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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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자유민주당(일본어:
약칭은 자민당[28] (自民党, じみんとう), 영어 약자는 LDP(Liberal Democratic Party), Lib Dems.이다. 1955년 창당되었으며 창당한 이래로 대부분 기간 동안 일본의 집권 정당으로 역할했다. 현 당수(총재)는 기시다 후미오이다.
오랜 기간 집권한 정당이다 보니 현대 일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29] , 따라서 자유민주당을 알면 일본 정치를 다는 아니지만 큰 틀에 대해 제법 파악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국민의힘, 미국의 공화당, 대만의 중국국민당과는 달리 국제민주연합 소속이 아니다. 원래 국제민주연합의 창립 멤버였으나 탈퇴하였다.
2. 성립[편집]
1955년 일본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합당으로 이루어졌다. 이른바 55년 체제의 시작.[30]
배경을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하고 군부 정권이 몰락한 이후, 일본 정치계는 크게 자유당, 일본민주당, 일본사회당으로 나누어졌다. 그중 보수우파 기믹인 자유당은 자유, 민자를 중심으로, 중도우파 혹은 보수 온건 기믹인 일본민주당은 일본진보당과 뒤를 이은 개진당, 자유당의 비 요시다 시게루 계열(하토야마 이치로 등)을 중심으로 창당되었다. 물론 이때는 전형적인 다당제의 모습을 보여서 사회당과 일본민주당이 연합하거나 반대로 일본민주당 일부 계파와 자유당계가 연합해서 자유당(창당 당시에는 민주자유당)을 결성하기도 했고, 또 일부 계파가 다시 일본민주당으로 떨어져나가는 등 이합집산의 연속이었다. 1940년대 말에 자유민주당과 비슷하게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창당된 적이 있지만 오래가지 않아 하토야마 이치로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재분당되었고, 1954년에 하토야마 이치로가 총리가 되었고 1955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과반수를 확보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총선 이후 좌우로 나눠던 일본사회당이 통합하여 세력에 있어서 민주당에 맞먹는 거대 정당이 되자,[31] 내심 일본사회당이 자유당과 연합할까 불안했던[32] 일본민주당은 1955년 총선을 기점으로 원내 3당으로 전락한 자유당과 그 동안의 라이벌 관계를 청산하고 전격적으로 합당을 결의하게 되는데, 이렇게 탄생한 정당이 바로 자유민주당이다.
그리고 1956년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의외로 자민당은 61석밖에 확보하지 못하는 부진을 기록한 반면[33] 일본사회당은 49석을 확보하며 약진하지만, 이후 더 반등하지 못하고 일본사회당의 지지율은 점차 침체된다. 그리고 1958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287석, 일본사회당은 166석을 얻게 되지만[34] 이후 일본사회당이 당내 노선 투쟁으로 일부 계파가 민사당으로 빠져나가며 격차가 벌어지고, 더욱이 1960년대 말 일본공산당과 공명당이 약진하여 일본사회당 지지층이 나눠지는 바람에 자민당은 사실상 일본 정계의 핵심으로 부상한다.
3. 장기집권[편집]
1993년 8월~1996년 1월(2년 5개월), 2009년 9월~2012년 12월(3년 3개월)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집권 여당으로 군림하고 있는 일본 최강의 정당. 캐나다 자유당,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인민행동당에 버금가는 장기 집권 정당이기도 하다. 실제 자유민주당이 만들어진 55년부터 일본 중의원 선거는 2009년 선거를 제외하면 원내 제1당 자리는 항상 자민당이 차지했고[35] 의석수 비율도 앞의 2009년을 제외하면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36] 그 탓에 자민당 총재 선거는 거의 일본 총리를 가리는 자리나 다름이 없었다.[37] 자민 막부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렇게 자민당이 너무 오랜 세월을 집권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는 정당 정치가 아니라 자민당 내의 파벌 정치나 다름없으며, 이는 일본이 형식적 민주주의에 비해 실질적 민주주의는 허약하다는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본은 자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가 너무 오랫동안 공고히 유지되어 다른 당이 정권을 잡기도 어렵고, 겨우 정권을 잡아도 지지 기반이 약해 조그마한 실수 하나에도 내각이 금방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 외 정당들은 집권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무하기 때문에 실제로 정권을 잡았을 때 경험 부족으로 굉장히 미숙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38] 그래도 자민당이 전체 의석의 2/3 이상은 차지하지 못해서 헌법 9조 등의 수정은 불가능했고, 21세기 들어 세가 크게 위축되었지만 자민당 내에서도 호헌파가 상당수 있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55년 체제는, 정확히는 1.5정당(또는 1 1/2 정당) 체제를 의미했다. 무슨 말이냐면 제1야당으로서 자민당의 2/3 의석 확보를 저지하는 일본사회당(좌파)이 부분적인 양당제를 유지시켜 주었기 때문. 애초에 55년 체제란 표현 자체가 정확하게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일본 정치판이 1955년 이후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 체제로 통합된 것을 이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1996년 이후 사회당은 자민당과의 연정 과정에서 동의한 소선거구제 하에서 대거 의석을 잃게 되고, 이후 사회민주당 등으로 분당되면서 주요 지지 세력인 노동조합 등이 구 민주당으로 대거 이탈, 군소정당이 되고 만다.
자민당 상당수 의원은 일본 제국 시절 상류층으로부터 내려오는 인물이 많아[39] 보수적 성격이 강하며, 이것이 21세기에도 일부 자민당 의원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와 각종 논란이 끊이지 않는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의원 세습 문제로 가면 더 심각해진다. 고정 지지층이던 농민들이 일본 국민들의 식생활 변화 등으로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 도시로 떠나자, 당 입장에선 고정 표밭을 잃을까봐 이촌향도 현상을 막기 위해 방파제나 둑, 도로 공사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농촌 주민들을 지키고자 했다. 거기에 도시 사람들의 표를 얻고자 온갖 복지 혜택을 늘려 국가 부채를 쌓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나마 정규군을 신설하자는 강경 우파 성향은 1960~70년대 안보투쟁 이후 기시 노부스케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많이 잠잠해졌으나[40][41] 2000년대 모리 요시로 집권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소 다로,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 등이 꾸준히 집권하며 다시 심화되고 있다. 그나마 최근 2021년 자민당 온건 계파에 속하는 기시다 후미오가 총재에 당선되면서 오랜만에 온건파 총리가 나왔으나 기시다도 아베와 어느정도 사이가 깊었던 사람인지라 큰 변화를 보일 것 같지 않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다만 자위대의 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추진하는 등 군비 증강에는 적극적이지만 헌법 개정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극우층하고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4. 극우 정당이라는 오해[편집]
한국에선 과거사 문제로 극우 정당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42] , 국제적으로는 평범한 보수계 빅텐트 정당으로 인식된다. 일단 자유민주당의 공식적인 당 강령에는 극우적인 성향의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 또한, 당의 수뇌부가 완전히 극우화된 것도 아니고, 극우파가 당의 주류인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자민당이 세계평화를 기치로 내건 공명당하고도 연정 구성이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고노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 전 의원도 자민당이었다. 사실 애초에 한국에서 일본 극우의 대명사인 아베부터가 국제적인 기준에서 극우인지 불분명하다. 한국을 제외하면 아베가 다소 국수주의적이고 막 나가는 성향이 있다고는 해도 극우라고 하지는 않는다.[43]
물론 극우 성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민당의 수뇌부 전체가 극우는 아니라도 극우 인사들이 포진해 있는 것은 맞다. 또한 당의 인적 구성에서도 극우파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자민당은 온건 우파도 아니고, 극우도 아닌 우파 전반을 포함하는 우익 빅 텐트 정당이다.
특히 21세기 들어 온건파 성향의 인물들이 많이 빠져나가거나 비주류로 밀려나면서 한국에서의 인식이 더 나빠졌는데, 이는 아베 신조 총리를 위시한 일부 강경 우파 정치인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민당 내 파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된 파벌 항목 참조. 2010년대 들어선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자민당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어 국내외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보수적인 것도 아닌 것이 아베 신조도 당원들의 계속되는 요구에 따라 보수적인 정책을 일부 버렸다. 아베의 후임자인 기시다 후미오도 아베가 밀고 나가던 강압적인 태도를 버리며 주변 국가들과 평화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아베가 폐지시켰던 무비자 입국을 다시 부활 시켜 관광객을 유입시키려 하고 있다.
사실 한국에서 극우라 욕먹는 자민당 정치인들도, 정확히는 외교/안보/과거사 등과 관련해서만 우익적이고 나머지 분야에서는 일본 정치 특유의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애매모호한 입장인 경우가 많다. 조화를 중시하고 남들보다 튀는 것을 꺼리는 일본 문화 특성상 국내 문제에 강고하고 독선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은 정말 웬만한 중량급 정치인이더라도 꺼리는 편이고, 그나마 국내가 아닌 국외 문제에서 인상을 남기려는 것. 때문에 자민당의 극우적인 면모는 일본 국내나 서구권에 비해 한국, 중국 등지에서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한국에선 극우 정치인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아베 신조도 전세계적으로는 그냥 평범한 우익 정치인으로 인식된다.
오히려 외교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중도적인 면모도 강하다. 자민당은 포퓰리즘에서 흔히 보이는 소수자/약자에 대한 혐오를 거의 이용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사회 조화를 고려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온건파 본류출신 총리는 민주당 출신 총리들 못지않게 외교, 역사관적으로 혁신적인 총리들도 여럿 있었고 방류출신이라 하더라도 국내 경제 문제에 한정해서 경제정책으로 고용률과 외국인 취업률 또한 대폭 상승시킨 총리들도 있었다. 보수우익적인 사고관은 기본적으로 깔고가고 반한 반중감정을 일으키긴 하지만 국내 정서 문제들을 고려해 때로는 진보적인 정책들도 펼치는 우익대중주의적인 면모가 강하다. 이러한 면모의 여파로 일본의 야당들은 집권은커녕 지역정당으로 추락하거나 자기 간판을 키워서 국회의원을 연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자민당 강세의 이유[편집]
선진국에서도 사례가 드물 정도로 일당 우위 정당제로서 초장기간 동안 집권해 온 자민당의 장기 집권 이유에 대해 한국 등에선 일본 사회의 우경화, 일본 시민들의 시민 의식 등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자민당은 실용주의적 정책을 많이 하기도 하며, 그렇게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44]
5.1. 유연한 실리주의[편집]
자민당은 한국에서 인식되는 것보단 훨씬 온건한 정당이다.[45] 한국에서는 과하게 혐한 어그로를 끄는 일부 소속 정치인들 탓에 극우적 성향을 가진 정당으로 오해를 받곤 하지만, 사실 자민당은 중도부터 극우까지 상당히 다양한 성향을 가진 정치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정당이며, 그동안 자민당의 정책 어젠다를 보면 상당히 융통성 있고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왔다. 과거부터 외교·안보 및 사회·문화·복지 분야에서 진보적인 의제들까지도 흡수하면서 외연 확장성을 꾸준히 늘려왔는데, 이러한 자민당의 융통성과 실용적 면모에 대해 일부 정치학자 중에는 이를 ‘창조적 보수주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한국 보수 정당의 정치인들도 이를 인정하여 당의 정책 혁신 방향으로 좌우 경계를 허무는 ‘유연한 실용주의’를 제시해 각 분야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흡수하여 외연을 확장하겠다고 하기도 했다.출처 출처
국민건강보험, 국민연금, 최저임금을 제도화하여 일본의 사회 보장 제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은 바로 자민당이다. 참고로 이 정책들이 통과한 시기는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 재임 시기이다.
자민당은 일본의 경제 성장에 집중하면서도 주요 정책 어젠다인 사회 복지 정책들도 사회당 등 야당보다 먼저 자신들이 선점해 버렸다. 물론 유교, 불교, 신토 전통을 포함한 사회보수주의적 태도도 유지하였기 때문에 진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가부장적 보수주의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정부의 복지 지출을 증가시키며 복지 정책의 질 향상, 고용 안정 추구, 노인 의료 지원 확대, 의료 보험의 피부양자 보호안, 물가 상승분을 고려한 국민연금 정책, 고용 보험을 실시한 것은 바로 자민당이다. 결국 이러한 꾸준한 정책 추진은 1970년 중반을 기점으로 자민당에 부정적이었던 산업 노동자들이 점차 자민당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7년 4월 1일부터 시작된 일본 국철의 7개 JR사(社)로의 분할민영화는 일본 좌파 진영 세력의 핵심이었던 일본 국철 측 노조 내 세력을 궤멸시켜 사회당, 공산당까지 망하게 하는데에 더욱 가속도를 붙여버렸다.
최근의 아베 신조도 사회복지정책 추진에 있어 예외가 아니었다. 아베는 일본 기업의 법인세를 내림과 동시에 일본 기업들에게 최저임금 인상을 강하게 압박@@, 결국 일본 내 최저임금이 사상 최대 폭으로 상승하였다.
한편 외교에서는 자민당 집권 시기에 1972년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닉슨의 방중을 반대하는 등 자민당 내 반중 정서를 추진해 오던 사토 에이사쿠 계파가 쇠퇴하고 다나카 가쿠에이가 총리가 되면서 자민당은 재빠르게 외교 노선을 혁신적으로 수정하였다.
이러한 일본 자민당의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 철저한 실리주의적 융통성과 실리적인 정책 추진, 상황에 따른 빠른 노선 변경은 일본 시민들로 하여금 굳이 야당을 선택해야 하는 필요성 자체를 느끼질 못하게 함과 동시에 일본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로 연결, 일본 정치에서 자민당이 주류의 위치를 확고히 자리 잡게 하였다.
5.2. 파벌 간 경쟁 체제[편집]
자민당은 여러 파벌들의 경쟁과 합의 속에 차기 총재가 탄생하는 구조이다. 이 점은 밀실 회담을 비롯하여 일본의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지만, 광범위한 파벌들의 존재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며 특정 계파의 독점으로 인한 폭주를 방지한다는 장점 역시 있다.[46] 일본 국민들은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를 계속해서 선출하여 여당이 자민당으로 유지되어도 계파간의 경쟁 체제로 인해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47] 실제로 일본은 선거에서 자민당이 연승하는 와중에도 총리가 굉장히 자주 바뀌었다. 일본국 헌법 공포 이후 무려 34명이 총리직을 거쳐갔으며 자리를 2년 이상 지키지 못한 총리들도 수두룩 하다.
이런 다양한 파벌들이 보수의 빅텐트로 모여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에 일본 자민당은 같은 보수 정당임에도 한국의 보수 정당과 달리 특정한 철학과 이념에 바탕을 둔 강령 정당의 성격이 상당히 약하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일본의 자민당을 성공한 사회주의라고 냉소적으로 보기도 한다. 자민당이 미국의 공화당과 같은 전형적인 보수 정당과 달리 정책 이념이나 강령이 뚜렷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 태생 자체가 이념을 공유하는 정치가들의 집단이 아니라 정치를 주도하기 위하여 입장이 다른 정치가들이 연합한 파벌 모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과거 자민당 내에는 온건 보수 성향 파벌들의 세력이 상당하였는데 이 시기 일본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잘 나가던 시기였다. 현재는 일본 정치가 점차 우경화되면서 자민당 내 중도 파벌들이 상당히 약해졌다.
반면 야당들은 통합은커녕 연대조차도 약한 편이다. 일본은 1996년까지 중선거구제였던 데다가, 소선거구제를 도입한 지금도 석패율제가 있어서 군소당 중견 의원들이 몰락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소위 '야권 연대'가 약하다.
하지만 스가 요시히데가 무파벌로 활동해 왔음에도 '아베 내각을 계승'한다는 명분만으로 후임 총재로 선출되어 과거보다 파벌의 의미가 약해진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었다.[48]
5.3. 경제 정책[편집]
적어도 일본 경제 발전을 논할 때 이것에 대해선 긴 말이 필요없다.
과거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던 꿈과 희망이 넘치던 일본 경제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정당이 바로 자민당이다. 자민당의 독주라 불리는 55년 체제는 1955년에서 1993년 자민당 내각의 붕괴까지의 시기인데 일본의 경제 도약, 부흥기는 1954년 진무 경기부터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인 1991년까지의 시기였다.[49] 한마디로 일본의 경제 전성기 내내 일본의 집권 여당은 계속 자민당이었다.
이는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혹평 역시 적지 않지만 자민당의 아베 신조의 초장기간 총리 집권에는 아베노믹스 등의 영향으로 인한 실물 경제 지표 회복이 주된 이유로 평가받는다. 현재 일본 청년층이 자민당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는 주요 원인 중 하나도 아베 총리의 2차 집권 이후 경제 지표 회복과 청년 실업률이 개선된 것이 꼽힌다.#
물론 역으로 말하자면 거품경제 종식 후 기나긴 경제 침체 또한 자민당 집권하의 역사이기도 하다. 때문에 전후 잃어버린 10년을 비롯한 일본 경제의 실책에 대해서 말할 때 자민당의 책임을 절대 빼놓을 수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그동안 일본 경제를 지지하던 엔고가 이후 오히려 근 20여 년간 일본 경제의 숨통을 조인 악재로 작용한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반론이 있다. 지나치게 높았던 엔고로 일본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바닥까지 하락한 가운데 자국 내수 시장으로 근근히 버텨야 했는데, 일본에 대한 서구권의 견제로 아베 신조가 2012년 총리직에 다시 취임하기 전까지 양적 완화를 통한 엔화 가치 하락은 엄두도 낼 수 없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버블 붕괴에 대한 예측과 이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자민당 정권의 명백한 실책인 것은 맞다.
또한 복지분야의 경우 자유민주당 역시 보수정당으로 친시장 정책 역시 펼치나 한편으로는 국가주도의 복지 역시 사용하는 등 스펙트럼이 큰 편에 속한다.
5.4. 자민당을 견제할 힘이 부족한 야당들[편집]
사실상 가장 큰 이유. 물론 일본 정치의 구조적 특성, 일본 특유의 사회/문화적 정서와 더불어 상술한 것처럼 자민당 정권을 공고히 지탱하는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실제로 자민당을 지지해주는 유권자층이 두터운 건 사실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자민당의 독주와 장기집권에 피로를 느끼고 자민당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문제는 이렇게 자민당 정권에 비판적인 유권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대안 세력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수십년간 1강 체제를 구축해왔고 굳건한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자민당에 맞서려면 자민당에 비판적인 유권자들을 한곳으로 결집시킬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일본 야권에는 이러한 구심점 역할을 할 만한 정당이나 세력이 없다. 입헌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존재하긴 하나 자민당을 위협할 만큼 세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고, 최근에는 일본유신회가 크게 약진하는 등 야권 전체가 단일 세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 정치의 이러한 구도는 매우 고질적인 것으로, 과거 55년 체제 당시에도 일본 야권은 일본사회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일본공산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자민당의 실질적인 대안 기능을 할 수 있는 정당들이 마땅치 않았다. 자민당조차도 사실 관료의 통제가 쉽지 않았을 만큼 55년 체제의 정경관 유착에서 관료의 힘이 막강했는데, 야당이 관료를 통제할 수 있을리가 없다. 일본공산당은 엄연한 극좌 정당으로서 수권정당으로서의 신뢰성을 유권자들에게 주지 못하기 일쑤인데다가 냉전기의 냉혹한 현실속에서 집권이 가능할 정도의 지지세를 규합하는게 여느 서구식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50] 일본사회당의 경우도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현대적인 서유럽식 사민주의 정당과는 결이 다른, 중도좌파에서 극좌까지 포괄하는 빅텐트 정당으로서, 친소, 친중, 친북 성향이 두드러지는 당내 좌파 및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워낙에 두드러져 보였고, 북한을 열성적으로 옹호하고 당내 극좌들의 경우 크메르 루주까지도 두둔하는 등(...) 당내 극좌 세력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숱한 뻘짓을 벌이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 중반에야 간신히 집권에 성공하지만, 이내 몰락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일반 유권자들이 보기에 자민당의 대안이랍시고 나온 정당들의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나마 과거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30~40대 젊은 인사들을 선거에 공천하고 '연금 개혁', '복지국가 건설' 등 걸출한 타이틀을 내세우며 자민당 정권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을 흡수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퇴진 이후 후계구도의 난맥상으로 자중지란에 빠진 자민당 대신 마침내 2009년 총선에서 정권교체를 이뤘던 민주당이 있었으나, 바로 그 민주당 정권 하에서 여러 난맥상이 드러나며 지지 기반을 상실하고 결정타로 동일본 대지진을 당하며 이를 수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바로 다음 총선에서 도로 정권을 내놓은 이후로는 세력이 미약해진 일본 야당들이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51] 구심점이 없으니 여러 유력 인사들을 중심으로 당이 찢어지고 분당됐다가 다시 합쳐지곤 하는 이합집산이 반복되고 있으며, 안 그래도 힘이 미약한 일본 야권에서 서로 다른 당으로 선거에 나와 표를 갈라먹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52]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민당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선거에서 야당에 표를 주지 않고 아예 기권하거나 정치 무관심층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자민당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야당에 표를 주기는 싫은 사람들이 그냥 안정적 선택지인 자민당을 선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소위 말하는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똑같다'는 식의 정서가 일본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53] 쉽게 말하자면, 자민당이 야당복(福)을 누리는 측면도 있다는 것.
여기서, 일본 리버럴/중도좌파 야당의 고질적인 한계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지지자들의 결집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 이 점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선거판에서 고정 지지층의 존재란 상당히 중요하다. 굳이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강성 지지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소에는 조용히 입 다물고 있지만 선거철만 되면 투표장에 나가 계속해서 같은 당만 밀어주는 고정 지지층이 두텁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선거에서 득표력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자민당만 해도 총리를 비롯한 정권 핵심부에서 사건이나 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며, 일본의 보수 유권자들도 이에 대해 마냥 좋은 시선을 보내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선거가 찾아오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투표장에 나가 자민당이라는 단일 정당으로 표를 몰아준다. 반면에 리버럴 야당들은 이에 비하면 지지자들의 지지 동력이 약하고 소극적 지지자들이 많은 편이라 쉽게 지지 정당을 갈아타거나, 정권교체를 바라는 마음이 있더라도 투표장에 나가지 않거나, 아예 반쯤 포기하는 상태로 관심을 꺼버리는 경우도 상당하다. 게다가 지금 일본 야권은 사분오열된 상태라서 그나마 존재하는 리버럴 성향 유권자들도 한 곳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이 당 저 당으로 흩어지는 상황이라 문제가 더 심각하다. 결국, 정치에 야심이 있는 유능한 신인 유망주 정치인들도 일단 리버럴한 진보성향이 있더라도 자민당으로 입당하여 파벌에서 활약을 해야만 당선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실권을 휘두를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일당 독주 체제라는 평가에도 의외로 자민당의 지지율은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30%대에서 머물거나 아주 높으면 40%대가 나온다.[54] 전국단위 선거에서 진행되는 비례대표 정당 투표에서도 득표율이 전반적으로 30%대 수준이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을 합치면 40%대 정도. 그런데 야당들은 이를 따라잡기는 커녕 여론조사에서 한 자릿수 지지율이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무당층이 40~50%나 된다는 뜻이다.
야당들이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이나 벚꽃 스캔들 등 정권의 비리를 추궁하는 네거티브에 지나치게 집중한 것도 문제다. 법적, 도덕적인 면은 차치하고 네거티브 전술만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건 유권자의 30%~40% 정도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해 줄 것이 보장된 상태에서 무당층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을 때나 가능하다. 하물며 소선거구제인데도 양당제가 무너졌으며, 총리의 인기가 떨어지면 다른 인물을 내세우면 그만인 의원내각제 체제인 일본에서, 비전과 정책을 인정받지도 못한 야당이 네거티브로 선거에서 이기기는 힘들다.
결국 상당수의 일본 국민들은 자민당이 특별히 더 좋다기보단, 딱히 이렇다할 대안이 보이지 않으니 미워도 어쩔 수 없다는 심리로 계속 자민당을 밀어주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애초에 일본 정치는 중앙의 힘이 강하지 않고 지방자치가 발달해있어, 일본인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 지방 정부와 지방 의회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되는 것.
서구권 선진국에서는 그나마 캐나다 자유당이 독주하는 캐나다의 정치지형이 정반대로 일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제3당[55] 이 여당을 선거 후 간접적으로 지원해 각국의 보수우위, 진보우위 지형을 공고히 한다는 점, 2010년대 이후 야권이 매 선거마다 죽을 쑤고 있다는 점, 두 당의 집권기간이 각기 55년이 넘어 현대 캐나다, 일본을 성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 등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두 당의 상이한 정치성향과는 별개로 두 정당을 지지하는 각 나라의 안정 희구 성향의 콘크리트층이 상당하는 점 또한 공통 분모이다.[56]
5.5. 출처[편집]
- 일본 사회당의 실패가 한국 진보정치에 주는 함의/권순미 아주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 (세계일보)일본은 왜 아베와 자민당을 지지하는가
- (한국경제)日 자민당 59년 집권 비결은 '유연함'… 진보적 의제까지 발빠르게 선점
- (매경프리미엄)아베 1강이 오래 유지되는 이유
- (시사저널)보혁구도가 만든 日 자민당
- (머니투데이)현실적인 日20~30대 아베 지지 이유…3.6%에 반했다
- (이슈게이트)한국당 “일 자민당, 영 보수당 벤치마킹”
- (아주경제)일본의 '권력 엘리트' 자민당 7파벌의 비밀
- (한겨레)일본 자민당 60년, 다양한 파벌의 견제의 역사…아베 불통에 길을 잃다
6. 파벌[편집]
자세한 내용은 자유민주당(일본)/파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의 정치는 사실상 자민당이 독점하였기에 일본의 시민들은 아래의 파벌 중에서 자신과 성향이 맞는 파벌을 총리직을 얻을 수 있도록 밀어주어 자신의 의견이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
2024년 1월 집권 기시다 내각의 지지율 하락세와 연이은 정치 자금 스캔들로 국민의 비판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세이와 정책연구회(아베파), 광지회(기시다파), 지수회(니카이파) 세 파벌이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이로써 무파벌 의원들이 자유민주당 내 과반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향후 자민당 내 파벌 간 경쟁과 견제 구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올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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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정책연구회(=청화회, 아베파)(해산) : 국민보수주의 성향의 파벌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피살당하면서 현재 회장은 공석 상태다. 소속 의원 수는 94명(중의원 60명, 참의원 34명)으로 자민당 내 최대 파벌, 대표적인 보수방류[57] 파벌로 2021년까지는 호소다 히로유키가 회장직을 맡아왔으나 호소다가 49대 중의원의 의장으로 선출되며 회파와 동시에 파벌을 탈퇴하게 되어 아베 신조 전 총리가 파벌의 차기 회장이 되었고, 기시다 총리가 아베를 견제하려는 행보를 보임에 따라 아베가 적극적으로 파벌의 영수로서 활동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 본인과 아소와 모테기, 이들 3대 주요 파벌의 수장이 자주 회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58] 청화회에는 기시 노부스케 - 아베 신타로 - 아베 신조로 이어지는 "아베계"와 후쿠다 다케오 - 후쿠다 야스오 - 후쿠다 다쓰오로 이어지는 "후쿠다계"의 사실상 두 계파가 존재하며, 후쿠다 다쓰오의 경우, 차기 총리의 야망을 갖고 있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총무회장을 지내고 있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후쿠다 다케오,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후쿠다 야스오, 아베 신조 등 총 6명의 총리를 배출하였다. 자민당 파벌 내 가장 우익적 성향을 띄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조회장과 아베 신조가 당의 우익화를 조장하면서, 기시다 내각을 좌지우지 하는 모습이다. 기시다 총리는 곧 있을 참의원 선거에서 우익들의 표가 매우 중요하기에 아베와 다카이치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2022년 7월 8일 퇴임 이후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베 전 총리가 갑작스레 피살당하면서 파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졌다. 그리고 불법 정치 자금 조성 스캔들로 기시다 내각에 입각한 자파 의원들이 연이어 축출된 이후 2024년 1월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
- 지공회(아소파) : 빅 텐트 성향의 파벌로 현재 회장은 아소 다로 부총재. 소속 의원 수는 53명(중의원 42명, 참의원 11명)이며 과거 굉지회에서 고노 요헤이와 아소 다로가 뛰쳐 나와 만든 위공회와 미키 다케오 - 고모토 도시오 - 오시마 다다모리 - 산토 아키코에 이르는 번촌정책연구소와 합쳐 2017년에 아소 다로가 현재의 지공회 파벌을 형성, 회장에 취임했다. 제 2파벌을 이끌고 있는 아소는 굉지회로서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기시다파(굉지회)와 다니가키 그룹과 파벌을 합치는, 대굉지회(대고치카이)를 구상하고 있다. 다만, 지공회를 형성할 당시 자신과 같이 굉지회에서 분열되어 나온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따르는 유린회(다니가키 그룹)에 합류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던 과거가 있다. 실권이 그닥 없는 자민당 부총재 직을 맡고 있는 아소의 힘은 감소했다고 볼 수 있으나, 과거 가네마루 신 부총재와 같이 당의 원로로써 아소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하다. 모테기 간사장과 더불어 권력의 중심인 AM[59] 으로 불리고 있는 중. 미키 다케오, 가이후 도시키, 아소 다로 등 총 3명의 총리를 배출하였다.
- 헤이세이 연구회(모테기파) :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의 파벌로 현재 회장은 모테기 도시미쓰 현 간사장. 소속 의원 수는 53명(중의원 32명, 참의원 21명). 보수 본류파의 직계로써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다케시타 노보루,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등 5명의 총리를 배출하였다. 다케시타 노보루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목요회에서 나와서 '경세회'를 만든 것에 실질적인 뿌리를 둔다. 실제, 경세회로 불릴 당시(고이즈미 집권 이전까지)에 자민당 내 최대파벌로서 가장 잘 나갔기에 현재까지도, '경세회'로 자주 불린다. 2001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최대파벌로서 하시모토 류타로를 출마시켰으나, 파벌 정치를 타파하겠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원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총재선거에서 패했고, 고이즈미의 우정개혁에 반대했기에, 경세회의 실권자였던 노나카 히로무가 반대, 저항세력이라 의회연설에서 고이즈미에게 불린 역사가 있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혁신하겠다고 표방하여, 기존의 파벌구도를 파괴하고(보수 본류의 대거 몰락), 자민당 총재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였기에 경세회의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파벌 영수인 모테기 도시미쓰가 기시다 총리에 의해 자민당 간사장[60] 에 임명됨에 따라 다시 반등의 기회를 얻었다. 기시다 총리는 모테기파를 내각에 4명이나 중용함에 따라 최대 파벌 아베파를 사실상 견제하고 있는 중이다. 양상을 보면 보수 본류의 양대 직계 파벌이 서로 손을 잡은 모습이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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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지회(고치카이, 기시다파)(해산) :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의 파벌로 현재 회장은 기시다 후미오 현 내각총리대신. 소속 의원 수는 44명(중의원 34명, 참의원 10명)으로 당내 파벌 중에 가장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며(1957년 이케다 하야토에 의해 결성), 보수 본류[62] 파벌의 직계로써 이케다 하야토,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미야자와 기이치, 기시다 후미오 등 총 5명의 총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청화회 소속의 모리 요시로가 총리가 된 2000년대 이후 보수 방류 계열 세력(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이 자민당을 장악함에 따라 파벌의 힘이 약해졌으나, 20년만에 기시다 총리를 배출함으로써 다시 반등의 기회를 얻었다. 관료출신의 의원들이 많아 정책 전문성은 앞서지만, 당 내의 파벌 정쟁에 약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기시다 내각의 연이은 스캔들과 지지율 하락 속에 전면 쇄신을 선언하며 2024년 1월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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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회(니카이파)(해산) : 중도 ~ 중도우파 성향의 파벌로 회장은 니카이 도시히로 전 간사장. 소속 의원 수는 44명(중의원 32명, 참의원 12명). 특이하게 원래는 보수방류 파벌로써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배출했던 파벌이었으나 이부키 분메이, 가메이 시즈카, 90년대에 신진당으로 넘어간 보수본류의 헤이세이 연구회에서 분파된 하타•오자와파(하타 쓰토무와 오자와 이치로는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을 창당하여 후에 민주당 중심인물이 됨) 출신 니카이 도시히로 순으로 회장을 역임하면서 현재는 보수본류 파벌과 별 다를바 없을 정도로 성향이 중도화된 파벌이다. 상당히 친중, 친한적 외교 스탠스를 취한다. 49회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파벌 중 가장 많이 의석을 잃었다. 파벌의 영수인 니카이가 간사장 직에서 내려오기도 했고, 현재 고령임을 감안할 때 파벌의 영향력이 전보다 크게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나, 니카이 전 간사장의 오랜 정치 경륜과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와의 연줄이 있어 쉽게 세력이 꺾이진 않을 것으로 보이며, 현재 무파벌인 스가와 그를 따는 일부 의원들과 세력을 합치려는 구상도 갖고 있는 상태.나카소네 야스히로, 우노 소스케 등 총 2명의 총리를 배출하였다. 신진당 - 자유당 - 보수당을 거쳐 상대적으로 지반이 약한 니카이가, 민주당 - 민진당 출신 중도파들을 많이 영입하여, 자민당 계파중 가장 왼쪽에 위치해 있다. 2024년 1월 자진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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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정치연구회(모리야마파)(해산) : 중도우파~우파 성향의 파벌로 회장은 모리야마 히로시 총무회장 대행. 소속 의원 수는 7명(중의원 6명, 참의원 1명)으로, 기존 파벌 영수이던 이시하라 노부테루 회장이 49회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여 큰 타격을 입었으며[63] 석패율제 구제도 못받아 비례대표로도 당선되지 못했다.
- 무파벌 : 77명(중의원 58명, 참의원 19명). 대표적으로 다카이치 사나에, 고이즈미 신지로, 스가 요시히데 등이 있다. 스가 전 총리의 경우 자신의 의견을 따르고, 정책을 함께 의논하는 26명 내외의 '가네샤의 모임'을 갖고 있다. 본인은 파벌을 형성할 경우 "오른쪽으로 가라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는" 파벌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어, 고민중이라고 한다. 아베 전 총리는 스가가 의향만 있다면 파벌을 쉽게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 tv프로에서 공개적으로 언급한 만큼, 파벌이 형성될 가능성도 농후하며, 스가가 마음만먹는다면 쉽게 파벌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주당이 집권했을 당시 자민당 총재를 역임했던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따르는 30명 정도 규모의 다니가키 그룹(유린회)가 존재한다. 굉지회에서 분열되어 나와 무파벌로 있는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아소 다로 부총재는 기시다 후미오의 굉지회와 다나가키 그룹, 자신의 지공회를 모두 합쳐서 분열되었던 굉지회의 파벌을 모두 끌어모아 확대 재편하는 대굉지회 구상을 하고 있다.
현재 니카이파, 스가 그룹, 이시바 그룹, 모리야마파는 하나의 단결된 파벌을 형성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모두 현 기시다 정권에서 찬밥신세를 받고 있고 각 파벌의 수는 적지만, 모두 합치면 80명 내외의 거대한 2위 파벌을 형성할 수 있다. 작년 12월부터 니카이 도시히로, 스가 요시히데, 이시바 시게루, 모리야마 히로시 등이 자주 만나고 있고, 스가의 최측근에 의하면, 올해 참의원 선거를 대비하여, 적어도 2022년 3월쯤에는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7. 지지 기반[편집]
7.1. 농민[편집]
자민당 지지자의 중추를 이루던 계층으로, 자민당은 농민들로부터 표를 얻으려면 이들이 생산하는 쌀을 비싼 값으로 사들여야 한다. 이는 풍년이 들든 흉년이 들든 상관없이 농민들의 손해를 막기 위한 배려책이며, 일본 쌀값이 미국이나 동남아시아보다 5~10배나 비싸지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이 쌀보다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기 시작하자 농민들이 벼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가버리는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났고, 이에 자민당은 고정 지지층을 유지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방파제 등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7.2. 노년층[편집]
22년 기준 참의원 선거 연령별 정당지지율
연령을 기준으로 할 때, 자민당의 핵심 지지층은 노년층이다.
7.3. 청장년[편집]
2010년대 이전에는 한국이나 미국처럼 중장년층과 단카이 세대는 자민당, 그 이하 세대는 혁신계 정당 구도였지만,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기점으로 민주당 정권이 몰락하자 2020년 현재의 구도로 바뀌었다.
60년대 전공투의 이미지 때문에 단카이 세대가 오늘날 혁신 정당을 지지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당시 대학 진학률이 낮다는 시대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는 단카이 세대 중에도 극소수의 한정된 경향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2020년대 현재는 대한민국의 86세대인 단카이 세대인 중년~노년층들이 우세까진 아니지만 오히려 입헌민주당,일본 공산당의 지지세가 다른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지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렇게 의외라고 할 수 있는 세대 구도가 들어선 이유는 첫 번째로, 45회 중원선 이후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 민주당 인사들이 실책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64] 그래서 일본민주당의 지지세는 붕괴되었으며, 노년층 정도가 되어야 정치참여도가 높고 무당층 비중이 없으므로, 윗세대에서 겨우 지지세가 나오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두 번째로는 세대별로 각 정당에 대한 이미지가 굉장히 상이하다. 일본의 청년 세대는 자유민주당을 중도적, 변혁적인 정당으로 인식하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통상적인 인식으로 수렴해, 자민당을 전통적, 변화 거부적인 정당으로 이해한다. 세대별로 정당에 대한 이미지 차이가 큰 것이다. 요미우리와 와세다 대학이 2017년 7~8월에 공동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50대 이상 세대에서는 자민당과 일본유신회를 '보수', 공산당을 '진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40대 이하 세대에서는 자민당과 일본유신회를 '자유주의', 공산당과 공명당을 '수구'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의 청년층들은 좌파와 진보 세력을 '수구'로, 이념상 보수주의 정당을 자유주의 정당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국내의 일본 관련 언론 보도는 반자민당-친야당 논조이므로[65] 상당히 일본의 청년들이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는데, 내막을 알고 보면 일본 청년들의 인식은 근거 있는 인식이다. 스가 요시히데 정권이 공공 기관에서의 도장 문화를 근절하겠다고 밝혔을 때, 국내 언론 보도는 자민당의 '도장 의원 연맹'이 반발했다는 뉴스만을 내보냈다. 그런데 사실 이 도장 의원 연맹은 자민당 내 소수 보수파로, 자민당의 당론은 스가 총리가 결정한 대로 도장의 축소화였는데, 이에 대항하는 야당은 아예 당론으로 도장 문화의 근절을 반대했다.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대표는 디지털화는 후퇴라는 워딩으로 정부 방침에 반발했고, 일본 공산당 역시 도장을 밀어내는 과도한 디지털화는 반대한다라는 당론을 세웠다. 이는 일본의 야당이 중년~노년층을 주 지지층으로 삼고 있기 때문.[66]
세 번째로, 자민당 외 모든 정당이 수권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일본을 이끈 자민당 정도가 겨우 30%정도 지지층을 차지하며, 자민당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은 다른 대안 정당을 고르기 보다 ‘지지정당 없음’을 선택한다. 다른 정당은 매우 미약한 비중을 차지한다. 젊은층일수록 그 정도가 심해져, 극단적인 경우 자민당 말고는 지지율을 제대로 갖춘 정당은 없으며, 모두 ‘지지정당 없음’으로 파편화된 상태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선거 기간, 각 방송사의 보도에서 젊은층들이 보이는 태도를 통해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오랜 일당 우위체제로 인해 야권이 몰락하고 사회를 주도하는 역할을 자민당이 독점하여 대안이 없는 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층으로 갈수록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고 투표를 기권하고, 자민당에만 표가 가는 현상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사회를 주도하는 역할은 자민당이 독주하며, 야권은 완전히 몰락하거나 대안이 없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설령 다시 야당이 반짝 반등한다 하더라도 자국의 상황과 시대의 흐름을 고려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정책과 내부 파벌싸움으로 인해 얼마 안가 다시 자민당이 실권을 잡는 모양새며, 실제로 일본의 청년층은 좌익 성향을 가진 이들마저 자민당에 제일 많은 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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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출구조사 결과에 따른 연령별 투표 성향. 빨간색은 자민당, 파란색은 입헌민주당이다.
2017년 중의원 총선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2017년은 아베 집권기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어느정도 젊은층에서 인기가 있던 덕에 높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이런 형세가 극대화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정당도 마찬가지고) 이 시기 자민당 역시 지지층 가운데 제일 비중이 높은 연령대는 노년층이었다. 이 시기 전체 투표율이 53% 였는데, 18세 투표율이 48%, 19세와 20대가 33%로 매우 저조했다. 청장년이 자민당을 싫어해도 정치 자체에 무관심과 불신이 더욱 거세니 야권은 이 세대에서 표를 받을 건덕지도 없는 상태.
7.4. 공명당의 지원[편집]
앞으로도 자민당 정권이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공명당과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에 자민당의 힘만으로 정국을 압도하기 어려운 면은 있다. 선거 득표율을 봐도 자민당은 30~40%대에 머물고 있고, 공명당이 나머지 10% 내외를 메꿔주고 있다.
공명당의 조직력은 일본의 정당 중에서 가장 막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창가학회 신도라는 거대한 표심[67] 을 실제로 개개인 단위로 통제할 수 있다. 가족 중 누구는 연립 여당인 자민당 후보를 찍고, 누구는 공명당을 찍고, 누구는 야당 후보를 떨어뜨려야 하니 자민당계 무소속 후보를 찍어주고 하는 식으로 일일이 지정을 해 주는 등 아주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덕분에 자유민주당 지역구 후보들은 자민당 기본 표에 더해 공명당의 ‘표 주기’로 안정적인 득표수를 보장받는다.
최근 들어 서로 대립을 자주 하는 것으로 보아 연정이 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민당은 공명당과는 연정을 지속할 가능성이 높다. 일단 입헌민주당, 공산당 등 여타 전국구 야당과 자민당은 정치적 접점이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연대가 어렵다. 그러나 공명당은 자민당과 정책적인 면에서 접점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므로, 과거 한국의 민주당-자민련의 DJP연합처럼 단독으로는 정국에 영향력을 발휘할 순 없지만 자신들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발휘하며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 자민당 역시 평화주의를 내세우는 공명당과의 연정을 통해 자칫 극우로 비쳐질 수 있는 당의 이미지를 제고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공명당이 외부 견제를 통한 브레이킹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현재로선 내부적인 불만이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인 것은 변함이 없으므로 이러한 정치적 동맹 관계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7.5. 구조적인 우위[편집]
자유민주당은 수십 년을 집권하며 가히 일본을 운영하는 핵심 축이 되었다. 자민당이 전후의 인프라 구축과 경제 건설에 일조한 영향력이 워낙 크고, 재난 대응 체계 구축 및 기간 관료 사회의 제도적(국가관리) 기관 같은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나마 믿고 맡길 만한 당으로 자민당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20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68] 투표율이 50%를 겨우 넘겼을 정도로 일본은 정치 무관심층이 많으며, 여론 조사에서 자민당 지지율보다도 높은 게 부동층일 정도로[69] 자민당만 믿고 지지한다기 보단 딱히 대안이 없다는 게 일본 정치의 현 주소.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지역 토호들과의 결합, 부정부패, 여러 실책, 그리고 자민당 내부 유력 정치인들의 분당을 쐐기로 1990년대부터 득표력을 상당히 소실했다. 원내 1당은 가능한 지지세지만 정권 유지에 필요한 과반은 불확실한 상태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90년대가 지니고 난 뒤부터는 공명당과 연정해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70]
7.6. 지방[편집]
자민당은 일본 대부분 지역에서 30% 내외의 고정 지지층을 얻고 있으며,[72] 특히 2010년대 아베 내각 들어 야권의 경쟁력 저하, 젊은 층의 우경화 등으로 인해 자민당의 지지세가 더 탄탄해지고 있다. 주로 규슈[73] , 주고쿠[74] , 시고쿠[75] 등 대부분의 서일본 지역과 동일본 지역에서도 동해를 마주보는 쪽인 호쿠리쿠 지역[76] 과 도호쿠 지방의 아오모리현, 아키타현, 야마가타현은 자민당 지지세가 높은 곳이다. 55년 체제 당시에는 보촌혁도 현상이 강하게 반영되어서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등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세였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대도시에서도 자민당 지지세가 나타나고 있다. 지도에서 드러나듯이 상대적으로 서일본이 동일본에 비해 지지세가 더 높고 특히 메이지 유신과 군국주의화를 주도한 야마구치현(조슈번)과 가고시마현(사쓰마번)에서의 지지세가 높은데 이는 자민당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삿초 동맹이 나온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들다 진압당한 도호쿠 중 남부 지방의[77] 경우 자민당의 지지세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에서도 증명된다.[78][79] 오사카의 경우 타 대도시에도 없는 파란색이 있을 정도로 자민당의 지지율이 전국 최하인데 이는 과거 오사카가 메이지 정부의 수도로 지정될 것을 기대하며 엄청나게 지원을 퍼부었지만 뒤통수 맞고 여전히 에도(도쿄)가 수도로 유지된되다 오히려 도쿄 일극 체제로 가게 되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 물론 이것도 딱히 오사카가 진보적인 건 아니고 그냥 지역 정당+똑같은 보수 정당인 오사카 유신회가 존재하니까 그런 거다. 이 정당이 등장하기 전까진 공명당의 지지율이 높았다.
8. 조직[편집]
- 총재
- 부총재
참고로, 당헌·당규 상 부총재의 정원(定員)에 대한 규정은 없지만, 2인 이상의 인원이 부총재로 동시에 임명되거나, 부총재의 자리에 동시에 있었던 사례는 현재까지 단 한번도 없다.
- 간사장
- 정무조사회장
- 총무회장
- 국회대책위원장
- 참의원 의원회장
9. 강령[편집]
헤이세이 22년(2010년) 발표한 자민당의 강령 전문이다.
우리 당은 "반공 · 반독재와 일본다운 일본의 확립"- 두 가지 목적으로 "정치는 국민의 것"의 원점에 서서 창당되었다. 헤이세이 원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이러한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다는 의미에서 우리 당의 승리이기도 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 · 사회주의 정당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품고 우리 당은 현실을 직시하고 미-일 안전 보장 조약을 기본으로 하는 외교 정책으로 인해 오랫동안 평화를 지키고,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일본을 국민과 함께 발전시켰다.
일본의 존재감이 증가함에 따라 국제화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얻은 반면 자신의 전통 문화를 잃어 가고 있다. 장수국이라는 자랑스러운 성과 반면, 경제 성장의 둔화와 재정 악화에서 오는 재정 제 기능 부전을 현재 우리는 겪고 있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는 국가의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이 같은 현실을 밝고 희망있는 미래로 바꾸기 위해 저출산 대책과 함께 교육의 충실과 과학 기술 개발에 국가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장수 인구의 활용과 국민 자질 향상, 국제화에 좋은 지원을 통해 경제 성장을 달성할 수 있고 국민 생활의 충실이 가능한 것을 세계에 보여야 한다.
우리는 일본 및 국민 통합의 상징인 천황 폐하[94]
께 오늘의 평화로운 일본을 쌓아왔다. 우리는 원래 부지런함을 미덕으로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을 자랑하는 국민이다. 노력하는 기회와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는 가족과 지역 사회의 유대를 가진 국가이다.가족, 지역 사회, 국가에 귀속 의식을 가지고 공공의 기여와 의무에 자부심을 가진 국민이기도 하다. 이것은 전통적인 국민성, 삶의 방식 즉 일본의 문화를 쌓아 올린 풍토, 사람들의 일 현재 · 미래를 포함한 3세대의 기초를 이루는 조상에 대한 존경을 가진 삶의 재평가야말로 또 다른 창당 목적, 즉 "일본다운 일본의 확립"이다.
우리 당은 2009년 총선 패배[95]
를 반성, 창당 이래 지켜 왔던 자유와 민주의 깃발 아래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것만을 고쳐, 유지해야 할 것을 지켜 질서 속에 발전을 추구하고, 국제적 의무를 이행, 일본다운 일본의 보수주의 정치 이념으로서 재출발하고 싶다.우리가 지켜왔던 자유(자유주의)는 시장 원리주의도 아니고, 무원칙한 정부 개입 승인주의도 아니다. 하물며 이기주의를 방임하는 문화도 아니다. 자립한 개인의 의무와 창의력, 자유로운 선택,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과 관용, 공조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유임을 재확인하고 싶다. 따라서, 우리는 전 국민의 노력으로 탄생한 국민 총생산을 여당만의 독선적인 판단으로 국민 생활에 재분배해, 결과적으로 국민의 자립심을 해치는 사회주의적 정책은 취하지 않는다. 이와 함께 정치 주도라는 말로 뜻에 반하는 의견을 무시하고 여당만의 판단을 독재적으로 강요, 국가 사회주의적 통치와도 단호한 대치해야 한다.
또한 일본의 주권을 손상시키며 "일본다운 일본'을 해치는 정책에 대해 싸워야 한다. 우리 당은 과거, 현재, 미래 성실하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자립한 납세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일본'을 목표로 새로운 자민당으로 국민과 함께 안정감 있는 정치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안심할 수 있는 것으로 하고 싶다.
1. 우리 당은 항상 진보를 지향하는 보수 정당이다.
(1) 올바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밑에,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을 고쳐, 유지해야 것을 지켜 질서 속에 발전을 추구
(2) 용기를 가지고 자유 활달에 진실을 말하며 협의하여 결정한다.
(3) 다양한 조직과 상호 작용 · 조정하고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하고 정부를 겸허하게 작동
2. 우리 당의 정책의 기본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1) 일본다운 일본의 모습을 보여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96]
을 목표로(2) 일본의 주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지키기. 국제 사회의 현실에 입각한 의무를 이행하고, 일국 평화주의적 관념
(3) 자조, 자립하는 개인을 존중하고 그 조건을 갖추는 동시에, 공조하는 짜임새를 충실
(4) 자율과 질서있는 시장 경제를 확립
(5) 지역 사회와 가족의 정 · 따뜻함을 재생
(6) 정부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정책이나 조건 만들기에 노력
(a) 법적 질서 유지
(b) 외교 · 안보
(c) 성장 전략과 고용 대책
(d) 교육과 과학 기술 연구 개발
(e) 환경 보전
(f) 사회 보장 등의 안전망
(7) 미래의 납세자의 사용 선택권을 박탈 않도록 재정의 효율성과 세제 개정에 따라 재정을 재건한다.
3. 우리 당은 긍지와 활력있는 일본 상을 목표로
(1) 가족, 지역 사회, 국가에 귀속 의식을 가지고 자립하고 공조하는 국민
(2)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인간 관계, '일본과 정'의 생계
(3) 합의 형성을 게을리 하지 않는 민주주의에서 결정되는 국가 및 지자체
(4) 노력하는 것이 결실, 노력하는 기회와 능력을 타고 나지 않은 것을 모두에서 지원하는 사회. 그 조건 정비에 주력하는 정부
(5)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정책을 수행하는 정부. 차세대 의사 결정을 해치지 않도록 국채 잔액의 감소에 노력
(6) 세계 평화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인류 공통의 가치에 기여하는 유덕 일본
10. 당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와레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