에도 현역으로 뛰려고 훈련을 하다가 굴건염으로 은퇴, 미국에서 번식암말 생활을 했기 때문에 둘의 교배 기회 자체가 없었다.
-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만화 은과 금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300억엔을 건 내기 경마에서 당대의 명마들과 같이 JRA 회장측의 대표마로 등장한다.[19][20] 다만 내기 시합 당일까지 성적이 계속 나빠져 회장측에선 퇴물이 됐다고 무시하며 다른 명마들이 이겨줄거라고 생각했지만 히라이 긴지만은 나리타는 격이 다른 말이라고 판단,[21] 하위를 달리는 나리타 브라이언에 철통같이 견제를 걸어둔다, 그리고 이 예상이 맞아떨어져 거짓말처럼 부활, 견제를 헤치고 선두를 달려서, 긴지가 비장의 수로 자신측 대표마 어니스 에이지와 외모가 닮은 점을 이용해서 바꿔쳐 투입한 영국의 명마 람타라[22] 와 3코너에서부터 맹추격, 결전을 벌이게 된다. 사진 판독 끝에 코 하나 차이로 나리타가 패배하는데, 실질적으론 경기 초반부터 외곽으로 돌도록 견제를 당해 경로 상의 손해가 많았던 나리타와 달리 람타라는 바꿔치기 된 대상인 2류마 어니스 에이지로 생각되어 견제를 전혀 받지 않았기에 은근히 나리타의 손을 들어주는 경기 내용이다. 나리타를 퇴물 취급하던 회장이 막판의 경합에선 나리타를 울부짖으며 응원하는 장면이 블랙 코미디.
- 나리타 브라이언이 마지막으로 출주했던 1996년 타카마츠노미야배(현재의 타카마츠노미야 기념) 대회는 4대 경마장(도쿄, 나카야마, 한신, 교토) 외의 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G1 상설 대회로도 유명하지만 주쿄 경마장 첫 G1 상설대회라는 상징이 무색하게 군악대의 팡파르 연주 실력이 처참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니코니코 동화에선 일본 4대 막장 팡파르 연주로 꼽았을 정도이며 나리타 브라이언 부진의 원인(...)이라는 드립까지 나올 정도이다.
- 주전 기수는 타마모 크로스의 주전 기수였던 미나이 카츠미, 부상 복귀 후엔 타케 유타카가 주로 기승했고 1996 천황상 (봄)때는 미나이가 기승했다. 1994년에 미나이 카츠미는 나리타 브라이언의 4승과 마블러스 크라운의 재팬컵 우승으로 G1 5승을 기록해 JRA 특별상을 받았고 NHK 홍백가합전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 나리타 브라이언과 가장 많이 맞붙은 상대는 의외로 사쿠라 로렐이나, 마야노 탑건이 아닌 삼손 빅이었다. 삼손 빅은 93년 G3 하코다테 스테이크스에서 2착으로 6착에 그친 나리타 브라이언을 이겨보기도 했다. 또한 삼손 빅은 클래식 3관에 모두 출전해 나리타 브라이언과 맞붙었으나, 사츠키상 18두중 17착, 일본더비 18두중 18착, 킷카상 15두중 15착으로 참패해 역3관마라 불렸다. 삼손 빅은 킷카상 이후 더트를 거쳐 장애물 경주로마로 변경되었고 6살로 은퇴한다. 이후 츠쿠바 대학에 승마부에 보내졌다가 2009년 이후 행방불명 상태다.
6. 경주 성적[편집]
[14] 하지만 다른 브라이언즈 타임의 자식들은 대부분 종마 성적이 좋지 못하고 반형제 형인 비와 하야히데 또한 종마 성적이 좋지 못했기에 오래 살았더라도 좋은 자마를 낳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15] 텐에이 트레이닝센터, 현재까지도 일본 최고의 경주마 트레이닝 시설로 평가된다, 하야타 목장 파산 후엔 샤다이 산하의 노던 팜에서 인수했다.[16] 정확히는 실크 레이싱과 그래스 원더의 마주가 파산한 하야다 목장의 지원을 위해 공동 인수하였으나 실크 레이싱의 경영 악화로 하야다 목장의 경쟁 상대였던 샤다이 그룹과 제휴 하면서 샤다이의 노던팜에 매각한 것이다. [17] 홋카이도 니캇푸군 니캇푸쵸에 위치한 유슌 메모리얼 파크의 부속시설. 오구리 캡을 필두로 야에노 무테키, 나리타 브라이언과 그 어머니인 퍼시피커스, 킹 헤일로, 그리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던 마야노 탑건 등 많은 명마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18] 데뷔 이후의 들쑥날쑥했던 성적이 섀도우 롤을 씌운 이후로부터 완전히 급상승했기 때문에 나리타 브라이언에게는 "섀도우 롤의 괴물"이라는 별명도 있었다.[19] 작중에서는 원래의 이름을 살짝 바꾼 나리타 브라이'온'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당시 회장측 말로 나리타와 함께 나온 말들은 시시 아마존(히시 아마존), 사쿠라 킹 오(사쿠라 치토세 오), 마사토 탑건(마야노 탑건), 타이키 바이자드(타이키 블리자드), 제스인(제뉴인)의 6필로 95년의 제40회 아리마 기념 대회에 참가했던 말들 중 인기 상위 6필에 해당하는 말들이었다. 사족으로 긴지측 말들 중 그나마 회장측의 말들과 대항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됐던 타야스 타케시는 95년도 일본 더비 우승마인 타야스 츠요시가 원네타로 아리마 기념에는 참가하지 않았다.[20] 정발판에선 다른 말들은 이름이 변한대로지만 나리타만 그냥 나리타 브라이언으로 나온다, 번역자의 무지가 역으로 원이름을 찾게 해버린 희한한 경우.[21] 긴지는 이 내기 경마의 판을 짤 때부터 이 승부를 가르는 것은 '나리타를 어떻게 막느냐'뿐이라고 깔고 들어갔고, 애초에 최근 성적이 부진한 이유부터가 긴지가 나리타를 관리하는 조교사들을 매수해서 컨디션을 아작내놓은 탓이었다.[22] Lammtarra. 데뷔전을 포함 단 4전으로 더비와 KGVI&QES, 개선문상을 휩쓸고 4전 4승으로 은퇴한 유럽의 전설적인 명마. 작중에서는 람타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정발 번역은 램탈. 일본 경마계와의 악연이 있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람타라 문서 참조.[레코드] A B C D [국제GI] [23] 독일의 경주마. 1994, 1995년 독일 연도대표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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