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라이트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 경주를 모두 제패한 삼관마이다.
2. 혈통[편집]
아비인 다이올라이트는 1930년 영국 2000 기니 우승마로, 일본에 처음으로 수입된 영국 클래식 우승마다. 1941년~1943년, 1946년 일본 리딩 사이어를 차지했다.[3]
어미인 플리펀시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8대 경주 우승마 4마리를 배출한 암말이며, 자마 8대 경주 총합 8승은 사상 최대 기록이다.
- 타이호 (大鵬, 父 : 시안모어) - 1934년 제실어상전[4] (요코하마), 메구로 기념(봄) 우승마
- 쿠리 히카리 (クリヒカリ, 父 : 시안모어) - 1942년 요코하마 농림성상전 4세 호마, 1943년 제실어상전(가을) 우승마. 현역 13전 9승.[5]
- 토사 미도리 (トサミドリ, 父 : 프리메로) - 1949년 사츠키상, 킷카상 우승마. 현역 31전 21승.[6]
3. 생애[편집]
1938년 미쓰비시 재벌이 경영하는 코이와이 농장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4월에 데뷔를 시키려고 해서 클래식 첫 경주인 사츠키상[7] 에는 출전하지 못할 뻔했지만, 마주인 카토 유사쿠가 조교 중에 먼저 데뷔하려했던 브랜드 솔[8] 을 이기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꿔 세인트 라이트를 먼저 데뷔시켰다.
데뷔전에선 7번 인기를 받았지만 2착과 5마신차로 승리했다. 그리고 바로 2주 후에 사츠키상에 출전하여 미나미 모어를 3마신차로 꺾고 승리했다. 도쿄 유슌(일본 더비)에서는 미나미 모어에게 1번 인기를 뺏기고 2번 인기였으나, 2착마 스테이츠에 8마신 차이로 압승을 거두고 2관을 달성했다.[9]
더비 우승 이후 세인트 라이트에 부과된 근량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요코하마에서 열린 핸디캡 경주에선 66kg을[10] 짊어지고 경기하여 3착하여 커리어 중 유일하게 연대에 실패했으며, 일주일 후 같은 무게를 짊어지고 우승을 차지했다. 킷카상[11] 전초전에선 68kg을 짊어지고 2착하기도 했다.
킷카상에선 1번 인기로 출전하여 미나미 모어를 2 1/2마신 차이로 꺾고 일본 최초의 삼관마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3관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12] 중일전쟁으로 인해 전운이 감도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13] 더비 우승 때 만큼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고 한다. 상금 또한 현금이 아닌 국채로 발행되었고, 이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휴지조각이 되었다.
어찌됐든 카토 마주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천황상[14] 을 목표로 나카야마의 핸디캡 경주에 출주시키려고 했으나, 이 경주에서 72kg이라는 말도 안되는 근량을 감당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미련없이 포기하고 바로 은퇴시켰다. 이 때문에 카토는 자신에게 경마를 알려주기도 했던 작가 키쿠치 칸에게 '상금을 벌려면 더 뛰게 할 수 있는 것을 욕심부리지 않고 은퇴시켰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카토는 1945년 5월 26일에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3.1. 종마 생활[편집]
은퇴 후 세인트 라이트는 코이와이 농장에서 종마 생활을 했다. 1947년에는 자마 올라이트가 세인트 라이트가 출전하지 못한 천황상 봄 대회[15] 을 우승했다. 그러나 GHQ에 의해 미쓰비시 재벌이 해체되고 코이와이 농장에서 경주마 생산이 금지되자 1949년 이와테 축산 시험장으로 옮겨졌다. 이후에도 오언스나 세인트 오 같은 팔대경주 승리마를 배출했다.
1947년부터 나카야마 경마장[16] 에서 G2 경주인 세인트 라이트 기념이 열리고 있으며, 1995년에는 킷카상 트라이얼로 지정되었다.
신잔이 두번째 삼관마가 된 다음해인 1965년에 노환으로 죽었다. 자마로 천황상 우승마 올라이트와 오언스, 1952년 킷카상 우승마 세인트 오 등이 있으며, 현재는 부계, 모계 모두 대가 끊겼다.
4. 여담[편집]
- 세인트 라이트가 데뷔했을 당시에 일본경마회[17] 경주에 체고[18] 164cm 이상의 말은 등록이 불가능했다.[19] 이 때문에 체고 166cm였던 세인트 라이트는 몰래 앞발 밑의 바닥을 파서 통과됐다는 이야기가 있다.[20]
- 역대 삼관마 중에 유일하게 1년만 뛰고 은퇴한 경주마다. 이당시엔 2세 경주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데뷔 이후 최단기 3관 달성 기록(225일)도 가지고 있다. 2세 데뷔가 보편화된 지금은 달성하기 매우 힘든 기록이다.
- 1942년에는 같은 어미를 둔 반동생 쿠리 히카리 (옛 이름 : 아르바이트가), 1949년에는 또다른 반동생 토사 미도리가 사츠키상을 우승하면서 현재까지도 유일한 3형제 사츠키상 제패를 이뤄냈다. 이중 토사 미도리는 종마 성적을 인정받아[21] 세인트 라이트와 같이 현창마에 선정되었다.
-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한글판에선 명칭이 '센트라이트'로 명명되었다.
5. 경주 성적[편집]
[1] 당시 기준으로 28세.[2] 중상마만 서술, 볼드 표시는 팔대경주 우승마.[3] 중간의 1944년과 1945년은 2차대전(정확히는 태평양과 CBI 전구에서 일본의 패망이 짙어졌을 때) 때문에 집계되지 않았으므로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차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4] 천황상의 전신[5] 쿠리 히카리의 원래 이름은 아르바이트(アルバイト)였다. 도쿄우준경주에서는 2착, 교토 농림성상전 4세 호마에서는 3착을 기록했다.[6] 도쿄 우준에서는 7착을 기록했다.[7] 당시 명칭 요코하마 농림성 상전 4세 호마.[8] 그해 나카야마 3세 암말 특별(현 오카상)을 우승했다.[9] 현재도 1955년 더비 우승마인 오토키츠와 함께 더비 최다 마신차 승리 기록이다.[10] 훗날의 텐 포인트가 경기 중에 부상당하고 결국 안락사되었을 때 근량이 66.5kg이었다.[11] 당시 명칭 교토 농림성 상전 4세 호마.[12] 삼관 경주 중 마지막으로 생긴 사츠키상이 2년 전인 1939년에 생겼다.[13] 당장 2달 뒤에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14] 당시 명칭 제실어상전.[15] 당시 명칭 평화상[16] 초창기에는 도쿄 경마장에서 열렸으나 이후 변경되었다.[17] 일본중앙경마회의 전신.[18] 앞발바닥에서 목과 등의 경계까지의 길이.[19] 이 당시의 경마는 군마를 양성한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20] 다만 해당 제도는 세인트 라이트가 데뷔하기 전에 이미 폐지되었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21] 종마로서의 평가만 보면 세인트 라이트를 아득하게 뛰어넘는다.[22] 호마(呼馬)는 개인 마주에게 우선적으로 판매된 말을 뜻한다.JRA 등 경마 단체에서 사들여서 추첨을 통해 마주에게 매각하는 추첨마와 구분된다.[23] 현 사츠키상.[24] 현 킷카상.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13:35:00에 나무위키 세인트 라이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