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이치로

덤프버전 :


오자와 이치로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구) 이와테 4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7대
오자와 이치로

선거구 개편
오자와 이치로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이와테 3구)
제42~47대
기카와다 토오루

제48대
오자와 이치로


제49대
후지와라 다카시



일본국 제35대 자치대신 겸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일본국 제32-49대 중의원 의원
오자와 이치로
小沢一郎 | Ozawa Ichiro


파일:小沢一郎.png

출생
1942년 5월 24일 (81세)
도쿄부 도쿄시 시타야구
(現 도쿄도 다이토구)
거주지
도쿄도 세타가야구 후카사와 6쵸메
현직
제49대 중의원 의원
재임기간
제35대 자치대신 겸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1985년 12월 28일 ~ 1986년 7월 22일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펼치기 · 접기 ]
가족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1]
전 배우자 오자와 가즈코[2], 슬하 3남
학력
도쿄도립 코이사카와 고등학교 (졸업)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니혼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 / 중퇴)
국민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정당

파벌
경세회[3]일청회 (회장)
지역구
舊 이와테현 제2구 → 이와테현 제4구이와테현 제3구 → 비례 도호쿠 블럭
의원 선수
18 (중)
의원 대수
32[A], 33[A], 34[A], 35[A], 36[A], 37[A], 38[A], 39[A], 40[A], 41, 42, 43, 44, 45, 46, 47, 48, 49[B]
약력
제32~49대 중의원 의원
과학기술 정무차관
건설 정무차관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제34대 자치대신 겸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내각관방부장관
제30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초대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제6대 민주당 대표
민주당 간사장
초대 생활의 당, 자유당 대표


1. 개요
2. 생애
2.2. 신생당 창당
2.3. 야권 연합 실패
2.4. 신진당 및 자유당 창당
2.5. 민주당 트로이카
2.6. 민주당 여당 시기 행보
2.7. 민주당 탈당과 일본 미래당 창당
2.8. 총선 참패 이후
3. 논란
3.1. "제주도를 사자" 발언 관련 오해
3.2. 일본 우경화의 원조인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제35대 자치대신 겸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전 자유민주당 간사장, 전 자유당 대표. 1942년 도쿄도 다이토구 오자키마치 출생.

과거 55년 체제 시절 자민당의 거물[1]로, 자민당 탈당 후 2차례나 그 자민당을 무너뜨린 경력이 있는 2000년대 일본 야권의 거물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한때 '아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허나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민주당의 당대표를 지내다 문제가 생겨 사임한 직후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정권 교체에 성공한 것까진 좋았으나, 이후 내부분열로 2012년 자파 의원들을 데리고 분당을 결행하여 일본 미래당을 창당했다가 중의원 선거에서 털리고 이후 자기 세력이 많이 줄어들어 정계에서의 영향력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결국 2020년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7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이와테현 제3구에서 당선되며 17선이란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현역 최다선 의원이며[2], 1969년 27세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된 이래 80세를 목전에 둘 때까지 단 한 번도 낙선하지 않았지만, 2021년 치러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소선거구 낙선 후 비례 부활하여, 오자와 시대의 종막이 엿보인단 평이다. 어쨌든 18선에 성공했다.


2. 생애[편집]



2.1. 다나카 가쿠에이의 수제자[편집]


아버지는 오자와 사에키로, 구제 카이세이 중학교니혼대학 법학부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다 정계에 입문해 중의원 10선, 운수대신, 우정대신, 건설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치바현의 대지주가문 출신이었다. 본적지는 아버지의 출신지 이와테현 오슈시. 본래 자민당 소속 의원이었으며 도쿄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변호사를 지망하여 니혼대학 대학원 법학연구과에 입학, 사법시험 지도를 받고 있었다.


파일:뱃지를 다는 오자와 이치로.jpg

1969년 초선의원으로서 뱃지를 다는 오자와 이치로
그러나 그 도중인 1968년 아버지의 급사로 급히 세습이 결정되어 1969년 자민당에 입당해 자민당 공천을 받아 구 이와테현 제2구에 출마해 그 해 중의원 선거에서 27세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선거운동을 하던 중 다나카 가쿠에이의 눈에 띄어 다나카 파벌의 일원들이 조직에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감시 역할을 하는 젊은 의원들 그룹[3]의 리더로 오자와가 임명되면서 다나카의 수제자가 된다.[4] 이후 자민당 총무국장과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맡으며 경력을 쌓아갔다. 다나카는 전성기에 메지로에 3000평에 달하는 대저택을 지어놓고 자택정치를 즐겼는데 오자와도 세타가야 후카사와의 1000평에 달하는 저택에[5] 의원들을 초청해 파티를 여는 등 다나카와 비슷한 자택정치를 하였다.

1985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으며, 가이후 내각 아래서는 47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6]했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인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의 사퇴와 여성 스캔들 문제로 사퇴한 우노 소스케 전 총리의 연이은 사퇴로 인해 정치개혁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자신의 오랜 동지인 하타 쓰토무를 선거제도조사회장에 취임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를 수락한 하타 쓰토무는 후에 소선거구제 도입에 힘을 쓰게 된다. 1990년 총선거에서는 당초에 접전일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자민당의 과반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1991년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지원한 후보가 패배하자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당내 2인자로 남아있었다.

1992년에는 다케시타파 회장인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가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은 것이 들통나(사가와 규빈 사건) 의원직을 사퇴하게 되면서 후임 회장 자리를 노리고 후계 싸움이 발생하게 된다. 오자와 이치로는 자신의 동지였던 하타 쓰토무를 지원했으나 후임 회장으로는 오부치 게이조가 결정되었고, 결국 12월 오자와 이치로는 하타 쓰토무와 신파벌 '개혁포럼21'를 결성하면서 구 다케시타파를 떠나게 된다. 개혁포럼21에는 오자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고 이를 두고 '이중권력'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2.2. 신생당 창당[편집]


1993년 중의원 선거제도를 중대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꾸는 일명 정치개혁법안을 두고 자민당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반발세력에 굴복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법안성립을 단념하게 된다. 이에 반발한 오자와 이치로는 하타 쓰토무와 함께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졌고, 결국 자민당의 분열로 내각불신임이 가결되면서 이에 대항한 총선거가 실시되게 되었다. 결국 오자와 이치로는 자민당을 탈당하고 "정치개혁"을 구호를 내걸어 일본 신생당을 결성했으며 대표에는 하타 쓰토무가 맡았다. 그해 신생당은 중의원 의원 총선에서 약진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등극시키는 조건으로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신당 사기가케, 일본신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과 연립정권을 구성하는데 성공을 하며 원했던 정치개혁법원도 통과되며 잘 나가는 듯 싶었지만...


2.3. 야권 연합 실패[편집]


호소카와 총리가 국민복지세 논의를 구상하다가 여론의 반발에 밀려 사퇴했다. 이 와중에 민사당과 일본신당, 신생당 등이 통일회파 개신을 구성하기로 하면서 연립정권내 1당이었던 사회당이 강력 반발하며 연정에서 이탈, 과반수가 붕괴되었다. 이후 하타 내각이 출범했지만 오자와는 하타 쓰토무 총리와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사회당이 자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성할 기미를 보이자 하타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시켜 총선을 통해 안정의석을 확보할려고 했지만 결국 해산을 포기하고 사임했다.

이에 자민당은 사회당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원장을 수반으로 한 자민-사회 연립 정권 수립을 기도하고, 오자와는 자민당 출신 가이후 토시키를 내세워 자민당의 반란표를 발판삼아 비자민 연정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과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당선. 그 유명한 무라야마 담화가 나온게 바로 무라야마 총리의 성향 때문인데 자세한 것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항목 참고.


2.4. 신진당 및 자유당 창당[편집]


이후 오자와는 자신의 주도로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을 통합해서 신진당이라는 정당을 만든다. 신진당은 재편된 소선거구제 + 비례대표제 하에서 정권교체가 가능한 '양대정당'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결성된 것으로서, 당수는 가이후 도시키, 간사장은 오자와 이치로가 맡았다. 1995년 7월에는 참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 의석으로 자민당보다 앞서기도 하는 등 40석으로 선전하면서, 자민당을 상대로 정권교체를 노리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5년 12월 가이후 도시키 당수의 임기만료로 진행된 당수선거에서 출마하였으나, 25년간의 동지라고 할 수 있는 하타 쓰토무와 맞붙게 된다. 개표 결과 오자와 이치로가 승리함으로써 오자와 이치로가 당수가 되었으나 이후 하타 쓰토무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파일:굳은 표정의 오자와 이치로.jpg

선거 패배로 인해 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에 응하는 오자와 이치로
그런데 정권교체를 노렸던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구 사회당 지지층 흡수에 실패하여 156석을 확보하는 부진을 거두자 비주류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등 위기에 빠졌다. 오자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자민당과 연정을 시도했으나 이는 당내에서 거세게 반발을 샀고 결국 1997년 12월에 신진당을 해산했다. 1998년에 자유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자유당은 일본 민주당에 밀려 원내 3당으로 전락했고, 지지율도 높지 않았다. 다만 1998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6석의 의석을 거두며 생각보다는 좋은성적이라는 평은 받았다.

간 나오토를 총리 후보로 내세웠으나 자민당이 중의원 다수의석을 차지했던고로 오부치 게이조가 총리로 등극했다. 이후 오자와는 자민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의견 차와 공명당의 연정 참여로 연정에서 자유당의 지분이 좁아지자 오자와가 연정탈퇴를 표명하며 연정이 깨지게 되었고,[7] 이후 자민당은 공명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를 하게 된다. 이 때 연정잔류를 지지하던 의원 26명은 보수당이라는 정당을 구성했다. 다행히 이들은 2000년 중의원 의원 총선에서 참패하고 반대로 자유당은 22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선전했다. 자유당은 다시 2001년 참의원 선거에서 부진하면서 오자와는 민주당과의 합당논의를 진행했고, 결국 2003년에 자유당이 민주당에 합류하는 식으로 통합되었고(민유합병) 오자와 이치로는 민주당의 당대행이 되었다.


2.5. 민주당 트로이카[편집]



파일:민주당 트로이카.jpg

민주당 트로이카 3인[8]
2003년 총선에서 177석을 확보해 선전을 거두었다. 2004년 간 나오토가 연금 미납문제로 사퇴하면서 민주당의 당대표로 내정되었으나 본인 역시 연금미납 문제로 고사했다.[9] 이후 참의원 선거 승리 이후에 부대표로 등극하며 승승장구 할것 같았으나...

2005년 "우정 해산"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참패하며 113석을 거두는데 그쳤고, 이 패배로 민주당 부대표에서 사임했다. 그러나 이것은 약이 되었다. 오자와는 다시 마에하라 세이지가 호리에 메일 문제로 사퇴하면서 마침내 민주당 당대표로 등극했으며, 2007년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의 실정을 틈타 민주당이 참의원 1당으로 등극했고, 이후 총리로 등극한 후쿠다 야스오도 별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다가 다시 패망하는게 오자와의 가장 큰 특징. 2009년 들어 북한의 로켓 발사 및 불법자금 수수 의혹이 터지면서 지지율에서 아소 다로 총리에게 역전당했다.[10] 결국 2009년 5월 임기만료로 물러났으며, 후임 당 대표로 하토야마 유키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하토야마의 새 얼굴을 내세워 결국 압도적인 승리로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2.6. 민주당 여당 시기 행보[편집]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09121202690001300_P2.jpg
2009년 12월 방한하여 국민대학교에서 "새로운 한일관계와 그 역할을 담당할 리더의 육성"이라는 특강을 했다. 이 특강에서 "불행했던 시대 사죄한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국민대 강연을 마치고 조선호텔에서 조훈현 九단을 만났다. 바둑 아마 6단이라서 조훈현 九단과 넉점 깐 접바둑에서 이기고 친필 바둑판을 받았다. (아마도 조 9단이 봐줬을 것으로 추측된다.) 저녁에는 청와대로 가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 만찬을 가졌다. 

하토야마가 총리에 오른 이후로는 섭정이라는 비야냥을 들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으며, 12월 방한에 앞서 같은 달에 있었던 중국 방문에서는 무려 세자리 수의 의원을 끌고 왔다. 그야말로 막후 실세. 그 직후 한국에 와서는 "사죄한다"라는 표현과 함께 천황의 방문을 제의하는 등의 발언을 보였다. 이 때문에 우익들에게는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신나게 까였다.

2010년 중순, 또 다시 벌어진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간사장 자리에서 낙마하였다. 그런데 낙마한지 세 달도 채 못돼서, 하토야마가 사임한 자리에 총리 한번 해보겠다고 민주당 대표 선출 레이스에 기어나와 민주당 팀킬을 감행. 하지만 2010년 9월 14일 선거를 통해 300표라는 차이로 패배하고 간 나오토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다.

오자와의 도덕성 문제가 얼마나 치명적이었냐면, 당 대표 선거 기간 중에 거의 모든 언론이 오자와에 대해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으며,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주당이 아무리 글러먹어도 오자와가 총리되면 그땐 정말 끝"이라는 모토로 깠다.[11] 우스갯소리로 오자와가 총리가 되는건 엔화 가치는 떨어질테니 수출은 늘어나겠네 라고 할 정도로 비난에 비난이 겹쳤었다. 향후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잡을 희망이 상당히 희박해보이는 현재로서는 이 사람이 총리가 될 일은 사실상 물건너 간 것으로 판단 될 만한 결정적 패배였다.

결국 총리 선거 실패 후, 불기소 처리된 정치문제가, 고등 법원의 판단으로 강제 기소.

이리되자 간 나오토 총리는 오자와의 당원권을 정지시키고 탈당하라고 압박하는 상황. 오자와도 이에 반발하면서 자파 의원들을 동원해 간 총리의 퇴진을 압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오자와가 자파 의원들을 데리고 탈당해 신당을 차릴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미 오자와 계파의 의원 16명이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마친 상황이었다.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간 총리가 무능하다고 질타하면서 간 총리의 사퇴를 압박했지만 자민당과 공명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자 간 총리가 하토야마 전 총리에게 사정해서 자진 사퇴라는 명분을 얻고 내각 불신임안을 부결시켰다. 사실상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오자와 계파도 반대표를 던졌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내각 불신임안이 부결되자 마자 간 총리가 2012년 초에 물러나겠다고 말하자 하토야마 전 총리가 빡치면서 오자와 전 간사장측과 연대해 조기퇴진을 압박했고 결국 2011년 8월쯤에 간 총리가 사퇴하겠다는 말을 받은 상황.

이로 인해 후임 총리 인선 준비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기묘하게도 일본에선 이제 오자와의 판이 도래했다라는 식의 분석이 나왔었다. 심지어 야후 재팬에서는 차기총리감 1위로 오자와가 지목되기도 하는 등 의외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지막 기회에도 불구하고 정치자금 문제라는 약점때문에 결국 본인이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당초 오자와 계파와도 다리가 걸쳐있는 노다 요시히코를 지지하지 않을까 했지만 결국 가이에다 반리 산업장관을 내세우기로 하면서 민주당 대표선거는 다시금 오자와 대 반 오자와의 흐름으로 가게 되었다. 1차 투표에서 가이에다 반리가 1위, 노다 요시히코가 2위를 차지했지만 과반득표자가 없어 2차 결선투표를 치루게 되었는데 이때 반 오자와 세력이 결집해 노다를 밀면서 노다가 가이에다를 제치고 대표에 당선되었다. 가이에다를 통해 막후 실권자의 위치를 회복하려던 오자와는 영향력의 쇠퇴를 절감해야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7. 민주당 탈당과 일본 미래당 창당[편집]


2012년 4월 26일, 일본 법원은 오자와의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1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온것이긴 하나 일본의 법전문가들의 분석은 항소를 하더라도 오자와에 대한 무죄판결이 뒤집어지긴 어려울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라고.[12] 일본 언론들이나 세간의 인식은 오자와가 영향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심지어 2012년 9월에 있을 민주당 대표경선이 출마해서 총리를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으며, 심지어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오사카 유신회와의 연대로 차기 정권을 노릴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오며 오자와는 다시 기회를 잡는가... 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다시 오자와의 정권 장악에 빨간 불이 켜지고 말았으니, 원전사태때 비서와 함께 도피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인 마사코가 폭로하면서 다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1. 방사능 누출 정보를 접하자 고향이자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현 제4구를 버리고 내연녀인 비서와 도쿄로 도망가버림.
  2. 근데 조강지처인 마사코는 정치인이 국민을 저버려선 안된다며 이와테에 남음.
  3. 잠행타다 취재가 들어오니까 그제서야 기어나옴.
  4. 지진피해 복구기간동안 지진지역에서 제일 떨어진 지역에서 낚시나 하고 있음
  5. 그러면서도 간 나오토 총리가 지진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는 이유로 총리 해임안을 강행함.

본인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증언 당사자가 40년간 함께한 부인임을 감안하면 절대 쉽지 않다.

결국 2012년 7월 12일, 노다 총리가 소비세 증세를 밀어붙여 통과되자 이에 반발해 자신을 포함한 계파 의원 51명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다. 곧 반 증세신당을 창당하고 노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겠다는 상황. 신당의 이름은 "국민 생활이 제일"로 결정되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녹색바람으로 일부 도망간 홋카이도 의원들도 있었다.[13]

국민 생활이 제일은 2012년 7월 15일 기준 지지율 3.7%라는 경이롭게 낮은 수치를 기록했고 일본인의 81.8%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상황이라 중의원 선거가 치러지면 대부분의 현역의원들이 날아가고 오자와 조차도 생존을 장담할수 없는 지경이라 당이 공중분해 되거나 잘해야 소수정당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몇몇 오자와계 의원들을 데리고 시가현지사인 가다 유키코가 창당한 일본 미래당에 입당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16일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미래당의 62석의 의석이 9석으로 줄어드는 사태를 맞이했다. 비례 득표율은 일본 공산당(6.1%, 비례만 8석)에도 뒤지는 7위(5.6%). 오자와 자신은 탈원전집회에 참석하는 생쇼를 해서 겨우 지역구 수성에 성공했으나[14] 여당 민주당도 원내 2당(득표율 3당)으로 떨어졌거니와, 이 결과는 오자와의 정치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는점 에 의미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


2.8. 총선 참패 이후[편집]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본 미래당 대표직을 사임한 뒤 자진 탈당하였다. 그러나 자기 계파였던 가이에다 반리민주당 대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복당이 불허되자 미래당으로 돌아와서 일본 미래당 이름을 생활당으로 변경한 뒤 생활당 당 대표가 되었다. 2013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어떻게든 유의미한 의석을 확보한 뒤 민주당과 거래를 할 모양인 듯.

2013년 2월 25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기사.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더 낮은 1.77%를 득표하며 0석. 비개선 2석만 남으면서 진짜로 망했다. 2.36%로 2석이라도 챙긴 사회민주당보다도 망한 셈. 반면 일본 공산당은 꾸준하게 약진하여 9.68%나 득표하며 제5당, 민주당과 일본 유신회를 뒤이은 사실상 제3야당이 되었다.

2014년 9월에는 한국의 국민대학교에 방문하여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수여식 영상을 보려면 링크를 클릭.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생활당은 지역구 0.9%, 비례대표 1.9%라는 처참한 성적을 받으며 완전히 폭망했다. 그래도 오자와 이치로 본인은 어찌어찌해서 다시 당선되었다. 2014년 12월, 무소속으로 활동하던 전 배우 야마모토 타로를 영입해서 중, 참의원 숫자 5명을 채워 간신히 정당 요건을 채워 교부금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당명이 생활당과 야마모토 다로와 친구들이라는 기묘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2015년 2월에는 김종필 전 총리의 상가를 방문해 조문하였다.

2016년 10월 12일, 당명을 자유당으로 변경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 자신이 만들었던 자유당과 동일하다.

2017년 10월 19일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유세에서 같은 당 소속의 참의원 의원이었던 배우 출신의 야마모토 타로가 대신 나와 그를 응원하기도 하였다.

10월 22일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희망의 당고이케 유리코에게 배척당하면서, 무소속으로 이와테현 제3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로써 17선 의원이 됐다.

2019년 1월 22일, 국민민주당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와 회동해, 자유당과 국민민주당 양당을 합당시키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4월 26일 공식적으로 자유당을 해산하고 국민민주당에 합류했다. 이로서 오자와 이치로는 2012년 민주당 분당 사태 당시 탈당한 이후 7년만에 민주당 계열 정당으로 복귀하게 됐다.

아베 신조 정권 타도를 외치며 공산당과 손잡기 시작했다. 오자와는 9일 자신이 운영하는 정치학교에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일본공산당 위원장을 초대했다. 오자와는 1993년부터 숱한 정당을 만들고, 다른 당과 연합하면서도 공산당은 알게 모르게 배제해왔는데, 그래서인지 시이 위원장 초청은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시이 위원장은 이날 초청 강연에서 "정권을 같이하자고 마음먹어 준다면 최대한의 선거 공조를 할 수 있다"고 말해 앞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연정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오자와가 막후에서 구상 중인 '반(反)자민당' 야권 연합에 공산당이 참여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우쓰노미야 겐지 변호사가 출마하고, 일본 공산당, 사회민주당, 입헌민주당이 지지를 하자 현재 국민민주당에 있는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전 대표는 에다노 유키오 대표와 만나서 우쓰노미야를 지원한다고 전했다.#

2020년 에다노 유키오 의원의 신당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에다노가 대표에 출마하면 지지의사도 밝혔다.#

입헌민주당 입당 이후 2021년 열리는 총선에도 같은 지역구에 다시 출마해 자민당의 후지와라 다카시와 리턴 매치, 18선째를 노린다. 다만 오자와의 입김이 강한 입민당 이와테현련[15]에서 이와테 1구에 현역인 시나 다케시 의원 대신 아나운서 출신의 사노 리에를 출마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중앙당으로부터 저지당하면서 체면을 다소 구겼다.

그리고 2021년 총선에서 자민당 후지와라 다카시한테 밀려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래도 표차가 크진 않아서 석패율제로 구제되어 18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앞서 시나 다케시 저격 실패와 함께 이번 패배로 '이와테 쇼군'이라는 절대적인 명성에 큰 상처를 입어 향후 정치적 행보를 풀어나가기가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야당 공투에 너무 집착하여 기존의 反 공산당 이미지를 본인 스스로 내다버린 것[16]과 함께 시나 다케시에 대한 과도한 저격의 반작용이 오자와를 낙선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22년 7월, 아베 신조 전 총리 암살 사건에서 피격 직후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말하고, 아베가 사망한 후에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초래한 자업자득이라고 발언해 큰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30년동안 한 차례도 자민당에게 내주지 않았던 이와테현의 의석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023년 6월 21일, 기존의 오자와 그룹을 일청회(一清会)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정책 그룹으로 격상시켰다. 동시에 독자노선을 외치는 이즈미 겐타 지도부와 달리 범야권 단일화를 추진하는 모임인 『야당 후보 단일화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유지회』(약칭 유지회)를 출범시켰다.

3. 논란[편집]



3.1. "제주도를 사자" 발언 관련 오해[편집]


2009년 3월에 오차와 이치로는 "제주도를 사자"라는 혐한 발언을 했다는 의혹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한국 정치학과 학자들 사이에선 꽤 평가가 좋은 편인 오자와 대표가 별 생각없어 보이는 저런 말을 했다는 것에 의심을 품은 네티즌이 관련 대화 전문 자료를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의 발언 가운데 극히 일부만이 본래 의미와는 달리 과장되어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관련 사안 자체가 논란이 되었던 만큼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고라에 올린 원게시물이 삭제되어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상황을 간단히 전하자면 이랬다고 한다.

사시모리 연합회장이 "최근 한국인들이 대마도 땅을 많이 산다는데,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자 오자와 대표가 신경 안 쓴다고 대답했고, 다시 "일본 땅이 한국 땅이 된다는 건데 신경 안 쓴다니요?" 라는 식으로 묻자 어이없었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면서 "그러면 일본인이 제주도에 땅을 산다고 해서 제주도가 일본 땅이 됩니까?"라고 예를 들며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기레기들이 오자와 대표가 한 말을 앞뒤내용을 다 자르고 "제주도를 사자"라고 왜곡해 보도한 것이다.

한편 해당 링크에서 그의 모친인 오자와 미치의 무덤이 제주도에 있으며, 관보를 통해 오자와 이치로의 아버지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주장도 올라와 있다. 근거는 전혀 없다.

국민대학교 일본학 연구소와 링크가 있는듯 하다. 한창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에도 방문하여 위안부에 대해 보다 진보적인 태도를 취할것을 요구한 바 있는데, 그후 2014년 9월 3일에 다시한번 국민대를 방문하여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2. 일본 우경화의 원조인가?[편집]


1993년 이후부터 오랫동안 야권에서 활동해왔고 2010년대엔 "위안부에 대한 진정성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등의 발언을 남겨 상당히 의외인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사람은 헤이세이 시대 이후 벌어진 일본 우경화의 원조격 정치인들 중 하나로 꼭 언급되는 사람이다.

오자와는 1993년 <일본개조계획>(日本改造計画)라는 저서를 통해 전후의 평화헌법이 모든 종류의 전쟁을 포기하면서 일본의 자체 방위, 국제기여 기회를 박탈한다고 비판하면서 해당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자위대의 지위를 격상,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17] 오자와는 이를 "보통국가(普通國家)"라는 용어로 소개했는데, 이후 우익 진영 등에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주장할 때 항상 사용하는 단어로 정착되었다.

위의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1994년에 "평화헌법은 반드시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본인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18] 그로부터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이야 일본 총리대신 등 집권 세력의 주류가 평화헌법의 개정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이 일본 정계의 현 주소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오자와의 주장은 한동안은 가선 우익들이나 하던 소리를 지도층급 정치가가 꺼낸 사례였기 때문에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나 오자와 이치로가 우경화와 관련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딴에는 "관료제를 타파하겠다"는 의도로 일본 내에서 원내정치인들의 영향력이 대폭 확대되어 가는 계기를 마련했단 점이다. 사실 외국의 일반인 입장에서 일본 정치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국회의원 지역구를 거의 봉토 수준으로 다루는 일본 원내정치인들의 지독한 족벌 체제와[19] 그러한 족벌들의 대다수가 막부 말기(바쿠후마츠)까지 거슬러간다는 데에 놀라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일본의 우경화란 건 항상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였던 게 사실이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몇십년간 제지가 가능했던 것은 종전 후 원내정치인들의 영향력이 한 일본사 연구서적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업과 관료들의 이익을 중개하는 브로커의 존재로 위축"된 덕분이었다.[20]

그런데 오자와가 무턱대고 "관료제를 타파하겠다"면서 자민당을 탈당했고 실제로도 자민당 정권을 잠시나마 붕괴시킨데다 이래놓고 오자와 본인이 차기 총리로 밀어줬던 사람은 대놓고 고노에 후미마로외손자였다.[21] 이러니 종전 후 몇십년만에 원내정치인들이 다시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술관료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2015년 기준으로 일본 내각 지도층에 초슈 지역 출신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이게 얼마나 무책임한 변화였는지 알 수 있다. 딴에는 "일본의 기형적인 지도체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인진 모르겠으나,[22] 애초에 일본은 원내정치인이란 사람들이 관료계급보다도 훨씬 더 비정상이란 걸 계산에 넣지 않았다.

2020년대인 지금에야 90년대보다도 일본의 평화헌법이 더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 정계가 아예 호헌파/개헌파로 갈린 상황이니 오자와 이치로 본인도 스스로를 호헌으로 코스프레하고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국이 되기 훨씬 전에 스스로가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뜬금포식 입장을 밝혔던 걸 보면 이것조차 그저 아베 내각에다 딴지를 거는 모습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일 가능성이 농후하다.[23]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65 - 199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3
신생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3 - 1994
창당


1994 - 1997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7 - 1998
정당 해산


1998 - 2003
창당


2003 - 2012
합당

[[무소속|
무소속
]]

20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2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12
일본 미래당 합류를 위한 탈당


2012
입당


2012 - 2014
당명 변경


2014 - 2016
당명 변경


2016 - 2019
당명 변경


2019 - 2020
합당


2020 -
합당[24]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이와테 2구


71,520 (26.71%)
당선 (1위)
초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0,675 (19.18%)
당선 (2위)
재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1,449 (21.98%)
당선 (1위)
3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0,183 (21.52%)
4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838 (22.27%)
5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3,212 (18.87%)
당선 (4위)
6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5,208 (24.80%)
당선 (1위)
7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449 (24.08%)
8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2,451 (40.82%)
9선[25]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와테 4구


125,619 (64.68%)
10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9,099 (59.70%)
11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8,458 (65.11%)
12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4,578 (59.95%)
13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3,978 (62.55%)
14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8,057 (45.50%)
15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5,293 (47.79%)
16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와테 3구
[26]
130,299 (57.42%)
17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9,362 (47.95%)
당선 (2위)
18선[석][27]



6. 기타[편집]


  • 바둑 실력이 거의 6단으로 고수다. 2007년에는 동료 의원이자 7단인 요사노 가오루와 바둑 승부를 했는데 승리하기도 했다. 요사노가 봐준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진짜로 졌다고 요사노가 인정했을 정도니 대단한 고수인 모양.

  • 2012년 이혼하였다. 아내 가즈코는 니가타현을 기반으로 한 건설재벌 '후쿠다구미 그룹'의 총수 후쿠다 다다시의 장녀였으며 73년 호텔 뉴오타니에서 열린 결혼식은 호텔 개업 이래 가장 성대한 결혼식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오자와 이치로와 가즈코는 각각 오자와 저택내에 다른 건물에서 생활할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28] 가즈코는 오자와의 지역구 이와테현에 있는 후원자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혼 사실을 알렸는데 편지에 따르면 오자와는 TV리포터, 유명 요정의 마담 등과 외도를 하고 이들과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았다고 한다.

  • 일본에서 여성 편력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정치인이다. 정치적 스승인 다나카 가쿠에이의 중재로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한 탓인지, 결혼 후에도 자주 다니던 술집 여성과 교제를 계속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고, 아내 가즈코의 위의 폭로 외에도 비서와의 불륜, 심지어 현역 민주당 여성 의원인 아오키 아이와 료칸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듯한 의심이 드는 사진이 파파라치에게 찍히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 때문인지 아내와 이혼 시 자식들도 전부 아내를 따라가서 슬하에 자식이 없다. 때문에 지역구 세습은 꿈도 못 꾸는 상황. 물론 오자와 본인은 반세습 의지가 강해서 꽤 오랫동안 자신은 지역구를 세습시켜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 한국 정치인과 비교하자면 이리저리 당적을 바꾸면서도 선거에선 기어코 살아남는 이인제랑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이인제는 운빨이 다했는지 2016년 20대 총선, 2018년 7회 지선에서 연달아 낙선한 반면, 오자와는 단 한 번의 낙선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이인제의 상위호환이라 할 만하다. 탄탄한 지역기반, 전략가 인상 등의 측면에서 보면 박지원과도 흡사한 측면이 있는데[29] 여기도 2020년 21대 총선에서 떨어졌으니[30] 오자와의 끈질긴 정치 생명력은 대단하긴 하다. 대만 정치인 중에선 쑹추위와 유사한 점이 있다.

  • 외교적으로는 친중파이다. 2007년 민주당 대표 시절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중국 공산당-민주당의 우호관계 협의를 다졌고, 2009년 정권교체 직후에 간사장으로써 600명의 대인원을 이끌고 다시금 방중하여 후진타오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의 해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민해방군의 야전사령관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1990년대 당시의 행동을 생각하면 완전 상반되는 행동이다.

  • 엄청난 다혈질이다. 신진당 시절 오자와의 독선적 태도를 카메라 앞 면전에서 비판한 의원이 있었는데, 오자와의 일갈은 한 번 해볼까?였다. 열이 뻗친 의원이 "한 번 해보자고!"라고 맞서자 그 의원을 향해 뚜벅뚜벅 걸으며 진짜 싸우려 했다. 주변 사람들이 말려서 앉기는 했다만.# 또 민주당 정권 시절 간사장으로써 기자회견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기자들이 아키히토 천황과 시진핑 당시 부주석을 회담시킨 것은 천황의 정치이용이 아닌가라며 비판했다. 이에 오자와는 처음엔 존댓말을 쓰더니 얼마 안 있어 기자들과 반말로 설전을 벌이며 "헌법이라도 읽어보고 와라", "그런 병신같은 소리 하는 인간은 내각의 역원에서 나가는 게 좋다", "알았냐?" 등의 극언까지 나왔다.#

  • 1992년 재단법인 존 만지로 & 윗필드 기념 국제 풀뿌리 교류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다. 존 만지로와 그 시대(ジョン万次郎とその時代)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7. 둘러보기[편집]











[1] 이당시 총리가 선출되면 오자와에게 감사인사를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2] 참고로 일본 역대 최다선 의원은 25선을 한 오자키 유키오다. 현직 중에 오자와의 바로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 16선의 노다 다케시였으나, 2021년 49회 총선에서 오자와와 달리 비례 부활을 못 받고 낙선했다.[3] 유명 어린이 만화이자 TV프로그램 시리즈의 이름을 따서 '소년 탐정단'이라 불렸다.[4]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카네마루 신과 공모하여 다나카 가쿠에이를 몰아낸 다케시타파의 일원이 된다. 오자와는 다나카를 몰아내는 쿠데타를 결행하기 전날 울면서 밤을 지샜다고 전해진다.[5] 파일:スクリーンショット-2023-08-29-14.12.03.png 한 블럭 전체가 오자와의 집이다.[6] 사토 에이사쿠 내각 하의 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공동 1위이다. 그 다음 최연소가 49세에 간사장이 된 아베 신조.[7] 이는 그 동안 과로에 쩔어 있던 오부치 게이조 총리에게 결정타를 날린 셈이 되어 오부치는 그 다음날 쓰러지는데, 그 길로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만다.[8] 좌측부터 간 나오토, 하토야마 유키오, 오자와 이치로[9] 결국 이 자리는 오카다 가쓰야에게 돌아갔다.[10] 2009년 4월 총리적임자 조사에서 아소 총리 21%, 오자와 대표 12%를 기록.[11] 물론 그 와중에도 혹시나 몰라서 막판에 오자와를 지지한다고 돌아선 각료들도 있고, 그동안 심어놓은 자파 인사들이 많이 있긴 했지만. 이 사람이 외국인 참정권 운운하면서 리버럴해보이는 탈을 쓰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스탠스는 우파 쪽에 가깝다. 나쁘게 말하면, 우파와 좌파의 안 좋은 점은 다 모아놓은 인물.[12] 일본 사법체계의 문제점 중 하나인데 지방법원에서 판결이 나면 대법원까지 올라가도 판결은 거의 뒤집히지 않는다. 사실 이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일본이 특별히 거론되는 이유는 3심제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뒤집히는 일이 없기 때문.[13] 물론 녹색바람도 거하게 패망.[14] 미래당 지역구는 고작 2석. 사실 당선이 안 되면 이상한 것이, 도호쿠 지방에서의 오자와였다. 심지어 낙선 되어도 석패로 재당선이 가능했을 것이다.[15] 한국으로 치면 당 지역위[16] 非자민·非공산 연립정권을 출범시켜 55년 체제를 야심차게 끝냈던게 오자와 본인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17] 오자와가 해당 주장을 하기 2년 전인 1991년 일본은 걸프전쟁에서 자국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거액의 전비 지원을 제공했지만, 평화헌법에 따라 실제 군사 지원은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기껏 돈을 왕창 내고서도 미국 등으로부터 비판을 들은 바 있었다.[18]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한국완역판 pg.207)[19] 이 때문에 일본 정계에 붙은 별명이 "Uncommon Democracy (비대중 민주주의)."[20]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한국완역판 pg.177)[21] 다만 아키히토 덴노와 마찬가지로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집안 내력과 달리 과거사에 반드시 반성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22] 사실 확실한 정치적 책임소재의 부재가 버블붕괴와 더 나아가 일제시기 폭주를 불러왔다는 분석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데다가 당시 걸프 전쟁 등에서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가 서방국가들에게 지적받는 등, 일본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러한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파급효과를 제쳐놓고 보면 오자와 본인은 개헌을 주장하던 시절에도 재무장 이상의 침략 정책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일 언행은 보이지 않았기도 하고.[23] 이런 관종짓이 꼴사납기는 해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는 모양인지 2021년 중의원 선거에서 석패율제의 도움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18선이라는 용자짓을 달성하며 일본 현역 의원 중 최다선 의원이라는 타이틀을 꿰찼다.[24] 입헌민주당과 신설 합당[25]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26] 소속은 이었지만 당의 공천(공인)을 받지 않고 출마해서 무소속으로 처리된 것이다.[석] 석패율제 당선[27] 현역 의원중 역대 최다선 기록[28] 세타가야에 위치한 오자와 저택의 부지는 1000평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1942년 동갑내기에 생일도 겨우 12일 차이다.[30] 얼마 안가 문재인 정부 국정원장으로 임명되긴 했다. 이렇게 보면 같은 당 소속이었지만 계파가 달라 한땐 분당까지 하며 과거 소속당이랑 싸우다 다시 합쳤다는 점에서 또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