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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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rmy_50.jpg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정치 장교[1][2][3]
냉전 시기의 정치 장교[4]
1. 개요
2. 탄생
2.1. 대숙청의 희생양
3. 군사적 문제점
4. 장점
4.1. 체제 안정성
4.2. 군사적 측면
5. 역할 전환
6.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정치장교
7. 유사한 사례
7.1. 프랑스
7.4. 중화민국(대만)
7.5. 전근대 중국
7.6. 일본 센고쿠 시대
8. 뒷이야기
9. 미디어
10. 정치장교를 지냈던 인물들



1. 개요[편집]


"붉은 군대에선 공격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오시프 스탈린

Kомисса́р. 소련군에서 공산당 소속의 군 장교를 의미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식 명칭은 정치지도원인데, 위키백과의 경우 한국어 위키백과는 정치지도원, 일본어 위키백과는 정치장교, 중국어 위키백과는 정치위원이라고 명기되어 있는다. 명칭은 다르지만 결국에는 셋 다 같은 것을 가리킨다.

매체에서는 하도 2차대전 초기 스탈린의 삽질과 엮어 정치장교를 우스꽝스럽고 부작위적인 존재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공산주의 국가는 특별히 군대만 당에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적인 조직은 공산당이 통제한다. 쉬운 예시로 현재 북한에서는 직장인들은 조선직업총동맹, 협동농장농부들은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청소년들에는 조선소년단이니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이니 하는 조직이 있고 하다못해 직업이 없는 전업주부들도 조선사회주의녀성동맹 등 모든 사회정치적인 단체들을 조선로동당의 통제 아래에 두는데, 이곳의 간부들은 전부 조선로동당 당원들이다. 동구권을 비롯해서 역사상 존재했던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조직의 이름이나 세부적인 운영방식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큰 틀에서는 위의 체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 통제를 위한 정치지도원 내지 정치 비서를 군에도 임명 하는 것일 뿐이지 군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특히나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 중 상당수는[5] 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당의 군대이기 때문에 당의 영도와 정책을 군이 잘 이행하는지 직접 감시하는 시스템이 바로 정치장교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조선인민군에는 당의 군 통제를 위한 로동당 위원회가 있는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비서를 총정치국장이 담당하고 그 이하 연대급 이상 부대에 역시 당위원회가 설치 되어 있으며 대대에는 당 세포위원회, 중대에는 정치지도원이 파견된다. 정치군관(장교)는 여타 외부의 당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당 조직을 대신하여 당원들의 당생활 지도-통제 권한이 있는데 인민군 모든 군관은 로동당원이기 때문에[6] 사실상의 인사 통제권이 작동하여 군을 완전히 장악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이들은 말이 장교지 특별히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군사적 지식이 깊은, 진짜 군 장교는 아니다. 즉 정치를 하는 '공산당 당원'으로서, 군을 감시하는 직책을 가지고, 계급으로는 장교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 바로 정치장교라 할 수 있다. 일반적인 군대를 운영함에 있어 군종장교군의관 등 사회에서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업이 군대에서는 장교로 보직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공산주의 국가는 여기에 '군에 보직된 공산당 당원'이 하나 추가된 것이고 그게 정치장교였던 것. 즉 정치장교의 존재 자체는 문민통제의 개념에서 본다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제도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2차대전 당시 소련은 그 정치장교가 주어진 역할을 넘어서 군 작전 계획에까지 관여하면서 폭주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2. 탄생[편집]


소련의 공산 혁명 이후 생겨났다. 당시 볼셰비키 정권은 각지의 반혁명군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공산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은 레프 트로츠키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으로 전술을 다시 짜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몽상적인 주장에 대해 "닥쳐!"로 일갈했다. 그는 전쟁은 실험이 아니라 검증된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 제국 장교들을 과거를 묻지 않고 군사 전문가로서 붉은 군대에 대거 영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군의 명장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도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아들이 백군에게 죽은 후에 붉은 군대에 참여했다. 뿐만 아니라 반혁명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외국군이 대거 개입하자 조국을 독일에 팔아먹었다던 공산당이 오히려 조국의 수호자가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7]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장교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내전 후에 붉은 군대의 사단장급 이상의 90% 가까이가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다. 다만 이런 장교들의 붉은 군대 입대는 자발적인 것뿐만은 아니라 위협[8]에 의한 것도 있었으며,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지휘한 렌넨캄프처럼 끝내 입대를 거절한 장교들은 처형되기도 했다.

결국 붉은 군대는 제정 러시아군의 후예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트로츠키의 말은 백 번 옳았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군사 전문가들이 들어오자 붉은 군대의 전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아울러 자칫 반혁명세력에 가담할 수도 있었을 옛 제정 러시아 장교들을 확실히 통제할 수 있도록 볼셰비키 정권 편으로 묶어두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군사 엘리트의 정권 탈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정치장교'라는 개념 생성의 주 원인. 일단 장교에게 계급은 부여되었지만 애초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근저에 깔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 특성상 초창기에는 사병들이 장교에게 복종은 고사하고 경의를 표할 필요조차 없었으므로 지휘권이란 건 사실 나 줘도 마땅할 정도였다.

여기에 충분한 군사 교육을 받은 사람, 특히 장교는 거의 예외없이 제국 시절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언제 정부, 그러니까 공산당을 배신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사실 당시에는 정말 정치장교 같은 걸 만들 만큼 우려할 만한 상황이었다. 장교들 중 공산당원의 비율이 턱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이런 저런 사정상 장교들이 당원이 되기 싫어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에 공산체제가 정착되고, 너나할거 없이 당원이 되려는 시대가 오자 장교들이 당원이 되는것이 어려워졌다. 군사 엘리트가 정권 탈취를 위해 당에 접근하려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컸기 때문이다. 이때까지의 장교들 상당수가 차르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전 부르주아 계급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는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따라서 당시 붉은 군대의 모든 명령은 지휘관의 사인과 함께 정치장교의 사인이 없으면 실행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정치위원 시스템을 군에 도입, 군이 당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반란을 시도할 가능성을 없앰과 동시에 병사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고, 아울러 지나치게 급락한 군사 지휘관의 권위를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각급 부대의 정치 지도자로서 운용하려 했다. 문제는 이것 때문에 지휘권의 이원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 체제가 아직 소련군이 제대로 편성돼 있지도 않았던 적백내전 시기에만 있었다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1930년대 소련의 신생 군사 엘리트들도 같은 문제를 인식해서 군 정치위원 및 정치장교들의 권한을 억제하려 했던 바 있다.


2.1. 대숙청의 희생양[편집]


정치장교는 대숙청을 실행한 내무인민위원부(NKVD) 소속이 아니라 공산당소속으로 국방인민위원부 산하의 붉은 군대에 파견된 처지였다. 이 때문에 "사상이 불건전한 트로츠키파를 숙청하려는" NKVD의 사냥감이 되기 딱 알맞았고, 실제로 대숙청에 일반장교보다 더 많이 희생되었다.

스탈린은 적백내전 당시 정치장교로 근무하기는 했지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고 트로츠키가 국방장관으로 있던 군에서 거의 불명예 전역을 했기에 군 정치부와는 거의 무관하다. 오히려 군 정치부는 창설자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의 온상이었으며, 트로츠키가 실각할 때도 일부 정치장교들이 반 스탈린 쿠데타를 일으켜 스탈린 파를 몰아내자고 제의할 정도였다.

숙청을 실행한 조직은 사법권과 수사권을 가졌던 NKVD(내무인민위원부)였다. NKVD는 정규 붉은 군대와는 별개 조직이었으나[9] 군을 덮칠 수 있었던 이유는 NKVD 휘하의 내무군군사경찰이 없던 소련군의 군사경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단 소련의 대숙청은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음에도 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숙청으로부터 자유로웠다. NKVD는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반스탈린 및 친트로츠키파를 숙청하다가, 사냥감이 보이지 않자 한동안 무풍지대에 있었지만 트로츠키가 창설했던 군 정치부, 즉 군내 정치장교 조직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 숙청 초기에는 주로 전현직 고위 정치장교들부터 체포되었다. 이것이 군 전체에 확산되어서 정치장교나 일반 장교 가릴 것 없이 군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일반장교보다는 정치장교에 대한 숙청이 더 심했다. 예를 들어 당시 15명의 야전군(army) 사령관중 13명이 처형된 데 반해 군 정치장교는 16명 전원이 처형되었으며, 군단급의 경우 군단장 57명중 50명인데 반해, 군단 정치장교는 28명중 25명인 식이었다.

실제로 대숙청 당시 가장 혹독하게 숙청된 자들이 바로 트로츠키가 심어놓은 고급 정치장교들이었다. 물론 정치장교뿐 아니라 일반 장교도 많이 죽였으므로 대숙청이 해악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대숙청은 일반 장교-정치장교와의 갈등과는 상관없다. NKVD는 소련 정부에 소속되어 있으며, 군 정치부는 군에 소속된 당조직이므로 다른 조직이다.


3. 군사적 문제점[편집]


비전문가인 정치장교가 전문가인 지휘관과 동등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문제가 많았다. 물론 개중에도 쓸 만한 정치장교가 있긴 했지만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경우가 워낙 많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치장교 체제가 처음 도입된 소련 적군은 부대 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가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일단 지휘권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에 따라, 부대 지휘관이 수립한 작전을 프롤레타리아 병사 대중의 대표인 정치장교의 승인을 받아 병사 전원의 만장일치라는 형식으로 지휘를 받게 돼 있었으니 당연히 권한이 지휘관과 동등한 것이다.

이 구조는 정치장교가 지휘관의 군사적 전문성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경우에는 그럭저럭 쓸만한 구조임이 적백내전에서 입증되었으나, 정작 전문 지휘관들의 사상적 기반을 의심하는 정치장교들의 태클이 기본이 되다 보니 결국에는 아무리 좋은 경우라 해도 지휘체계가 이원화되면서 의사결정 및 작전지휘의 효율이 크게 저하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지휘체계가 군사적 문외한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쟁을 총지도해야 할 당 군사위원회에 군사 비전문가들이 워낙 많았고, 군사작전의 정치적 효과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에 일선 지휘관들의 효율적인 건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당연히 정치장교는 당 중앙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덤으로 군사경험이 없는 관계로 눈 앞에서 병사들이 다 죽어나가는 판에도 자신의 지시로 인해 무슨 결과가 나올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신히 담당 정치장교를 설득했다고 해도, 상위부대의 정치장교가 압력을 넣으면 말짱 도루묵. 상위부대로 올라갈수록 정치장교의 숫자가 불어나기 때문에 지휘권의 혼선이 더 심해진다. 부대 지휘관과 정치장교 사이에서, 경우에 따라 정치장교끼리도 견해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싸움만 엄청나게 일어나지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군대는 지휘관과 정치장교의 병림픽 속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만 하고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치장교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자니 정치장교의 고자질이 두려워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장교가 상급부대에 있는 일 없는 일 전부 고자질을 할까봐 정치장교를 살살 달래는 일 역시 지휘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어버려 붉은 군대의 지휘관들로서는 타국 군대에서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쓰잘데기없는 업무까지 추가되어 피로가 누적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심지어는 지휘관의 업무가 이건 부대를 관리하는 사람인지 정치장교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인지 헷갈리는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지휘를 잘해도 정치장교가 트집잡고 고자질을 하면 총살까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치장교가 전선에서 앞장서면 사기진작의 효과가 있겠지만, 그 정치장교가 선두에 서서 빌빌대거나 전투의욕을 상실해 버리면 답이 없다. 아무리 똘기를 가득 채워도 정치장교도 사람이다. 포탄의 충격에 쇼크를 일으키거나 총성과 비명에 움츠려들어서 주저앉아버리면 주변의 병들도 동요할 수 밖에 없는고로 전술적으로 옳은 돌격이나 진격의 발목을 잡는 미친 사태가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상술했듯 많은 수의 정치장교들이 대부분 총 한번 집어본적도 없는 책상물림 출신들이 많았던지라 일개 병보다도 더 빌빌 기는 경우도 알음알음 보여지곤 했다.[10]

이런 문제점 때문에, 1930년대부터 소련군은 내부에서는 정치장교의 권한을 줄이고 단일 지휘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커다란 노력을 했다. 정치장교에 관련된 문제점은 소련군 내부에서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었던 것이었고, 그 권한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그게 정치장교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런 노력은 있었다. 문제는 대숙청을 겪으면서 이걸 협의해야 하는 사람들이 지휘관과 정치장교를 가리지 않고 싸그리 숙청당한 덕분에 논의가 붕 떠버렸고, 지휘권 문제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신규 인력으로 대숙청의 피해를 복구하는 상황이라 지휘관의 리더십도 확보하지 못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독일의 침공이라는 대 위기를 맞아버렸다는 것이다.


4. 장점[편집]



4.1. 체제 안정성[편집]


체제의 안정성 측면에서 정치장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근현대사에서 무력혁명으로 건국된 국가들은 전쟁을 치르며 출범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국가에 비해 비대한 군부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부가 비대해진 나라들치고 쿠데타가 안 일어나는 나라가 없다. 나라를 대표할 유일한 무력이자 나라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이니만큼 너무 배고파도, 반대로 너무 배불러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게 군대이다. 남베트남이나 이집트, 미얀마, 터키, 파키스탄 같은 나라가 대표적이다. 이들 나라 중 이집트나 미얀마 같은 나라는 정부의 명령을 받아야 할 군부가 쿠데타 후에도 계속 정권을 잡고 있거나 정권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공산국가도 정치장교가 없었다면 당을 제치고 이들 나라들처럼 군부가 정권의 전면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장교 덕인지 다른 체제에서는 빈번했을 쿠데타가 난 적이 거의 없다.[11] 몇 안되는 예외[12]가 냉전 말기 동유럽 혁명이 일어날 때 1980년대 폴란드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소요사태 때문에 군부가 나선 사례 정도지만, 이는 군부가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되려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개입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 공산체제는 버틸 수 있었다. 폴란드 외에 다른 동유럽 국가들도 대부분 군부는 시민들의 혁명에 관여하지 않고 본연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으며, 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정부의 통제도 순순히 수용했다. 이는 당이 군부를 확실히 장악했기 때문이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장교 제도는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중이 아니라면...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처럼 너무 막장이라 정치장교 같은 거 있어도 군이 민중 봉기에 합류한 사례가 있긴 했다.

정치장교의 존재 덕분에 민간 정치세력이 군에 대해서 확실한 통제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점, 즉 문민통제가 확고해진다는 점은 쿠데타의 가능성을 언제나 걱정해야 하는 정치적 후진국에서는 큰 이득이다. 군의 쿠데타를 제도적으로 확실하게 봉쇄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봐야 한다. 일례로 소련이 건국한 이래 국가 원수인 서기장들은 이 정치장교 일을 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직업군인으로 복무한 적이 없는 순수 민간 정치인들이다. 그리고 북한선군정치라는 미친 짓을 벌였지만, 그 지도자인 김정일은 군대 한 번 안 간 쌩판 민간인이이었고, 그 아들 김정은은 탄원병이라는 일종의 지원병으로 단 2년 남짓 복무를 했을 뿐이며, 그 끔찍한 군대 경험 때문이었는지 정권을 잡자마자 선군정치를 폐지했는데, 그러고도 군부는 아무 말 없었다.

사실 정치장교의 존재 이유이자 정치장교의 가장 큰 임무가 바로 지휘관이 똑바로 하나 안하나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정치장교 제도는 그 문제점에 불구하고 일단 존재 목적 자체는 훌륭하게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공산권 지도자들도 대개 정치장교의 단점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지만 바로 이 체제안정성 때문에 폐지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13]

4.2. 군사적 측면[편집]


군사적 면에서도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하면 나름대로 효과적이었다. 군사지휘관의 지휘권이 보장되면서 정치장교가 실제 이론상의 원래 임무인 병사들의 전의 고양에 주력하는 경우, 유능한 지휘관의 효율적인 지휘를 받는데다 정치장교의 지도 하에 사기가 충만한 광신적인 병사들로 구성된 이상적인 부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병사들의 사기 문제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병사들이 당에 절대적으로 충성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 지휘관이 변절하거나 해도 병사들은 가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사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제62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과 62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그의 상급부대인 남부전선군 사령관 안드레이 예료멘코 상장과 남부전선군 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 콤비가 대표적이다. 특히 구로프는 군사적으로도 자신에게 지휘권이 있었던 NKVD 부대까지 추이코프에게 넘겨주면서 철저하게 정치적 지원에만 주력했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면서는 이런 경향이 강해져서, 나중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정치장교의 역할은 이런 사기진작으로 축소된다.


4.3. 정훈교육[편집]


정치장교가 벌인 각종 삽질에 비하면 의외겠지만, 정치장교 제도는 군사적인 면에서는 방해만 되는 반면에 공보정훈장교로서는 우수했다. 이들은 원래 인민들을 사상 무장시키고 혁명정신을 고취하는게 일인 당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예 현대적인 정훈교육의 시작을 이들의 사상무장 사업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이는 '병사 개개인'에게 아군의 정치 체제가 적군의 정치 체제보다 확고하게 우위에 있으며, 자신들은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비록 정의를 위한 신념과 전투의 결과는 별개인 만큼 이들의 교육이 항상 승리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교육받은 신념이 필승의 의지를 주고, 정의로운 신념을 굳게 가진 병사들의 높은 사기정신력이 그렇지 못한 병사들의 집단보다 훨씬 효율적인 전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전문적인 정훈교육은 분명 가치가 있는 활동이다.

2차대전 시기 연합군의 일원으로 소련군에 파견되어 정치장교를 목격한 서방권 군인들도 소련군 정치장교에 대한 호평이 많았다. 병사들은 정치장교를 무섭게 생각하기는 커녕, 오히려 서방국가의 채플린 혹은 공보정훈장교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둘이 하는 일도 비슷하다. 전사자에 대한 장례식을 주관하고, 개인적 상담을 받아주기도 하고, 글을 모르는 까막눈 병사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거나 써주기도 했다고 한다.[14]

유발 하라리의 저작인 《사피엔스》에서는 흔히 '이념'으로 분류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파시즘도 초인적 미래 질서를 규정한, 불교와 같은 훌륭한 종교로 규정하며 정치장교는 군종장교 그 자체로 정의한다.

또한 정치장교가 후방에 안전히 머무르며 전투를 관람했을 것이라는 일반적 편견과는 달리 이들은 병사의 모범이 되어야 했기에 돌격시 먼저 진두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사상율도 일반 장교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에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모든 당원은 다른 병사보다 더 앞서서 싸우라"는 강령이 내려오기도 했으며,[15] 100% 당원이었을 정치장교 역시 이런 명령을 당연히 따랐을 것이다.


4.4. 내무부조리 척결[편집]


또한 정치장교의 존재로 인해 부대 내부의 가혹행위가 감소되는 장점이 있었다. 감시하는 게 주 업무인 간부가 따로 붙어있으니 사병간에 뻘짓하거나 지휘관의 묵인이 있기는 더 어려웠다. 가혹행위를 당한 피해자들이 정치장교에게 가해자를 고발하거나 정치장교가 직접 적발해 처벌될 수 있도록 했다. 일단 소련군도 군내 구타와 가혹행위는 금지한다는 공식 명령이 수시로 내려왔고, 이를 어긴 내무부조리 가해자는 정치장교가 "의 명령을 어기고 의 명예를 실추시킨 반역자"란 명목으로 군사재판에 넘길 수도 있었는데 명예와 사상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공산주의 체제 특성상 되려 내무부조리 가해자들이 서방권의 군인들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그러나 소련이 망하고 난 이후에는 정치장교 제도가 폐지됐고, 자연스레 러시아군 내부에는 이런 담당 직책이 없어진 탓에 소련 시절보다 훨씬 데도브시나가 늘고 가혹해졌다. 이후 군 비리도 심각해져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러시아군은 많은 적포로와 민간인들에게 여러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보도되고 있다.


5. 역할 전환[편집]


그러나 그런 장점도 사실은 정치장교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수많은 전훈에 압도된 지휘관들이 위기상황에서 숙청의 위험을 무릅쓰고 억지로 정치장교의 권한을 축소한 결과 드러난 것이었다.

비록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합적으로 바라봤을 때 단점이 더 큰 이상 당 군사위원회조차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독소전쟁 중인 1943년부터 이때까지 누적된 정치장교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이 직접 나서 정치장교의 배속 수준과 권한을 대폭 조정했다. 일단 정치장교는 통상 연대급 이상에만 배치하고, 그나마도 지휘관의 정치적 보좌 겸 최후까지 전투의지를 잃어서는 안 되는 참모장교로서의 임무만, 그것도 연대나 사단급 제대에서나 수행하게 되어서 정치장교들이 지휘관의 작전에 간섭할 권한을 대폭 축소해버린 것이다. 이후 정치장교의 역할은 주로 병사들의 사기 상승을 위한 선전과 정치교육으로 거의 제한됐다. 물론 지휘관의 보좌격으로는 꾸준히 활약했다. 예를 들어 흐루쇼프 같은 경우도 1943년 이후로는 독일군 포로 심문이나 정보 수집 등으로 군을 도왔다.

그리고 적어도 지휘권 행사를 위해서는 충분한 군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상부가 깨달았기에 수많은 정치장교가 억지로 훈련소에 끌려가서 소대장, 중대장 과정 지휘 훈련을 받고서야 다시 정치장교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윗선에서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은 소련군들이 총알받이로 갈려나간 뒤였다.

이후 정치장교는 개별보직에서 일종의 순환보직으로 전환되었는데 소위로 처음 임관한 후에는 소대장을 하다가 중위로 진급하면서 중위 1년차에서 중대 정치장교로 옮기고 중위 2년차에서 대대 참모를 역임하다가 대위로 진급한 뒤에 다시 중대로 내려와서 중대장을 하는 방식으로 계속 지휘관 → 정치장교 → 참모 → 지휘관의 순서대로 계속 보직을 반복하게 되었다.

덤으로 군에 대한 정치적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반 장교들의 공산당 입당을 적극 장려했다. 이 조치는 군 복무에 대한 보상[16]이기도 했지만, 장교를 공산당에 입당시킴으로서 확실하게 공산당 편으로 만들면 굳이 감시자를 두당 1명 이상씩 딸려보낼 필요가 감소하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부터 정치장교의 폐해에 대해서는 소련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이후 계속 축소되다가 소련 체제가 안정되어 쿠데타 음모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어진 1950년대 이후가 되면 그저 공보정훈장교 + 당연락관의 역할로 마무리된다. 그래도 평시에는 아예 없는 것보단 낫기 때문에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계속 남기는 한다.[17]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일본계 소련군 대위의 수기를 보면 2차대전 이후의 소련군 중대에는 중대장 외에도 문화중대장, 정치중대장('세포중대장'이라고 언급)이라는 '같은 급'의 정치장교가 존재했다. 각각의 역할은 중대 내의 계통과 선전, 교육 그리고 군기, 취체, 의식, 거행(문화중대장)과 공산당원에 대한 교양과 조직 및 당세포회의와 비판회의를 관장하여 사상 취체와 인사에 관한 최후 결재권(정치중대장)로 구분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대장이 지휘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권은 정치중대장이 가지고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소련이 붕괴하고 들어선 러시아 연방에서는 당연히 정치장교 제도는 폐지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얼마전 zampolite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며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이런 zampolite들의 활동이 보고되었다.[18] 고위 정치인이 하루아침에 군 장성으로 임명되는 사례는 아직도 남아있다. 푸틴 대통령의 심복인 세르게이 쇼이구는 원래 관료였으나 1991년 러시아 연방 비상대책부 장관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하루아침에 소장 계급을 받았다. 이후 옐친 정권 아래에서 중장, 상장 진급을 계속하다가 비상대책부에는 재난 구호 명목으로 '비상대책군'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두고 장관이 그 사령관을 겸한다는 규정이 신설되어 쇼이구 장관은 2003년 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비상대책군 사령관이 되었다. 비상대책부 장관을 퇴임하고 다른 관직으로 간 후에도 대장 계급은 그대로 유지하다가 2013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는 최룡해처럼 아예 대장 군복 차림으로만 공식 석상에 나온다.

독소전쟁 당시 다른 소련군 포로에 비해서도 특히 정치장교 포로는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OKW(독일군 최고사령부)에서는 모든 소련 인민위원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인민위원이 바로 정치장교이다. 이 때문에 하급 정치장교들의 피해는 엄청났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일선에서 뛰다시피해서 사상률이 높은데다, 포로로 잡히면 거의 100% 사망 확정이니...

6.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정치장교[편집]



6.1. 중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총정치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원래부터 소련 체제를 본받았고, 중국 국민당이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군사부분의 지휘관이었던 장제스가 사실상의 당수가 되어 당을 장악하는 것을 직접 보았는지라, 군대를 장악할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19] 역시 정치장교가 존재한다. 1930년대 장시소비에트 시절에 마오쩌둥부터의 공식 직위는 총사령관 주더의 정치장교였다. 실제로는 총사령관 위에서 지도하는 위치였지만...

연(连 중대급)급에서는 정치지도원(약칭 지도원), 영(营 대대급)급에서는 정치교도원(약칭 교도원), 단(團 연대급)급 이상은 정치위원(약칭 정위)를 두고 있으며 정치장교가 부대 당위원회의 서기, 지휘관이 부서기를 담당한다. 과거에는 정치장교가 지휘관의 명령을 부결할 수 있을 정도로 권한이 강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부작용 때문에 권한과 역할을 축소시키는 대신, 지휘관을 당의 충성분자로 만드는 방식으로 선회하는 바람에 현재는 실질적으로는 2인자의 역할로 지휘관과 충돌하는 일은 많이 없다. 위에서 말했듯 지휘관도 당원이고, 무엇보다도 정치장교와 일반장교의 친목을 엄격히 차단했던 북한군이나 초기 소련군과는 달리 일정 계급 이상까지 승진하기 위해서는 지휘관과 정치위원을 순환하도록 하기 때문에 동료나 상관으로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대하기 힘들다.[20] 하여 지휘관은 당에 충성하고 정치장교도 군사작전에 대하여 문외한이 아닌,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21] 현재 인민해방군의 경력 관리 모델 상에는 위관급까지는 일반장교/정치장교를 순환하며 거치다가 영관급부터는 일반/정치 중 한쪽으로 고정되게 되어있다.[22] 정치장교는 일반장교와는 분리되어 정치위원회나 기율검사위원회 등에서만 근무할 수 있다.

의외로 중화민국군도 정치장교가 있었다. 쑨원이 군대를 설립할 때 소련의 체제를 많이 참고했기 때문. 국공합작시절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장제스를 보좌하는 정치장교였다.

중국 영화 집결호를 보면 정치장교가 당시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주인공 부대의 첫 정치장교는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다 전사했고 후임으로 들어온 정치장교는 글을 모르는 병사들을 위해 편지를 써주는 등 병사들에게 선생님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이런 훈훈한(?) 면 뿐만 아니라 이 제도의 문제점도 영화 내에서 다루어지는데, 중대장인 주인공이 위에서 언급한 첫 정치지도원과 지휘를 두고 약간의 다툼을 벌이는 장면도 있다.

지도원: 중대장, 화력진지 구축하고 돌격조를 보냅시다.

중대장: 그건 안 돼요. 적군엔 야포가 있소. 일단 재정비합시다.

지도원: 포기한다고요? 그럴 순 없습니다.

중대장: 중대장은 나요. 나서지 마시오!

지도원: 그런 비겁한 짓은 용납할 수 없소!

그리고 이 지도원은 이 말을 마친 직후 야포에 맞아 전사한다.[23]

중국에서는 이들 정치장교와 유사한 업무를 하는 장교가 바로 군종장교이다. 기존 종교 업무에 장병 병영생활도우미와 특히 군종 승려들의 경우는 전원 전투승 출신이라 무술 교관 역할까지 맡으면서 정치장교와 유사한 업무들을 맡아서 한다. 업무 특성상 정치장교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는 편이다.

6.2. 북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차 대전 후 소련군의 체계를 이식받은 조선인민군도 정치장교 제도를 두고 있는데, 북한 학자 안찬일 박사는 소련의 영향으로 정치군관의 역할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6.25때 중공군의 영향으로 강해진 것으로 본다. 휴전 이후에도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 아무리 가방끈이 짧아도, 군대는 일단 전투를 위한 집단이라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부대 최선임자는 행정군관으로 임명한다. 북한에서는 정치장교라는 말 대신 '정치일군'이라는 단어를 쓰며, 6.25 전쟁 당시에는 '문화부지휘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24]

그러나 군사정치위원(홍군의 정치장교)의 가치를 매우 높게 치는 중국 홍군의 체제 영향도 있어서 정치장교의 권한이 독소전 이전의 소련군 만큼이나 강력하다. 거기에다 행정군관과 정치군관을 사찰하는 보위사령부도 있는데 북한군 포병소위 출신 강리환의 말에 의하면 정치군관이 가장 쎄고 보위국이 조금 약하거나 비슷하고 행정군관은 제일 약하다고 본다. 이는 총참모부 출신 임영선도 마찬가지로 동의한다. 현재에 북한군 정치군관 출신이 몇명이 탈북하여 정착했는데 역시 이들의 설명도 비슷하다. 정치군관의 통제 매우 강력하여 군단 정치위원회 소속 중좌가 군단장에게 직접 김일성 김정일 교시를 들먹이며 경고하는게 가능할 정도라고. 전직 총정치국 중좌 출신 심주일씨는 자신이 군단 당위원회 조직국에 있었을때 이야기를 드는데,원래 규정은 행정군관은 군단장이건 뭐고 간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부대 밖을 나갈때에는 당위원회에 보고해야 하는데 이는 군단장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임무로 평양에 가든 상관없다. 한번은 군단장이 별 말 하지 않고 술을 마시러 나갔는데 다음날 정치군관이던 심주일 정치중좌가 "위대하신 수령님 김일성 대원수님 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시었습니다. '군관이 보고 하지 않고 부대를 나가면 미국의 중앙정보기관과 만날 수도 있다.'고 하시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군단장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고 심주일은 마음이 약해져 이번은 보고 안할테니 조심하라고 경고만 했는데 다음날부터 어디 갈일 없냐고 하면서 매일 군단장 벤츠를 보내더라고... 그의 말로는 정치군관이 물론 한번 부정적인 보고를 한다고 해서 군단장이 짤리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같은 보고가 서너번 정도 이어지면 정기 인사 때 조용히 사라질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한국전 당시 노획문서를 연구한 박명림의 서술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정치장교의 전사율이 높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입으로만 전쟁하는 사람들이라서 전사율이 높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김일성 생전에 아직 김정일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 전, 당시 김정일의 측근으로 있던 인민군 총참모장 오극렬이 "정치장교 체계 탓에 기동성이 너무 낙후돼서,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는 게 좋겠다."라는 내용의 건의를 김정일에게 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리고 김일성에게 최종 허가를 받기 위해 서류를 보냈는데... 김일성이 "이딴 계획을 허가한 게 누구냐!?"하고 대노하여 결국 김정일에게 직접 찾아가 "너 정치장교들이 없어지면 군대가 누구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고[25] 핵심을 꿰뚫은 이 짧은 가르침(?)에 김정일도 크게 배워 오극렬은 일시적으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당했으나, 몇 년 뒤 다시 복귀해 핵심 요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등을 보면 얘들도 별로 믿을 만한 놈들은 아닌 거 같다. 이때는 오히려 정치위원과 보위부원이 쿠데타를 계획했으며, 이들이 군단장을 설득해서 쿠데타 참여에 끌어들이는데 실패하자 그를 암살했다.(!) 이거 정 반대 아닌가? 다만 6군단 반란사건이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이었나에 대해서는 최근에는 부정하는 견해가 많기 때문에 정치장교가 무용하다는 논거로는 적절치 않다.

2012년, 조선인민군에서는 작전장교 출신 리영호와 정치장교인 총정치국 국장 최룡해의 파워게임 끝에 리영호는 실각하고 최룡해가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총참모장 인민무력부장도 사실상 자기 사람으로 앉히고 계급도 차수가 아닌 대장에 머무르게 하여 신군부 트로이카를 이루며 정치장교 전성시대를 열고 있다. 실제 예로 2013년 12월 16일에 있었던 조선인민군 맹세모임에서 최룡해 혼자서 충성연설을 담당했다. 2014년 5월 최룡해가 해임된 후에도 후임 황병서가 최룡해와 같은 조선인민군 차수 계급을 받으면서 총정치국장이 대장인 총참모장이나 인민무력부장보다 계급이 더 높은 구도는 유지되고 있다. 황병서가 해임된 후 취임한 김정각도 원래부터 차수였다. 그러나 2018년 5월 취임한 김수길은 차수가 아닌 대장 계급이어서 북한군 내 권력구도에 다시 순수 제복군인 출신의 힘이 커진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있다.[26] 그리고 2021년 1월 상장 계급의 권영진이 신임 총정치국장으로 임명되어 정치장교들의 힘이 확실히 빠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바로 차수로 진급되었고 이후 7월에 원수 둘이 강등되면서 다시 사실상 1위를 차지한 듯 하다.[27]

북한 인민군에서 정치장교들은 일반 장교들과 따로 훈련한다고 한다. 훈련 중에 생길 수 있는 일반 장교와 정치장교 사이의 친목이나 전우애가 나중에 정치장교가 일반 장교를 감시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인민군 병사들은 일반 장교가 아닌 정치장교들에게 더 잘보이려고 노력하는데 그 이유가 정치장교는 조선로동당 입당추천서를 작성해주기 때문이다. 돈주 집안이라면 정치장교에게 거액의 뇌물까지 줘가면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들을 출세시키게 만드려고 애를 쓴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가 유튜브 실방 중 얘기한 바에 따르면, 북한에서 정치군관은 그렇게까지 인기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권한이 크지는 않은데, 윗선에선 정치군관이 모범을 보이고 감시 철저히 하라고 쪼아대서 피곤한 데다, 다른 군인들처럼 돈될만한 부업도 하기 힘든 위치라 생각보단 별로라고 한다. 그나마 뇌물 좀 받아먹는 것도 적발되면 다른 군관보다 더 심하게 처벌되어 맘놓고 받을 수도 없어, 정치군관의 인기는 더더욱 떨어지고 있다.


7. 유사한 사례[편집]



7.1. 프랑스[편집]


흔히 주목되지 않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의 파견의원 제도는 놀라울 정도로 정치장교 제도와 유사하다. 사실, 커미사르의 원조는 이 파견의원이라고 볼 수 있다. 커미사르를 정치위원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

목적 면에서 정치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높히는 한편 군부 엘리트가 주도하는 쿠데타를 방지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명목상으로는 제한된 권한만 가졌으나 실제로는 월권에 가까운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도 일치한다. 물론 단점도 거의 비슷했다.


7.2. 독일[편집]


전쟁초기 독일은 소련만큼 강한 권한의 정치장교를 운영하진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나치당은 독일국민의 투표로 정권을 잡았으며 정권 자체도 국방군 장교단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귀족들과 SA 돌격대를 숙청하는 등의 일연의 정치적 타협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히틀러는 장교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당 차원에서 현역 장교들을 대상으로 나치당 이념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프로이센 전통상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충성 맹세선언을 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더해 야전 장교들의 수행 장교나 선전 장교로 나치당원 출신 장교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히틀러도 패전이 계속되자 병사들 사이에서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며 스탈린의 정치장교 제도와 비슷한 국가사회주의 지휘 장교단을 신설한다. 이들은 나치당의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붉은 군대의 정치 장교가 소련 병사에게 공산주의 철학을 주입하듯이 독일 병사들에게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 목표였다. 다만 이들 대다수가 원래 참모장교 지원을 했다가 거부 당한 집단이란 것을 숨기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도는 좌절된다. 그 다음으로 국가사회주의 지휘 참모부를 설치해 결국 신입 장교 선발 및 훈련에 나치당이 전면적으로 참여하는데 성공한다. 이 '총통의 구세군'은 점차 독일군 장교에게 전문 군사기술 보다 이념적 충성심이 중시되는 경향의 상징으로 일반적인 공보정훈장교보다 정치장교에 가깝다.[28] 그리고 헝가리에서 소련군에 참패를 당하자 분노하여 사형집행분견대를 두어 탈영병이나 전선 이탈자를 재판없이 즉결처형 가능하도록 만들려 했다.


7.3.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의 정훈장교와 그 휘하 정훈병은 항목 맨 위의 "사상과 정훈및 국가안보/부대보안교육을 담당하는 병과"라는 점과 프로파간다 제작에 가장 앞장선다는 점,[29] 가혹행위 방지 등이 비슷하다.[30] 실질적으로 정치장교와 비슷한 기관을 뽑자면 구 국군기무사령부가 있다. 야전부대의 장교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감시하는 대통령의 수족 노릇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쪽이 실질적으로 정치장교와 가장 비슷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으로 친위 쿠데타를 모의한 것이 발각되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재편되었다. 2022년 11월 1일 국군방첩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조선은 동시기 중국과 달리 내시의 권력이 철저히 통제되었으므로 정치장교와 유사한 직위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선조(조선)가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고 고문한 것이 정치장교와 유사하다.

7.4. 중화민국(대만)[편집]


중화민국도 정치장교 제도를 운영한 바 있다. 이는 손문이 소련과 연합하면서 황포군관학교를 개설했을 때, 소련 적군의 제도를 들여온 것으로 혁명파가 군벌세력과의 내전을 거치면서 사병들의 정치의식 지도를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 따라서 중화민국 군대의 정치장교들은 중국국민당의 이념을 토대로 장교와 사병들의 정치의식을 지도(라고 쓰고 감시라고 이해하자)하였으며, 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고 1990년대 대만이 민주화될 때까지 계속 운용되었다. 대만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타국 군대의 정훈업무로 축소되면서 정치장교 제도를 운용하던 군 정치부는 해체되었다.


7.5. 전근대 중국[편집]


공산국가식 총정치국의 원형이라고 할 수있는 감군을 운영했다. 사실 이념을 떠나면 정치장교의 원조는 다름아닌 중국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영토가 워낙 넓어서 군현제를 도입하고도 지방행정에 빈틈이 많아서 민간의 사적인 무력 보유를 완전히 막을 수가 없었다. 사실 무협지에 나오는 무림 혈투의 유구한 역사적 근거인 계투는 중국 공산당도 막지 못하고 있을 정도. 그리고 장군들과 전방 관군들 사이의 꽌시와 반란기도의 위험은 항상 불거지는 문제였고, 군대가 역성혁명을 주도한 사례가 많아 황제가 군대를 신뢰하기가 극히 어려운 시스템이어서 황제가 그나마 운명공동체라고 할만한 태감 환관들에게 감찰권한을 주어 장군들을 통제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감군이다.

물론 감군들은 군사와 전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므로 시대를 앞서 초창기 정치장교 제도의 폐단을 그대로 족족 보여주었으며 전쟁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황명의 수행을 빙자해 정상적인 작전을 방해하니 도움이 될리가 없다. 특히 전시상황에서 안그래도 힘든 전황을 더 악화시켜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가 하면 오히려 잘싸운 장수들을 모함하여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감군에게 모함당하면 유능한 장수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낮았으므로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처신을 매우 지혜롭게 한 곽자의 정도고 보통은 고선지처럼 억울하게 처형당하기 일쑤라 오히려 복고회은처럼 목숨을 건지려고 반란을 일으켜버리기도 하였다.

감군 중에서 명나라 초기의 환관 왕진은 중앙군 전력을 모조리 말아먹고 장군들 전원을 전사시키며 황제를 이민족에게 포로로 잡히게 하는 대삽질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제를 수행한 병부상서까지 전사하는 바람에 빡친 근위대 장군 번충에게 철퇴를 맞아 죽었다.

7.6. 일본 센고쿠 시대[편집]


군메츠케라고 하는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부대에 파견되어서 군대를 감시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닌자의 침투를 감시했으며 주군에게 전투결과를 보고하여 장수의 보고가 얼마나 과장 축소됐는지 살피는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시기 이 메츠케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시다 미츠나리인데 이사람은 너무 철저하게 감시하고 애누리가 없어서 같은 토요토미 가신단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한편 이 제도는 에도시기에 평화가 찾아오자 각번을 감시하는 일종의 비밀경찰제도가 되었다.


8. 뒷이야기[편집]


통념상으로는 '공산주의 사상에 충실한 당에만 충성하는 꼴통'이라는 인식이 붙었고, 실제로 해먹은걸 보면 뭐 틀린 말도 아니지만... 놀랍게도 1980년대 들어 소련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불 때, 소련군 내의 개혁과 개방을 주도한 것은 정치장교들이라는 연구도 있다. 사실 개혁과 개방에 있어서는 교육을 잘 받고 선진적 문물과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위치의 이른바 엘리트라 불리는 집단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볼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시각이다. 현실에서 월드 인 컨플릭트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겪지 않고 냉전의 종식을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브레즈네프도 군비강화를 했지만 평화를 열망했고 노력했는데 이 또한 그가 정치장교 출신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9. 미디어[편집]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시리즈: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의 모드 이스턴 프론트에서도 징집병들의 보조로 등장한다. 2.2.1.0 버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지휘범위에 있는 징집병 또는 형벌부대의 방어력을 올려주고 진급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2.3.0.0 버전부터는 선전전 교리에서 스킬로 등장하며 뮤니션 50을 소모하여 징집병 분대에 PPS-43을 든 정치장교를 한명 붙여 중단거리 화력이 우수한 형벌부대로 변경시킨다. 컴퍼니 오브 히어로즈 2에선 'NKVD 교란부대 전술 지휘관'만 사용할 수 있는 유닛이다. 소련이 주인공이면서 극렬한 소련까로 유명했던 싱글플레이 때문에 DoW의 커미사르처럼 아군을 팀킬함으로서 주변 유닛들에게 버프를 주는 막장 유닛이 나오지 않을까 사람들이 걱정을 했지만, 다행이도 그런 엽기적인 요소가 없는 정상적인 버프기 유닛으로 등장한다. 20초간 방어능력을 크게 키워주는 '전선을 사수하라!' 스킬과 20초동안 공격능력을 크게 키워주는 '누구도 물러서지 마라!' 스킬 모두 추가자원없이 무료로 사용 가능한 스킬이며, 45탄약을 사용해 선전물 삐라를 뿌릴 수 있다. 선전물 삐라를 받은 적 유닛은 제압에 걸려 공격능력을 한동안 상실하거나, 아예 적 본진을 항해 유닛이 스스로 도망을 가도록 할 수 있는 강력한 CC기 스킬이다.

Warhammer 40,000커미사르는 이름부터 정치장교가 모티브이다. 워해머의 커미사르는 그야말로 초엘리트들이다. 스콜라 프로제니움이라는 사관학교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드맨보다 전투력이 뛰어나다. 스페이스 마린 채플린군종장교이면서 정치장교인 병과다.

물론 처형권 같은 게 있긴 하지만 너무 남발하면 사기 문제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고, 출신부터가 엄선한 사관생도 중에서도 엄선된 인재에, 최정예 장교임에도 말단 병사들과 함께 뒹구는 솔선수범의 견본이라서 병사들이 매우 신뢰한다고 한다고 제국에선 주장한다. 뭐 사실 이것도 세바스찬 야릭같은 영웅급 커미사르나 그렇고 어설프게 장교행세 하려들거나 권위만 내세우면 "어이쿠, 잘못 쐈네요, 죄송합니다."를 당할 공산이 크다고. 가장 위대한 커미사르로 손꼽히는 카야파스 케인 왈 : "카리스마 있는 커미사르가 존경받을 확률은 오크 발레리나를 볼 수 있는 수준." 그의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열정적인 많은 커미사르가 아군의 불행한 '오발 사격'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정말로 가드맨들에게 신뢰받은 커미사르도 있다.

김민수 작가의 끝나지 않은 전쟁 시리즈 중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인민군 시점에서 전개되는 장백산 10호에서는 정치지도원의 묘사가 그야말로 처량하다. 사실상 전시에 돌입한 시점에서 집결지인 동굴에 책상 갖다놓거나 전투화도 신지 않고 돌아다니고 보총도 안들고 다니다 정찰대대장에게 사정없이 깨지며 정찰대원들 사이에서도 뒷담화로 허구헌 날 까인다. 능력 있는 정치장교가 없는 건 아닌데 과거 시점인데다 심지어 훈련 중 사고로 앉은뱅이가 되어버려 의병제대했다고. 그나마 이 인물은 부대원들이 고향 가서 장사라도 하라고 돈이라도 걷어 줬을만큼 인심을 산 편.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소련군 이야기를 다루는 쪽에서는 어김없이 나온다. 1에서는 첫 미션에서 총알만 받은 주인공에게 더더욱 충격을 주는 요소. 뭔가 버그인가 싶어 총을 받으러 다시 되돌아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지정된 루트에서 벗어나 숨으려 하면 "이 겁쟁이놈!"이란 말과 함께 주인공을 원샷킬한다. 물론 MG42에 닥돌해도 죽을 뿐이고 게임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주인공의 선배역을 자청한 저격수에게 고의적 팀킬로 죽는다. 2에서는 주인공에게 가 보라고 해놓고 뒤에서 문 잠가버린다.

하지만 이후 트레이아크가 만든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적들의 땅, 적들의 피' 미션부터 마르코프라는 정치장교가 걸걸한 목소리로 선전을 하며 등장하며 전차 미션인 '피와 강철'에서도, '철의 포위망' 임무 시작시에도 일반 사병들과 같은 기차칸에 타서 작전을 설명해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중후반부 병원 장악 때는 파파샤를 들고 매우 좁은 실내인데도 적극적으로 돌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철의 포위망 미션 최후반부에 이 정치장교가 독일 시내에서 정말 기가막힌 선전방송까지 하며, 우라돌격을 할 때도 잘 살아남고 이끌어간다. 심지어 이 장교... '제국의 심장' 임무 시작 때 침수된 지하철에서 빠져나오고도 살아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31] 참고로 빅토르 레즈노프는 정치장교가 아니라 중사다.

월드 인 컨플릭트에선 보기 드문 개념인 정치장교 발레리 레베디예프가 등장한다.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극초반부터 인민군 소좌 역을 맡은 차승원에게 찌질대는 정치장교가 나온다. 후반부 포항여중 전투 씬에서 국군 대위 역의 김승우바주카전차를 박살내자 남부 권총을 꺼내들고 반역자 운운 하면서 그를 위협하는데, 그러자 그는 PPSh-41로 기어이 정치장교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32]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에서는 새 타이푼급 잠수함붉은 10월호의 정치장교가 함장인 마르코 라미우스 대좌 옆에서 깐죽대다가 죽었다. 영화판에서는 원작만큼 깐죽거리지도 못하고 라미우스(숀 코너리)에게 죽었다. 그때 다른 장교들 반응은 "그 돼지는 죽어도 싼거임."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충공깽인건 이 정치장교의 이름이 푸틴이다. 원작에선 중령, 영화에선 상위 계급으로 나온다.

붉은 10월과 마찬가지로 잠수함 영화이지만, 실화였던 K-19에서도 정치장교가 나온다. K-19에서 원자로 사고가 나서 위기에 몰리자, 정치장교는 미국의 도움을 청하기를 거부하는 함장 보스토리코프 대령(해리슨 포드)의 지휘권을 박탈한다. 정치장교는 권총으로 보스토리코프를 위협하며 "당의 이름으로 귀관의 지휘권을 박탈한다"고 통고하는데, 정치장교의 주된 설치 목적이 잘 묘사된 장면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함장은 오히려 핵잠수함의 비밀이 서방국가에 넘어갈까봐 미국에 지원요청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더 투철한 국가관을 가져야 할 정치장교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미국에 도움을 청하려고 한다. 그러나 부장 플레닌 중령(리암 니슨)이 정치장교로부터 함장의 권한을 넘겨받자마자, 예상과 달리 보스토리코프의 편을 들고 정치장교를 감금하여 보스토리코프의 지휘권은 다시 회복된다. 마지막에 지원하러 온 아군 잠수함에 정치장교 일당을 인계할 때, 정치장교가 왜 자기 편을 들어 준 나를 구금했냐 묻자 플레닌은 "나는 지위는 잃었지만 자존심은 버리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들은 둘 다 버렸지."라고 답한다. 해당 내용은 영화의 창작으로, 실제 사건 당시 K-19의 정치장교는 잠수함을 가까운 섬에 좌초시키고 구조대가 올 때 까지 승조원들을 섬에 대피시키자고 제안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주된 배경이 되는 1941~1942년은 정치장교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정치장교의 행보를 잘 볼 수 있다. 작중 정치장교인 다닐로프(조지프 파인스)는 마치 공보정훈장교 정도의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그것은 그의 계급이 낮아서 지휘관에게 간섭할 수 없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사기고양을 위해 유인물을 뿌리고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주드 로)를 발굴, 선전하여 특진하게 된 이후의 그의 계급이 바로 정치지도원(политрук, 상위급)이며, 보통 지휘관급 정치장교들은 전부 부대편제(대대, 연대, 여단 등) + 위원(комиссар)이라는 명칭이 곧 계급명이다. 하급 정치장교들은 정치부에 소속되어 실제로 선전, 사기고양 등의 공보정훈장교와 비슷한 업무를 보거나 전선에 나가서 선봉돌격 같은 몸으로 뛰는 일을 많이 했다. 다닐로프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연적인 자이체프를 상부에 나쁘게 보고하기도 하는데,[33] 장교나 병사의 불온한 동향의 보고는 정치장교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였다. 당시 고위급 정치장교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고 싶다면 간단히 작중 등장하는 니키타 흐루쇼프(밥 호스킨스)를 보면 된다. 등장하자마자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마브러브 얼터너티브의 번외편중 하나인 1983년 동독을 배경으로 한 슈발체스마켄에서도 정치장교가 등장하는데 그레텔 예케른이라는 안경잡이 여성장교가 있다. 작중에서 전술기 조종 실력은 가장 형편없는 주제에 자기보다 계급도 높고 전술기 조종실력도 초일류이며 중대장이기도한 아이리스디나 베른하르트에게 위엄쩔게도 큰소리를 뻑뻑 치기도 하고 이 작품의 메인 남녀주인공인 테오도어 에벨바흐 & 카티아 발트하임에게 말라죽을 정도로 갈굼을 선사하기도 한다. 상부의 명령이라고는 해도 지대 밉상일 만하다. 하지만 해왕성 작전 이후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아이리스디나의 편을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일부러 베를린에 남아 666중대의 정치적 백업을 자처하는 등 오히려 아이리스디나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도 정치장교가 잠깐 등장한다. 여기서는 작중 후반 소련 해군 순양함의 함교에서 등장한다. 사령관이 그를 부를 때 '정치부관[34] 동지(Товарищ замполит)'로 호칭하는데, 이 정치부관이 1943년 이후 정치장교의 권한 축소 이후 붙여진 명칭이다. 미합중국 해군과의 대립에서 함대사령관이 주저하자 명령이 내려왔는데 왜 가만히 있냐면서 전투배치를 종용하는 역할이다. 이에 대해 사령관은 '나는 이미 전쟁을 겪어 봤소. 또다시 그걸 겪고 싶지 않소.'라고 말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이 정치장교가 찰스에게 세뇌당해서 미사일로 소련군 수송선을 날려버리는 일을 저지른다. 이를 본 사령관은 차라리 이렇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동지는 방금 3차 세계대전을 막았소. (다른 수병들에게) 이자를 끌어내.'라고 말한다. 영화 진행만 놓고 보면 의외로 큰일 한 인물이다.

DUST에선 지휘 분대 및 분대에 추가하여 아군을 보조할 수 있다. 일반 병사들이 쓰는 무기를 사용하면서 같이 싸운다는 것이 원래 대다수의 정치장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도 정치장교 비슷한 설정이 있긴 했는데, 이걸 본격적으로 써먹은 건 한참 후인 기동전사 건담 MS IGLOO 시리즈에서의 모니크 캐딜락 특무대위. 기렌 자비 직속의 총수부 소속이었다가 제603기술시험대에 관리/감시 자격으로 파견되었는데, 2계급 위의 권한을 가지고 있어 실질적으로 작중에서 중좌 대우를 받는 것으로 나온다. 다만 상당한 유리멘탈인데다 배치된 제603기술시험대가 제식 경쟁에서 탈락한 병기를 땜빵으로 쓰고 버리는 개차반 취급을 받는 부대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트 특권의식이 곧바로 박살나서 일반적인 정치장교 캐릭터들과 좀 다른 길을 걷는다. 모빌슈트 조종 실력이 뛰어나서 그걸로 직접 전선에 뛰어들어 작중 상당량의 비중을 챙기는 것도 차이점.

스타크래프트알다리스는 직함만 안 달았을 뿐이지 오리지널 시절 그의 행보는 정치장교에 가깝다.

PSYCHO-PASS에서는 잠재범인 집행관을 감시하고 수사 지휘를 하고 집행관들과 같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정치장교와 유사한 감시관이 있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10. 정치장교를 지냈던 인물들[편집]





  • 마오쩌둥: 명목상 초기 홍군의 총사령관은 주더였고, 마오쩌둥은 주더의 정치장교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홍군은 마오가 총지휘했고, 주더는 실무적, 전술적 지휘만을 맡았다. 당시 마오쩌둥은 "당이 군을 지도한다"는 원칙을 만들어냈고, 이는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Александр Щербаков): 일명 '파오후 정치장교' 짤방으로 유명한 인물. 본래 공산당의 문화-선전 분야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엔 모스크바의 산업 시설을 점검하고 피난 계획을 세우는 등 본연의 역할에 힘쓴 인물이다. 당 내외에서도 신임을 많이 받은 인물로, 증언 중에는 '스탈린은 셰르바코프가 올린 안건은 읽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승인했다.'라는 말까지 있다. 그 의심병으로 유명한 스탈린이 말이다! 독소전쟁 종전 직후인 1945년 5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35]러시아 위키백과 경력만 보면 몇년 후 흐루쇼프가 4년 역임했던 모스크바 지역당서기와 4년 역임했던 시당서기를 38년부터 45년까지 7년이나 겸임하였으며,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함께 전후세대를 이끌어갈 중핵이나 다름없는 인사였다. 이후 셰르바코프가 사망한 뒤 스탈린은 '의사들의 음모'라며 소련의 의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셰르바코프가 의사들에게 살해당했다고 날조한다.

  • 황병서를 비롯한 역대 북한군 총정치국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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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2년 7월 12일 보로실로보그라드 부근에서 TT-33를 들고 독전하는 소련군 제4보병사단 제220연대 하급 정치지도원 알렉세이 예료멘코[2]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는 예료멘코의 계급을 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로 표기하고 있다. 대대 정치장교(Батальонный комиссар)는 소령(Майор)급 정치장교로 중위(Лейтенант)급인 Младший политрук보다는 훨씬 높은 계급이다.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의 예레멘코러시아어 위키백과의 1935~1942년의 정치장교 계급 문서 참고.[3] 선전용 사진이 아니라 진짜 전투 도중에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의 인물인 예료멘코도 용감하게 싸우다가 저 사진을 찍은 지 겨우 몇 분만에 전사했다.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인 막스 알페르트(Макс Владимирович Альперт, 1899~1980)가 사진 제목을 그냥 대대장으로 표기하는 바람에 이 사진은 오랫동안 대대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 사진은 또한 TT-33을 사용하는 장교의 모습으로 쓰이고 있다. 재현 영상은 워패스(게임) 의 광고인데 고증은 엉망진창이지만 유일한 고증이 이 장면. [4] 1980년 소련 해군에서 수병들에게 당정치사업을 하는 모습.[5] 전부 다는 아니다. 소련군도 처음에는 소련 공산당의 당군으로 출발했다가 이후 소련의 국군으로 승격된 것처럼.[6] 보통 중사나 상사 이상 8-10년정도 복무자는 당원내지 후보 당원이다.[7]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할 때 레닌은 체포를 피해서 외국으로 도망간 상태였다. 이후 제정이 붕괴된 사실을 듣고 나서 러시아로 돌아갈 때 독일의 협조를 받았는데, 당시 러시아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독일과 계속해서 전쟁을 지속하고자 하였기에 독일로서는 전력분산으로 소모가 많아지고, 사방이 적으로 둘러쌓이면서 많은 압박을 받았기에 전황이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이러한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주장한 레닌은 독일로서는 거의 유일한 구원줄이었다. 실제로도 10월 혁명 이후 레닌이 정권을 잡으면서 곧바로 독일과 휴전에 들어갔는데, 당시 러시아 내에서 백군들이 들고 일어나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광대한 영역을 독일이 점유 중이었기에 레닌은 발트 해 연안 지역과 폴란드, 우크라이나 등 서부의 광할한 지역을 독일에 넘기면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는 사실상 독일에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닌으로서도 할 말은 있는 게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의 전체적인 상황이 나빴음에도 황제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막대한 전력을 소모했으며, 임시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로 타도된 제정의 잘못된 것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였기에 어쩔 수 없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독일의 상황 역시 좋지 못한 상황에서 독일군이 공격하지도 않은 지역까지 넘겨주었는데, 특히나 우크라이나 평야는 러시아의 생명줄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식량 생산지였음에도 넘겨주었다. 물론 동등한 위치에서 진행된 휴전협정이 아니었음은 감안해야 한다.[8]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로 징병한 러시아 제국 장교들의 가족을 인질로서 '특별 관리'하다가 해당 장교가 탈영이나 반역 행위를 할 경우 그 가족들을 수용소로 보내거나 총살하도록 조치했다.[9] 붉은 군대는 내무인민위원부가 아니라 국방인민위원부 관할이기 때문에 상급부서가 다르다.[10] 물론 징병제의 특성상 병들 중에서도 총 한번 안쏘고 살아온 사람도 많긴 했다. 그래도 병들 중에는 실제로 사냥꾼 출신(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사냥꾼 출신) 같이 총 쏘는 법 정도는 알고 있던 사람도 많았는데 정치장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전무했다. 그리고 병이 빌빌대는 것과 장교가 빌빌대는 것을 비교하면 후자가 더 군대에 주는 악영향이 크다.[11] 아프리카 독재자들처럼 쿠데타를 일으킨 장교들이 좌익 성향인 경우는 앞뒤가 바뀐 경우이기 때문에 제외한다.[12] 다른 예외는 동독 말기, 쫓겨난 호네커가 에곤 크렌츠 내각을 인정하지 않고 쿠데타를 벌이려 했던 것, 소련의 8월 쿠데타 뿐이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군부 스스로가 아니라 정치지도자들이 꾸민 친위 쿠데타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부 쿠데타와는 다르며, 동독의 경우 시도조차 못하고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뒤는 다 아는 대로 에곤 크렌츠 내각도 물러나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소련도 시민들의 저항에 군부가 돌아서면서 소련이 붕괴되었다.[13] 북한에서도 1980년대 후반 총참모장 오극렬에게 설득된 김정일이 정치장교 제도의 개편을 김일성에게 이야기했다가 박살나고, 오히려 오극렬이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4] 제정 시절에는 돈 많은 귀족 자제들만 교육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정책은 그야말로 전무했다. 그래서 소련은 1922년부터 1937년까지 전국적인 문맹퇴치 캠페인을 벌여 30년대까지 대부분의 인민을 문해자로 만들었다. 50년대에 이르면 소련의 문해율은 거의 100%에 달하게 된다.[15] 본래 소대장, 중대장 등 소부대 지휘를 맡은 초급 장교들의 사상율은 오히려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높다. 정치장교처럼 부하들을 이끌고 진두에 서서 지휘해야 하기 때문이다.[16]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사실상 유일한 정당이기에 공산당에 입당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대우가 좋아졌다.[17] 1950년대쯤만 되어도 소련군에서 복무하는 이들은 일부 영관급 장교 및 장성/제독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 태어났으며, 아예 소련 수립(1922년 12월 30일) 이후에 태어나서 러시아 혁명은 국사 시간에 교과서로만 접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18] 이런 zampolite가 현지에서 민간인을 돕는 자국 장병들을 상대로 총격을 가했다는 기사가 있다. 개중 일부가 우크라이나 군에 포로가 되었고 현지 우크라이나인의 증언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교차검증이 된다고 한다.[19] 중국에서는 '당이 총을 지휘한다'고 한다.[20] 쉬스유가 바로 성격 때문에 정치장교 보직을 맡은 경력이 없어서 진급이 안됐다고 한다.[21] 과거에는 정치장교만을 교육하는 인민해방군정치대학이 별도로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정치장교도 동일하게 인민해방군국방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22] 따라서 중대장을 해본 정치장교는 존재할 수 있지만, 대대장을 해본 정치장교는 존재할 수 없다. 단 여기도 장군들 밥그릇 때문에 간혹 일반장교 출신 장군들이 기행부대에 정치위원으로 가는 경우가 있는 듯하다.[23] 싸움을 벌이긴 했지만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은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친구였던 정치지도원이 사망하자 이성을 잃은 중대장은 국민당군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라 명령하고 전범 행위에 대한 문책을 받아 영창에 갇히게 된다.[24] 이때의 '문화부'라는 명칭은 '정치문화부'의 준말인데, 당시 북한군 체계에 영향을 준 소련군의 체계에서는 정치국이 수행하는 기능이 조선말 번역으로 ‘문화’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25] 실제로는 "너놈이 그러는 순간, 너놈 머리 위에 총폭탄이 날아오는거다!"였다는 설도 있을 정도로 거친 분위기였다고 한다.[26] 김정일 시기에 이미 조명록이 총정치국장을 하면서 국방위 제1부위원장라는 명실상부한 북한 2인자 위치에 있었다. 현재도 북한군 서열 1위는 총정치국장인 것으로 보이기에 비대해진 군조직에 대한 전체적인 권력빼기의 일환이지 제복군인 우대는 아니다(처음부터 이러했던 것은 아니고, 김일성시기에는 군 서열1위가 인민무력부장이었다). 다만 2020년 10월 기준 이는 모를 일인게 김수길은 대장인데 비해 총참모장 박정천은 인민군 원수다.[27] 사실상이라고 붙이는 이유는 김정은을 제외한 명목상 서열 1위인 리명수 최고사령부 제1부사령관. 실질적 서열 1위인 리병철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있기 때문이다.[28] 제프리 메가기,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422~424쪽. 정작 소련군은 이때 문민통제가 적정 수준 확립됐다고 보고 정치장교가 전술전략에서 배제되고 전문장교의 지휘가 확대되었다.[29] 대대 및 그 이상급 훈련시나 정훈교육 시마다 정훈장교와 정훈병이 카메라 등의 촬영도구, 휴대용 마이크와 스피커 같은 것들을 최소 하나는 들고 대대원 맨앞, 맨뒤나 대대/연대/여단/사단/군단장 등 지휘관들이나 국방부장관 등 높으신 분들 근처에 무조건 있다는건 군대를 갔다온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30] 다만 한국군의 경우 소련과는 다르게 교육만 한다. 감시하는 것은 중/소대 간부들과 병사들 몫, 잡는건 군사경찰들 몫이다.[31] 물론 철의 포위망 임무 중간에 사라지기에 병원이나 다른 장소에 남아 있다가 지하철 앞으로 와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32] 이때 차승원의 대사가 "어이 동무~, 사람은 헷바닥(혓바닥)때문에 죽는다 하지 않았네?" 라는 말을 남긴다. 여담으로 그 이전에도 깐족거리던 정치장교에게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헷바닥(혓바닥)때문에 죽는다 하였소."' 라는 섬뜩한 경고를 날렸던 바가 있었다.[33] 원래는 계급을 떠나 절친한 사이였다. 후반부엔 우정을 되찾고 바실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34] 혹은 정치대리. 번역에 따라 조금 다를 수 있다.[35] 생전에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셔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