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모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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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후쿠시마 조지







일본국 제79대 내각총리대신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川護煕 | Hosokawa Morihiro

파일:Morihiro_Hosokawa.jpg
출생
1938년 1월 14일 (86세)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재임기간
제79대 내각총리대신
1993년 8월 9일 ~ 1994년 4월 28일
서명
파일:호소카와 서명.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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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적지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
부모
부친 호소카와 모리사다(細川護貞)[1]
모친 호소카와 아쓰코(細川温子)[2]
배우자
호소카와 가요코(細川佳代子)
자녀
호소카와 모리미쓰(細川護光)
형제
고노에 타다테루(近衛忠煇)[3]
친인척
선조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선조 가라샤
증조부 호소카와 모리히사(細川護久)[4]
조부 호소카와 모리타쓰(細川護立)[5]
외조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학력
세이센 소학교 (졸업)
에이코가쿠엔 중학교[6] (졸업)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조치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신체
176cm, O형
정당

지역구
비례구 (참)
구마모토 1구 (중)
의원 선수
3 (참)
2 (중)
의원 대수
9, 11, 16 (참)
40, 41 (중)
약력
아사히 신문 기자
참의원 의원
대장정무차관[7]
제10~11대 구마모토현지사
조치대학 겸임 교수
초대 일본신당 대표
중의원 의원
제79대 내각총리대신
제18대 호소카와 가문 당주
프롬 파이브 대표

1. 개요
2. 배경
3. 정치 활동
3.1. 1998년 주일미군 철수 발언
3.2. 정계 복귀 시도 및 깜짝 출마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55년 체제를 무너뜨리고[1] 비자민 7당 연립 정권을 이룩했던 제79대 내각총리대신.


2. 배경[편집]


파일:호소카와 가몬.svg
호소카와 가문의 가몬(家紋)인 구요(九曜) 문장.

에도 막부(江戶幕府) 시절 구마모토(熊本) 번의 영주이자 센고쿠 시대(戰國時代)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 등으로 유명한 명문가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제18대 당주(장손)다. 호소카와 가문은 세이와 덴노(清和天皇)의 피를 이은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아시카가(足利) 정이대장군(征夷大将軍)의 방계이며, 1633년부터 12대 238년간 구마모토 번의 영주를 거쳐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후작에 봉해졌다. 근세 호소카와 가는 호소카와 후지타카부터 시작된다. 중시조가 되는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이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딸 아케치 타마코(明智玉子)지만, 타다오키의 서자 중 하나의 후손을 중간에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모리히로는 아케치 집안과 직접적인 혈연은 없다.

그의 아버지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우리 가문에는 옛날에는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답니다. 아, 태평양 전쟁(1945)이 아니라 오닌의 난(1467) 때."라는 조크를 하기도 했다. 참고로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다. 이 조크는 후에 모리히로가 한 것으로 와전된다.

그의 외조부는 중일전쟁으로 유명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로[2], 일본 중세사를 주름잡은 후지와라 북가(北家)의 종가이자 고셋케(五摂家)의 중심으로, 수백 년간 외척이자 섭정으로 귀족계의 정점에 군림했던 고노에(近衛)의 30대 당주였다. 그의 남동생 호소카와 타다테루(細川護輝)는 외조부 고노에 후미마로와 그 장남의[3] 대를 이어 고노에 가문의 32대 당주가 되었다. 또 고노에 타다테루(近衛忠煇)의 아내는 쇼와 덴노(昭和天皇) 히로히토(裕仁)의 동생 타카히토 친왕(崇仁親王)의 장녀 야스코 내친왕(甯子内親王)이다.

패전 후 일본은 화족 제도가 폐지됐지만 그의 혈통은 일본 전통 신분제의 최상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작의 외손자의 아들에 불과한 아소 다로와도 비교를 불허한다. 고셋케 중에서도 최고, 일본 화족 최고봉인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외손자이자 전통 깊은 호소카와 후작가의 직계로, 현대 일본의 그 어떤 정치인 가문과도 원칙적으로 비교가 안 되는 우월한 혈통을 자랑한다. 중의원 의원을 세습하는 집안이래봐야 옛날 촌장 집안 출신 정도인 경우가 많은데 이쪽은 일본 황실에 버금가는 최고 중의 최고 공가인 외가와 구마모토를 지배한 최고위 다이묘인 친가의 피를 이은 출신이다.

그럼에도 그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 환경 운동, 반핵 운동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의외로 고대사부터 명문 귀족임에도 진보적 성향을 가진 정치인들은 계속 나타났기 때문에 모리히로라고 아주 특이한 것도 아니다.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 형제와 초기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리히로는 일본 유수의 명문 조치대학을 나와 중도 좌파 신문인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만 33세 나이에 참의원 진출(일본 상원, 1971~83)을 이룬 것은 집안 배경 탓인지 몰라도, 그가 일본의 구체제를 깨고 최초의 비자민당 총리가 된 건 전적으로 그의 정치관과 스스로 이룬 정치 이력 때문이다.


3. 정치 활동[편집]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현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본적지는 구마모토현이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해 5년간의 짧은 정치 기자 생활을 마치고 68년 퇴사했다. 퇴사 직전 소위 김희로 사건(金嬉老事件)[4]을 심층 취재하면서 재일 한국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

1969년 그는 처음엔 일본사회당 소속이던 구마모토 1구[5] 중의원 의원 마츠마에 시게요시를 통해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당시 일본은 보수의 자민당과 혁신의 일본사회당이란 양강 구도로 정치를 꾸려갔었다. 그러나 결국은 무소속으로 자기 본적지인 (구) 구마모토 1구에 출마했다. 이유는 자신이 일본사회당보단 보수 쪽에 가깝다고 생각해서였단다. 같은 지역구에 사카모토 타이라, 후지사키 히사오라고 일본사회당도 후보를 2명이나 냈다. 안 그래도 일본사회당이 강한데 표까지 갈라먹은 셈. 당연 낙선.

출마 당시 그의 아버지 모리사다는 '정치라니 그딴 야쿠자들이 하는 짓을 니가 하려느냐'며 말렸다고. 후일 그의 친동생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6]는 그 일로 문예춘추 인터뷰에서 독자들을 웃겼다고. "아니, 우리 집안 장손이면 뭘해요, 공주랑 결혼한 저보다도 인지도가 없었는데." 유머 감각은 집안 내력인 모양. 그래서인지 낙선이야 했지만 그가 집집마다 방문한 동네는 이상하게 득표를 많이 했다고.

결국은 1971년 자민당에 입당해 참의원 선거에 나선다. 극우 작가 겸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의 지원 유세를 받는 등, 역시 너도 별 수 없구나 소리를 들었지만 자민당 내 중도 좌파였던 다나카 가쿠에이[7]의 계파로 들어간다. 소위 칠일회 혹은 목요 클럽이라 불렸던 모임을 통해 중의원만 40명인 자민당내 대형 파벌을 형성하면서, 좌장인 다나카 가쿠에이가 1972년 총리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한다.

일본 참의원은 6년 임기로, 전반 3년, 후반 3년 임기를 보장받는데, 다나카 총리의 계파였던 그도 후반에는 대장성 정무 차관, 자민당부간사장 등 요직을 맡게 된다. 후반 임기 중 구마모토 현 지사 출마를 표명하고 선거 준비에 들어간다.

83년 구마모토 현 지사에 당선된 그는 소위 '니뽄이치즈쿠리운동(日本一づくり運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지방 자치 운동을 벌였다. 각 지방마다 특산품을 하나씩 만들어 경제도 살리고 지방 분권의 초석을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구마모토 현을 예술향으로 만들기 위해 대형 현립극장을 만드는 등 노력했다. 재선까지는 지사로서 열심히 노력했고 인기도 많았다. 3선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갑자기 '권불십년'을 외치고는 출마를 단념한다.

1991년 퇴임한 그는 도쿄로 이주했다. 그리고는 문예춘추를 통해 '일본자유사회연합(自由社会連合)'을 제창하기 시작했다. 그는 냉전구도 속에서 리베이트 사건 등 일본이 부패로 썩어간다고 주장하면서, 대 정치, 행정 개혁을 통해 일본을 변혁하자고 주장했다. 아울러 보수 자민당, 진보 사회당 구도의 양당 구도를 반드시 박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자민당을 탈당했다.

1992년 일본신당을 결성한 그는 당대표에 올랐고 참의원에 재선됐다. 이듬해인 1993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에 실패하자 야7당 연립정권을 만들어 자민당을 뒤엎고 총리가 됐다. 38년 만의 비(非) 자민당 총리로 호소카와 내각 출범 최초엔 지지율이 74%에 달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도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라든가, 한국 경주시를 방문하여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94년 5월에는 니시신주쿠 게이오플라자호텔에서 암살미수 사건을 겪었다. 범인은 송혼숙(松魂熟)이라는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인 52살의 노조에 마사카츠. 흉기는 38구경 리볼버 권총이었으며, "호소카와 전 총리가 국회에서 태평양전쟁은 침략행위라고 한 발언과, 예산안 통과 전 사퇴한 것에 불만을 품어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러모로 일본 극우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94년 4월 28일 정치자금 문제(사가와 규빈이라는 기업으로부터 1억 엔을 빌렸다)로 돌연 사퇴했다. 하지만 이미 연립정권의 붕괴는 1월부터 그가 염원하던 정치개혁 법안이 사회당의 비토로 저지되면서 시작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또한, 기존의 소비세를 국민복지세로 바꿔 그 비율을 3%에서 7%로 올리는 구상도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어 정권의 구심력을 잃고 말았다. 후임인 하타 쓰토무 총리는 두 달 만에 사임하며 반자민당 연립은 1년도 못 가 붕괴되고 만다.

"잎이 흩어짐은 때를 아는 것, 이 세상 꽃은 꽃대로 사람도 사람대로"라며 1998년 환갑과 함께 중의원을 사퇴했다. 이 말은 먼 선조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정실인 가라샤사세구를 인용한 말이다. 가라샤의 원 사세구는 "질 때를 알았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요, 사람도 사람이리라(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1998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1. 1998년 주일미군 철수 발언[편집]


1998년 일본에서는 주일미군에 대한 철수논의가 오가기도 했는데 주일미군이 일본경제에 부담을 준다는점이나 과거 소련의 위협때문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떠냐야된다는 주일미군철수발언으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8]

1998년 12월 22일 노나카 히로무 일본 관방 장관 :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 감축 협정에 따라 오키나와의 군사 훈련장 한 곳을 반환했다. 이날 반환된 나하 훈련장은 4백80㏊와 7천9백㏊의 수역으로 96년 체결된 양국간 협정에 따라 미군이 일본에 반환키로 한 11개 시설 중 첫번째 것이다. 미국은 이 협정에서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지의 20%를 돌려주기로 합의했다. 이번 반환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을 줄이려는 노력이 진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내 미군 시설의 재편과 감축을 게속 추진할 것이다." 2) 전에는 소련의 침략 위협을 막아 주는 기능을 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1998년 6월 17일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미국의 외교 정책 전문지 Foreign Affairs 7∼8월호에 실린 <일본에 미군 부대가 필요한 것인가>에서) : "2000년까지 3만7천명의 주일미군을 철수시키고 일본과 미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새로운 동맹 관계를 맺어야 한다. 냉전 종식 후 옛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고 일본이 충분히 자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주일미군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이제 미군이 일본을 떠날 때다. 1995년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미군 주둔에 대한 일본의 연간 부담이 50억 달러로 늘어나 최근 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0년에 만료되는 이 합의를 경신하지 말고 미군을 떠나도록 해야 한다." 3) 적어도 미 해병대의 규모는 줄이고 싶어한다.

틈만 있으면 주일미군 지원 예산을 깎고자 한다. 1997년 8월 3일 일본 정부(<도쿄신문> 2일치 보도) : "주일미군 주둔 경비 가운데 일본 부담분을 내년 예산에서 삭감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미군쪽과 협의에 들어갔다. 재정 구조 집중 개혁 기간인 98년부터 3년 동안 전체 방위비를 마이너스 편성한다는 내각의 결정에 따라 주일미군 주둔 경비 세출도 삭감하기로 했으며, 삭감 폭과 대상 항목을 미군쪽과 협의 중이다. 일본 정부가 주일미군에 대한 편의 제공 차원에서 지난 78년부터 도입된 '배려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삭감 대상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주일미군의 숙사와 가족 주택, 복리·후생 시설 건설에 할당된 제공 시설 정비비를 억제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주일미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려 예산은 1996년의 경우 2천7백 27억 엔이었으며 제공 시설 정비비는 9백53억 엔이었다." 7) 일반 국민은 물론 유명한 고위급 정치인들이 주일미군에 대해 공공연한 반대 운동을 벌인다.아시아 주둔 미군과 미군기지 되찾기 운동


3.2. 정계 복귀 시도 및 깜짝 출마[편집]


2007년에 도예가로 전직하며 일선 정치에서 진짜 물러난 것으로 보였지만, 2014년 1월 돌연 도쿄도(都)지사 보궐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정부가 손을 놓으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

1월 14일 출마선언장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자민당) 전 총리가 전격 참석해 지지 연설을 했다. 2007년 은퇴했던 고이즈미 총리 역시 후쿠시마 사태 속에 반핵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치에 복귀한 것. 그 자리에서 탈원전을 추구하는 호소카와 후보를 지지하기로 선언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d6ltSCCIAEqAj0.jpg
#, #

전직 총리가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는 것은 유례가 없는 파격인데다가, 천하의 고이즈미까지 가세했다. 그래서 호소카와 전 총리가 도쿄도지사에 당선될 경우 아베 정권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었다. 여기에 비주얼계 락그룹 LUNA SEASUGIZO가 탈원전을 주제로 호소카와와 대담을 진행하면서 힘을 실어주었고, 이는 큰 화제를 불러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2월 9일 도지사선거 결과, 아베 신조 총리와 자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마스조에 요이치 前 후생노동상의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것도 더블 스코어였다! 관련 아사히신문 보도. 마스조에 후보는 211만2천979표, 호소카와와 우쓰노미야는 각각 95만6천63표, 98만2천595표를 획득했다.

전날 일본 간토 지방을 강타한 20년 만의 폭설로 인한 낮은 투표율도 선거에 영향을 미쳤지만, 마스조에가 내건 복지 공약과 2020 도쿄 올림픽에 대한 어젠다가 호소카와 전 총리의 탈원전 공약보다 도쿄도민들에게 더 큰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범야권 내 표 분산도 커다란 패인이었다. 탈원전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한 우쓰노미야 겐지[9] 후보와 단일화를 실패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민주당의 지원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역시 패인이었다.

만약 두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되었다면 단순 계산으로 211만 vs 193만으로 상당히 근접한 수준이 된다. 거기다가 사표도 줄었을 것이라 그야말로 해볼만한 선거였을 것이다. 이런 양자구도가 되면 주민들에게 먹히는 공약과 민주당의 지원을 통한 바닥민심 확보 등으로 승리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 결국 그의 패배로 아베 총리의 아베노믹스를 비롯한 경제, 정치, 외교정책들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소 의미 없는 가정이다. 우쓰노미야 겐지는 신좌파 성향에 가까운 인물인 반면 호소카와는 보수면 보수였지 진보라고 할 수는 없는 인물이다. 단지 과거사 문제나, 탈원전 문제에 있어서 뜻을 함께 하고 있을 뿐, 근본적으로 화족 명문가 출신으로 보수적인 색체를 드러내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강성한 진보 성향을 보이는 우쓰노미야는 단일화하기에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일부 민주당 성향과 중도 성향 정치인의 지지는 받았다. 오자와 이치로, 간, 하토야마, 오자와 사키히토 등이 지지선언 하였고, 정치자금 지원과 유세도 왔다.

선거 이후에도 꾸준히 탈원전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선거에서 당선 된 마스조에 요이치가 정치자금 문제로 사퇴하여 2016년 7월에 다시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10] 다만 고이즈미 전 총리와 호소카와 전 총리는 이번 선거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1]

그러나 자신이 정계에 영입시킨 고이케 유리코를 지지 선언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정치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을 보면 호소카와는 과거사에 대한 접근 방식과는 별개로 현 민주당의 성향과도 어느정도 차이가 있는, 본질적으로는 보수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그가 지지한 고이케나, 아니면 2014년에 자신이 지원을 받은 고이즈미 준이치로나 모두 과거사 문제는 호소카와와 크게 달랐지만 내치는 중도보수 리버럴 성향에 가깝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에 호소카와와 죽이 어느정도 맞는 부분이 있는 것.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무소속
]]

1969 - 1971
정계 입문


1971 - 1992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9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2 - 1994
창당


1994 - 1997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7 - 1998
창당


1998
합당


1998
합당

[[무소속|
무소속
]]

1998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마모토 1구

[[무소속|
무소속
]]

38,632 (8.34%)
낙선 (8위)

1971
제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전국구


17,759,395 (44.47%)
당선 (11순위)
초선
1977
제1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구마모토현
283,359 (31.14%)
당선 (2위)
재선
1983
제10회 구마모토현지사 선거
479,854 (83.94%)
당선 (1위)
초선
1987
제11회 구마모토현지사 선거
610,627 (90.56%)
당선 (1위)
재선
1992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3,617,246 (8.05%)
당선 (1순위)
3선[12]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마모토 1구
213,125 (33.40%)
당선 (1위)
초선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마모토 1구


85,682 (44.39%)
당선 (1위)
재선[13]
2014
도쿄도지사 선거
도쿄도

[[무소속|
무소속
]]

956,063 (19.64%)
낙선 (3위)
[14]

6. 여담[편집]


  • 국무대신 경력이 없던 가타야마 데츠[15] 총리가 1947년 취임한 이래 무려 46년 만에 국무대신 경력 없이 취임한 총리다.[16] 그 전에는 모든 총리들이 국무대신을 지낸 적이 있었다.

  • 2010년에는 "한일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2004년에는 경남 산청을 방문해 도자기를 직접 만들었다. 첫 번째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2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산청군에 방문한다고. 본래 호소카와 집안이 역사적인 명문가로[17] 에도 시대 도자기 공예와도 연이 깊은 집안이라서 원류를 찾아왔다고. 도자기에 대한 열정이 크다고 한다.

  • <내일은 없습니다>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총리 시절의 일기인 『나이쇼로쿠(内訟録)-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대신 일기』펴내기도 했다. 논어 공야장편 제26장에 나오는 "나는 자신의 허물을 보고 내적으로(内) 스스로 자책(訟)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는 대목에서 따왔다.

  • 과거 김영삼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열림기획YS는 잘맞춰 라는 게임의 대전액션게임 파트에서 당시 일본 국가원수 캐릭터로 등장하기도 했다. 2022년 현재 이 게임에 등장한 국가원수 중에서는 빌 클린턴과 더불어 둘밖에 안되는 생존인물이기도 하다.

  • 최근에는 대한항공 광고 '일본에게 일본을 묻다' 캠페인에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 2022년에 가이후 도시키가 사망하면서 현재 생존한 전직 일본 총리 가운데 가장 오래 전에 총리직을 역임한 인물이 되었다.[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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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8년간 일본의 선거 정치를 지배하고 있던 자민당의 독주를 깼다.[2] 얼굴을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정말 닮았다. 외조부이니 당연한 걸지도...[3] 후미마로의 장남 후미타카는 1945년 만주 작전 종결 뒤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956년 포로 상태에서 사망해 실질적으로 당주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4] 김희로 사건: 폭력단원 김희로(나중에 권희로로 개명, 1928~2010)가 빚을 받으러 갔다가 인질극을 벌이면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는데 경찰이 인종 차별 발언을 했다며 수차례 기자들에게 자기 입장을 피력하는 등 사건을 벌였다.[5] 중선거구제 시행 당시의 선거구이다.[6] 현 고노에가 당주. 원래 본명은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輝)이다. 참고로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친동생인데도 성이 다른 이유는 패전 이후 외가 고노에 가문의 직계가 사실상 단절되어버리게 되자 타다테루가 사후입양으로 고노에 가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다.[7] 사실 자민당내에서 진짜 좌파는 번촌정책연구소를 이끌던 미키 다케오였고 다나카는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보수본류라인이었으며 다나카 본인 스스로도 보수본류의식이 매우 강하였다.[8] 호소카와총리, 주일미군 철수 주장[9] 前 일본 변호사협회 회장. 공산당, 사민당이 지지한 후보. 혐한시위 등의 극우 활동을 반대했다.[10]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 문서로.[11] 참고로 2016년 선거로 당선된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는 호소카와 전 총리를 통해 정계에 데뷔했고, 고이즈미 전 총리 내각에서 입각한 경력이 있다.[12] 1993. 7. 제4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13] 1998. 5. 7. 중의원 의원 사퇴 및 정계 은퇴[14] 2013년 12월, 전임자 이노세 나오키 도쿄도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및 벌금형 확정으로 인한 도지사직 상실에 따른 보궐선거.[15] 정확히 말하면 총리 취임 전까지 국무대신을 전혀 지낸 적이 없었다가 총리 취임 직후 임시로 전 각료직을 겸직하고 정국을 수습한 적이 있었다.[16] 호소카와 이후로 국무대신 경력이 없는 총리는 무라야마 도미이치하토야마 유키오 단 둘밖에 없다.[17] 가마쿠라 막부 시대 다이묘에서 기원한다.[18] 그렇다고 그가 전직 총리 가운데 최고령은 아니다. 생존 중인 전직 일본 총리 가운데 최고령인 인물은 무라야마 도미이치로 마지막으로 생존해있는 다이쇼 시대 태생 총리다.[19] 그리고 그 위로 후쿠다 야스오, 모리 요시로 순서이고 호소카와는 그 뒤를이어 4번째로 고령인 전직 총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