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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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설명
2.1. 원인
2.2. 정치 불참여와의 관계
2.3. 국민 개개인의 능력
2.4. 인터넷과 정치적 무관심
2.5. 중립과 정치적 무관심
2.6. 현황
2.7. 정치적 관심의 범주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
3.1. 전통형 무관심
3.2. 현대적 무관심
4. 어록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정치적 무관심(政治的無關心) / Political apathy[1])은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국민(시민)들이 정치와 정치적 주제, 현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설명[편집]



2.1. 원인[편집]


국민이 정치에 대해 갖는 인식과 관심도는 역사적으로 그 사회에서 형성되어왔던 환경과 그에 따른 사회적 관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하는 여러 사회적 요소들은 다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국민의 생업이 순탄하며 삶의 수준이 양호하고, 개인주의 성향의 사회이거나, 내셔널리즘 가치관이 옅은 국가일수록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두는 경향이 적다고 여겨진다. 국가와 국민의 대표자로 여겨지는 국가원수의 선출권에 따라 정치에 대해 갖는 인식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이 팽배하다고 알려진 일본이나 영국, 독일 등의 나라는 국회의원에 의해 정부수반이 선출되기 때문에, 정치 지도자에 대해 본인이 선택한 지도자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어려울 수 있고, 이는 국민의 특정 정치 인물, 집단에 대한 관심과 소속감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또는 한편, 미국과 같이 자신이 속한 국가가 강한 국력과 국제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에 의해 정치 지도층에 대한 관심이 형성되는 것과 같이, 그 나라가 위치한 국제적 지위도 정치적 무관심의 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2.2. 정치 불참여와의 관계[편집]


'정치 불참여(政治 不參與)'는 개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정치적 무관심과는 의미가 다르다. 특정 정치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보이콧이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보이콧에 참여한 사람은 정치 불참여를 선언한 것이지만, 그럼으로써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의무투표제가 시행되는 국가에서도 이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의무투표제 국가에서는 투표를 하지 않을 경우 법적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정치 불참여가 이론상으로는 발생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데도 투표장에 '끌려나온' 투표자들은 별 생각 없이 아무에게나 투표하게 되는데(이를 '당나귀 투표(Donkey vote)라 한다), 이런 투표자들의 행위를 정치에 관심이 있는 행동이라 해석할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 불참여를 유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떤 현상이나 행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에 참여할 의지가 없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무관심과 정치 불참여는 일종의 순환관계가 있다.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 불참여자의 수를 늘려 정치와 민의가 괴리되게끔 만들며, 그러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 사람들은 정치적 무관심에 더욱 빠진다. 그 결과 정치 불참여자가 사회에 만연하게 되고, 그 악순환이 멈추지 않으면 정치와 민의가 끝내 분리된다.


2.3. 국민 개개인의 능력[편집]


정치는 국민의 삶에 분명 중요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정치에 지속적이고 무한한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국민에게 제일 중시되는 것은 결국 생업과 가정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인간 개인이 가진 에너지는 한계가 있기에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정치에 집중하기 어렵다. 당장 평일 오전 10시에 국감이 열린다고 가정했을 때, 이를 실시간으로 꼬박꼬박 확인할 수 있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보자.

한편 국민의 정치적 판단력은 편차가 크다. 어떤 학문을 제대로 공부했다고 하려면 최소한 학사는 있어야 하고, 보통 석사 정도는 되어야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다. 정치학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의 정치적 지식은 높게 봐도 고등학생, 낮게 보면 의무교육인 중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거기에 이름도 생소한 정치인, 정당간 관계, 지역별 정치 특징, 정책 이름, 보도자료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각종 공약들까지 더해지면 정치는 더욱 난해해지기 마련이다. 이를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국민은 현실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완전한 직접민주주의를 채택하기엔 너무나 많은 정치적 장벽 및, 자칫 다수의 감정적이고 편향적인 정치노선이 지배하는 포퓰리즘의 난립을 막기위해 엘리트정치를 섞어, 정치 전문가인 정치인이 정치를 상당수 맡는 대의민주주의를 대부분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정치는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정치적 무관심이 생기기도 하니 아이러니하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시대 민주주의가 겪는 가장 큰 문제는, "그 정치 전문가들이 과연 제대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럼에도 왜 "저 바보같은 정치인보다는 똑똑한 나는 왜 정치를 할 수 없는가?"라는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 전문가와 국민의 간극때문에 발생한다.

2.4. 인터넷과 정치적 무관심[편집]


현대에 들어 인터넷은 정치 이야기가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인터넷에서 정치 이야기를 보기 싫어하는 네티즌을 정치적 무관심의 사례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는 올바르지 않은 시각이다.

거실에서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뉴스를 보며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반적인 광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야구장이라면 어떨까? 야구장에서 보라는 야구는 안 보고 계속 정치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좀 좋게 표현해줘야 눈새, TPO를 모르는 사람 정도일 것이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중증 정치병 환자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정치를 다루는 커뮤니티라면 몰라도, 인터넷에는 정치 관련 커뮤니티보다는 그렇지 않은 커뮤니티가 더 많다. 가령 게임을 다루는 게시판의 경우, 해당 커뮤니티에 접속한 사람들은 게임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지 골 썩는 현실 정치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게임과 관련이 없는) 정치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는 사람은 소위 '분탕충' 취급받는 것이 당연하다. 커뮤니티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이런 행위를 정치적 무관심과 엮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정치 이야기를 하라고 판을 깔아둔 곳에서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당장 얼굴을 맞대고 할뿐더러, 토론을 중재할 사회자가 있는 국감, 정치 토론조차 별별 막말과 견강부회로 얼룩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상에서도 명절에 만난 친척끼리 정치 이야기를 하다 편갈라 싸우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니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환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온갖 욕설, 명예훼손, 인격모독 등이 판치는 진흙탕 개싸움이 되는 것이 인터넷에서의 일반적인 정치 이야기다. 네이버미디어다음 등 포털 사이트 뉴스 댓글란은 정치병자들의 헛소리와 유언비어로 얼룩진 지 오래고, 한때 인터넷 민주주의의 참신한 시도로 기대받았던 다음 아고라도 결국 정치병자들에 의해 유도된 극도의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침몰했다. 당시 부작용이 청산되지 못한 채 이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재현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정치 떡밥을 배척하는데, 이걸 정치적 무관심이라고 칭하는 건 부적절하다.


2.5. 중립과 정치적 무관심[편집]


예컨데 군인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투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당, 특정 정치인을 선전/비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고로 현역 간부, 병사가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징계 사유가 된다. 왜냐면 대한민국 군대는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의 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군인도 사상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라고 하는 것이 본인 신분에서 이탈한 정치적 수사를 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도주의와 중립 자체를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중도주의의 경우 좌파와 우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정책을 요구하는 것일 뿐, 마냥 정치에 무관심하여 손을 놓고 있는 행위나 이념이 아니다.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할 경우 대개 해당 입장에 맞는 정책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는 반대파는 물론이거니와 온건 성향의 유권자에게도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소유권의 보장을 통한 자유로운 재화의 이동이 사회의 부를 증대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극히 예외의 경우가 아닌 한 개인 혹은 단체의 경제적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보장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의 편중과 특정 계층의 생산수단 독점이 경제적인 불균형과 불평등을 낳으며 이것은 사회를 좀먹고 계층을 발생, 고착화시키는 암적인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국민복지를 평준화하는 정책을 지지한다.

중도주의자들은 이 둘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한다. 자본주의자의 논거에는 귀속적 지위로 인해 발생하는 운 좋은 무능력자의 사례와 시장 실패에 관한 비효율이 배제되어 있다고 비판할 것이며, 사회주의자의 논거에는 어차피 국유화된다면 누가 열심히 노력할 것이냐며 지적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자의 의견을 인정하되 시장의 실패를 막을 다양한 방어장치의 도입[2]을 지지할 것이고, 사회주의자의 의견도 인정하되 사회주의의 실패를 막을 다양한 방어장치의 도입[3]을 지지할 것이다.

'중립'은 중도주의와는 성향이 다르다. 중도주의는 중립적 의견을 견지하는 정치 성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없으면 취할 수 없다. 반면 중립은 그냥 이도저도 아니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질적 차원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지 성향을 중립론자로 밝히는 이들은 대개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중도주의라는 단어를 정치적 중립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자신을 합리적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치장 심리에서 비롯된다.

중립론자는 정치적 무관심이 심한 사회일수록 숫자가 증가한다. 정치적 중립은 단순히 사회적 산술 평균의 중간값인 중도주의가 아닌 이성을 통한 합리적 기준 설정 과정 그 자체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은 합리적 기준의 설정 과정에서 나오며 그 결과적 편파성과는 무관하다.


2.6. 현황[편집]


앞서 개인의 에너지와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개인의 생업이 곤란해지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들며 다양한 경제적 악재가 발생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으로 인해 촉발된 대침체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촉발된 대봉쇄가 이 기간 중 일어난 대표적인 경제적 위기다.

경제적 위기가 발생하면 고용을 책임지는 기업이 흔들린다. 따라서 고용시장의 유연화가 이루어지며 고용감소가 발생한다. 특히 생존에 미치는 영향이 적어 경기의 흐름을 크게 타는 직종(요식업, 레저)이 주력인 자영업은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생업이 곤란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이는 이기주의와 정치극단주의가 득세하는 배경이 된다.

특히 젊은층은 이런 흐름에 매우 무방비한데, 그나마 저축이라도 쌓아두고 집이라도 어떻게 구해놓은 중장년층과 달리 경제적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적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이 벌어지니 스펙의 기형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일본의 경우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10년을 겪으며 경제적 활력이 크게 줄었다. 거기에 더하여 인구의 고령화가 심해지고 노인층의 소비 특성이 겹쳐 경제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 그 결과 청년층은 극도의 정치적 무관심을 보이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계속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가고 있다. 그런 한편 경제적으로는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태이다.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싶어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도 힘들어진 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정치적 환경이 양자택일화한다. 스펙을 기르는 대신 정치에 관심을 끊을 것인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스펙을 기를 기회를 버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대부분의 사회인은 인간관계가 망가질 위협이 적은 스펙 쪽을 택할 것이다.


2.7. 정치적 관심의 범주[편집]


다만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것의 근거와 범위를 어디까지로 봐야 하는지에는 논의가 필요하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상', '정책', '업적'과 같은 비교적 객관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잘 생겨서(얼빠)', '착해보여서', '어렵게 살아서(언더독 효과)', '아빠가 잘해서(세습)', '나랑 동성(혹은 이성)이라서' 같이 본인 자신에게만큼은 이득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면에선 분명히 비합리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인에게 이런 잣대를 들이대었을 때이다. 객관적인 이유를 들어 정치인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비합리적인 이유로 정치인을 지지하는 사람도 생각 외로 많다. 비합리적인 이유를 근거로 들어 어떤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어쨌든 투표장에 나가 투표했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후보에 대한 고찰 없이 연예인 인기 투표하듯 나라의 앞날에 관여한 무뇌아라고 봐야 하는가?

또한 지지한 후보에 대해선 알지만 그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핵심 측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소속된 당은 모르겠는데 인물이 괜찮아서 표를 주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런 종류의 '어설픈 관심'은 무관심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가?

언론에 언급된 것 이상의 정치 관련 지식을 얻는 한편, 숱한 정치인들의 포트폴리오를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정보가 없어서 몰랐다면,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서 놓치기 쉽다.


3. 정치적 무관심의 종류[편집]



3.1. 전통형 무관심[편집]


정치는 특별한 사람, 높은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정치를 다른 세계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정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태도다. 은연 중에 가지게 된 권력에 대한 충성심과 복종심이 기저에 깔린 경우가 많다.
  • 공포형 무관심: 구시대 권위주의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발현되기 쉬운 무관심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무지하고 힘이 없어 권력자들에게 반항하지 못하니, 권력자들이 뭘 하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깐 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라는 정치의사의 표출이다. 학습된 무기력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 신뢰형 무관심: 현 정치체제나 권력에 깊은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발현되기 쉬운 무관심이다. 이들은 정부의 공정성과 정통성에 지나친 확신을 가진 나머지, 선거 때는 적극적으로 투표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심판에는 무관심하다. 심하면 '권력자는 항상 서민을 위해 고생하고 있으며 시민들은 지도자의 영도력에 추진력을 실어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미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북한이 존재한다. 북한은 에서 주민들에게 돼지 할아버지 신화에 공정성과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가르치며, 당원과 주민 공히 돼지가 잘못을 해도 심판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또, 1989년에 나온 북한 가요인 휘파람에서도 '혁신자는 항상 서민을 위해 고생하고 있으며, 혁신자가 주는 꽃다발을 복순이에게 주면 복순이도 좋아한다.'는 폭군 찬양 뉘앙스의 가사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뢰형 무관심은 지도자의 권위가 실추되거나 국가 자체[4]가 붕괴할 경우 주민들은 패닉 상태를 겪을 수밖에 없다. 공포형 무관심보다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점을 공자 역시 지적한 바 있다.
  • 무정치형 무관심: 시쳇말로 정치가 밥 먹여주냐고 외면하는 경우. 정치적 참여에 신경쓸 시간에 자신에게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이익을 주는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정치참여활동으로 얻는 사회적 이익에 비해서 정치참여로 인해 받는 개인적인 피해가 너무 크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아고라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그날 일을 쉬어도 되도록 참여 수당을 지급했다고 한다.


3.2. 현대적 무관심[편집]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체제와 상호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의 여러 양태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일어나고 있다. 영어로 '얼간이'란 뜻인 'idiot'의 어원도 그리스어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에서 나왔다.
  • 굴절적 무관심: 원래는 강렬한 정치적 관심이 존재했지만, 정치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뜻대로 실현되지 않다 보니 이에 환멸을 느껴 정치적 관심이 식어버린 경우다. 이들은 '내가 투표한다고(혹은 투표 안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혹은 '이놈이 되나 그놈이 되나 마찬가지'라는 냉소주의적 신념 하에 정치 참여를 포기한다. 극단적으로 이는 대중의 소외 현상을 불러올 수 있으며 권력으로 하여금 현상유지를 가능하게 하여 권력의 폭력화를 허용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권력이 소수집단을 폭력으로 탄압해도 잘 발견되지 않고, 공론화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정치혐오로 인한 투표 포기로 직결된다.
  • 사생활화형 무관심: 국민들이 자신들과 밀접한 이해관계에 몰두한 나머지 공공의 이익과 사회발전에는 무관심해지는 경우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전문화되면서 사회 문제와 현상을 파악하는 데 과거보다 많은 노력이 들게 됐기 때문에, 거대 담론을 피한 채 개인적인 이익과 행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면 권력은 국민들에게 당장의 사소한 이익을 만족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강압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해관계인들에게는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결정적인 불이익이 되는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게 된다. 대국적인 식견과 견해를 가진 정치인보다는 지역구 주민이 당장 좋아하는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이 쉽게 당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소비형 무관심: 국민들이 소비에 몰두하고 달콤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면서, 골치 아프고 어려운 정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되는 경우다. 사회생활형 무관심과도 연관이 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정책이 바로 우민화 정책이다. 우민화 정책 하에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서로 손을 잡아 대중매체 등으로 소비형 무관심을 조장하고, 이 무관심을 지렛대 삼아 여론조작을 활발히 진행하게 된다. 대한민국 역시 제5공화국 시기에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3S(섹스, 스포츠, 스크린) 정책을 실시한 바 있다. 70년대 볼 수 없었던 에로영화나 프로 스포츠가 80년대 갑자기 생겨난 게 바로 이 때문이다.


4. 어록[편집]



나의 목소리가 국가의 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아무리 약하다 할지라도, 자유 국가의 시민이자 주권자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 투표권을 가진 것만으로도 정치에 관해 알아야 할 의무를 나 자신에게 부과하기에 충분하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갈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틴 니묄러 목사,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5]


옆동네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던 민경이가

백혈병 환자가 되어서

죽어도 아무도 몰랐다

같은 공장 같은 보직의

선영이 지영이도

같은 병으로 차례로

죽어도 아무도 몰랐다

(중략) 그 무엇도 우리의 행복을

막을수 없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아들내미가

군대에 갔다 자살을 했다

난 화가 났는데

아무도 화를 안내줬다

신문에 안나오니까,

결국 아무도 몰랐거든

UMC/UW,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놓았더니> 中. 위 <나치가...>와 비슷한 맥락의 가사이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 놈이 그 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이 다 해 먹는다.

- 민중운동가, 함석헌.# 다만, 이와 비슷한 관용어는 함석헌이 발언한 이전에도 계속 쓰이던 말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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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 위키백과의 표제어. apathy 대신에 indifference/disengagement가 들어가기도 한다.[2] 독과점 등의 불공정거래 금지, 상속세 도입, 기본적 인간의 삶 유지를 위한 복지정책 등.[3] 결과적 평등보다는 기회적 평등의 중시, 복지를 폭 넓게 하되 사유재산제의 인정 등.[4] 북한이 딱 그 경우이다.[5] 사실 이 유명한 말의 시조가 누군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위의 것은 1976년도 버전이 기반. 위키피디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