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와 정책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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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와 정책연구회
아베파

형성
1979년 1월 24일
설립자
후쿠다 다케오
회장
공석[1]
이념
국민보수주의
우익대중주의
일본 내셔널리즘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
고보수주의
반이민주의
국수주의
안티페미니즘
반동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내부 계파:
극보수주의
권위주의
우익극단주의
자유보수주의
우파공동체주의
성향
우익 ~ 극우
주요 정치인
호소다 히로유키 (전 회장)
에토 세이시로 (최고고문)
야마타니 에리코 (좌장)
시오노야 류 (회장대리)
시모무라 하쿠분 (회장대리)
세코 히로시게 (참의원 의원회장)
다카기 쓰요시 (부회장 겸 사무총장)
요시노 마사요시 (부회장)
니시무라 야스토시 (부회장)
마쓰시마 미도리 (부회장)
나카가와 마사하루 (부회장)
이나다 도모미 (상임간사 겸 사무국장)
노가미 고타로 (상임간사)
모리 마사코 (상임간사)
야마다 미키 (간사)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역사
2.1. 후쿠다파 시절
2.2. 아베파·미쓰즈카파 시절
2.3. 모리파 시절
2.4. 마치무라파 시절
2.5. 호소다파·아베파 시절
3. 역대 회장 목록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세이와 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또는 아베파(安倍派)는 일본의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파벌로 현재 최대 파벌이다. 회장은 아베 신조 전 내각총리대신이 맡고 있었으나, 사망으로 현재는 공석이다.

이 파벌의 근본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이며, 기시의 사위이자 한때 파벌 회장을 역임한 아베 신조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 또한 청화회의 회장을 지냈다. 다시 말해 아베 신조는 3대째 이 파벌 회장직을 세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파벌의 강력한 구심점인 아베가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갑작스럽게 살해당하면서 회장직이 공석이 되었다. 아베가 사망하기 전에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명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이상, 마땅한 대체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이 파벌이 붕괴되는 것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2][3]

비슷한 사례로는 1985년, 사망한 아베처럼 일본 총리를 하다 물러난 후 정치 활동을 계속하며 오랜 시간 자유민주당을 쥐락펴락 하던 어둠의 쇼군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신의 파벌 다나카파(목요회)에서도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며 권력을 놓지 않으려 들었고, 이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파벌 내 중진 다케시타 노보루가네마루 신은 스터디 그룹 개념인 창정회를 만들어 다나카에 반발했다. 그러던 중 다나카가 급작스럽게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이 타이밍에 다케시타 노보루가 대부분의 다나카파 의원들을 데려가 다케시타파를 결성하며 다나카파는 무너져버렸다. 일부 잔류 그룹은 니카이도 스스무의 니카이도 그룹으로 이어졌으나 얼마 못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분열되려하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청화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스승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도쿄올림픽 후원 회사 'AOKI'로부터 200만엔의 뇌물을 수령해 부정축재했다는 금전 스캔 의혹이 터지면서 아베의 국장 이후 청화회가 분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있다.# 그리고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아소 다로 부총재의 대굉지회 구상도 모리 전 총리의 재판 판결에 따라 실현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아베의 뒤를 이을만한 적합한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7월 11일, 파벌 회의를 열어 향후 파벌 운영에 관한 방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파벌 원로인 에토 세이시로와 아베의 최측근들이었던 니시무라 야스토시, 세코 히로시게, 시모무라 하쿠분, 그리고 역시 파벌 간부인 시오노야 류 등이 회합에 참여했다.

차기 회장 후보자로는 시모무라 하쿠분, 시오노야 류, 하기우다 고이치, 니시무라 야스토시, 세코 히로시게가 거론된다.# 또 당분간은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된다.# 파벌 간부이자 회장대리인 시오노야 류시모무라 하쿠분이 토론을 벌여 논의한 끝에 아베의 국장이 치루어지는 올해 가을 때까지 집단지도체제로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9월 29일, 시오노야 류 파벌 회장대리는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운 집행부 체제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2. 역사[편집]



2.1. 후쿠다파 시절[편집]


현재의 세이와 정책연구회(이하 청화회)는 원래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에서 분파한 후쿠다 다케오를 중심으로 하여 1962년에 결성된 '당풍쇄신연맹'이 기원이었다.

7년이라는 기간동안 집권한 사토 에이사쿠의 차기 후계자로서, 사토에게 가장 신뢰를 받고 있던 사람이 후쿠다였으나, 사토 내각에서 여러 주요 요직을 거치며 세를 불려가고 있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도 차기 후계자로 거론되며 만만치않은 상대였다.

결국 다나카가 총리 자리에 오르고 후쿠다가 패배의 쓴맛을 느끼게 되자 이 것을 계기로 각복전쟁이라는 다나카와 후쿠다간의 전쟁을 벌이게 되지만, 후쿠다 자신도 파벌 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하여 다나카에게 뒤쳐져 총리 후보에 떨어진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 것을 개선하려 노력하며 결국 1976년,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총리 직에 오르게 되었으나 2년 후 오히라 마사요시와 다나카의 연합으로 총재선에서 패배하며 재선에 실패했다.

이렇 듯 다나카에게 두 번이나 패배한 후쿠다는 1972년 총재선 직후 파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산회(호리 그룹)와 춘추회(소노다파)를 통합, '팔일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총리직에 오른 이후에는 파벌 정치를 타파하기 위해 팔일회를 해산하였으나, 총리직 퇴진 이후 재결성 여론이 높아져 1979년 1월 24일, 청화회를 결성했다. 1984년에는 자유혁신동우회(이시하라파)를 흡수한다.


2.2. 아베파·미쓰즈카파 시절[편집]


1986년 중·참의원 공동 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여, 후쿠다는 차기 회장으로 아베 신타로를 지명했다.[4]

아베는 뉴리더의 구성원중 한명으로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후계를 목표로 하지만, 자신과 같이 뉴리더중 한명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가 총리직을 차지했다. 다케시타 내각에서는 간사장을 역임하며 다케시타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리크루트 사건으로 데미지를 입고, 1991년 지병으로 사망하여 자신의 야망도 물거품으로 넘어갔다.

아베의 사망 이후 후계 회장 자리를 놓고 미쓰즈카 히로시와 가토 무쓰키가 대립하고, 한 때 아베파 사천왕이라고 불렸던 모리 요시로가 미쓰즈카를 지지하며 미쓰즈카가 회장직에 취임했다.

같은 해 미쓰즈카는 총재선에 출마했으나 가토가 이에 반해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가토는 청화회에서 제명되어 독립된 파벌을 결성한 후 자민당에서 이탈했다.

미쓰즈카·가토의 대립 이후에는 이번엔 모리계가메이계가 대립하게 된다. 한편 파벌 내에서는 산하 그룹으로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가 결성되었다.

1998년, 모리계의 독자적인 주도로 총재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출마를 결정하게 되자 이에 가메이계가 반발하였으나 모리가 간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자 가메이계가 청화회를 이탈하여 모리계가 청화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2.3. 모리파 시절[편집]


모리가 미쓰즈카의 후계자로 회장이 된 이후 1998년 말, 파벌 명칭을 청화 정책연구회로 개칭했다. 2000년에는 모리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자 후쿠다 다케오 이후 자민당 내의 최대파벌이 되었다. 모리는 총리직 취임으로 일시적으로 파벌을 탈퇴했기에 모리의 측근인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회장직을 맡았다. 회장 직을 계승한 모리는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향력을 늘려가고 있던 고이즈미와 함께 대립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파벌을 장악했다.

모리의 퇴진 이후 고이즈미가 총리 직에 취임하자 모리가 회장 직에 복귀했다. 고이즈미는 최대 파벌이었던 하시모토파를 자신들과 적대세력이라고 명명하고, 하시모토파 의원들을 내각에서 배제시키는 한편, 아오키 미키오가 하시모토파의 협력을 받는다는 핑계로 하시모토파를 견제·분열하여 이러한 효과를 봐 제44회 중원선에서 당 내 최대파벌로 성장했다.

2006년, 고이즈미의 퇴임에 따른 차기 총재선에서는 같은 모리파의 유력 후보로 아베 신조후쿠다 야스오가 자리에 올랐다. 이 둘의 부친은 한 때 청화회를 이끌던 사람들이었고, 2명이 입후보하면 모리파가 분열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후쿠다가 불출마를 선언하며 이러한 우려는 깨져 아베 신조가 총재로 선출되었다.


2.4. 마치무라파 시절[편집]


모리는 파벌 회장에서 퇴임하고,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회장 직에 취임했다.

2007년,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직에 취임하고 마치무라가 관방장관에 취임하자, 파벌 회장직을 폐지하고 파벌 간부들이 돌아가며 운영하는 대행체제로 전환했다.

같은 해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참패하였으나, 여전히 중참 양원의 최대파벌이었다.

2008년, 총리 총재직 퇴임 이후 무파벌로 지내고 있었던 아베 신조가 '상담역'이라는 직책으로 파벌에 복귀했다. 한편 고이즈미는 무파벌인 상태로 2009년에 정계에서 은퇴했다.

같은 해 9월, 후쿠다 야스오의 총재 퇴임에 따른 총재선에서 마치무라가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같은 파벌이었던 아베와 후쿠다가 2대에 걸쳐 국정운영에 실패했기 때문에 2대 정권을 계속 지지했던 아소 다로를 밀어줘 후보를 옹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소가 총리로 선출된 이후 호소다 히로유키는 간사장으로, 마치무라는 관방장관에서 해임되었으나 대행체제의 변화는 없었다.

2009년, 마치무라가 회장 직에 복귀하고 모리가 아베와 함께 상담역으로 활동하는 것이 결정되어, 마치무라파 하의 청화회가 더욱 굳건해졌다.

같은 해 제45회 중원선에서 굉지회에 이어 제2파벌로 추락했으나, 중참의원을 합하면 아직도 청화회가 최대 파벌의 자리를 유지했다. 또 같은 해 고이케 유리코가 '파벌이 아닌 당 전체가 단결해야한다"라고 발언하며 파벌을 탈퇴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 집행부에서는 마치무라파가 전원 배제되며 창립 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당 간부에서 배제되었다.

2012년 총재선에서 마치무라가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파벌 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베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베가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총재선에 출마하며 파벌이 혼란에 빠졌다. 파벌 내에서는 마치무라를 지지하는 의원이 70%에 달했으나, 아베는 다른 파벌이나 무파벌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마치무라에게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아베가 총재에 당선되었다.

이후 제46회 중원선과 제23회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제1당 탈환에 성공했다.


2.5. 호소다파·아베파 시절[편집]


2014년 제47회 중원선 이후, 마치무라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자 호소다 히로유키가 회장 직에 취임했다.

2020년 총재선에선 시모무라 하쿠분, 이나다 도모미, 니시무라 야스토시가 입후보에 의욕을 보였으나, 최종적으로 무파벌의 스가 요시히데를 지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스가가 총리직에 취임한 이후 시모무라가 정무조사회장으로 집행부에 입성했다.

2021년 2월, 하시모토 세이코가 올림픽대신 취임으로 파벌을 이탈했다.

스가의 사임으로 치루어진 2021년 총재선에선 시모무라가 또다시 출마 의향을 드러냈으나 선회하였고, 아베가 밀어주는 다카이치 사나에와 호소다가 밀어주는 기시다 후미오 양 후보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10월에 발족된 기시다 내각에서 마쓰노 히로카즈가 관방장관에 취임했다.

11월 10일, 정계를 은퇴한 오시마 다다모리의 후임으로 호소다 히로유키가 중의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파벌을 이탈하고 아베가 회장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2022년 7월 8일, 아베가 괴한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파벌이 혼란에 빠졌다. 처음에는 시오노야 류를 중심으로 하는 7인 권한대행 체제로 운영할 것임이 밝혀졌으나, 파벌 내의 젊은 의원들의 반발로 회장대리인 시오노야와 시모무라가 대행하기로 결정했다.

국장 이후에도 회장을 공석으로 놔두기로 결정했다.#


3. 역대 회장 목록[편집]



대수
이름
파벌 호칭
임기
1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파
1979년 ~ 1986년
2
아베 신타로
아베파
1986년 ~ 1991년
3
미쓰즈카 히로시
미쓰즈카파
1991년 ~ 1998년
4
모리 요시로
모리파
1998년 ~ 2000년
5
고이즈미 준이치로
2000년 ~ 2001년
6
모리 요시로[5]
2001년 ~ 2006년
7
마치무라 노부타카
마치무라파
2006년 ~ 2007년
-
마치무라 노부타카
나카가와 히데나오
다니가와 시젠
2007년 ~ 2009년
8
마치무라 노부타카
2009년 ~ 2014년
9
호소다 히로유키
호소다파
2014년 ~ 2021년
10
아베 신조
아베파
2021년 ~ 2022년
공석 (2022년~)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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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장대리인 시오노야 류시모무라 하쿠분이 사실상 회장직을 대행하고 있다.[2] 당장 비둘기파 후쿠다계와 강경파 아베계로 양분되어 있기도 했고, 소속원이 많다 보니 성향도 다양하고 중진들도 많아서 각자 세력을 규합해 여러 파벌로 흩어지기 좋다.[3]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2022년 7월 8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여전히 아베파가 최대 파벌이긴 하지만 아베 전 총리에 버금가는 카리스마를 가진 차기 리더는 사실상 없다고 한다. 동생 기시 노부오는 형인 아베보다도 건강이 양호하지 못해서 한계가 있고, 다카이치 사나에같은 극우 강경파도 아베가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인 셈이며, 아베 전 총리가 없는 일본 정치권에서는 극우세력이 예전처럼 힘을 못 쓰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따라 자민당 내 온건파인 보수본류가 주류로 급부상할 가능성이 생겼다. 특히, 기시 노부오는 2022년 12월에 50회 중원선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서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고 있다 한다.[4] 참고로 아베 신타로는 전 내각총리대신이자 훗날 청화회의 회장을 역임한 아베 신조의 아버지이다.[5] 아직도 파벌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