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이치로

덤프버전 :



[ 펼치기 · 접기 ]
[[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제13대
제14대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png전전
]]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제33대

하야시 센주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png전시
]]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37대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요나이 미쓰마사
제38-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고이소 구니아키
스즈키 간타로
[[쇼와 시대|

쇼와 시대파일:1px 투명.png전후
]]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000,#fff 히가시쿠니[[파일:1px 투명.png노미야 나루히코
시데하라 기주로
요시다 시게루
가타야마 데츠
제47대
제48-51대
제52-54대
제55대
아시다 히토시
요시다 시게루
하토야마 이치로
이시바시 단잔
제56-57대
제58-60대
제61-63대
제64-65대
기시 노부스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제66대
제67대
제68-69대
제70대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
제71-73대
제74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제74대
제75대
제76-77대
제78대
다케시타 노보루
우노 소스케
가이후 도시키
미야자와 기이치
제79대
제80대
제81대
제82-83대
호소카와 모리히로
하타 쓰토무
무라야마 도미이치
하시모토 류타로
제84대
제85-86대
제87-89대
제90대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후쿠다 야스오
아소 다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제95대
제96-97대

노다 요시히코
아베 신조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
제98대
제99대
제100-101대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인세이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 내무경


원로 · GHQ · 부총리





하토야마 이치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c3c965 일본국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
하토야마 이치로
鳩山一郎 | Hatoyama Ichirō
'''

파일:하토야마이치로.jpg

출생
1883년 1월 1일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現 도쿄도 신주쿠구)
사망
1959년 3월 7일 (향년 76세)
도쿄도 분쿄구
재임기간
제52대 내각총리대신
1954년 12월 10일 ~ 1955년 3월 19일
제53대 내각총리대신
1955년 3월 19일 ~ 1955년 11월 22일
제54대 내각총리대신
1955년 11월 22일 ~ 1956년 12월 23일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
어머니 하토야마 하루코
배우자 하토야마 가오루
아들 하토야마 이이치로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구니오
증손자 하토야마 기이치로, 하토야마 지로
학력
고등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졸업)
고등사범학교 부속 중학교 (졸업)
제1고등학교[1]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영미법학 / 학사)
정당

종교
기독교 (개신교)
지역구
도쿄 1구
의원 선수
15 (중)
의원 대수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5, 26, 27, 28
약력
하토야마 가즈오 법률사무소 변호사
도쿄시회 의원
중의원 의원
제28대 내각서기관장
제40대 문부대신
입헌정우회 총재대행위원
초대 일본자유당 총재
초대 일본민주당 총재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요시다 시게루와의 악연
2.3. 자민당 시대를 열다
2.4. 집권 후기
3. 선거 이력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일본정치인. 제52-54대 내각총리대신과 초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장남은 하토야마 이이치로 전 외무대신, 장손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이다. 조부는 자유민주당의 초대 총재로서 55년 체제를 열었는데 손자는 자유민주당에 맞서는 민주당의 첫 총리[1]이자 최초로 (연립이 아닌) 단독 정당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또한 제국주의자인 조부와 달리 손자는 일본의 과거사를 인정하고 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도쿄 출생. 명문 정계 가문인 하토야마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하토야마 가즈오는 도쿄에서 중의원 의원을 지내고, 후일 중의원 의장을 지냈던 정치 거물로, 이치로는 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생일이 1월 1일이다.[2]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영미법학과를 졸업 후,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이치로도 젊어서부터 정계에 입문해 1915년, 32세에 중의원 입성을 시작으로 이후 정계에 매진했다.

젊어서는 우익 정치인이자 강경보수 세력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문부대신 재임 시절[3]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는 대학 교수들의 처분을 놓고 의회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그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하토야마 문부대신의 질의답변이 걸작이었다. "상관없습니다. 따르지 않는 교수가 있다면, 전부 해고하면 됩니다." 이런 과격한 강성우익 성향에도 불구하고 의회민주주의를 견지하였기에 군부에게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혔으며, 대정익찬회의 성립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거세되어 낙향하게 된다.

패전 이후 하토야마는 순식간에 전후 일본의 정치 지도자급의 인물로 부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던 하토야마는 패전 직후인 1945년 발빠르게 보수 우익 정당을 하나 창당했는데, 그것이 자유당이다. 그러나 과거의 보수파 전력과 성장세는 이후 들어온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고, 결국 1946년 하토야마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 명령과 금고형을 선고받는다.[4]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07000555.jpg
전성기 시절.


2.2. 요시다 시게루와의 악연[편집]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50111006850.jpg
1953년 11월 17일, 요시다 시게루(왼쪽)와의 만남.

공직 추방을 당하자 정계에 나설 수 없게 된 하토야마는 부랴부랴 그가 세운 자유당을 맡길 만한 인물을 찾아나섰는데, 그렇게 찾아낸 인물이 친밀했던 요시다 시게루였다. 요시다 시게루가 자유당을 접수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첫 총리직에 오른 걸 보면, 하토야마는 권력 접수 직전에 뼈아픈 추방을 당한 것이다.

하토야마는 요시다에게 자유당을 넘겨주며 네 가지 약속[5]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관계는 친밀했었지만, 1951년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다. 하토야마는 공직 추방령에서 풀려난 이후 1952년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당에 복당했고 요시다에게 약속대로 총리직을 요구했지만, 이미 권력을 확고하게 틀어쥔 요시다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두 사람은 앙숙지간이 되어 버렸다.

이는 두 사람 간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당 내부의 파벌 갈등으로 이어져 요시다파와 하토야마파의 대립이 이어졌다. 요시다 총리의 연이은 원맨 행보와 '바카야로 해산'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하토야마는 결국 1953년에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과 함께 탈당하여 '분당파 자유당(分党派自由党)'을 결성한다. 동년 4월에 실시된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35석만을 얻어 요시다파의 199석에 한참 못미치는 결과를 받자 다시 자유당으로 복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 분열상태는 지속되었으며 1954년 4월에 터진 조선의옥(造船疑獄)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의 '지휘권 발동 사건'[6]으로 요시다 내각이 정치력에 큰 타격을 입고 여론도 염증을 내기 시작하자 하토야마는 다시 동년 11월 24일에 탈당하여 개진당 의원들과 함께 일본민주당을 창당하였다.


2.3. 자민당 시대를 열다[편집]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52.jpg
12월 10일에 제5차 요시다 내각이 총사퇴하자 하토야마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처음 집권한 하토야마의 일본민주당은 7년을 장기집권한 자유당에 비해 세력이 약했다. 의석도 전체의 1/4 수준에 불과했고, 아직 거대정당으로 남아있던 자유당이 하토야마의 집권을 반길 리가 없었다.

1955년 2월,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치러지면서 자유당 강세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었다. 이른바 '하토야마 붐'으로 불리는 이 선거에서 하토야마와 일본민주당은 드디어 1당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 이치로는 처음 몇 개월 간 불안정했던 권력 구도를 안정적으로 굳히는 데 성공했지만, 역으로 좌우 양파로 분열되었던 사회당이 중의원의 1/3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하토야마가 내세웠던 개헌, 즉 평화 헌법 개정[7]을 무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당 좌우파가 1955년 10월 화해하고 양파로 갈라진 사회당을 통합하면서 세력면에서 사회당이 일본민주당에 맞먹는 의석수를 획득하자, 일본 내 우익 정치가 및 재벌들 사이에서 사회당 재집권에 대한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고, 사회당이 자유당과 연합하면 충분히 집권할수 있기 때문에 불안한것은 마찬가지였다. 하토야마는 원내3당으로 전락한 자유당과 다시 접촉하기 시작해, 11월에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을 같은 정당으로 흡수해 이른바 통합 보수우익 정당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자유민주당이다. 사회당 좌우파와 일본민주당, 자유당이 서로 통합해 양당체제[8]로 정리된 1955년을 일컬어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이쯤 되면 일본 내 보수우익 세력의 대부. 새로 생긴 자민당 내에서 하토야마는 미키 부키치, 오가타 다케토라,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공동 임시 총재를 맡았으나, 경력이나 문벌이나 당내 세력으로 볼 때 하토야마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당 통합 이후 임시 소집 기간 동안 세 번째로 총리 지명을 받아 첫 자민당 내각을 열었다. 이후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의해 자민당이 처음 실각할 때까지 무려 38년 간을 자민당에서만 총리가 나오는 독주 체제를 형성했다.[9] 다만 막상 55년 체제가 시작된 직후에 치러진 첫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확보하면서[10] 부진을 면치못해 별로 좋은 성적표를 얻지는 못했다. 이 때 소선거구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참의원에서 폐기되어 무산되었다.하토만타


2.4. 집권 후기[편집]


이후 기간부터는 정당 통합으로 안정적인 권력 기반을 갖추면서, 점차 대외적인 활동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소련과의 국교 회복을 서두르기 시작했는데, 처음 집권할 때 내세웠던 공약이기도 했지만 특히 위에 썼던 헌법 개정이 수포로 돌아가자 경제,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미국에만 의존하는 국제적인 고립을 막고[11] 유엔 가입을 빨리 서두르기 위해 하토야마는 소-일 국교 회복에 상당한 노력을 했다.

처음 1956년 10월에 하토야마가 직접 소련으로 가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회담하였고, 이후 고노 이치로가 소련으로 건너가 협상한 끝에 1956년 12월 소련과 일본은 다시 국교를 맺는 데 합의했다. 일본의 유엔 가입을 반대하던 소련이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자 일본의 유엔 가입이 그대로 해결되었다. 하토야마는 일본의 유엔 가입 직후 총사퇴했다.

이후 1959년 3월 7일 오전 9시경 분쿄구의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cache6.amanaimages.com/23023000794.jpg
사망 두 달 전.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12
1912년 보궐선거
도쿄도시의원

[[무소속|
무소속
]]

-
당선
초선
1915
제1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쿄시 선거구


-
당선 (6위)
초선
1917
제1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당선 (1위)
재선
1920
제1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쿄 10구
-
3선
1924
제1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정우본당
'''

-
4선
1928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쿄 2구


-
당선 (2위)
5선
1930
제1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당선 (4위)
6선
1932
제1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당선 (3위)
7선
1936
제1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당선 (2위)
8선
1937
제2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당선 (2위)
9선
1942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동교회
-
당선 (1위)
10선
1946
제2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도쿄 1구


106,872 (-%)
당선 (1위)
11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도쿄 1구


108,660 (22.6%)
12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100,610 (22.1%)
13선[12]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149,541 (27.4%)
14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89,572 (15.7%)
당선 (4위)
15선


4. 기타[편집]


  • 프리메이슨의 회원이다. 1951년에 가입했다.
  • 2023년 현재 기준 마지막 법조인 출신 총리대신이다. 하토야마 이치로 이후로는 아직까지 법조인 출신 총리가 배출되지 않고 있다.


5. 둘러보기[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5 07:48:04에 나무위키 하토야마 이치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단,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통해 자민당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을 밀어내고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출범시킨 비자민 7당 연립정권을 승계한 하타 쓰토무 전 총리도 민주당 당적을 보유했으며, 하토야마 유키오가 집권할 때에도 역시 민주당 당적으로 출마하여 나가노 3구 중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했었다.[2] 이치로의 증손자인 하토야마 지로도 1979년 1월 1일생이다.[3] 이누카이 내각, 사이토 내각.[4] 추방의 공식적인 이유는 그가 1937년부터 영국과 더불어 이탈리아와 독일을 다녀온 것을 여행기로 작성했기 때문이었는데, 1937년부터 독-이-일 추축동맹이 논의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걸 꼬투리 잡힌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그의 전쟁 이전의 행적이었다.[5] 혹은 세 가지 약속. 요시다 시게루 참고.[6] 검찰이 자유당 간사장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제삼자수뢰죄 혐의로 체포하려 하자 이누카이 다케시(犬養健) 법무대신이 법안 처리중임을 이유로 검찰청에 대한 지휘권을 발동하여 사토에 대한 체포를 저지한 사건. 민주주의에 기반한 기소독점권 규제라는 명목의 지휘권이 정치적 목적으로 오남용된 것으로, 일본 민주주의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다.[7] 요시다 시게루는 전후 일본의 패전국 위치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평화헌법을 앞장서서 주장했다. 그러자 국방비 부담 감소와 한국전쟁 특수가 맞물리면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부활했고, 하토야마 내각 즈음에는 완전회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일본 내 우익들 사이에 다시금 재무장에 대한 야욕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하토야마는 이것을 간파하고 개헌을 공약으로 걸어서 일본 우익들의 지지율을 그야말로 쓸어 모았다.[8] 사실상 양당제였지만, 규모상이나 조직력 상 자민당이 훨씬 우위였기 때문에 1.5정당 체제로 부르기도 한다.[9] 사실 이건 1960년대 이후 다당화와 중선거제의 영향이 컸다.[10] 자민당 61석 VS 사회당 49석[11] 이런 하토야마의 탈미노선은 그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공직 추방을 당하고 난 직후 더욱 강해졌다.[12] 분당파 자유당 (하토야마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