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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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독재자.不管黑猫白猫,能捉到老鼠就是好猫
중국공산당 2세대 지도부를 대표하는 인물로[4]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중국의 제3대 최고지도자로서 군림했고,[5]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정계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후계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를 직접 지명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상 2010년대 초반까지 그 영향력이 살아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중국의 역대 최고지도자 중 유일하게 당 총서기직과 국가주석직을 맡지 않았으며, 중앙고문위원회의[6] 주임 겸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으로서 실권을 휘둘렀다.
20세기 후반 중국의 개혁 • 개방 정책을 진두지휘했으며 현재 중국 언론에서는 그를 개혁 • 개방의 총설계사로 칭한다. 흑묘백묘론으로 대표되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융합을 시도했고, 그가 정립한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중국이 세계 2위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중국공산당에선 덩샤오핑을 20세기 중국을 살려낸 거인, 일명 백년소평(百年小平)으로 칭송한다. 일부 중국인들은 그를 부도옹(不倒翁)[7] 또는 작은 거인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지속했으며[8][9] 본인의 무리한 개혁 • 개방 정책으로 초래된 양극화와 부정부패를 일소하지 못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1989년 천안문 6.4 항쟁을 무력 진압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민중 학살의 직접적인 최종 책임자이기도 하다.
요컨대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 창업자라고 한다면,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이룩한 국가 토대 위에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해 중국을 부강의 길로 이끈 번영의 지도자가 된다. 명나라의 영락제나 청나라의 강희제에 비견되는 경우가 많으며,[10] 대한민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자주 비교되기도 한다.[11]
대한민국에선 한국 한자음인 등소평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북한에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2. 초기 이력[편집]
덩샤오핑은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벽돌집으로)의 장남으로 출생해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13] 운동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 때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한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은 둘째치고 프랑스의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프랑스 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간 덩샤오핑은 이 시기에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쯤에 '중국 공산 청년 동맹'[14] 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를 포함하여 청년 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덩샤오핑이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24~1925년 사이에 적광에서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어조는 강렬해도 저우언라이의 글에 비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나 문장의 퀄리티는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프랑스 예비 유학생으로서 준비하던 시절에도 항상 성적이 중간에서 맴돌았던 인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15]
그 뒤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어차피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해야 했던지라 경유지 비슷하게 하여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물론 이는 모스크바가 공산주의자에게 갖는 상징성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에 간 덩샤오핑은 1926년 초에 스탈린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 имени И. В. Сталина, 약칭 КУТВ)[16] 에 입학했고[17] , 이때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마침 1920년대 초부터 중국인들이 러시아로 유학을 많이들 왔는지 1925년에 설립된 중산대학(中山大學)[18] 으로 1926년 중순 쯤에 거처를 옮겼다.
덩샤오핑은 여기서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웠는데 이것도 깊게 배우질 않고 프랑스 시절처럼 어중간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된 것으로 보인다.[19]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간 덩샤오핑은 정치적 선동 부분의 일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는데 펑위샹은 소련과 연계하면서도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합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한 펑위샹은 덩샤오핑을 군에서 내쫓았고[20] 1927년 7월, 덩샤오핑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21] 그리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그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덩샤오핑도 같이 따라가고 1928년 초에 중산 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장시위안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3. 국공 내전과 항일 전쟁[편집]
홍군의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 당시 비주류였던 마오쩌둥을 지지하고,[22]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장교를 맡았다.
"군신" 또는 "독안룡"이라고 불리던 팔로군 명장 류보청과 함께 129사단을 이끌고 8로군 주류와 떨어져 옌안을 떠나 중원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배후에서 항일 전쟁을 치렀다. 류덩군이라고 불린 이 129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덩샤오핑의 군사적 재능도 높이 평가되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자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29사단은 확대 개편되어 제2야전군이 되었다.[23] 국공 내전 초기에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은 밀리고 있었으나, 류덩군은 중원에서 국민당군을 견제하면서 산둥 반도를 본거지로 하여 후방을 교란했다. 류덩군은 산둥 반도를 장악했고, 1948년 말부터 전쟁은 전체적으로 역전되어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949년 장강(長江)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24]
1949년 10월 19일, 중앙인민정부 산하에 중국 전역의 군사실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인민혁명군사위원회가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23일, 중공중앙서남국이 설치되면서 서남국 제1서기가 되어 서남 지역의 당무를 장악하게 되었다. 1950년 2월 8일, 충칭에서 류보청을 주석으로 하는 서남군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허룽, 슝커우, 류원후이, 룽윈 등과 함께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는데 허룽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항복한 사천군벌 찌끄러기들을 명예직으로 임명한 것이었으므로 덩샤오핑이 실세였다. 2월 22일, 서남군구가 설립되면서 초대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스스로 군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최고 권좌에 오른 후, "어떤 전공을 공부하셨습니까?"는 서방 기자의 질문에 "특별히 없습니다만, 굳이 하나 말하자면 군사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편집]
파일:MAIN201502041654000274178619157.jpg
류샤오치와 함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던 1962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춘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덩샤오핑(오른쪽에서 두 번째).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천윈, 류샤오치, 마오쩌둥이 보인다. 마오쩌둥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난 1960년대 전반기 중국 국가 지도부는 형식적으로 마오쩌둥을 최고 지도자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류샤오치-덩샤오핑-저우언라이의 집단 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오쩌둥은 여전히 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지만, 서부에는 후쭝난의 지휘 아래 국민당군 40여만 명이 남아 있었다. 제2야전군은 서부로 진격했고, 1949년 12월 청두를 함락시켜 대륙에 남아 있던 최후의 국민당 근거지를 점령했다. 제2야전군은 이곳에 계속 주둔하면서 서남군구로 개편되었다. 덩샤오핑은 서남군구 정치장교,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을 맡았고 이후에는 충칭시장을 역임하면서 토지개혁, 아편 거래 근절, 국민당 잔당 토벌 등을 시행했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폭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저항했으나, 덩샤오핑은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지주계급 및 아편 유통업자, 기타 국민당 잔당들을 합해 10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고 알려져 있다.
과감하면서도 잡음 없는 일처리로 능력을 보이면서, 3년 후 중앙으로 전임되어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국공 내전 말 그와 지위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높았던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꾸준히 승진하여 지도부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서남지구에서 능력과 리더십에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25][26] 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경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960년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자 공산국가들이 모인 회의에서 마오주의를 설파하고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여 마오쩌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이는 훗날 덩샤오핑이 실각한 후에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5. 문화대혁명과 시련[편집]
하지만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덩샤오핑이 자신이 죽으면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했듯이 자신을 격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을 당내에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반혁명분자요 주자파라 여기게 되어 제거하고자 했다. 여기에 장칭이 열심히 마오쩌둥을 부추겼다.[27]
결국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시작으로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 중국 전역은 홍위병들의 살육과 파괴, 약탈로 점철되는 개판이라는 말도 아까운 생지옥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류사오치도 숙청당했다.
이후 홍위병이 일어나고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에 따른 혼돈이 발생했다.[28] 덩샤오핑도 반마오주자파(反毛走資派,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든 자본주의 추종자)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29] 문화대혁명 당시, 그의 큰아들인 덩푸팡 역시 추락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30]
6. 1차 복권[편집]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정치인인 그가 군사위원으로 간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는 국공 내전 당시 정치위원역을 한 적이 있는데다가,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훗날에 정권을 잡을 때도 보이듯이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31] 덩샤오핑의 재부상에 문혁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했다. 린뱌오 사후 국방부장 직을 계승한 혁명원로 예젠잉(葉劍英)이 덩샤오핑을 옹호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4인방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1975년 1월, 중국공산당 10기 2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및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보선되어 계속하여 정돈사업을 지휘하였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향한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조카[32]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적 보유만은 허락됐다.
이때 덩샤오핑의 대담함을 알게 해 주는 일화가 있는데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덩샤오핑은 끝까지 문화대혁명을 공식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단 마오쩌둥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덩샤오핑 본인이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가 마오쩌둥 사후 자신의 국정 운영에 발목이 잡힐 수 있기 때문에[33] '나는 문혁 당시에 시골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식으로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명령이 곧 황제의 명령과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이런 태도는 마오쩌둥은 물론 당내 지도 세력들의 어그로를 끌기에 충분했지만 어쨌든 덩샤오핑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신에 덩샤오핑은 수차례 자아비판을 하고 마오쩌둥에게 반성문을 보냈지만 이미 삐칠 대로 삐친 마오쩌둥은 그런 덩샤오핑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쨌든 이는 마오쩌둥이 얼마나 덩샤오핑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한데,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의 중앙 관직은 박탈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 이상의 공격은 막아주었다. 덩샤오핑이 계속 당권을 보유할 수 있도록 명령한 것도 마오쩌둥이었고 4인방을 비롯한 급진파들이 덩샤오핑을 숙청하자고 수십 차례 마오쩌둥에게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끝까지 덩샤오핑에게 최소한의 보호는 해 주었다. 과거 펑더화이이나 류샤오치 같은 인사들이 마오쩌둥에게 대항했다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보기 드물게 마오가 인간적인 모습을 덩샤오핑에게 보여준 셈이다.
7.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편집]
그리고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34] 이 문화 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 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35]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 수습이 어려웠으므로[36] ,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37]
8. 집권 시기[편집]
8.1. 문화대혁명 청산[편집]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 성분 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 공산 혁명 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백악관에서 (덩샤오핑과의) 저녁식사 중 영화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한 해프닝이 있었다. 맥레인은 문화대혁명 당시였던 1970년대 초에 중국을 방문했었으며, 마오쩌둥 사상의 사회개혁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1979년 백악관에서의 저녁식사 중, 맥레인은 중국의 농장에서 채소를 키우는 교수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연구를 중단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에 슬픔을 느끼냐고 질문했고, 교수는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노동하며 배울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덩샤오핑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멈춘 뒤, "그 교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맥레인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38] 라고 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마오쩌둥을 잃은 문화대혁명 지지 세력에는 권위나 경력에서 덩샤오핑을 상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인 숭배에 빠지지 않았다. 전임 화궈펑만 하더라도 그 짧은 집권기 동안 자신을 찬양하는 포스터나 노래, 선전물을 무수히 제작하였으나,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를 절대로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선전화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분명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으나, 마오쩌둥을 격하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전임자를 격하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었고 스탈린의 도움없이도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들도 한둘이 아니라서 격하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고[39] 마오쩌둥 이외에 이름을 날린 이들도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을 보좌하면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아무리 덩샤오핑 개인이 마오쩌둥에 당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해도 격하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의 일인지라 그를 굳이 격하시키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8.2. 근대화 추진[편집]
또한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 분권적 경제 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40] 덩샤오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던 무렵,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부문의 전근대화 및 문화대혁명과 하방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한 농촌지역 인력과잉이었고, 생산성 또한 저조해서 상당량의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으며 그나마도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배급제 특성상 식량이 풍족하게 배급되었던 것은 아니라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또한 당시 중국의 인구증가 속도를 생각하면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외화낭비도 목과할 수 없는 문제였는데 1980년대 초반에 농업개혁을 시행해서 결국 수년 내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과 산악지대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고 도시화가 진행된 2020년과는 다르게 개혁 · 개방이 막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중국인구의 대부분이 농촌에서 주거했기 때문에 실제 1인당 경지 면적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공산당의 상징적 성과물인 중국농업인민공사(통칭 인민공사)에 의한 중앙 통제적 농업을 과감히 버리고, 가구별 의사 결정에 따른 자율적 농업 및 잉여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그를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카리스마와 그가 계획적으로 양성한 정치적 친위부대의 지원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시범 지역이었던 안후이성의 농업 생산은 3년 만에 3배가 된 곳도 있었으며, 1981년에는 식량의 자급 자족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안후이성을 시찰한 중국 지도부가 '드디어 인민이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정책을 확대할 정도였다.
8.3. 개방 정책[편집]
내부적으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는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덩샤오핑은 이제 농업보다 한 단계 높은 "기초적인 생산과 공업"을 육성코자 하였으나, 이를 내부적으로 추진할 생산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서방의 여러 국가로부터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단계로서 미국과 전격 수교하였으며[41] , 미국과의 수교 직후에는 자신이 구상한 경제 개발 모델[42] 을 시험할 경제 특구를 4군데 지정했다. 따라서 이 4곳의 경제 특구는 모두 남동쪽 해안가에 위치하게 된다. 물자의 유통 및 수송이 편하고, 자본주의의 영향을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홍콩과 인접해있고 광저우와도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써는 그저 시골 어촌 마을이던 선전을 경제 특구로 개방했고, 선전의 성공을 확인한 후 경제 특구를 총 20곳 지정하였다. 이 지역들은 밀려드는 서방의 돈과 생산 기술, 시설을 활용하여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중국 전체에 성공과 부를 전시하는 표본으로 기능했다.
8.4. 대외 정책[편집]
서방과의 관계도 확연히 증진되었다. 미중수교 과정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왔던 것이었지만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43] 이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공식 석상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열창하는 등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다.[44] 보잉사 등 미국 내 주요 산업 시설을 돌아본 덩샤오핑과 중국 지도부는 큰 문화 충격과 경제 개발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반면 소련과의 관계는 이념 및 국제 정세의 문제로 인해 냉랭하였다.[45] 1960년 중소 영토 분쟁과 수정주의 논쟁으로 같은 공산주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소련과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 연원은 1920년대에 코민테른을 앞세운 소련의 과도한 간섭에 대한 마오쩌둥 등 비주류의 반발부터 시작된다.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얻었다. 물론 이 역시 덩이 의도한 바이다.[46]
8.5. 천안문 6.4 항쟁[편집]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이나 당 총서기직에 앉았던 적이 없었지만, 중국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48] 자신이 미는 이들을 요직에 앉혀 후일에 대비했다. 그래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에는 류덩군 시절부터 친구였던 원로 리셴녠을 앉히고, 행정부의 수장인 국무원 총리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는 후야오방[49] 이 맡았다. 자오나 후는 당시 후계자로 거론되어 있었다."20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20년 간의 평화를 손에 넣자"
-천안문 6.4 항쟁을 진압하면서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덩은 무조건적인 서방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서 드러났다. 학생 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며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한편, 당시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원로들이 이런 학생 운동이나 대중 운동에 대해 특히 콤플렉스를 보인 것은, 민주화에 따른 중국 공산당 실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외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겪은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문화대혁명 역시 당시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홍위병의 실질적 배후는 언론을 통해 이들을 선동한 마오쩌둥 및 4인방이었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당시 덩샤오핑의 진압 성명문이나 자오쯔양의 회고록에서도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전개되어 제2의 문혁 같은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다른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로 끌려가서 삽질하며 개박살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중 운동을 더욱더 불신하고 있었다.[50] 그리하여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이 당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허나 이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있었는데, 당시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총리 자오쯔양은 덩의 지시로 군 투입이 결정되자 천안문 광장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군이 곧 투입될 것이니 빨리 해산해주십시오"[51] 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곳에 모인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에 진압되었다. 이때 진압과정에서 수백~수천명이 사망했다.[52]
그리고 시위대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자오의 이런 행동은 그가 시위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때문에 덩의 눈밖에 나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모든 직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국 자오쯔양은 권좌에서 축출당한 후 사망시까지 약 20년 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장이 거의 옳았다고 믿었다.[53]
어쨌든 이렇게 축출된 후와 자오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다고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 시위를 유혈 진압한 후진타오를[54]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55] 국가주석 직은 1988년 리셴녠이 죽자 군부의 대표자 양상쿤을 앉혀 군부를 달랬다.
헌데 지금 중국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총칼과 탱크로 진압한 것에 대한 비난은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 바가지로 먹는 감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고 수행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군권은 모두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하수인에 불과한 리펑 입장에선 좀 억울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 · 개방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보수파들이 리펑의 뒤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군중들에게 대피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자오쯔양과도 비교당하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와 같은 욕을 신나게 먹었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주범은 마오쩌둥이었지만, 정작 크게 비판받은 사람들은 4인방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8.6. 임기제 확립[편집]
모든 당직의 재임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제한하고, 65세 이후에는 새로운 당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는 1인 독재와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활한 세대 교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0대 ~ 80대 원로들이 당을 좌지우지하거나 수십년씩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사라졌으며 시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10년씩 집권하면서 후계 세대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당 독재이면서도 주기적인 세대 교체가 잡음 없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당직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원로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직이 아니면 힘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기타 공산당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지도부의 '노화 현상'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은 공식 직함 없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다. 예컨대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의 해임은 원로방에서 결정됐고 이후 열린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그저 형식적 추인을 하는 데 그쳤다. 또한 덩샤오핑은 13기 5중 전회에서 당 군사 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로서 인사권과 국가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그는 일개 당원[56] 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진핑이 약 30년 후 사실상 종신집권을 하게 되면서 중국은 강력한 독재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새로운 체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8.7. 남순강화[편집]
한편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강경대처한 공로로 단숨에 중앙정계에 진입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 약속했던 추가적인 개혁 · 개방, 시장경제화는 모두 미뤄졌고, 극도의 정치적 경색이 이루어졌다. 잔인한 천안문 유혈진압에 격분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은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해서 모든 방면에서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며, 덕분에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실추되었다. 하지만 서구권은 중국을 적성국으로 규정한다거나 무역을 봉쇄하지는 않았다. 천안문 사태 직후에는 최혜국 대우 연장불가, 경제제제, 무역중단 같은 조치들도 거론되었으나 결국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냉전이 막 종식된 상황에서 중국을 또다시 적성국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기에는 정치권이나 대중들이나 모두 피곤했으며, 당시 10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을 놓치기도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의 처형과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때문에 천윈 등은 계급투쟁을 다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개혁개방의 전면 후퇴를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장쩌민은 경제 건설로 공산당 지위를 굳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장쩌민의 실질적 정책은 모두 사상 강조, 정치 통제의 강화에 있어서 이 부분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의 완고한 태도에 자신이 죽고 나면 개혁개방이 무산되고 자신이 그저 천안문에서 학생들을 죽인 살인마로만 기억될 것을 우려한 덩샤오핑은 후치리, 옌밍푸 등 숙청당한 개혁개방파를 복권하고 심지어 자오쯔양의 복권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장쩌민을 압박했다. 하지만 보수파의 완고함이 바뀌지 않자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소위 남순강화 라고 일컫는 행보를 시작한다.
이는 명목상 가족여행이었고 덩샤오핑은 실제로 여러 명소를 방문하면서 관광을 즐기는 듯 했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가족여행에 당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양상쿤이 동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여행 준비에서 당은 배제되고 인민해방군이 준비를 맡았으며 중군위 비서장 양바이빙이 총정치부, 해방군보를 동원하여 인민해방군의 덩샤오핑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다. 1월 17일,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떠난 덩샤오핑은 먼저 후베이성 우한과 후난성 창사를 방문, 후베이성 서기 관광푸와 후베이성장 궈수엔에게 중앙에 전하라면서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우리 지도자들은 마치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어치 있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회의와 행사 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텔레비전 스타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 (...)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선전과 주하이 방문에서는 "개혁개방 노선, 정책, 방침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라도 타도될 것이다. 이점에 대해 나는 몇차례 언급하였다."라고 또 경고를 날렸다. 보수파가 우세하였던 중공중앙 지도부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평당원의 가족여행으로 폄하하면서 보도를 금지하였으나,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홍콩의 명보, 대공보 등이 취재를 시작하였고 홍콩 언론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던 광둥성과 푸젠성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해방일보, 선전특구보 등 지방언론들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2월에 이르러 인민일보도 굴복하였다. 3월부터 선전특구보를 중심으로 덩샤오핑의 현지지도를 매우 자세히 보도하기 시작했고 광저우 양청만보, 광명일보, 문회보에 이어 신화통신이 전국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동정을 보도하였다.
덩샤오핑의 뒤에 중군위 제1부주석 양상쿤, 중군위 비서장 겸 총정치부 주임 양바이빙, 중군위 부주석 류화칭 등 중국의 군사지도자들이 모두 따라붙었으며 심지어 장쩌민의 경쟁자인 정법위 서기 차오스까지도 덩샤오핑쪽에 서면서 중국 지도부는 경악하였다. 덩샤오핑은 군대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보수파에게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남순강화가 끝난 후인 8월에 전국 군구의 사령관들이 개혁개방을 옹호하는 궐기 사설까지 내보내면서 총이 누구 손에 있는지가 매우 명백해졌다. 장쩌민은 2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덩샤오핑에게 새해 안부 전화를 걸면서 아부를 해야 했고, 중앙문건을 통해 전국 각지의 간부들이 남순강화에 대해서 학습하게 하였다. 2월 21일, 덩샤오핑은 의기양양하게 베이징으로 개선하였다.
3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가 남순강화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정, 3월 11일자 신화통신을 통해 정치국 공보를 발송하여 전국에 알리게 했다. 덩샤오핑은 5월 22일, 서우두철강 현지지도 때 지도자는 반드시 경제통이어야 하며 주룽지야말로 경제를 확고히 장악했다고 그를 크게 칭찬, 장쩌민에게 계속 까불면 주룽지로 총서기를 교체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장쩌민은 14차 당대회에서 자신이 몰락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여 "14차 당대회에서 누가 보고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라고 넋나간 소리를 할 정도였다. 천윈과 보이보는 이미 총서기를 두번이나 찍어냈는데 세번째로 갈아치울 순 없다고 장쩌민 지지를 분명히 했지만 장쩌민은 덩샤오핑에게 완전히 기울어 5월 29일 중앙당교에서 열린 성부급 간부 연수반 졸업식에서 덩샤오핑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줄을 대게 되었다. 천윈은 중앙고문위원회를 소집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덩샤오핑의 선동으로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이 개혁개방을 요구하면서 중앙을 압박하고 국무원 부총리 톈지윈을 비롯한 남순강화에 고무된 개혁개방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톈지윈은 극좌파들을 좌파 특구를 만들어서 격리해서 평생 배급이나 받아처먹고 쇄국주의나 하면서 살게 만들자는 폭탄발언까지 했으나 원로들의 항의에도 덩샤오핑이 별거 없는데 웬 소란이냐고 톈지윈을 옹호하면서 보수파는 몰락하였다.
중국 공산당 내의 마지막 개방 vs 쇄국의 대결에서 승리한 덩샤오핑과 개방 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 NBA를 라이브로 중국 공영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한거나 같은 해에 상하이증권거래소, 선전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 내부 개방 반대세력인 보수파의 수장은 덩샤오핑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천윈(진운, 陳雲)으로, 덩샤오핑이 먼저 죽으면 보수화가 진행되고 천이 먼저 죽으면 개혁 개방이 유지된다는 것이 당시 해외 중국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본디 천윈이 병약했던지라 덩보다 일찍 갈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예측이었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인해 의외로 장수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남순 강화 직후 천윈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은 이미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자신이 밀렸음을 인정하는듯한 발언도 했다. 이후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의 당 규약 개정으로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어 천윈은 은퇴했고, 1995년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그보다 2년 뒤에 죽었다.
9. 죽음[편집]
이후 은퇴하여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향년 92세로 1997년 2월 19일 베이징 301의원[58] 에서 사망하였다.
말년의 큰 소원 중 하나가 자국으로 반환된 홍콩 땅을 밟는 것[59] 이었지만 5개월 남짓 앞두고 사망했다. 그 외에도 두 가지의 소원이 더 있었다. 하나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을 하는 것이었는데, 사후 5년 뒤 2002 한일 월드컵에 중국이 본선에는 진출했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또 하나는 대만과의 양안통일이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이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소원의 영향으로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중국과 홍콩, 대만 사이에 있는 남중국해에 비행기로 뿌려졌다.
유언으로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향후 50여 년 동안은 국제 사회에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인내하며 조용히 힘을 키우라는 말을 남겼다. 힘을 키우기 전까진 패권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 또 그의 유훈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라'는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중소결렬 시기를 겪으면서 경계심이 커졌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해 덩샤오핑은 생전에 이런 농담도 하였다고 한다. '중국은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다. 중국군이 모두 러시아에 들어가 항복하면 러시아는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거덜이 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러시아는 중국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유훈과는 달리 중국의 대외적 성향은 점차 공격적으로 변해갔고[60] 끝내 그가 사망한 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미국-중국 패권 경쟁으로 이어졌다.
10. 평가[편집]
대표적인 개발독재자 중 한 명으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기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 등으로 휘청거린 중국을 개혁·개방 체제로 돌려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생산력을 확보할 새로운 성장의 길을 이끈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사태로 대표되는 중국 내 자유, 민주주의 운동과 내부 불평등,[61] 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62]
덩샤오핑은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63] 을 외치며 한동안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또 범죄소탕, 부패척결이란 명분 하에 수많은 시민들을 때려잡은 1983년 엄타(嚴打) 운동 같은 사례처럼, 덩샤오핑의 통치기는 법치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지는 문혁 이후 흐트러진 공권력, 치안 강화였으나, 문제는 반대 의미로 너무 강하다보니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했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쌓이게 된다. 또 그런 와중에도 권력층은 유유히 처벌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덩은 스스로 임기제를 확립하고 그 임기를 지킨 후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해 1인 지배체제로 굴러가던 중국 공산당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말장난일 뿐이란 반론도 있다. 또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64] 사실상 덩샤오핑과 원로방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65] 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그 자손들은 삼삼오오 결탁해 태자당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이나 대리인을 내세워 스스로 사업에 나서 수조원에서 수십조원 단위의 재산을 일궈냈으니, 이는 원로의 자손들이 상위계급으로 군림하며 자기들끼리 각종 정책을 결정하는 과두제를 창설했을 뿐 어떻게 봐도 국가와 당이 민주화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66]
그리고 임기제를 시스템으로 정착시키고 정치개혁을 완성하기 위해 법과 규정을 정립하는 대신 불명확한 관례와 개인의 권위를 이용하는 인치(人治)에 의존했고, 규정을 적용할 때도 본인들은 혁명원로라면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규정은 예외로 만들어 빠져나가기 바빴다.[67] 그런 측면에서 덩샤오핑의 소위 임기제 확립은 이미 시작부터 폭탄을 안고 출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임기제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초에 대한 보상을 받겠답시고 80대 후반이 되도록 권력을 놓지 않는 모순은, 원로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드디어 친정체제를 구축하나 싶던 참에 10년 임기가 끝나버려 후진타오와 공청단파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생긴 장쩌민과 상하이방의 퇴진 거부[68] 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후진타오와 공청단파의 반격을 불러와 보시라이 사태와 저우융캉 숙청, 시진핑의 1인체제 수립으로 집단지도체제의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피날레를 장식한 당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졌으니 덩샤오핑 때부터 내려온 모순과 내로남불이 결국 시진핑의 독재자 등극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렇게 2010년대 들어서 5세대 중국 지도부의 지도자가 된 시진핑이 1인독재체제를 구성하면서 허술한 집단지도체제조차 지금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니, 덩샤오핑 역시 책임론을 피해갈 수가 없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 계파간 견제를 통한 주기적 세대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결국 시진핑 대에 와서 입증된 것처럼 스스로 물러나는 권력은 없으며 여러 당이 권력획득을 위해 경쟁하고 시간이 되면 치를 수밖에 없는 다당제 선거만이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권력교체 방법임이 드러난 것이다. 덩샤오핑은 중앙고문위의 다른 원로들에 비해서는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장쩌민에게 이양하는 등 그래도 다음 세대로의 권력이양이 정착되도록 힘쓴 편이고, 그래도 천안문 전까지는 마오쩌둥 시대와 같은 피를 덜 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동구권 붕괴 앞에서 중공 고위층이 느꼈을 상상 이상의 공포를 고려하면 강경책에 손을 대려는 유혹이 강했던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결국 천안문 이후 중공의 정치개혁은 불가역적으로 중단되었고, 애써 확립한 임기제마저 오래 못 가 붕괴되었으니 평가는 냉엄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일당독재인 중국에선 중국인 개개인의 속은 알 수 없으나, 중국 공산당 차원에선 개혁 · 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받고 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덩샤오핑은 어찌됐든 말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란 말을 칭찬처럼 사용하고 부르주아를 비판한 사회주의자였다. 덩이 주창한 것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69] 그런 점에서 덩샤오핑은 사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처럼 좌파정당에서 경제적 우클릭을 이끈 좌우혼합형 사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안티들에겐 둘 다 사회주의를 위장한 쁘락치라는 욕도 먹는다. 사실 시장주의자들에게도 특히 덩은 일당독재 권위주의적 방식까지 결합되어[70] 사실상 국가자본주의자 혹은 국가사회주의자, 관치 경제로 오히려 시장 경제를 망친 자라는 비판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덩샤오핑은 보는 관점에 따라 진영 내에서도 평가가 나뉠 수 있는 인물이다. 모 경제 관련 언론에서 덩샤오핑을 치켜세우다가, 정치 쪽 사설이나 서적에선 덩샤오핑을 독재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이런 맥락. 국내의 경우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처럼 덩샤오핑을 호평한 인물도 있는 반면, 진중권처럼 '천안문 사태에 대해 철없는 부르주아 학생 난동을 진압했다며 중공을 조심스레 옹호하던 일부 구좌파나 군부독재를 찬양하는 한국 우익의 멘털리티가 묘한 교감을 이룬다'며 이를 비꼬는 인사도 있는 등 사실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는 좌우를 넘는 부분이 있다. 실제 구좌파라고 표현되긴 했지만 지금도 중국 공산당을 긍정하는 한국내 일부 좌파들은 그를 옹호하며 독재도 일당독재를 추구했으니 일인독재보단 낫다는 식으로 부분적 쉴드를 치는 반면[71] , 뭔 헛소리냐고 발끈하는 리버럴 좌파들도 많다. 한편, 보수 우파도 조갑제처럼 긍정하는 인사가 있는 반면, 중국 공산당 생명줄 연장시킨 독재자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리버럴 우파의 경우도 많다. 근데 이 리버럴 진영 안에서도 또 2016년 기준 리버럴 중도 혹은 중도좌파 정치인으로 인식되던 안철수가 뜬금없이 덩샤오핑을 롤모델로 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하는걸 보면 한국 내에서도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여러 관점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외에서도 흑묘백묘론 같은 실사구시적 태도나 외교술 같은 부분은 호평하지만, 인권 문제 등에 있어서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럼에도 다른 독재자들보다 약간 더 호평받는 기류는 있는데,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국이란 강대국의 지도자라는 점이 언급 빈도를 높이고 실사구시적 태도나 일당독재를 추구해 종신독재자와는 표면적으로나마 구분되는 점, 또 롤러코스터를 달리던 전임 마오쩌둥과 비교되는 대비 효과 덕분도 있어보인다. 물론 이 평가가 천안문 6.4 항쟁 이전에 나온 것도 상당하다는게 함정이지만.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결단력과 통찰력을 보았다며 덩샤오핑은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고[72] ,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덩샤오핑을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경제 대변혁을 이룬[73] 위대한 '황제'[74] 라고 주장했다.[75] 반면 중국현대사의 권위자인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덩샤오핑을 혹평했는데, 부작용이 많은 중국 관료 자본주의의 형성에 그가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천안문 6.4 항쟁 역시 이런 관료 자본주의로 인해 득세한 관료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양극화를 목도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외적으로는 일명 '도광양회'라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덕에 냉전 이후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이미지가 잔뜩 실추된 후에도 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시진핑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도광양회 정책을 폐기함으로서 이 정책이 재주목 받은 바 있다. 미국은 당연히 여기에 반발했고 결국 미중 무역분쟁으로 이어졌다. 물론 시진핑은 북경 올림픽 집행위원장을 지내는 등 외교 감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미국을 도발하고 싶어서 도광양회를 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도광양회가 이제 그 가치를 다했다고 판단해 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안이라면서 가져온 정책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중국이 누구 힘으로 중진국까지 발전할 수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시진핑인 만큼 미중 무역 분쟁은 분명 시진핑도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일부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중국을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들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76] 이들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공산당을 짝퉁 공산당 취급하며, 2008년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이라는 정당도 만들었지만 현재는 반체제 세력으로 찍혀 금지된 상태다. 심지어 이들 중에선 천안문 사태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부에서 싸잡아 보는 시선과 달리 내부에선 그들끼리도 나름 다툼이 치열한 모양이다.
한편, 의외라면 의외지만 덩샤오핑은 해외 문화가 중국에 퍼지는 거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미 일본 문화 전파에 대한 족쇄를 풀었는데, 1990년대 후반에나 일본 문화의 전면적인 개방이 이뤄진 한국인 입장에선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 그의 개혁 개방 사상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중국은 이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특촬물을 무삭제로 지상파 TV에서 볼 수 있었는데[77] , 이런 시류 때문인지 당시 수교가 이뤄지던 일본 내에서도 중국 요리나 관광 붐이 일어 이때를 노리고 드래곤볼, 란마 1/2이나 쿵후보이 친미, 권법소년 같은 중국풍이 강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권법소년의 원작자 마츠다 류지는 아예 방중하여 각종 무술인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했다. 이런 개방 정책은 자유주의의 물결도 불러와 천안문 항쟁의 간접적인 요인도 되지만, 이를 진압한 후에도 해외 문화 유입은 유지되어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도 관료들이 눈치가 보였는지 어쨌는지 검열 등 문화통제 정책을 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사망하고 장쩌민이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그런 거 없고 다시 강력한 검열과 문화 통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사람이 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본인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즉,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 차지하고 국가주석 자리는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덩샤오핑의 집권기 내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자리는 중국 국외에는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이 번갈아 가면서 맡아야 했다.[78] 그나마 덩샤오핑이 퇴임한 이후에는 중국 내에서도 이게 너무 이상했다는 인식은 있었는지 덩샤오핑의 직계 후임인 장쩌민 집권기부터는 항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을 동일인물이 맡도록 조치하고 있으며 이는 2023년 현재 시진핑 집권기까지 유지되고 있다.
11. 어록[편집]
不管黑猫白猫,能捉到老鼠就是好猫。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으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선부론(先富論)
如果中国有朝一日变了颜色,变成一个超级大国,也在世界上称王称霸,到处欺负人家,侵略人家,剥削人家,那么,世界人民就应当给中国戴上一顶社会帝国主义的帽子,就应当揭露它,反对它,并且同中国人民一道,打倒它。
만일 어느 날 중국이 안면몰수하고 초강대국이 되어 패권을 주장하고, 여기저기 남을 괴롭히며, 남을 침략하는 한편, 남의 것을 착취한다면, 세계의 모든 인민들은 응당 들고일어나 중국을 '사회제국주의'[80] 로 규정하고 반대하여 중국 인민들과 함께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81]
11.1. 28자 방침[편집]
천안문 사건과 소련의 붕괴 등 내외의 시련을 맞아 덩샤오핑이 1992년 설파한 어록으로 이후 중국외교의 핵심적 방침으로 채택되었다. 능력을 과시하거나 앞장서지 않고 전반적으로 낮은 외교자세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내부 안정과 국력을 조용히 키우는 신중한 외교정책을 말한다. 보통 도광양회와 유소작위로 요약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에서 유비가 조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일컬여져 왔다.
- 冷靜觀察/冷静观察 (냉정관찰) - (외교적 행동을 하기 전에) 국제정세를 먼저 냉정하게 관찰하라.
- 穩主陣脚/稳住阵脚 (온주진각) - 내치에 집중하여 국내의 질서와 안정을 공고히 하라.
- 沈着應付/沉着应付 (침착응부) - 상황과 능력을 고려해 침착하게 대처하라.
- 韜光養晦/韬光养晦 (도광양회) -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실력을 기른다.
- 善于藏拙/善于藏拙 (선우장졸) - 어리석은 척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조용하고 겸손해야 한다.
- 決不當頭/决不当头 (결부당두) - 절대로 앞에 나서거나 우두머리가 되려하지 말라.
- 有所作爲/有所作为 (유소작위) -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만 나서서 한다.
12. 가족[편집]
결혼을 세 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장시위안(张锡媛:1907~1930)으로 노동자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었다. 바오딩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당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1927년 상하이에서 덩샤오핑을 만난 인연으로 1928년 결혼을 했다. 1930년 산욕열로 사산하고 사망했다.
두번째 부인은 진웨이잉(金维映: 1904-1941)으로 저장성 사람이다. 1926년 공산당에 입당하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으며, 1931년 첫번째 아내와 사별했던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하지만 1933년 덩샤오핑과 2년만에 덩샤오핑이 연루된 당내 모종의 사건으로 이혼했고, 다시 고위 당직자였던 리웨이한(李维汉:1896-1984)과 결혼했고, 대장정까지 마쳤다. 국공합작이 체결되자 소련으로 요양을 갔으나, 독소전쟁 당시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독일군의 모스크바 폭격때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이 두번째 결혼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당의 강요에 의한 이혼이었다고 한다. 진웨이잉의 재혼남편인 리웨이한은 문혁때 덩샤오핑처럼 숙청되었지만 덩샤오핑 집권하에서 복권되어 고위 관리로 활약했다.
세번째 부인은 줘린(卓琳:1916-2009)으로 베이징 대학 물리학과의 학생이었으나, 중공 본거지 옌안으로 갔다. 1939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의 주례로 덩샤오핑과 결혼했다. 덩샤오핑의 2남 3녀는 줘린과 사이에서 낳았다.
덩샤오핑의 장남인 덩푸팡(1944)은 베이징 대학 시절 홍위병의 습격을 받아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가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장애인 협회의 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장쩌민 시절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어 감방에 갈뻔 했으나, 장쩌민은 은인의 아들을 구해주었고, 자리를 사직하는 것으로 유야무야했다. 15차 당대회와 1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시진핑 시기에는 정부에 쓴소리를 했으며, 2020년 시진핑이 홍콩의 일국양제를 무너뜨리는 행보를 보이자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현재 중국 내 시진핑의 권력은 절대적이라 보통 사람 같으면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겠지만 전임 지도자의 맏아들은 어찌 건드리지 못하는 모양. 막내아들 덩즈팡(1952)은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양자물리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물리학자이다. 이후 귀국하여 중국 통신회사에서 근무했다.
장녀 덩린(1941)은 화가이고, 아버지의 전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녀 덩난(1945)과 삼녀 덩룽(1950)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덩난은 중국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3. 사진 이야기[편집]
14. 여담[편집]
- 생전에 주로 쓰촨성 광안 방언을 사용했고 항상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83] 그러나 공식 석상에서의 연설은 중국의 관료들이 그렇듯 보통화로 했다. 대표적으로 천안문 진압 후 기자 간담회에서 학생운동을 "난동"이라고 비난하는 발언.
- '탁구 외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중 정책에 따라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이후, 이에 보답하여 1979년에 방미를 했는데 우주 비행 훈련소에 방문을 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를 훈련하는 기기를 탔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떠나길 주저했다.[84]
- 김용의 열렬한 팬이였다. 기사. 문화비평가 올리버 차우의 증언에 따르면 덩샤오핑은 비밀요원을 홍콩에 보내 김용의 소설을 구해 오게 했다. 김용은 저장성의 거부의 아들로, 그 아버지는 공산당 집권후 지주-반동 계급 숙청 당시 처형된 바 있는데, 덩샤오핑은 이에 대해 김용에게 사과했다. 1981년 김용을 직접 만난 덩샤오핑은 “우린 이미 오랜 친구와 같다. 당신의 책을 대부분 읽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화대혁명기에 금서로 지정됐던 김용의 작품은 덩샤오핑이 실권을 장악한 1981년에야 중국 대륙에서 해금됐다.
- 프랑스 유학의 영향인지 크루아상과 콘트락트 브리지 게임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총리로 복권된 이후 해외에 파견되었는데, 귀국시 외국 공항에서 크루아상을 사와 중국에서 부하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마작과 포커를 매우 좋아해서 충칭 시장으로 재임시에 집무실에 사람을 불러 자주 했는데 이것이 문혁 때 비판되어 실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주더나 펑더화이는 장기를 좋아했고, 워커홀릭인 저우언라이는 업무에 바빠 놀 여유가 없었으며,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 엄청난 골초였고 외국 정상들을 접견할 때조차 재떨이를 앞에 두고 항상 줄담배를 피웠다.[85]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본인도 이게 좀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상회담 시 사진 찍을 때는 치웠다가 끝난 후 다시 내왔다. 이렇게 골초였음에도 불구하고 흡연자들이 자주 걸리는 폐암이나 후두암에 걸리지 않고 92세까지 장수하였다.
- 매운요리를 즐겨먹었는데 이 점에 있어서 마오쩌둥과 비슷했다. 젊었을 적 프랑스에서의 자취 경험으로 요리 실력도 썩 괜찮았다고. 대장정 시기 종종 매운 양념을 곁들인 개고기 볶음을 선보였는데, 반응이 몹시 좋았다고 전해진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식사시간을 꼬박꼬박 지켰고 과식을 피하고 소식을 했는데 이것이 장수비결이라고 평가받는다.
- 살아생전 장쩌민-리펑-주룽지의 2세대 지도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3세대 지도부 승계를 계획하기도 했는데, 이게 사후에도 그대로 실현되면서 과장 좀 보태자면 2012년까지 30여년간 덩샤오핑이 중국을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치면 30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영향력을 휘두른 셈이 된다. 물론 후세대들이 다 그의 말대로 행동한 것도 아니긴 하다만. 이 중 원자바오를 점 찍었다는 점에선 좀 흥미롭기도 하다.
-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입수한 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같이 봤었다. 처형 비디오를 보고 나서 덩샤오핑이 한참 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었고, 이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 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덩샤오핑이 불과 수개월 전 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후의 남순 강화를 통해 개혁 개방에 가속도를 붙인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불식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길은 대외 개방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 성장 성과의 극대화 뿐"이라는, 나름대로 절박한 인식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물론 현실은 개혁 · 개방 와중에 반동분자 색출까지 둘 다 했으므로 일종의 말장난일 뿐이지만, 그래도 반동분자만 때려잡기 급급했던 김일성보다는 훨씬 나았다고 볼 수 있다.
- 1991년 아무런 직위 없이 있을 때 김일성과 비밀리에 만나 개혁 · 개방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1994년까지 나진 개방, 비핵화 딜,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김정일에게도 이 조언을 해줬는데 김정일은 그를 수정주의자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다만 김정일도 2000년대에 들어 신의주특별행정구처럼 비슷한 노선을 모색하긴 했었다. 허나 전권을 주려고까지 했던 중국인 장관 후보가 오기 직전 탈세 혐의로 중공에 체포되고[86] 이후 북미 외교 등이 잘 안 풀리자 2000년대 중반 핵실험으로 자폭해 끝이 안 좋았을 뿐. 헌데 정작 마오쩌둥이 반대했던 북한의 권력 세습은[87] 찬성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국가마다 맞는 게 있다는 게 일단은 표면적인 찬성 이유.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하기도 했다.#
- 1994년 중국 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던 월드컵 전 경기를 위성으로 시청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실제 덩샤오핑 집권 시기에 처음으로 CCTV에 유럽 축구가 방송되기 시작했다.[88] 1994년 갑을 리그라고 부르던 프로 축구 리그를 창설하는데 기여했으며[89] 살아생전 국가 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도 보고 싶어했으나,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덩샤오핑 본인도 중국이 월드컵 본선은 출전한 것은 보지도 못한 채 1997년에 사망했다.[90] 그런데 정작 관중 우려 등으로 축구장에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0년 대만 총통부 직속의 역사편찬기관 국사관(國史館.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이 인터넷으로 '중화민국 100대 인물'의 선정 투표를 실시했는데, 덩샤오핑이 중간 집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당황한 대만 정부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을 후보에서 제외했고 결국 조사 자체를 취소했다.#
-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는 덩샤오핑을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했어도 항상 그를 염려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이나 실각하여 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됐지만 몇 년 후 마오쩌둥의 부름을 다시 받았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각당한 대부분의 중국 정치가와 공직자들은 실각 후에 홍위병에게 구타당하거나, 강제 노동소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혹은 감옥에서 복역 중 사망하거나, 혹은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정치범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신임을 받은 셈이다.
- 단신으로 유명하다. 1904년생임을 감안해도 대체적으로 쓰촨성 출신들은 타지역 출신 중국인들에 비해서도 신장이 유독 작다. 그래서 타 지역 출신 중국인들은 쓰촨성 출신들을 먀오쯔(苗子, 땅콩보다 훨씬 더 작은 종자)라고 놀린다고 한다. 그 반대는 산둥성 출신들이다.
- 작은 키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라고 하자 당연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그럼 모두 내 의견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실행하겠소.'라고 했는데 실제론 덩샤오핑 혼자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실제론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선 덩샤오핑을 발견했지만, 덩샤오핑을 아낀 마오쩌둥이 '덩샤오핑 동지는 어차피 키가 작아서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똑같아 보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라며 그냥 넘어갔다는 말과 이 말을 듣자마자 덩샤오핑이 아예 책상 위에 올라서서 자신의 의견을 알렸다는 말도 있다.
- 동국무역그룹 창업주 헌암 백욱기(1919~2003)는 덩샤오핑과 외모가 비슷해서 1990년대 당시 별명이 '등소평'이었으며(참고),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이순진과 외모가 굉장히 닮기도 했다.
15. 매체에서[편집]
1995년 일본에서 발매된 홍콩97이라는 게임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 해당 작품 내에선 죽은 상태였다가 [91] 궁극의 병기로 개조당한다.[92] 참고로 이 게임은 우연의 일치로 덩샤오핑이 사망한 년도를 맞추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호이4에서 중화민국 산업장관으로 등장하는 희대의 막장 고증을 보여주었지만 1.5 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온 다음에는 중국 공산당 산업장관으로 변경되고, 중화민국에는 웡원하오, 장징궈, 천이(1883), 다이리, 천궈푸 등이 새 장관으로 추가되었다.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등소평'(원제 : 历史转折中的邓小平)이 2014년 방영했다. 국내에서는 2015년 1월 CNTV에서 방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