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다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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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대
제92대
제93대
제9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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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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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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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6대 내각총리대신
미키 다케오
三木武夫 | Miki Takeo


파일:Takeo_Miki.jpg

출생
1907년 3월 17일
도쿠시마현 이타노군 고쇼촌
(現 도쿠시마현 아와시)
사망
1988년 11월 4일 (향년 81세)
도쿄도 치요다구 미츠이기념병원[1]
재임기간
제66대 내각총리대신
1974년 12월 9일 ~ 1976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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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미키 무쓰코[1]
자녀
장녀 다카하시 기세코[2]
장남 미키 히로시[3]
차남 미키 가쿠[4]
처조카 모리 에이스케[5]
학력
미쇼무라 심상고등소학교 (졸업)
도쿠시마현립 상업학교 (중퇴)
사립 츄가이 상업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 / 졸업)
메이지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법학 / 명예박사)[6]
정당

파벌
번촌정책연구소
지역구
도쿠시마 전현구
의원 선수
19 (중)
의원 대수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약력
중의원 의원
제51대 체신대신
국민협동당 서기장
제17·18대 운수대신
제5·10대 과학기술청장관
제2·8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11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27대 통상산업대신
제95·96대 외무대신
제4대 환경청 장관(부총리 겸직)
제7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66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유년 및 성장기
2.2. 정계 입문
2.3. 전쟁 후의 활동
2.4. 총리 취임
2.6. 말년
3. 평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제66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2. 생애[편집]



2.1. 유년 및 성장기[편집]


도쿠시마현에서 농업 겸 비료생산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도쿠시마 상업학교로 진학하여 4학년 재학 중, 야구고시엔 출전비용을 마련하고자 바자회를 개최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이 수익을 야구부가 아닌 학교 전체를 위한 예산으로 전용하자, 미키는 학교 측에 예산사용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였다. 학교가 이를 거부하자 미키는 격분하여 동급생들을 이끌고 수업 거부 투쟁을 주도하며 학교와 마찰을 일으킨 끝에 강전 처분을 당하여 고베에서 남은 학업을 마쳤다. 이 사건은 미키의 인생에서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그는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법학부에 편입해서 1937년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웅변클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졸업 후 잠시 USC로 유학을 떠났으나 중도귀국하였고, 그 해 바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된다.

그의 결혼은 미키가 고베에서 다니던 학교의 이사장, 간사이 상계의 거물 유우키 도요타로[2]의 중매로 이루어지게 된다. 유우키는 미키를 높이 평가하여 미키가 중의원 의원을 지내던 1940년, 모리 노부테루[3]라는 재벌의 딸을 아내로 얻을 수 있도록 중매를 서주었다. 가난한 도쿠시마의 농가 출신에 미래가 불안정한 정치인이었던 미키와 대재벌의 차녀인 모리 무쓰코 사이엔 하늘과 땅같은 격차가 있었기에 처음에 무쓰코는 결혼을 주저했지만 중매를 선 유우키의 "모리(森)도 미키(三木)도 인수분해하면 똑같이 3개의 나무니까, 시집이 아니라 그냥 똑같은 집에 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놓일 거다"라는 설득에 결혼을 결심했다. 10살 연하의 아내와는 처음부터 달콤한 신혼생활따윈 없이 정치인과 정치인의 아내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금슬은 꽤 좋았다.

처가인 모리 가문은 재계과 정계 양면의 명문으로, 아내의 아버지인 모리 노부테루, 처남들인 모리 사토루, 기요시, 요시히데가 모두 기업인을 지내다 중의원 의원, 대신직을 역임하였으며, 현재는 치바 11구모리 에이스케 전 법무대신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아내 무쓰코의 언니는[4] 경제계에서 이름난 안자이가(安西家)에 시집을 갔는데 이를 통해 미키는 사토 에이사쿠, 그리고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과도 연결된다. 미키는 재벌과의 혼맥을 대를 이어 맺었는데, 그 자신은 모리재벌 창업주의 사위이며, 장남 미키 히로시는 토요제관 창업자 다카사키 다쓰노스케의 손녀와 결혼시켜 현재 토요제관그룹 홀딩스 명예회장이다.


2.2. 정계 입문[편집]


1937년 하야시 센주로 내각이 중의원 해산을 선언함과 동시에 제20회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때 학생이면서도 선거운동을 도운 이시다 히로히데는 나중에 미키파의 중진으로 노동대신 등을 지낸다. 그리고 레프첸코에 의해서 KGB에 포섭된 인물이라고 지적당하는 등 스캔들도 있다고.

3~40년대에 정치인 생활을 하면서 드물게 반정부적인 연설을 하였으며 기본적으로 군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일본 헌법의 초안작성에 참가, 미일동지회를 결성하여 개전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2.3. 전쟁 후의 활동[편집]


1952년 일본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 내각에 입각하여 체신대신을 지내고 진보-보수 세력의 절충을 제안하여 하토야마 이치로의 민주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2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나 법안상정을 놓고 중의원과 마찰을 빚은 끝에 결국 사임했다. 미일안보조약 때도 표결 직전에 퇴장해 결국 표결에는 불참, 반대의 뜻을 내비쳤다.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지냈으나, 오키나와미 해군 원자력항공모함이 주둔하는 문제를 두고 사토의 비핵 3 원칙과 어긋난다 하여 사임하는 등, 자민당 소속이면서도 당시로서는 진보적 정치인으로 주류 정치계와 선을 긋는 행보를 자주 보였다.

그 절정이 사토 에이사쿠의 4선 도전에 대한 저항이었다. 당 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의 공작으로 당내 중간파들이 사토 4선을 지지하고 나선 데에 고무된 사토는 단독경선, 즉 그냥 4선으로 추대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사토의 욕심에 대해 민주정치의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경선에 도전, 사토가 재선할 당시 얻은 표보다 더 많이 득표하였다. 이 일로 총리 자격이 있다고 당내외에서 인정받은 것은 덤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보수의 지류".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출신 국회의원이 정계의 주도권을 잡는 전후정치를 "보수의 본류"라 함에 빗대어 말한 것.

1972년 각복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민주당총재 선거에 출마했으나 결국 후보직을 사임하고 중일수교를 공약으로 하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하여 다나카 내각에서 부총리 겸 환경청 장관으로 선임되었다.

2.4. 총리 취임[편집]


파일:external/www.weblio.jp/souri66.jpg
1974년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 그 금맥과 인맥' 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춘추 11월 호에 다나카의 여비서 사토 아키코를 겨냥한 논평을 발표하여 다나카의 금권정치에 문제를 제기하자 다나카는 여론의 거센 반발을 받고 총리직을 사임했다.

다나카는 후임 총리로 외무대신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하며 오히라를 총리로 내세우고자 작업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뇌물수수 의혹 때문에 밀려났는데 차기 총재선거에서 이런 식으로 관여하게 되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다나카에게 노골적으로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결국 주류파벌이 아닌 미키가 총리가 되었다.

1975년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장례식에 갔다가 괴한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경시청의 시큐리티 폴리스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2.5. 록히드 사건[편집]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키는 곧바로 정치개혁을 주도하여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개혁하고 다나카 체포를 결행하였다.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미키를 실각시키고자 "미키내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미키 총리는 이를 역이용하여 더욱 다나카를 강경하게 몰아붙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당시 법무대신인 이나바 오사무는 다나카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하였는데, 이 일은 훗날 다나카에 대한 표적수사였다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았다.

다나카 체포과 구속을 성사시켜 청렴한 미키라는 별명으로 청렴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얻었으나 당시 자민당의 거두인 다나카를 사법처리했다는 것 때문에 자민당 내에서 번번이 미키퇴진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정치적 부담이 되어 미키는 결국 자민당의 내분과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2.6. 말년[편집]


총리 사임 이후에도 자신의 계파 번촌정책연구소를 이끌고 꾸준히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9년에는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총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라는 40일 항쟁을 주도하였으며, 오히라의 사망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건재함을 과시했다. 1980년 고모토 도시오에게 파벌을 넘겨주고 자민당 최고고문으로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났다. 87년에는 재임 50주년을 맞아 중의원에서 최장기 재임의원 표창을 받았으나 이듬해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3. 평가[편집]


총리 재임시절에는 정치자금규제법과 공직선거법 개정 등 정치개혁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일소관계 개선과 아시아 태평양 평화체제 구축[5], 배기가스 규제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리버럴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또한 자유민주당 주류와 뜻을 달리함을 분명히 하여 소수파벌을 이끌고 정치판 한 가운데서 파격적인 발언과 구상으로 파란을 일으켜 당시 정계의 화약고로 꼽혔다. 당시 기자들은 유럽의 화약고였던 발칸 반도에 빗대 미키를 발칸 정치인이라고 조롱하며 야유했으나 즉흥적인 제스처로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노련함을 보여 다나카마저도 정치의 프로는 나(다나카)와 미키뿐이라며 극찬하기도 한다[6][7]

그러나 비판도 없지는 않다. 다나카를 구속시킨 뒤 자민당 내 거의 모든 계파들이 反미키 운동에 동참했을 때 차라리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비판이다. 비교가 되는 사례가 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재임기간 중에 우정개혁을 밀어붙여 당내반발이 생기자 의회 해산 및 선거로 당내 반대세력을 일소하고 개혁조치를 성공한 것.[8] 만약 다나카 구속 → 전 계파의 미키 끌어내리기 공작 → 의회해산 및 선거 크리로 갔다만 설령 다나카 개인은 당선되더라도 다나카파나 다나카를 편든 계파들이 전부 붕괴했을 개연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이렇게 될 경우에는 자민당 일당체제 종식이 훨씬 일찍 이루어지고 번촌정책연구소+일본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 사회민주연합 같은 비 다나카파 연립정권이 17년 일찍 등장했을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미키는 의회 해산이 헌법에 맞는지 마뜩지 않았다라고 후에 진술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정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헌법 정신을 흔들면서까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는 이야기[9]. 그의 헌법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이런 케이스는 일본 역사에 유일하다. 그 덕분에 제33대 중의원 의원들은 전후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4년 임기를 꽉 채웠다.[10] 하지만 결말은 자민당의 참패.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우정개혁을 두고 당내 반발이 있자 의회해산과 선거 실시로 맞섬도 이 당시 정치 신인으로 "미키 내림"의 움직임을 보고 반면교사로 체득한 것이라고 한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37 - 1947
정계 입문


1947
입당


1947 - 1950
합당

1950 - 1952
합당
개진당



1952 - 1954
합당



1954 - 1955
합당


1955 - 1988
합당
사망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37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쿠시마 2구

[[무소속|
무소속
]]

? (?%)
당선
초선
1942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당선
재선
1946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당선
3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도쿠시마 전현구


58,602 (20.8%)
당선 (1위)
4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7,331 (20.4%)
당선 (1위)
5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개진당



71,713 (20.4%)
당선 (1위)
6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4,571 (16.8%)
당선 (1위)
7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7,849 (20.2%)
당선 (1위)
8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2,456 (26.3%)
당선 (1위)
9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4,774 (17.1%)
당선 (1위)
10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5,945 (19.3%)
당선 (1위)
11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7,043 (18.9%)
당선 (1위)
12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8,303 (16.8%)
당선 (1위)
1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8,500 (20.9%)
당선 (1위)
1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2,519 (21.9%)
당선 (1위)
1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566 (16.0%)
당선 (3위)
1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0,544 (20.1%)
당선 (1위)
1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3,891 (14.2%)
당선 (3위)
1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3,834 (17.3%)
당선 (2위)
19선


6. 여담[편집]


미키가 생전 살았던 시부야구 난페이다이(南平台)에 위치한[11] 저택은 미키 다케오 기념관(三木武夫記念館)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보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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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이츠미바시자선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2] 야스다 은행(現 미즈호 은행)의 부행장으로 후에 일본은행 총재, 척식(拓務)대신, 대장(大藏)대신 (現 재무대신)을 역임했다.[3] 모리 재벌 창업자이자 중의원 의원. 그가 세운 쇼와전공이라는 회사는 훗날 쇼와 전공 사건을 일으켜 아시다 내각을 붕괴시켰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 당시 대장성의 핵심 보직인 주계국장에 앉아있던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도 있다. 10만엔을 수뢰하여 수사를 받았다.[4] 즉 미키의 처형[5] 대표적으로 방위예산은 GDP 대비 1%를 넘기면 안된다는 1% 원칙을 처음 제시했다.[6] 사실 이는 다나카와 미키 모두 일본정치에서 있어서 당인파(黨人派), 즉 관료 출신이 아닌 평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에 다수 당선된 정치가였기에 나온 말이다. 다나카와 미키가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 일본의 보수정계의 주류는 요시다 시게루를 시초로 하는, 관료로서 장기간 근무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관료파 정치였다.[7] 다만 다나카는 당인으로써의 정체성보다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이른바 보수본류로써의 정체성이 더 강하였으며 다니카 본인은 자신의 계보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8] 고이즈미는 초선의원 시절 미키 끌어내리기의 움직임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이런 식의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9] 또한 미키 퇴진을 주장하던 의원들 중에서도 대원로급인 호리 시게루는 미키를 끌어내려다가 자민당이 분당되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퇴진운동 강경화에 제동을 걸었다. 호리 자신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분당할 때 가담했다가 선거 및 당 운영 등에서 고생했었고, 또한 1959년에 제1야당인 일본사회당에서 민사당이 분당 된 이래로 두 정당 모두 재통합(158석), 분당(40석) 당시의 의석수를 회복하지 못하는 사례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즉,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정권유지가 가능한데 굳이 모험을 감수해야할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 다음에는 호리에게 신세진 후쿠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자 퇴진운동의 기세가 줄어듦도 미키가 분당을 결심하지 않은 요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미키가 분당의 조짐을 보인 것은 실은 퇴진운동의 김을 빼기 위한 제스처로 보는 의견도 많이 존재하는 편.[10] 이후 제48회 중의원 의원들이 임기 만료 1주일 전까지 재직하며 사실상 임기를 다 채웠다. 이는 202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일정 때문에 매우 늦게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제48회 중의원의 임기만료 후에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치렀다.[11] 기시 노부스케와 한동네 주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