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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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5일 천안문 6.4 항쟁 직후 인민해방군 전차 대군의 진격을[3] 맨몸으로 혼자 막아선 시위대 측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명 탱크맨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위치는 아래 나오는 사진의 천안문광장 국기게양대와 인민대회당의 위치로 봤을 때 대략 동창안로와 난허얀로의 교차로 인근으로 추정된다.[4]
1998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지도자들 & 혁명가들 20인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
악몽의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 진압이 마무리되고, 6월 5일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 오는 59식 전차들을 천안문 앞 10차선 도로(장안거리)에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다.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그 방향으로 가서 서서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수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며 곧 다시 내려왔다. 이후 전차는 엔진을 재시동하여 다시 출발했다. 그 때 전차 측면에서 1~2m 이내에 서 있던 그가 다시 전차 앞으로 뛰어들어 재빨리 대치 상황을 재연했다.[5] 이후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영상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2명의 인물이 그를 끌어내 근처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 있던 사복 공안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고, 같이 시위를 한 동료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탱크맨을 찍은 사진은 전세계 신문의 1면에 실리며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러 언론과 미디어 매체에서 탱크맨 사진을 여러 차례 사용했고, 탱크 앞에 서서 무언의 저항을 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6] 또한 탱크맨이 찍힌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국 현대사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이 순간은 베이징 호텔 발코니에서 아래의 참상을 내려다보던 다섯 명의 외국 기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가장 유명한 버전은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탱크맨의 사진을 촬영한 기자 중 한 명인 AP통신 동남아시아 사진편집자였던 제프 와이드너는 베이징 호텔 6층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인터뷰에서 제프는 당시 사진을 찍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광장 근처 호텔에서 창문을 통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남자가 종이가방을 들고 탱크 앞으로 걸어나왔다"며 "그러더니 탱크 한 대의 포탑에 올라 군인들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국 청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에게 현장에서 잽싸게 끌려나갔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기자 스튜어트 프랭클린(Stuart Franklin)이 촬영한 사진은 필름이 상자 안에 담겨 중국에서 밀반출된 후 'Time and Life' 잡지에 실렸다.#
이 사진을 촬영한 또 다른 기자 찰리 콜(Charlie Cole)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뉴스위크지를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원격 사진 렌즈를 이용해 '탱크맨' 사진을 찍게 됐다. 일부러 사진의 왼쪽 아래에 사람의 모습이 오도록 구도를 잡음으로써 사람을 향해서 오는 탱크들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호텔을 감시 중이던 공안이 곧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사진이 찍힌 필름 롤을 사진기로부터 재빨리 빼낸 후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리고 빈 필름 롤을 대신 사진기에 끼워두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안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예상대로 필름을 빼앗겼지만, 콜 기자가 지혜를 발휘해 대비한 덕분에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무사히 도쿄의 AP통신 지국으로 보내져 마감에 맞춰 뉴스위크에 보도될 수 있었다.# 찰리 콜이 찍은 이 사진은 1990년 올해의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서방 기자 이외에도 로이터의 쩡셴화가 베이징 호텔 1111호실에서도 탱크맨을 촬영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탱크맨 사진을 검열, 통제하고 있다.
6.4 항쟁 당시 인민해방군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고로 군인들이 별 생각 없이 탱크맨을 진짜로 밟고 지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7] 혹은 짓밟지 않더라도 탱크에서 나온 군인이 총으로 쏴 버리고 시체를 옆으로 치운 후 지나갔을 수도 있다. 즉, 탱크맨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탱크를 막아섰던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탱크맨마저 전차가 밟고 지나갔다면 더 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저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 중 하나였으며 사진 속 인물이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로 뽑혔음을 생각하면 큰 일이었을 것이다. 탱크맨 사진 자체도 충격적인데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탱크맨의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면 그 즉시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인식은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세져 시위진압도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학살당하는 것은 분명 더욱 비참한 일이나, 때로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학살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월남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자유당 정권의 파멸을 불러왔다. 결정적 장소에서 발생한 비극적 죽음은 그 자체로 아이콘이 되어 꺼지지 않는 혁명의 연료가 되는 셈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차 부대가 본인을 밀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탱크맨 본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컬러 사진으로 보면 길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장에 컬러 사진에 있는 길에 있는 주황색의 무언가가 다 핏자국이다. 탱크맨이 서 있던 바로 그 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실제로 같은 위치를 몇 시간 전에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을 보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과 부서진 자전거들이 널려 있다.
시민들이 학살된 바로 그 자리에서 탱크맨 자신도 단신으로 "그래!! 나를 탱크로 밟고 지나가라!! 어디 한 번 죽여볼테면 죽여봐라!!" 라는 마음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탱크를 막아선 것이다. 군인들도 차마 시민을 눈앞에서 전차로 짓밟지 못할 양심[8][9] 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전차 앞에 서는 데만에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을 무릅쓴 자세가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땅이 울리도록 자신을 압도하며 서 있는 수십 톤짜리 살상무기를 상상하면 공감이 될 것이다. 탱크라는 건 보통 무게가 아니기에[10]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바로 근처에 서 있으면 진짜로 땅이 흔들리며,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전차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살벌했던 당시의 상황과 거대한 폭력 앞에 단신으로 혼자 서서 막아내는 그의 용기가 인상깊게 표현되어 위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사건 당시 직접 사진을 찍었던 미국인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는 "그가 4명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2014년 독일 '도이체 벨레'에 말했다. 와이드너는 "그(탱크맨)는 탱크가 오는 것을 보았고, 자신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가족이나 친척이 군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 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11]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 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12] 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장쩌민이 단언한 대로, 2017년 6월 탱크맨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콩에 있는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 창립자인 '프랭크 루(盧四淸)'의 인터뷰에 따르면, 탱크맨은 망명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 중국에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왕웨이린이 본명도 아니고 굳이 해외에서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다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자신이 진짜 탱크맨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며,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가 끝나야 비로소 탱크맨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위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사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이다. 그는 3일에서 4일을 기점으로 무력 진압이 거세지자 기록을 남기려 창안제가 내려다 보이는 베이징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경비가 삼엄했고, 가까스로 6층 호텔방에 투숙 중이던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을 설득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 촬영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사용하던 니콘 F3 카메라는 2일 전 장안대로에서 취재 중 날아온 돌에 맞아 부서져서 니콘 FM2로 촬영을 진행해야 했고, 와이드너 본인도 뇌진탕에 걸려서 당일에도 두통에 시달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필름도 촬영 중 떨어져서 호주인 여행객에게서 간신히 한 롤을 빌려 촬영했고, 그래도 화각이 나오지 않자 사용하던 400mm 렌즈에 2X 컨버터를 급히 끼워 찍었다고 한다. 필름 자체도 사진 촬영용 고감도 필름이 아닌 ASA100짜리 필름이라 1/60~1/30까지 셔터 속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간신히 세 장을 찍었다고. 손떨림 보정 기능이 있는 현대적 DSLR로도 핸드헬드 상태에서 저 정도 셔터 속도를 유지하면서 800mm 장망원 렌즈로 흔들리지 않게 촬영하는 것이 매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정말 기적적으로 나온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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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9년 6월 5일 천안문 6.4 항쟁 직후 인민해방군 전차 대군의 진격을[3] 맨몸으로 혼자 막아선 시위대 측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명 탱크맨이라고 불린다. 이 사람은 왕웨이린(王維林)이라는 가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오늘날에도 회자되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위치는 아래 나오는 사진의 천안문광장 국기게양대와 인민대회당의 위치로 봤을 때 대략 동창안로와 난허얀로의 교차로 인근으로 추정된다.[4]
1998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20세기의 지도자들 & 혁명가들 20인 중 하나로 등재되었다.#
2. 특징[편집]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가까운 이웃 외에는 아무도 그의 글을 읽거나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세계의 거실에 들어간 지 한 시간이 지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1989년 6월 5일 천안문 광장 근처의 탱크 열 앞에 서 있던 그는 쑨원보다도 더 생생하고 친밀하게 자신의 이미지를 세계 기억 속에 새겼을지도 모른다. 자기 초월의 순간에 윈스턴 처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목격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자유와 저항의 불멸의 세계적인 상징이 되었다.
2.1. 역사[편집]
악몽의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혈 진압이 마무리되고, 6월 5일 탱크가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를 하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당연히 겁에 질려 도망쳤으나, 수십 미터 밖에서 진격해 오는 59식 전차들을 천안문 앞 10차선 도로(장안거리)에서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양손에는 검은 비닐봉투와 옷가지를 든 어떤 사람이 단신으로 막아냈다. 영상을 보면 저 사람이 막은 전차가 한두 대가 아니었고, 가만히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차 조종수들이 차마 저 사람을 깔아뭉개고 갈 수 없었는지 옆으로 지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그 방향으로 가서 서서 막았다.
그런가 하면 전차 위로 올라가서 조종수석에다 대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으며 곧 다시 내려왔다. 이후 전차는 엔진을 재시동하여 다시 출발했다. 그 때 전차 측면에서 1~2m 이내에 서 있던 그가 다시 전차 앞으로 뛰어들어 재빨리 대치 상황을 재연했다.[5] 이후 몇몇 시민들이 달려와 데려가면서 위험한 상황이 끝난다. 영상에는 파란색 옷을 입은 2명의 인물이 그를 끌어내 근처 군중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주변에 포진해 있던 사복 공안들이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달려와서 떼어놨다는 설도 있고, 같이 시위를 한 동료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후 탱크맨을 찍은 사진은 전세계 신문의 1면에 실리며 세계적으로 퍼졌으며, 천안문 6.4 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러 언론과 미디어 매체에서 탱크맨 사진을 여러 차례 사용했고, 탱크 앞에 서서 무언의 저항을 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6] 또한 탱크맨이 찍힌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국 현대사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이 순간은 베이징 호텔 발코니에서 아래의 참상을 내려다보던 다섯 명의 외국 기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가장 유명한 버전은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의 사진이다. 이 사진은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탱크맨의 사진을 촬영한 기자 중 한 명인 AP통신 동남아시아 사진편집자였던 제프 와이드너는 베이징 호텔 6층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인터뷰에서 제프는 당시 사진을 찍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광장 근처 호텔에서 창문을 통해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남자가 종이가방을 들고 탱크 앞으로 걸어나왔다"며 "그러더니 탱크 한 대의 포탑에 올라 군인들에게 말을 걸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결국 청색 옷을 입은 두 명의 남자에게 현장에서 잽싸게 끌려나갔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기자 스튜어트 프랭클린(Stuart Franklin)이 촬영한 사진은 필름이 상자 안에 담겨 중국에서 밀반출된 후 'Time and Life' 잡지에 실렸다.#
이 사진을 촬영한 또 다른 기자 찰리 콜(Charlie Cole)은 천안문 6.4 항쟁 당시 뉴스위크지를 위해 베이징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원격 사진 렌즈를 이용해 '탱크맨' 사진을 찍게 됐다. 일부러 사진의 왼쪽 아래에 사람의 모습이 오도록 구도를 잡음으로써 사람을 향해서 오는 탱크들의 위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호텔을 감시 중이던 공안이 곧 들이닥칠 것에 대비해 사진이 찍힌 필름 롤을 사진기로부터 재빨리 빼낸 후 비닐봉지에 싸서 화장실 변기 물탱크 속에 숨겼다. 그리고 빈 필름 롤을 대신 사진기에 끼워두었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공안이 그의 방으로 쳐들어왔고 예상대로 필름을 빼앗겼지만, 콜 기자가 지혜를 발휘해 대비한 덕분에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은 무사히 도쿄의 AP통신 지국으로 보내져 마감에 맞춰 뉴스위크에 보도될 수 있었다.# 찰리 콜이 찍은 이 사진은 1990년 올해의 세계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서방 기자 이외에도 로이터의 쩡셴화가 베이징 호텔 1111호실에서도 탱크맨을 촬영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탱크맨 사진을 검열, 통제하고 있다.
2.2. 용기에서 비롯된 행위[편집]
6.4 항쟁 당시 인민해방군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고로 군인들이 별 생각 없이 탱크맨을 진짜로 밟고 지나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7] 혹은 짓밟지 않더라도 탱크에서 나온 군인이 총으로 쏴 버리고 시체를 옆으로 치운 후 지나갔을 수도 있다. 즉, 탱크맨은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탱크를 막아섰던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탱크맨마저 전차가 밟고 지나갔다면 더 큰 일이 되었을 것이다. 저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 중 하나였으며 사진 속 인물이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로 뽑혔음을 생각하면 큰 일이었을 것이다. 탱크맨 사진 자체도 충격적인데 전차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탱크맨의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면 그 즉시 중국의 국제적 위상과 인식은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더욱 거세져 시위진압도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러 사람이 학살당하는 것은 분명 더욱 비참한 일이나, 때로는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학살보다 더욱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다. 틱꽝득의 소신공양은 월남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김주열 열사의 죽음은 자유당 정권의 파멸을 불러왔다. 결정적 장소에서 발생한 비극적 죽음은 그 자체로 아이콘이 되어 꺼지지 않는 혁명의 연료가 되는 셈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차 부대가 본인을 밀고 지나가게 하는 것이 탱크맨 본인의 의도였을 수도 있다. 게다가 컬러 사진으로 보면 길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장에 컬러 사진에 있는 길에 있는 주황색의 무언가가 다 핏자국이다. 탱크맨이 서 있던 바로 그 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곳이었다. 실제로 같은 위치를 몇 시간 전에 같은 구도로 찍은 사진을 보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수많은 시체들과 부서진 자전거들이 널려 있다.
시민들이 학살된 바로 그 자리에서 탱크맨 자신도 단신으로 "그래!! 나를 탱크로 밟고 지나가라!! 어디 한 번 죽여볼테면 죽여봐라!!" 라는 마음으로 죽을 각오를 하고 탱크를 막아선 것이다. 군인들도 차마 시민을 눈앞에서 전차로 짓밟지 못할 양심[8][9] 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전차 앞에 서는 데만에도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을 무릅쓴 자세가 가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당장 땅이 울리도록 자신을 압도하며 서 있는 수십 톤짜리 살상무기를 상상하면 공감이 될 것이다. 탱크라는 건 보통 무게가 아니기에[10] 빠른 속도로 움직일때 바로 근처에 서 있으면 진짜로 땅이 흔들리며, 사람이 넘어질 수도 있다. 단순히 움직이는 전차 옆에 당당하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살벌했던 당시의 상황과 거대한 폭력 앞에 단신으로 혼자 서서 막아내는 그의 용기가 인상깊게 표현되어 위 사진이 퓰리처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3. 생존 여부[편집]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왕웨이린은 대만으로 건너가 살아 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이는 중화권 언론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100% 밝혀진 바 없고, 오히려 진압 직후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복역 중이라거나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사건 당시 직접 사진을 찍었던 미국인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Jeff Widener)는 "그가 4명에 의해 끌려갔으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2014년 독일 '도이체 벨레'에 말했다. 와이드너는 "그(탱크맨)는 탱크가 오는 것을 보았고, 자신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며 "가족이나 친척이 군에 의해 죽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1. 장쩌민의 발언[편집]
위 영상은 1990년 미국 ABC 방송의 유명 베테랑 앵커인 바버라 월터스(Barbara Walters,1929~2022)가 장쩌민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다.
월터스가 대놓고 당시의 사진을 제시하며 왕웨이린을 언급하자 장쩌민은 너털웃음을 짓는 등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 남자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월터스의 질문에 중국어와 영어를 번갈아 쓰며 답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중국어로 사진 속 장면 자체에 대해서만 얘기하면서 말을 돌리다가 갑자기 영어로 "그 사진이 증명해 준다. 그는 탱크에 깔려죽지 않았다."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월터스는 좀 더 직설적으로 체포 혹은 처형에 대한 질문을 하고 이에 표정이 굳어진 장쩌민은 중국어로 그 사람이 체포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답한다. 재차 질문을 받은 장쩌민은 마침내 "하지만 내 생각에는 절대로... 죽지 않았다."(But I think never... never killed.)라고 영어로 답변하고[11] 그것을 확인하는 월터스를 향해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다시 한 번 똑같은 답변을 한다.
즉, 왕웨이린에 대한 서방 측의 의구심을 분명하게 부정한 셈이다. 특히 'never'라는 표현을 쓴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never는 일반적인 부정문에도 쓰이지만, '결코' 혹은 '절대로' 등의 강조형으로도 쓰이는 표현이기 때문. 장쩌민이 영어에 매우 능통한 인물[12] 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구태여 사망설을 부정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 인물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3.2. 2017년 보도[편집]
결국 장쩌민이 단언한 대로, 2017년 6월 탱크맨이 중국에서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콩에 있는 중국 인권민주화운동정보센터 창립자인 '프랭크 루(盧四淸)'의 인터뷰에 따르면, 탱크맨은 망명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고 중국에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으며 왕웨이린이 본명도 아니고 굳이 해외에서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고 중국이 민주국가가 되기 전까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정말 중국에 있다면 신변의 안전 때문에 자신이 진짜 탱크맨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울 것이며,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가 끝나야 비로소 탱크맨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4. 갤러리[편집]
위 사진은 AP통신의 사진기사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이다. 그는 3일에서 4일을 기점으로 무력 진압이 거세지자 기록을 남기려 창안제가 내려다 보이는 베이징 호텔로 향했다. 호텔은 경비가 삼엄했고, 가까스로 6층 호텔방에 투숙 중이던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을 설득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사진 촬영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사용하던 니콘 F3 카메라는 2일 전 장안대로에서 취재 중 날아온 돌에 맞아 부서져서 니콘 FM2로 촬영을 진행해야 했고, 와이드너 본인도 뇌진탕에 걸려서 당일에도 두통에 시달리던 중이었다고 한다.
필름도 촬영 중 떨어져서 호주인 여행객에게서 간신히 한 롤을 빌려 촬영했고, 그래도 화각이 나오지 않자 사용하던 400mm 렌즈에 2X 컨버터를 급히 끼워 찍었다고 한다. 필름 자체도 사진 촬영용 고감도 필름이 아닌 ASA100짜리 필름이라 1/60~1/30까지 셔터 속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간신히 세 장을 찍었다고. 손떨림 보정 기능이 있는 현대적 DSLR로도 핸드헬드 상태에서 저 정도 셔터 속도를 유지하면서 800mm 장망원 렌즈로 흔들리지 않게 촬영하는 것이 매우 힘든 것을 감안하면 정말 기적적으로 나온 사진이었다.
5. 관련 매체나 기념물[편집]
5.1. 게임[편집]
- 서울의 봄: 이태신이 행주대교 앞에서 2공수를 회군시키는 장면[14] 이 탱크맨과 비슷한 구도를 띄고 있다.
- 스타크래프트: 커스텀 중에 이를 반영한 것이 있다. 나는 베이징의 천안문을 사랑해라는 이름이다.
- 심슨 가족: 이를 패러디했다. 시즌 16 12화에서 등장한다. 이 에피소드는 2021년 홍콩 디즈니+에서 삭제됐다.## 시즌 22 에피소드12에서 또 패러디했다.
- 워 썬더: 2021년 10월 7일 유튜브 공식계정에 중국 인민해방군 주력전차 소개영상을 업로드하였는데, 1분 50초경 59식 전차를 정면에서 일렬로 줄지어 등장시켰다.#
- Roblox: 레딧의 한 유저가 패러디했다. 댓글창이 세서미 크레딧 조크로 도배된 건 덤이다. 여담으로 베스트 댓글 중 "59식 전차 포탑은 그렇게 둥글지 않음. 999999사회 포인트 차감"이라는 댓글이 있다.#
5.2. 음악[편집]
- They Don't Care About Us: 마이클 잭슨의 노래로 뮤직비디오에 등장한다.
- We weren't born to follow: Bon Jovi의 노래로 뮤직비디오에서 잠깐 등장한다.
5.3. 기념물[편집]
- 스페인 조각가 페르난도 산체스 카스티요(Fernando Sánchez Castillo)가 만든 탱크맨 조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