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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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편

제41~45대
하토야마 유키오


제46~48대
호리이 마나부




일본국 제93대 내각총리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鳩山由紀夫 | Hatoyama Yukio


파일:330px-Yukio_Hatoyama_20090916.jpg

출생
1947년 2월 11일 (77세)
도쿄도 고이시카와구
(現 도쿄도 분쿄구)
현직
공화당 대표
재임기간
제93대 내각총리대신
2009년 9월 16일 ~ 2010년 6월 8일
서명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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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조모 하토야마 가오루
부모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
모친 하토야마 야스코
형제
누나 이노우에 가즈코[1]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배우자
하토야마 미유키
자녀
장남 하토야마 기이치로
친족
조카 하토야마 지로
학력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도쿄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 / 학사)
스탠퍼드 대학교 (공학 / 박사)
명예 학위
단국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부산대학교 (정치학 / 명예박사)
홍콩성시대학 (명예박사)
전주대학교 (명예박사)
신체
177cm, B형
종교
기독교 (개신교, 침례회)
정당

지역구
(구) 홋카이도 4구 → 홋카이도 9구
의원 선수
8 (중)
의원 대수
38[A], 39[A], 40[A], 41, 42, 43 , 44, 45
약력
센슈대학 경영학부 조교수
하토야마 이이치로 비서관
중의원 의원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제2대 신당 사키가케 대표간사
제7대 민주당 간사장
제2·7대 민주당 대표
제93대 내각총리대신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2.2. 정계 입문 이후
2.3. 총리 취임 이후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
2.4. 총리 퇴임 이후
2.5. 정계 복귀 선언
3. 가계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제9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2009년 야당 민주당 소속으로 일본 역사상 최초로 단독 정당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1]를 실현한 주인공이었으나 오키나와주일미군기지인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정치자금 스캔들[2], 중국와의 어선 분쟁 외교 굴욕, 경제 불안 등으로 위상이 추락하여 집권 약 9개월 만에 퇴임하였다.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이전[편집]


1947년 2월 11일, 대장성 관료인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郎)와 브리지스톤 이시바시(石橋) 재벌[3]의 영애인 야스코의 장남으로 도쿄도 분쿄구 오토하의 하토야마가 저택(現 하토야마 회관)에서 태어났다.

명가 출신답게 가쿠슈인(学習院)[4] 초등과와 중등과를 다녔고, 도쿄도립 코이시카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 계수공학과를 졸업[5], 이후 1976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해 도쿄공업대학 조수를 거쳐 1981년센슈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1984년에 정계 입문을 이유로 퇴직하였다. 학계에서 상당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물이기에 하토야마 유키오를 저평가하는 사람들도 "정계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이름있는 공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1975년 3살 연상의 하토야마 미유키와 결혼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 배우이던 미유키는 20대에 미국으로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건너가, 당시 전 남편과 이혼하고 유키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후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사실 그도 재혼이다. 유키오의 어머니가 아들 혼사를 위해서 며느리인 미유키의 전 남편에게 죄송하다고 사죄하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어쨌든 유키오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유부녀였기 때문에...

파일:external/www.sisajeju.com/16485_8240_3750.jpg
결혼 당시 사진. 머리 스타일이 참 묘한데다 뭔가 발랄하다. 일본에선 이야미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2. 정계 입문 이후[편집]


이후 자민당에 입당해 정계 입문, 다나카 가쿠에이총리가 이끌던 목요 클럽(木曜クラブ)의 신인으로서,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가문의 지반이 있는 홋카이도에서 출마, 지역구 내 득표율 2위의 성적으로 당선되었다. 당시는 중선거구제였다. 1988년에는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 라는 초파벌적 정치집단을 결성, 리크루트 사건 등의 당내 비리를 폭로하였고, 이 집단은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로 이어졌다.

1993년 정계 개혁의 소용돌이 가운데 자민당을 탈당, 신당 사키가케의 창당에 관여하였고, 55년 체제의 붕괴와 함께 등장한 호소카와 내각에서는 내각 관방장관 정무부장관을 담당하였다. 이후 성립된 자사사(自社さ, じしゃさ)(민당-일본회당-신당 키가케) 연립정권 하에서는 사키가케의 대표간사[6]를 맡았다. 1996년 사키가케를 일신하여 새로이 창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 그 해 여름 간 나오토, 남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등과 함께 구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파일:2019112800002_2.jpg}}}
1997년 3얼 22일, 창당 이후 치뤄진 민주당의 첫번째 전당대회에서 공동대표 직에 연임된 하토야먀 유키오, 간 나오토

1999년의 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하며 당수가 되었으나, 2001년 제1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에게 참패를 당한 것에 대한 책임론[7], 그리고 오자와 이치로가 있는 자유당과의 이른바 "민유합병" 추진이 오자와 이치로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당내 신진당 출신 의원들 대다수의 반발을 사서 대표를 사직하였다. 그럴 만도 한게, 민주당은 오자와가 신진당 당대표 시절 독재적 당 운영에 반발하여 신진당을 탈당한 의원을 대거 영입하며 몸집을 키운 정당이었다.

그러나 대표 사직 후에도 당내 최대 파벌인 하토야마 그룹의 대표로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후임 민주당 대표인 간 나오토는 오자와 자유당과의 합병에 소극적이었지만, 당시 민주당 최대 그룹 리더였던 하토야마가 "자유당과 합병하지 않으면 그룹 의원들을 이끌고 탈당을 불사(...)하겠다"는 협박과 더불어 그 자신도 세력 확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오자와와 다시 교섭, 반하토야마파의 거두인 간 나오토가 민유합병을 진행시키자 반하토야마-반오자와 의원들은 구심력을 잃었고 결국 오자와의 민주당 입당은 성사된다.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참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오카다 가쓰야의 대표 사임으로 후임 대표가 된 마에하라 세이지는 하토야마 그룹과의 대립구도를 해소하기 위해 하토야마를 직접 간사장에 기용하였다. 그러나 호리에 메일 스캔들로 마에하라 집행부 체제가 흔들리자 하토야마 당시 간사장은 동반 사임을 요구했고, 이를 성사시킨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공백이 된 민주당 대표 자리에 오자와 이치로를 적극 지원해서 결국 대표로 만들었고, 오자와는 그에 보답하며 하토야마를 간사장에 재기용(.....)하였다. 마에하라는 격분했지만 이미 당권은 넘어간 상황.

2007년 참의원 선거의 대승 이후에도 간사장을 유지하였으나, 2009년 5월 오자와 이치로가 정치자금문제로 대표직을 사임하였고, 오자와는 일반당원에게 인기가 많았던 오카다 가쓰야의 당선을 막고 하토야마를 당대표로 만들기 위해 차기 당대표 선거는 의원들만의 투표로 진행시키는 방침을 고수했고, 반발하는 의원들에게 '너희들은 언제나 반대! 반대! 최후만큼은 좀 말을 들어라!라며 일갈했다. 그렇게 열린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 가쓰야를 꺾고 승리, 7년여 만에 당수로 돌아왔다.

파일:external/blog.donga.com/20091103144342.jpg
파일:일본 민주당 리즈시절.jpg

2009년 8월 30일의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단독 정당으로서는 사상 최다 의석인 308석을 기록하면서 대승, 9월 16일에는 중참 양원의 지명으로 제93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2.3. 총리 취임 이후[편집]


총리 취임 후에는 당과 내각의 포스트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을 외무대신으로, 오자와 대표대행은 간사장으로 조정했다. 선거 전에 내건 공약의 이행을 놓고 자민당 등과 대립, 연립정당인 사회민주당, 국민신당 등과도 마찰을 빚었다. 주요 공약은 아동수당, 고속도로 무료화, 오키나와 주일미군 후텐마(普天間) 기지 이전 등인데, 이 중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로 인해 미국과 사이가 불편해져 대미 관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게 되었고, 2010년 5월 말까지 이전지를 확정짓지 못하면 총리를 사임한다는 초강수를 두기도 했다. 이외에도 전 비서의 정치자금 비리 등으로 야당의 공격을 받았고 스스로도 이것을 취임 때부터 우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큰 정부의 복지수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바로 다음 해에 예정된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이유로 증세에는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외교에 있어서 그는 "자주외교"를 표방했으며 친아시아적인 스탠스를 강하게 취했는데, "우애"를 강조하면서 나름대로 동아시아 자유주의 정당에서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중국에게 "미국을 배제한" 동아시아 질서를 제안하기도 했고 덕분에 한국, 중국 등으로부터 일본과의 원만한 외교관계 형성을 통해 모처럼만에 집권 초기에는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안정, 평화에도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오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친아시아적 외교 스탠스는 미국의 큰 반발을 불러와 결과적으로 총리직에 퇴임하게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하토야마는 뉴욕 UN 총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후진타오에게 "미국과의 관계를 격하하고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자 한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미국에게 알려지고 이것은 미국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Asia's Reckoning). 그것도 모자라 하토야마는 일본핵무기 반입 조약 내지 합의 등 공개, 대테러전쟁에 있어서 해상자위대미국 군함에 대한 연료공급 활동의 중단,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과 같이 미국에게 무리한 사항을 지속적으로 요구해 미국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는데 당시 일본 외무성의 간부가 미국에 가서 하토야마를 이해할 수 없고 멍청한(stupid)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을 달래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하토야마는 아세안+3 회의에서 "미국을 배제한" 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자는 주장했다가 호주베트남에서 이 사실을 미국에 알리면서 미국은 하토야마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런 미국과의 외교 참사는 내각 관료와 야당이 하토야마를 무시하는 좋은 빌미가 되었는데 일례로 2010년 5월 21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마루카와 다마요 참의원에 의해 이상한 사람이라고 야유를 들었다.

결국 일본 사회민주당오키나와 후텐마 주일미군 기지 문제로 연정에서 사퇴하자 7월 참의원 선거의 패배를 막기 위해 2010년 6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오자와 간사장도 함께 사임했으며, 후임은 간 나오토 부대표. 결론적으로 외교문제에서 동맹국인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며 화를 자초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과 멀어진만큼 중국러시아를 상대로 얻어낸 외교적 이익도 전무했으며 아소 내각의 경제 참사 이후 일본 국민들의 기대로 총리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를 방치하여 일본 수출기업들이 모조리 박살나는 등 경제적으로도 대실패, 거기에 내정조차 기대에 못 미치면서 정치 자금 스캔들 등으로 인해 불명예 퇴임하게 된다.


2.3.1. 독도 발언에 관하여[편집]


소위 하토야마의 '독도 망언'으로 보도된 일련의 사건은, 2010년 4월 8일의 중의원 외교위원회에서 오카다 가쓰야 외무대신이 "불필요한 마찰을 부르지 않도록 하고 싶다. 그 단어(불법 점거)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교섭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이 그 발단으로, 하토야마 본인은 그날 저녁의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생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약간의 답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본인 또는 정부의 생각을 바꿀 뜻은 결코 없다"고 답변하였다. 결국은 표기의 문제로,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를 '망언'이라 보도한 것은 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별개로 하토야마는 총리직 퇴임 이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케시마의 날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꼬여 있다. 우리는 역사의 사실을 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일본이 수용한 포츠담 선언으로 독도 등 섬의 구속은 연합국 사실상 미국이 정하게 됐다. 미국2008년 독도는 한국령으로 정했다. 당시 관방장관은 어떤 항의도 하지 않았다. 이 책임이 크다"라는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출처1 출처2

그 외에 2014년에는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가 동북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가로 막고 있다면서, 독도 문제는 더는 건드려선 안된다고 강조한 적도 있다. [뉴스쇼 판] 하토야마 "독도 문제 더 건드려선 안돼" 2015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은 중국과는 센카쿠 제도, 한국과는 다케시마로 영토 갈등을 벌이고 있다"며 "일본은 패전국이기에 고유한 영토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이는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하토야마 전 日총리 "일본은 역사 잘 몰라 영토문제 일으켜"


2.4. 총리 퇴임 이후[편집]


2012년 4월 이란 방문으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었다. 미국이란 핵개발 문제로 인해 이란에 강력한 무역제재를 가하고 주변국들에게도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가운데 일본총리였던 하토야마가 "이대로 전쟁 분위기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직접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등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이란 방문을 감행했다. 미국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 입장에서 하토야마의 이런 돌출 행동은 외교적으로는 큰 악재일 수밖에 없다. 의원이 가도 외교적으로 말이 많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인데 하토야마는 어쨌든 전임 총리이니 무게감이 다르다.

그리고 예상대로 이란에선 "하토야마 전 총리도 IAEA가 불공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며 비판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토야마 본인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곧바로 해명을 했지만 애당초 저렇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누가 봐도 뻔한데 간 게 문제라는 비판이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 내부에서도 나왔다.

이후 오자와 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소비세 증세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소비세 증세안이 통과되자 오자와는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하여 신당을 차렸다. 이런 가운데 하토야마도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탈당해 신당을 창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토야마가 주도하고 있는 "소비세 연구회" 소속 중의원이 30명이기 때문에 이들 중 16명 이상만 탈당해도 민주당의 중의원 과반이 붕괴되던 상황이였다. 다만 하토야마 측은 "나는 당내에서 일하겠다"라면서 탈당 및 신당창당을 강력히 부인했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결국 민주당에 잔류했으나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에 임한 노다 총리가 TPP에 찬성해야 공천을 주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자 이를 반대했고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다. 하토야마는 탈당해서 무소속 출마를 강행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출마를 포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한 셈이다.

2013년 1월 17일 중국 내 학술단체의 초청 형식으로 중국 방문했는데, 일본이 책임 인정을 꺼리는 난징 대학살 추모 박물관을 방문했다. 여기에 중국과의 영유권 갈등이 강화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다오위댜오)에 문제에 대해 "분쟁지역임을 인정할 필요 있다"고 언급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 전임 총리가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일본에서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전직 대통령이 '독도는 분쟁지역 맞다'고 발언한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다. 영유권 분쟁에서는 보통 실효지배 중인 측에서 분쟁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자칫 영유권의 변경 내지 타협 가능성을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발언 직후 일본 방위성 대신이 '역적'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일본은 분쟁 지역 언급보다도 문제시 된 부분이 "중국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에게 센카쿠 열도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어째 앞뒤 다 잘라먹고 "일본에게 빼앗겼다"라는 부분만 강조하면서 전직 총리가 "일본센카쿠를 훔쳤다"라고 발언했다면서 난리가 났다. 이게 민주당 내부에서도 심한 논란이 되어 강제출당된 모양이다.

2015년 3월 10일 크림반도에 직접 가 문제가 되었다. 일본 정부러시아의 크림 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서방과 함께 러시아 제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토야마는 "이번 방문 동안 크림반도의 실제 상태는 제가 일본에서 보고 들어왔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라는 발언을 했다.

파일:/image/417/2015/08/12/2015081216228038541_1_99_20150812164608.jpg
2015년 8월 12일 서대문형무소를 방문, 유관순 열사가 수감되었던 감방에 헌화했으며 광장에 있는 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도게자까지 하며 사죄했다. 역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본 정치인 중에서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도게자까지 해가며 사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번 행보는 도게자에 대해 일본에서 논란이 많이 일고 있는데, 일본에서의 최대의 사죄를 의미하는 도게자인지 한국에서의 상대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의미하는 큰절인지, 일본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큰절이라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입장이 되지만, 도게자라면 일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빈다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도게자로밖에 안 보이지만, 큰절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 큰절을 시키면 실제로 도게자처럼 한다.[8]

하토야마의 큰 결단이 경색된 한일관계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관점이 있었다.

2016년 4월 중일관계의 악화가 대부분 일본에게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젠 중국에서도 까임방지권 획득할 기세였다. 일본 민주당(후신 민진당)은 호헌파 정당답게 대개 일본이 가해자라는 인식을 내세운다.(단, 영토 문제는 별개 취급한다.) 문제는 자민당이 장기 집권 중인 현 일본 정치 상황에선, 지지기반 자체가 약하다 보니 집권부터가 요원할 뿐더러 집권하더라도 정치력 부재로 상술되었듯 빨리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다. 다만 자민당은 내부 계파 권력다툼이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 계열보다 더 심각할 뿐더러 최근 아베 신조가 대부분의 계파를 제압한 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계파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자민당 내 다른 계파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 전직 총리로서 역사적 과오에 대한 사과를 통한 한일, 중일 관계 개선에 힘쓰는 활동을 펼쳤으며 2018년 10월에도 방한하여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인 이수현의 묘를 참배 한 다음 날 경남 합천에 있는 한국인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방문하여 다시 사죄 의사를 밝혔다. 한국 원폭피해자에 무릎꿇은 前 일본총리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에도 한국을 직접 방문해 대법원일본 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책임을 확정한 판결에 대해서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관련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저희가 제공했다” “일본인들은 사죄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한일 관계 개선에 힘쓰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하토야마 전 日총리 “일본인들은 사죄하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어야”

2019년에도 한국에 대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거창군에 방문하여 강연을 가졌으며, 천황의 뜻을 받아들여 한·일 과거사 인식을 적극 수용해 사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또, 나루히토의 방한 제안도 주장했고 위안부 합의안에 대해 일본의 책임도 강조했다.# 대한 수출 규제 이후에는 멀어진 한일관계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으며, 관계악화의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고 인터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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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는 김대중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의 빈소를 방문해서 조문했다.# 우측의 안내하는 사람은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낙연 민주당 상임고문.

8월에는 아리랑TV에 출연했는데 #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서 "그 원점은 일본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아 그들에게 고통을 준 데 있다"고 지적했다.#

9월에 하토야마 내각 수립 10주년을 맞아 혁신 세력 중심으로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10월 11일 오후 부산대학교 대회의실에서 열린 '통일 한국의 미래와 평화전략'이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에서 "전쟁 피해자가 더는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가해자는 사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폭력을 행사한 사람은 잊어도 피해자는 그 아픔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대통령 묘역을 참배하고 방명록을 남겼다. 이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12일 오전 9시에는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했다. #

2021년 8월 26일에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주최하고 서울대 일본연구소와 한국법제연구원이 주관한 "국제심포지엄 - 한일관계,대전환을 논하다"에서 기조강연을 하였다.

오카야마현 츠야마시에서 열린 귀무덤 위령 행사에서 6.25전쟁 종전선언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인 것으로 보도된 일본 정부에 대해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정부 사절을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굉지회 전 수장이자 총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미야자와 기이치까지 언급까지 한다. 두 전 총리가 모두 중일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들이기 때문.

2022년 5월 9일, 다음날 취임식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접견해 한일 우호협력에 관하여 논의했다.#

2022년 9월 24일, 방한해 진도 왜덕산을 찾았다. 왜덕산진도 주민들이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군 시신 100여구를 안장한 곳으로 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하여 왜덕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24일 열린 위령제에 참석하여 분향을 하고 무덤 조성에 감사의 의사를 전했고 자신이 줄곧 말 해오던 지속적인 사죄를 다시 언급했다.

2022년 10월 6일,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하여 "민주화운동을 위해 애쓰신 영웅들에게 감사드린다"라는 내용의 방명록을 남겼으며 같은 날 오후 4시부터 전남대에서 '우애에 기반한 동아시아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하토야마 전 총리는 "윤석열 대통령은 8월 14일 위안부 기림의 날에 아무런 메시지도 내지 않았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존중하는 입장으로 보이는데, 일본 정부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지만 이래서는 피해자분들께서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윤석열 대통령비판했다.

2023년 3월에 한국일본의 징용공 문제 해결을 가지자 기시다가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3년 9월 1일. 도쿄 치요다구 국제포럼에서 개최된 '제100주년 관동대지진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에 참석했다.#

2.5. 정계 복귀 선언[편집]


민주당이 망했어요 되고 나서 후신 정당들인 국민민주당, 입헌민주당 모두에 합류를 거부했던 하토야마 유키오가 2019년 10월 25일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정계 복귀 선언을 했다. 총리 퇴임 후 2013년 민주당에서 강제로 출당 당하고(과거 청산의 의미로 윤리위에 같이 넘겨진 간 나오토에게는 솜방망이 징계가 내려지며 비교되었던 측면이 있다.), 경원시 당하면서 이에 대한 앙금이 많이 쌓였는지 이후 구 민주당계 정치세력에 대해 매우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 이름만 보면 천황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정당 같지만 하토야마 본인의 설명에 의하면 당명의 공화(共和)는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자의 뜻 그대로 "함께 화합한다"는 의미로 천황제와 병립 가능한 이념이며(...) 천황제를 반대하기 위한 정당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실은 공화주의의 원래 의미이기도 하다. 공화주의 항목 참조.

물론 보수층들의 반응은 하토야마를 천황제를 반대하는 극좌, 역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2020년 연말이나 2021년 연초로 예상되는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기사 하토야마는 공화당 당 대표에 올랐고, 하토야마 유키오의 보좌관 출신인 스토 노부히코 전 중의원 의원이 간사장(한국 정당에서는 부대표에 대응)을 맡게 됐다. 하토야마의 수상직 시절 실권자였던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자와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오자와가 있는 국민민주당과는 연합할 생각이 없고 입헌민주당이나 레이와 신센구미와는 선거연대 정도는 가능하다고 발언했다.

2019년 10월 27일에는 공화당 창당 첫 일정으로 한국에 다시 방문하여, 경기도 용인시 에덴교회에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아베 신조 수상이 제대로 역사에 대해 사죄하고 후세에 대해 교육을 할 것을 촉구했다. 기사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가 정부와 도쿄도가 "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감염자 수를 축소했다"며 "연기가 결정 되니 그제서야 외출 자제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5일 하토야마 총리는 트위터에 "고이케 유리코 도지사가 주말에 외출을 자제하라고 요청했다"며 "도쿄올림픽을 성사시키기 위해 감염자 수가 적게 보이게 해서, 도쿄가 코로나를 잘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게 해) 엄격한 요구는 피해왔지만 연기가 결정된 직후 이런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고 썼다.

하토야마 총리가 트위터에 글을 쓴 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대로라면 도시 봉쇄를 해야 할 수도 있다'며 "4월 12일까지 외출을 자제해달라"고 호소한 이후다. 하토야마 총리는 도쿄도가 감염자 수를 축소했다는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도쿄가 감염자 수를 축소하는 사이)코로나는 퍼져버렸다"며 "당신은 도민 퍼스트가 아니라 올림픽 퍼스트 였다"고 지적했다.

아베 총리가 코로나19 신약으로 추진하는 아비간은 여성이 먹을 경우 기형아 출산, 남성이 먹을 경우 성기능 저하의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아비간에 대해서도 "아이를 만들고 싶은 남녀는 이 약을 복용하지 말라"고 부작용을 언급하였다.#

아베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고 다음 날, 하토야마 전 총리는 "공산당만큼은 열심히 했다. 그 외의 야당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아베 장기 집권의 제일 가는 공헌자는 바로 야당이다."라는 요지의 글을 올려 입헌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워낙 한심한 야당을 까는 글이라 답답함을 참고 참으며 야당을 지지하던 아베의 반대자들은 물론 평소에 하토야마를 악의 화신 취급하며 극렬히 까던 우파들조차도 하토야마가 말하는 것치고는 정상적인 걸 말했다(...)라며 많은 공감을 받아 리트윗 3만개받았다.

하타 유이치로 사망 후 "나가노의 작은 오야코동 가게에 들렀더니 떡방아를 하고 있었다. 가게 주인이 내 옆에 검은 깨를 묻힌 떡을 놓고 유이치로 몫이라고 나직이 말했다. 현지에서는 모두 울었다고 한다. 사교성이 좋고 상냥한 하타 유이치로 군이었다. 정권교체 때 너무 신세를 많이 졌다. 그가 가 버리다니 병이 밉다. 삼가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2021년 4월 18일, 본인의 트위터에 그보다 이틀 전 있었던 미일정상회담과 관련해 "서툴고 불안한 느낌, 부끄러움이 전면에 드러났다. 외무성의 자존심 결여도 상당했으나 저녁 만찬을 거절당하고 햄버거와 함께 20분 정상회담에서는 불쌍했다"고 비판하면서 "그래도 바이든과의 최초 정상회담으로 일본은 자만하려는가"라고 비꼬았다.#

2021년 6월 2일에는 트위터에 "한국의 한 대선 후보가 독도에 대한 표기를 바꾸지 않으면 한국이 올림픽을 보이콧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지도에 독도는 한국 영토로 표기돼 있다 보수파는 친미라서 항의할 수가 없는 것인가"라는 글을 올렸다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도쿄 2구[9] 출마설 등이 돌았으나 결국 출마하지 않았다. 창당 후 2년만에 선거에 나오기는 무리도 있고, 괜히 야당 연대를 깼다고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입헌민주당이 공산당과 연대했다가 선거에서 패하면서 공화당 독자노선을 다시 모색할 수 있겠으나 그 사이 제3당으로 성장한 일본 유신회의 존재 등 아직 갈길이 멀다.

2022년 4월 5일, 본인 트위터에서 부차 학살이 공정하게 심판되어야 한다고 발언하였다. 또한 우크라이나군의 동부(돈바스)에서의 친러파 1만 명 이상 주민 살해, 미군에 의한 이라크인, 아프가니스탄인 살해, 일본군에 의한 난징대학살, 미군의 원폭 투하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

2022년 6월 공화당 기자회견 영상에서 2022년 7월 참의원 선거에 자신을 포함한 간사장 및 공화당의 여러 후보들이 도쿄도 선거구가나가와현 선거구 등에 등록 및 출마할 예정이라고 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출마하지 않았고 스토 노부히코 간사장을 비롯한 공화당 후보자들 전원이 낙선하였기 때문에 권토중래 후 다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보인다

3. 가계[편집]




본래 하토야마 가는 미마사카 국 카츠야마 번 출신으로, 고조부인 하토야마 히로후사(鳩山博房)는 에도의 관료였다. 말 그대로 뼈대 있는 가계다. 증조부 - 조부 - 부친 - 본인과 남동생까지 4대가 줄줄이 전부 도쿄대학 출신들이다.

  • 하토야마 카즈오(鳩山和夫)
1856.05.06~1911.10.03
증조부인 하토야마 카즈오는 1856년 에도에서 출생, 1875년에 카이세이 학교[10](후의 도쿄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미국으로 유학, 컬럼비아 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예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총장이었던 와세다대학제3대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1885년에는 외무성에 입성, 189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96년에 중의원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는 홋카이도 개척에 관여하여 하토야마 가문의 지반을 닦았다(정사위 훈삼등).

  • 하토야마 하루코(鳩山春子)
1861.05.02~1938.07.12
증조모인 하토야마 하루코는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인 교육가의 한 사람으로, 와타나베 번사의 장녀로 태어난다. 이후 공립여자대학을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며, 이어 며느리인 카오루가 이어받는다.

1883.01.01~195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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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1883년에 카즈오의 장남으로 출생, 1908년에 도쿄제국대학 영미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1915년에 국회 입성, 이누카이 내각에서 문부대신을 역임하는 등 전전부터 정계의 거물로 활동, 전후에는 일본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954년 총리 대신이 되어 자민당을 결성하고 55년 체제를 이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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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모델에도 선정되었다.
총리직 사임 이후에는 자민당 결성에도 관여하였다(15선, 정이위 대훈위). 즉 할아버지가 만든 자민당 일당 우위 체제를 손자가 일시적으로 무너뜨렸다. 여담으로 프리메이슨의 회원이다.

  • 하토야마 카오루(鳩山薫)
1888.11.21~1982.08.15
조모인 하토야마 카오루는 스즈키 공가의 공녀로 공립여자대학 원장으로 재직한다.

  •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郎)
1918.11.11~199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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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유키오, 이이치로, 쿠니오.
부친인 하토야마 이이치로는 1918년에 도쿄에서 출생, 1941년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 이후 대장성(大蔵省)에 입성(入省)하였다. 이후 착실하게 승진하여 1971년에는 일본 관료 사회의 정점인 대장성 사무차관에 임명되었다. 1974년에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 76년의 후쿠다 타케오 내각에서는, 초선 의원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외무대신에 임명되었다(3선, 정삼위 훈일등).

  • 하토야마 야스코(鳩山安子)
1922.09.11~201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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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인 하토야마 야스코는 세계 2위 타이어 제조업체 브리지스톤의 창업주인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 현재 브리지스톤의 주식 1,200만 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 시가 170억엔에 이른다고 한다. 홋카이도 선거구에 나왔을 때 하토야마는 게이샤와의 스캔들에 휘달려 낙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 때 미유키 여사가 "스캔들이 사실이라면 남편이 얼마나 외로워서 그랬을까. 참 불쌍하다"라면서 공개적으로 남편을 두둔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시킨 거였다.(...) 또 하나의 일화로는 주택공사 관련 스캔들로 자민당과 정국이 시끄러워지자 당시 둘 다 중의원이었던 유키오&쿠니오 두 형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중의원 뱃지를 떼어버려라!"라고 호통쳤다. 결국 이런 조언이 자민당 탈당의 계기가 되었다. 당선 당시에는 어머니의 수렴청정까지 거론되었으나 결과는 보시는대로. 1996년 아들 형제가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에는 수십억 원의 자금을 용돈에서 준비. 이것은 후에 정당 보조금에서 전액 회수했다. 2013년 2월 11일 별세했다.

1948.09.13~2016.06.21
남동생인 하토야마 쿠니오는 1948년 9월에 도쿄 도에서 출생,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후, 형과는 달리 정계 입문을 강하게 희망하였다. 이후 자진해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비서로 정계 입문, 1976년에 도쿄 8구에서 처음으로 당선된 이래 11선 연속으로 당선되었고, 대신직을 5번 역임하였다(총무, 내각부 특명 담당, 법무, 노동, 문부). 법무대신 시절 적극적인 사형집행 찬성론자로 死神이라는 위명을 떨쳤다. 2016년 6월 21일 지병인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서 별세했다. 지역구는 차남인 하토야마 지로에게 세습되었다.

1979.01.01~
남동생인 하토야마 쿠니오의 차남으로 2013년 역대 최연소 오카와시 시장을 역임하였으며 쿠니오 사망 이후 그의 지역구를 세습받아 현재도 중의원으로 재직중이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86 - 199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3
탈당


1993 - 1996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96
민주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6 - 1998
창당


1998 - 2013
합당[11]

[[무소속|
무소속
]]

2013 - 2019
강제 제명[12]
정계 은퇴


2019 -
창당
정계 복귀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홋카이도 4구


93,001 (16.11%)
당선 (2위)
초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5,516 (14.74%)
당선 (3위)
재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1,824 (21.07%)
당선(1위)
3선[13]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홋카이도 9구


131,936 (52.79%)
4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1,500 (45.45%)
5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1,442 (50.02%)
6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50,050 (49.26%)
7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461[14] (66.36%)
8선[15]

6. 여담[편집]


  • 키가 역대 총리 중 큰 편인데 177cm로 역대 4위이다. 공동 1위는 오쿠마 시게노부(180cm), 고노에 후미마로(180cm), 2위는 나카소네 야스히로(178cm), 그 외 아베 신조가 175cm 이런 식이다. 한국의 경우 가장 키가 컸던 대통령 최규하가 182cm 였지만 임기가 1년도 넘지 못했고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 중엔 1위가 노태우로 175cm, 김대중, 이명박, 문재인이 173~172cm 그 외 대통령은 170cm도 넘지 못했다. 그러나 2022년 키 180cm의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 기록도 깨졌다. 중국의 경우 제일 키가 컸던 최고지도자는 시진핑으로 175cm이다.


  • 파일:external/pds.joinsmsn.com/htm_2010051313511820002010-001.jpg
특유의 발랄한(?) 패션 센스와 아내로 유명하다. 참고로 미유키(幸) 여사는 역대 일본 총리 부인과 달리 적극적인 자기 표현과 대외 활동으로 하토야마 총리 못지 않게 주목 받았다. 한류에도 많은 호감을 표시했고, 특유의 멋진 패션으로 나름 인기를 끌었지만 하토야마 총리가 퇴임하면서 빛을 바랬다. 당시 남편의 퇴임도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 파일:external/file.levelb.blog.shinobi.jp/20091201hato.jpg
일본에서는 넷우익들의 압도적인 혐오를 받는 존재로, 넷 우익들은 그를 거의 악의 화신이자 매국노로 규정하고 있다. 하토야마 폿포라는 AA캐릭터를 만들어 까기도 한다. 폿포는 비둘기의 울음소리를 가리키는데, 하토야마의 하토가 비둘기를 의미하기 때문. 이 AA는 등장시 99%의 확률로 무능하고 사악하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악역만 맡는다. 과거 인터넷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우애라는 표현의 기묘한 어감과 총리 자체의 전파계 이미지와 겹쳐 20세기 소년친구에 종종 비유되기도 했다.

  • 하토야마가는 대대적인 명문가였다. 하토야마의 길이라는 하토야마가 공식 사이트만 봐도 생가가 화려하고 근사하며 정원도 넓다. 그리고 위에서 전술하였지만 고조부 때부터 가족이 대대로 도쿄제국대학-도쿄대학 출신이고 전부 다 각료를 역임했다.

  • 역대 총리 출신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곳은 도쿄대학이지만 제국대학이 아닌 신제 도쿄대학 출신은 하토야마 유키오가 유일하다.[16]

  • 세이버메트리션이었다. 1979년 일본오퍼레이션리서치학회 회지에 <야구와 OR>이라는 제목으로 통계를 통한 야구의 승률예측모형 논문을 발표했다. #

  • 2015년 10월엔 일본 현지에서 일본 우익세력에게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 도쿄 시내 한 대학에서 열린 중일관계 관련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돌아가는 하토야마 전 총리의 차량을 우익단체 차량 12대가 가로막고 왕복 6차선 도로를 10분 동안 불법으로 점거한 채 비난을 퍼부은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우익들은 업무 방해 혐의로 자택을 압수수색 당하고 선전용 차량을 경찰에 압류당했다.

  • 2015년 11월 5일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일본 정부는 위안부의 뜻에 따르는 답을 이끌어내야 한다." 라는 주제의 강연을 하였다.

  • 2016년 11월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변호인에 대해 "국가권력이 관계된 폭력, 누명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 영화를 통해 민주국가 일본을 소생시키고 싶다"라는 코멘트를 했다.

  • 2018년 방한하여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워낙 유명인이 자주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긴 하지만 사우스 파크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시즌 13의 'Whale Whores 에피소드에서 현직 총리로 등장한다. 에피소드 자체가 일본의 고래 조업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육류 소비도 비판하는 내용인지라 일본의 비중이 크다. 고래 조업에 대한 전 세계의 비난이 쇄도하자 공식 성명 발표 방송에서 "Fuck you dolphine, and fuck you whale!"이라는 무지막지한 대사를 내뱉는다. 아키히토 천황도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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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당 간 연합을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는 호소카와 내각에서 실현한 바 있다.[2] 이후 혐의 없음으로 처리됐다.[3] 브리지스톤(Bridgestone)이라는 사명이 돌다리라는 집안 이름 한자를 반대로 뒤집은 것.[4] 본래 왕족과 귀족을 위해 세워진 관립학교였으며,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고 평민에게 개방된 후로도 금수저들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일관제 학교이다.[5]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와 부친 하토야마 이이치로 전 외무대신,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 전 법무대신은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3대가 전부 도쿄대학 출신인 엘리트 집안이다.[6] 지금으로 치면 간사장에 해당되는 직책이다.[7] 의석 수는 늘어났지만 워낙 개선의석수가 적어서 그런거지 전회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추천을 받은 무소속의원들을 대거 영입했음에도 비례득표율은 전회보다 낮아지는 대참패였다.[8] 여담으로 많이들 헷갈리는 사실인데, 큰절과 도게자의 큰 차이는 ‘손을 모으는지’의 여부이다. 도게자 문서 참고.[9] 하토야마 유키오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정치적 기반이었고, 동생인 하토야마 구니오의 지역구이기도 했다.[10] 카이세이 중고등학교와는 무관하다.[11] 민정당, 사회민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12] 센카쿠 열도 실언으로 인해 강제 제명되었다.[13]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4]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노 다로가 기록을 깨기 전까지 소선거구제 시행 하에서 후보자가 가장 많은 득표수로 당선된 기록이었다.[15] 내각총리대신 취임.[16] 도쿄대학 출신 총리가 없다고 알고있는 한국인들이 꽤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 당연히 틀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