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케 호프
최근 편집일시 :
1. 개요[편집]
일본의 경주마. 1973년 연도대표마. 하이세이코와의 라이벌리로 유명하다.
2. 혈통[편집]
부마 인디애나는 1964년 영국 클래식 3관 경주 중 하나인 세인트 레저 스테이크스의 우승마이고 모마 하야 후부키는 일본의 경마 초창기였던 1907년에 코이와이 농장에서 수입한 기초 번식 암말 중 하나인 뷰티풀 드리머 계에 속하며 현역시절 31전 4승을 기록했다. 타케 호프의 반형제 타케 후부키는 1971년 우준 빈마 우승마다.
3. 생애[편집]
3.1. 1972년, 1973년 시즌[편집]
모마 하야 후부키가 파르홀론과 교배하여 낳은 타케 후부키가 1972년 우준 빈마에서 우승했기 때문에 한 살 어린 반형제 타케 호프는 1972년 7월의 데뷔전에서 1번 인기를 받았고 승리를 따냈지만 이후 6전에서 승리하지 못하며 데뷔 시즌을 마쳤다.
1973년 클래식 시즌 첫 경기에서 승리했지만 사츠키상 트라이얼 경주인 야요이상에서 하이세이코에 대패하며 7착에 그쳐 사츠키상에 나가지 못했고 다음 경기에서 코차로 우승하면서 겨우 일본 더비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지방과 중앙을 합쳐 10연승을 질주하며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하이세이코가 단승 지지율 66.6%의 압도적 인기를 자랑한 반면 타케 호프는 9번 인기에 스타트 위치도 7프레임 21번의 외곽이었다. 경주가 하이 페이스로 진행되면서 후방 대기조가 유리해졌고 후방에서 기회를 엿보던 이치후지 이사미가 골 앞 200m 지점에서 하이세이코를 추월하자 이를 따라 간 타케 호프가 이치후지 이사미를 제치고 2분 27초 8의 레코드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하이세이코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타케 호프의 승리를 운 좋은 플로크 승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고 5달 후 교토신문배에서 하이세이코가 2착, 타케 호프가 8착을 기록하면서 더비는 플로크 승리였다는 게 정설이 되는 듯 했다. 이후 주전기수 시마다 이사오가 조교 중 낙마로 부상을 당해 타케 쿠니히코가 킷카상에서 타케 호프를 기승하게 되었다.
더비 우승마임에도 지난 경기 패배와 기수 변경의 이유로 킷카상에서 6번 인기를 받는다. 아이돌 호스인 하이세이코는 물론 1번 인기였고 타케 호프는 하이세이코의 라이벌이라기 보단 옛 원수 역할에 가까웠다. 전반 1000미터를 65.2초로 통과하는 초 슬로우 페이스에 제 3코너에서 하이세이코가 먼저 앞으로 나가 선두로 달렸고 타케 호프도 이를 보고 쫓아가 나란히 결승점을 통과했다. 사진판정 결과 타케 호프가 승리했고 더비 2위였던 이치후지 이사미가 3착을 기록했다.
1973년 연도대표마와 최우수 4세(현 3세) 수말에 선정되었다. 이 해 하이세이코와 4번 붙어 타케 호프가 2번 우승, 하이세이코 1번 우승을 기록했다.
3.2. 1974년 시즌[편집]
1974년 5세(현 4세) 시즌의 타케 호프가 출전한 5경기에 하이세이코도 모두 나왔다. 하이세이코 진영이 의도적으로 타케 호프와 같은 경주에 나가는 일정을 짰다는 얘기가 있다.
첫 경기였던 아메리칸 자키 클럽 컵에서 우승했지만 다음 나카야마 기념에선 불량마장에 고전하며 하이세이코에 패해 3착을 기록했다. 이어진 천황상 봄에서 우승하며 신잔에 이어 2번째로 일본 더비, 킷카상, 천황상을 우승한 말이 되었다. 이후 타카라즈카 기념을 회피하며 휴양 후 복귀 전인 오픈 경주에서 5착을 기록했다.[3]
아리마 기념 경기는 타케 호프와 하이세이코의 은퇴전이었다. 팬 투표 1위는 하이세이코 였지만 배당 인기에서 처음으로 하이세이코를 이겨 1번 인기로 출주, 그러나 2번 인기 타니노 치카라가 승리했고 3번 인기 하이세이코가 2착, 타케 호프는 3착을 기록했다. 하이세이코와의 전적은 통산 9경기에 타케 호프 4번 우승, 하이세이코 2번 우승으로 끝났다. 경기 후에 양 진영의 인터뷰에선 우승마 타니노 치카라는 제쳐둔 체 서로의 순위에 코멘트 했고 언론 역시 둘의 은퇴 레이스를 중점으로 보도했다.
3.3. 은퇴 후[편집]
종마 생활을 시작했지만 성적이 좋지 못했고 1994년에 죽었다.
4. 여담[편집]
- 아이돌 호스 하이세이코의 압도적 인기 덕분에 킷카상에 기승했던 타케 쿠니히코는 경기 후 "레코드로 더비에 승리한 말인데 이상하게 인기가 없었다"라고 코멘트, 주전 기수 시마다 이사오는 1974년 아메리칸 자키 클럽 컵에서 타케 호프가 하이세이코를 꺾고 우승했으니 다음 경기에선 1번 인기를 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이세이코가 1번 인기, 타케 호프는 3번 인기를 받자 "어째서 그 말만이 인기를 모으는가"라고 분노했다고 한다.
- 시마다 이사오의 아들이 하이세이코의 팬이어서 더비에서 하이세이코가 패하자 울었다는 얘기가 있다. 반면 타바라 세이키는 타케 호프가 이기는 것을 보고 감명받아 경마 기수의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 타케 호프가 더비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4세 중거리S 경기에서 사쿠라 체스를 코차로 꺾고 우승해 참가 자격을 얻었기 때문인데 이것을 두고 경마 역사 연구가 야마모토 잇쇼는 "사쿠라 체스의 코가 좀 더 길었다면 일본 경마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라 평했다.
- 하이세이코의 자마 카츠라노 하이세이코가 일본 더비에서 우승했을 때 2위였던 린도 플레벤의 기수는 타케 호프의 주전 기수 시마다 이사오였다.
5. 경주 성적[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2 03:29:03에 나무위키 타케 호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