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화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Idolization[1] / Cult of personality[2]

국부영웅주의에 심취해 종교적인 행위로 '신처럼 사람과 사물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상숭배라고도 하는데 우상숭배는 '숭배', 즉 '무언가를 믿는 것'으로 본인이 스스로가 믿는 것에 가깝다. 반면 우상화는 그 대상을 믿게 하도록 신격화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해서 지금의 힘이 있는 종교들이 생겨났고 굳이 힘이 있는 세계적인 대종교가 아니더라도 소수종교들도 이러하다.

냉전 시기 대한민국에서는 반공 교육을 통해 북한을 예시로 들면서 공산주의 국가의 특징이 우상화라고 주장한 적도 있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3] 물론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 중에서 우상화를 한 지도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의 성향은 그 범위가 넓기 때문에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인식도 제각각이며[4] 후술하듯 반공 국가도 독재자에 대한 우상화를 자행한 경우도 많다.

독재자 우상화는 호찌민, 아타튀르크[5]처럼 국민들이 진심을 가지고 앞장서서 하는 경우도 드물게나마 있지만, 절대다수는 국민들의 의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독재자 측에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며 하는 것이기에 독재 체제가 붕괴하면 그 독재자를 우상화한 흔적들은 거의 다 파괴되는 수순을 겪게 된다.

2. 나라별 우상화[편집]



2.1. 동북아시아[편집]



2.1.1. 북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우상화/북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아예 별개의 문서로 분리되었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부자에 대한 북한의 우상화는 단순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 수준을 넘어 거의 웬만한 사이비 종교들도 거뜬히 능가하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주체사상을 문자 그대로의 종교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많다.


2.1.2. 대한민국[편집]


파일:00503517_20161201.jpg

파일:1659189633812.jpg

남한에서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 정권 시기에는 지도자 우상화가 있었는데 실제로 이 시기에는 대통령의 초상화가 가정에 걸리지는 않았어도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몇몇 학교 교실이나 직장 등에 걸리기도 했고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위대한 영도자'라는 호칭이 붙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이자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부라는 상징성과 본인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대통령들 중 가장 우상화가 심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초창기 대한민국 원대한민국 환에는 이승만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다. 원래 이승만의 초상은 화폐 중앙에 위치했으나 사람들이 화폐의 중앙 부분을 접으면서 이승만의 초상이 닳는다는 이유로 오른쪽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승만은 자신의 동상을 1956년 3월 31일 탑골공원에 세운 후 동년 8월 15일에는 남산 조선신궁 터에 그 유명한 평양의 김일성 동상보다도 큰 25m 높이의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6] 그리고 1955년 9월 16일에는 수도인 서울특별시의 이름을 바꾸겠다고 대통령 담화로 공모전을 열어 1위가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나와 수도 이름이 현직 대통령의 호가 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질 뻔했지만 최현배 등의 국어학자들은 물론, 김형민 초대 서울특별시장, 심지어 이승만 본인마저 이 호칭이 어이없다고 느껴서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그러면서도 이승만은 같은 해에 있던 본인의 80세 생일 기념 행사는 매스게임까지 곁들여 성대하게 치렀고 이후에도 이승만의 생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어 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으며 국민들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이승만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불러야 했다. 물론 이승만에게는 '세계적인 반공 지도자', '자유세계의 광명', '예수와 석가와도 같은 지도자', '세계의 위인', '현대의 성자', '민족의 태양', '인류의 등대' 같은 호칭이 붙었다. 그리고 이승만은 자신의 이름을 도로와 공원, 도서관에 붙였으며[7] 1959년 9월 15일에는 서울 뚝섬에 '우남 송덕관'을 세우고 거기에 이승만 부조와 반신상을 설치했으며 1959년 11월 18일에는 남산 정상에 '우남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기에 이르게 되었다.

박정희도 항목 내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우상화가 미약한 수준이긴 했어도 나름대로의 우상화를 시도했는데 5.16 군사정변을 '5.16 군사혁명'이라고 한 것은 물론이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5월 16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기도 했다.[8] 그러다가 박정희 사후에 남유진 구미시장이 그에 대한 우상화에만 몰두하느라 구미시의 경제가 악화되면서 많은 악평을 받았다.

전두환 시기에는 언론에 의해 땡전뉴스로 대표되는 전두환 우상화가 횡행했는데 그 일례로 전두환이 집권하기 직전인 1980년 8월 23일에는 조선일보가 그 유명한 '인간 전두환 - 육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이라는 언론 비평 역사에 길이 남을 용비어천가특집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집권 후에도 전두환에게는 '우리 대통령의 풍성한 웃음에 팔을 휘저으며 태극기를 흔드는 꼬마들은 그만 추위를 잊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가뭄에 단비를 몰고 온 대통령' 등 마치 북한을 연상시키는 오글거리는 우상화 문구가 붙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금기시하는 기독교 우파 세력이 오히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신격화의 선봉에 서 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광훈이 교주로 있는 사랑제일교회다.[9] 이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팔이를 통한 자기 세 과시 용도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에는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예컨대 진중권친문 세력의 문재인 옹호를 '문재인 우상화, NL 운동권의 전통'이라며 비꼰 적이 있다. #

2.1.3. 일본[편집]


일본 제국 시절에는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섬겼는데 이후에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숭배하는 일본인들이 많이 있다.

일본 제국 시절에는 기독교화되기 전의 로마 제국처럼 천황을 '현세에 강림한 신(아라히토가미)'으로써 신격화해 숭배했으며 이를 위한 국가신토라는 사상도 존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하여 망한 이후 쇼와 덴노인간선언을 하면서 천황에 대한 신격화가 부정되고 평범한 인간으로 취급되면서 국가신토도 폐지되었다.

현대 일본에도 극우 세력을 비롯하여 여전히 천황을 우상화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만세)를 외치기도 한다. 정작 일본 황실에서는 반기지 않지만.

그 외에도 맥아더가 일본을 점령한 직후에는 맥아더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2.1.4. 중국[편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262163_STD.jpg

초대 주석이었던 마오쩌둥은 스스로를 우상화하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이용했다.

  • 스스로를 "위대한 지도자 마오주석", "위대한 수령, 위대한 최고사령관, 위대한 스승, 위대한 조타수"라고 불렀다.
  • 마오쩌둥 찬양가들은 길거리와 기차역, 기숙사, 매점에서도 울려퍼졌다.
  • 마오쩌둥 어록과 마오쩌둥의 얼굴이 그려진 배지는 각각 12억 부/48억 개나 만들어져 모든 중국의 국민들에게 분배되었으며 당시 일반적인 중국 국민들은 마오쩌둥 어록만 읽을 수 있었다.
  • 마오쩌둥의 초상화는 20억 장 인쇄되어 관공서에서부터 개인 주택에서까지 볼 수 있었다.
  •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훼손했다가 자신의 12살짜리 딸의 고발로 목에 총을 맞고 처형된 사람도 있다.
  • 대부분의 도시와 대학 광장에 공산당 창건일인 7월 1일을 상징하는 7.1m 높이의 마오쩌둥 동상을 세웠으며 기단의 높이도 1966년 5월 1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기념하는 의미로 정확히 5.16m로 만들었다.
  • 마오쩌둥의 황동/도자기 흉상도 집집마다 배부되었다.
  •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전통 무용을 본따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춤까지 만들고 이를 '부모님이 우리와 아무리 친해도 마오쩌둥과의 관계만큼 가깝지 않다'는 등의 가사가 달린 마오쩌둥 찬양곡을 배경삼아 추기도 했다.
  • 중국에 살던 사람들 모두가 매일매일 튜닉 수트를 입고 가슴에 마오쩌둥 배지를 단 채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집에 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보고 '아침에 물어보고 저녁에 보고하며' 마오쩌둥에 대한 '충의'를 나타내야 했다.
  • 과학 논문을 포함한 모든 출판물에는 마오쩌둥 주석의 인용문을 기반으로 한 인용문이 포함되어야 했다.
  • 심지어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북한보다 먼저 마오쩌둥의 이름과 발언을 진한 고딕체로 강조해야 했다.

1968년 8월 4일에 마오쩌둥은 샤리푸딘 피르자다(Sharifuddin Pirzada, 1923~2017) 파키스탄 외무장관으로부터 당시 중국에서는 희귀한 과일이었던 망고를 바구니 40개 분량으로 선물로 받고 바로 다음날에 이를 베이징에 있는 청화대학교 마오쩌둥 선전팀 일원 3만 명에게 감사의 표시로 보내 홍위병 파벌 간의 갈등을 잠재우고자 했다. 이 망고가 공개되자 이를 본 중국인들은 눈물까지 흘려가며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위대한 수령님이 만 년을 한없이 사시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당시 중국의 망고 열풍이 어느 정도였냐면 밀랍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복제 망고와 망고를 찬양하는 포스터가 무수히 양산된 것은 당연했고 '망고를 보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 마오쩌둥을 보는 것과 같다'는 찬양 기사가 인민일보에 대놓고 실린 데다 망고 한 개를 보관하고 있던 탱크에 담긴 물을 공장 노동자들에게 주어 노동자들이 '마오의 정신으로 채워질' 수 있게 하거나 망고를 방부처리하여 제단에 모시고 그 망고에 절을 하는 일들이 있었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쓰촨성에 살던 한 치과의사는 1969년에 이 '특별한 과일'을 보고 '평범한 고구마와 같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에 회부되고 조리돌림을 당한 후 머리에 한 발의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이 망고 숭배는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당시 망고를 찬양하는 포스터

후계자인 화궈펑도 "뛰어난 지도자 화주석"이라고 스스로를 우상화하며 유치원에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고(당시 사진) 그의 집권기까지 중국 각지에는 지도자들의 동상들이 여러 개 있었으나 1981년 이후 전부 파괴되었고 1990년대부터 개혁개방의 무드로 접어들면서 점차 사라졌지만 아직 몇 군데 남아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을 찬양하는 우상화 움직임이 다시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겉으로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지만 뒤에서는 관영매체들이 간접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시진핑/비판과 논란, 시집가려면 시다다 같은 남자를 만나라 문서 참조. 보통고등학교학생모집전국통일고시 논술 문제에 시진핑 어록이 제시문으로 출제되기도 한다.


2.1.5. 대만[편집]


중화민국의 국부 쑨원, 그리고 1987년까지 대만 교과서에는 지도자이자 독재자 장제스를 찬양하는 노래 등이 난무했다. 이 두 사람을 위한 국부기념관, 중정기념당은 지금도 대만의 관광지인데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물론 이것은 국부천대 이후만이 아니라 중화민국이 건국되고 장제스가 실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1987년 대만 계엄령 해제 이후 전부 사라졌다. 다만 쑨원은 어찌 보면 현재진행형이다.


2.2. 동남아시아[편집]



2.2.1. 베트남[편집]


파일:external/cfs10.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DRLV1dAZnMxMC5ibG9nLmRhdW0ubmV0Oi9JTUFHRS8yLzI1MC5KUEcudGh1bWI=&filename=250.jpg

공산주의 지도자들 중 호찌민은 영웅으로 취급되었으며 우상화되었는데 어디서든 그를 찬양하는 내용들이 여기저기에 나돌았다. 호치민을 그저 비판하거나 지적했을 뿐인데도 '반혁명'으로 몰려서 숙청되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호찌민 사후 사이공호찌민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베트남에서 호찌민을 비판하는 건 가능하지만 사람들이 그리 썩 좋게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호치민을 북한의 독재자 일가들에 비유하면 비판을 받을 뿐이다. 호찌민에 대한 비판점도 있지만 그의 성격이 소탈했음은 물론 인민을 위해 헌신했기에 그만큼 진정 국부로서 존경받는 것이며 죽어서 화장 후 재를 3등분하여 베트남의 북·중·남부에 한 줌씩 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베트남 정부가 이를 거절한 것이다. 즉 이쪽은 자기 스스로가 우상화한 게 아니라 공산권 특유의 개인 숭배에 호치민의 존경받을 만한 성품이 조화를 이루어 우상화가 저절로 이루어진 셈.

자세한 사항은 호찌민 항목 참조.


2.2.2. 말레이시아[편집]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4308767116_dc2813f17f_z.jpg

지금의 말레이시아의 전신인 말라야 연방 시기부터 있었다.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자신의 독립운동 치적을 과장시켜 '말레이시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셨다'는 선전을 해댔으며 아예 자신의 동상까지 쿠알라룸푸르에 세웠다. 후임인 압둘 라작이 가장 악명을 떨치는데 인종차별과 폐쇄정치를 강행하고 잔인한 독재를 저지른 원흉인 주제에 스스로 '개발의 아버지', '조국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신다' 등의 허위선전을 강행했고 자신의 이름을 여기저기(예: 도로명, 지명 등) 남발했다. 대표적인 예로 반다르 툰 라작이 있다.

1976년 라작 사후 후세인 온이 집권한 후에도 '단결의 아버지'라고 신격화되는 등 개인우상화가 이루어졌으며 마하티르 1차 집권기에는 중국인과 같은 이방인이 지도자를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차츰 세월이 흐르고 바다위 시대가 접어들면서 독재의 완화가 이루어졌으나 개인우상화는 끝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나집 라작 총리는 스스로를 '변화의 아버지'라고 칭하고 새로운 신격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스스로를 '나라를 발전시키고 과거의 어둠을 씻으신다' 등으로 위장시키는 수법을 이용하고 있다. 지금은 지도자들을 비판할 수 있다는 점도 있으며 윗동네와는 달리 극단적인 세뇌를 강행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우상화의 영향으로 아직도 일부 말레이인 보수층들은 총리가 자신들의 장소에 오면 '위대한 총리님 사랑해요' 등의 피켓을 내세워 찬양을 보여주고 있다.


2.2.3. 필리핀[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st_of_Ferdinand_Marcos%2C_near_the_town_of_Baguio.jpg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자신에게 여전히 부족 사회로 본 필리핀 사회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왕이라는 이미지를 투영하려고 했고 이에 따라 마르코스는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필리핀 전역의 토착민들을 통치하는 '다투'의 이미지를 자신에 투영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 사용된 필리핀의 5페소 동전에 본인의 옆모습을 새겨넣은 것은 물론이고 마르코스는 '필리핀인 슈퍼맨' '미국에 대항한 유일한 대통령' 등으로 선전되었다.

심지어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필리핀 관광청을 동원해 벵게트 주의 산간지역에 3㎢ 넓이의 '마르코스 공원'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상단에 나온 것처럼 30m 높이의 콘크리트 흉상을 만들어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 흉상을 만들기 위해 당시까지 그 인근에 살던 이발로이족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10]


2.3. 중앙아시아서아시아[편집]



2.3.1. 투르크메니스탄[편집]


파일:external/media.washtimes.com.s3.amazonaws.com/Turkmenistan_President_Statue.JPEG-0831b.jpg

투르크메니스탄은 억압적 체제로 인해 중앙아시아의 북한으로 불리며 비판받는데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이 중앙아시아의 북한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이 우상화로, 투르크메니스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우상화가 이루어진 국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초대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는 별의별 것을 금지시켜 놓고 해괴망측한 선전을 해대며 이슬람 국가라는 특성상 우상숭배가 금기시됨에도 북한과 비견될 정도로 실소가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우상화를 일삼았다.

  • 수도에 12,000,000달러를 들여 황금 동상을 만들었는데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동상을 회전하게 하고는 니야조프를 존경하는 태양이 동상 주위를 돈다고 우겼다. 그 외에도 수도인 아시가바트에서는 50m마다 1개씩 니야조프의 동상을 세웠으며 전국 각지에는 자신의 동상을 14,000개나 세웠다.

  • 자기 어머니의 동상을 곳곳에 세우고 자기 부모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했다.[11]

  • 달과 요일 이름이 러시아적이라며 투르크메니스탄식으로 변경했는데 1월은 자기의 호칭인 '투르크멘바시'로, 4월은 자기 어머니 이름으로, 심지어 9월은 자신이 쓴 경전인 '루흐나마'가 완성된 달이라는 이유로 달 이름을 아예 '루흐나마'로 바꿨다.

  • 투르크메니스탄 국가첫 소절부터 니야조프를 찬양하는 가사가 들어갔는데 심지어 이 부분은 후렴인데도 1절보다 먼저 부르도록 했다.[12]

  •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창조 신화까지 만들어 이를 교과서에 서술했다.

  •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은 매일 아침 수업 전에 "만약 내가 위대한 사파르무라트 투르크멘바시를 배신한다면 내 심장이 멎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해야만 했다.

  • 루흐나마라는 사이비 경전을 써서 이를 국가의 주요 연구 의제로 삼고 대학교 입학 시험의 절반을 루흐나마 관련 내용으로 채웠으며 40여개국에 수출까지 한 것도 모자라 위성 캡슐에까지 루흐나마를 넣고 이를 이 책이 우주를 정복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거기다가 꾸란, 성경과 함께 3대 성서라고 자랑하면서 모스크에도 걸어 놓았으며 이에 반발한 이맘들이 근무하는 모스크를 철거하는 대응도 했다.

  • 을 가리키는 투르크멘어 단어를 금지어로 지정한 후 자기 어머니 이름인 구르반솔탄 에제(Gurbansoltan Eje)에서 따 온 '구르반솔탄'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 때문에 투르크메니스탄에서 '4월에 빵을 사다'는 '구르반솔탄에 구르반솔탄을 사다'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나타났다.

게다가 니야조프 사후에 집권한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함메도프도 우상화를 실시했는데 이 사람도 별의별 것을 금지시키면서 자신의 치적을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켰고 고국 항공사의 비행기에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으며[13] 매년 새로 공식 사진을 찍어서 전국 모든 학교의 모든 교실에 내걸었는데 이 사진들은 사실 그냥 각도만 조금씩 다르게 해서 찍은 것이었다.


2.3.2. 튀르키예[편집]


파일:external/d.haberciniz.biz/basbakan-erdogan-kasimpasa-tesislerinin-acilisini-gerceklestirdi-IHA-20130923AW000521-4-t.jpg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튀르키예의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우상화가 이루어진다. 그가 대통령이었던 1920년대에 터키 곳곳에 아타튀르크의 동상과 인명을 딴 건축물들을 여럿 지은 적이 있다. 그러나 업적도 매우 컸기 때문에 지금도 튀르키예인들에게는 국민 영웅으로 취급받고 아타튀르크 모독죄라는 형법마저 존재한다. 오죽하면 아타튀르크에 대한 우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우상화'라고까지 불릴까?

이슬람주의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정권을 잡으면서 과거보다는 아타튀르크에 대한 우상화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튀르키예인들은 아티튀르크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14] 자칫 튀르키예 현지에서 아타튀르크에 대한 비난을 했다가는 쫒겨나거나 심하면 형법에 따라 처벌받을 수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다.


2.3.3. 이라크[편집]


사담 후세인도 자신을 우상화했는데 후세인은 자신의 사진을 관공서, 사무실 건물, 학교, 교실, 공항, 상점, 버스 정류장, 카페, 다리, 거리, 집 등 모든 곳에 걸도록 강요했으며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 인사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게 했다. 물론 이라크 통화(디나르)의 모든 액면가에서는 후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후세인은 이에도 만족하지 못해 이라크 전역을 자신의 포스터, 조각상, 동상, 벽화들로 채웠다.

국제공항, 대학교, 다리, 댐, 경기장, 예술 센터, 거리, 로켓, 심지어 도시에까지 후세인의 이름이 붙었으며 학교에서는 북한마냥 그의 전기와 그가 쓴 문학 작품들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고 바트당 관계자들은 학생들이 후세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물론 후세인을 찬양하는 노래와 문학 작품들은 무수히 만들어졌으며 국영 방송의 배경에도 후세인의 이미지가 넣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던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이 2003년에 축출되자마자 후세인의 동상들을 파괴하고 사진들에 신발을 던지거나 오줌을 싸고 이들을 모조리 불태웠다. 특히 2002년에 바그다드 피르도스 광장에 세워진 12m 높이의 동상은 후세인의 축출 직후인 2003년 4월 9일에 케이블에 목이 걸려 넘어진 후 사람들에게 짓밟혀 목이 잘리고 거리로 끌려다는 굴욕을 당하게 되고 이는 후세인의 몰락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15]


2.4. 유럽[편집]



2.4.1. 소련 (멸망)[편집]


블라디미르 레닌 집권기부터 레닌의 사진과 어록들이 널리 퍼지는 등 우상화의 조짐이 보였으나[16] 소련의 본격적인 우상화가 시작된 시기는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부터다. 스탈린은 1929년에 50세 생일을 성대하게 맞이한 것을 계기로 자신을 우상화하는 것을 시작했으며 1930년대 중반부터 이를 본격화했다. 보면 북한, 마오쩌둥의 우상화와 정말 비슷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실 북한과 마오쩌둥의 우상화는 스탈린의 우상화를 철저히 모방한 후 확장한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사실상 논외인 북한의 김씨 삼부자를 제외하면 니야조프, 마시아스 응게마와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우상화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고 공산권 내부에서도 우상화 하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철저한 우상화를 시행했다. 사실상 공산권 우상화, 아니 근현대사 전세계 지도자 우상화의 시초격 인물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

스탈린의 초상화나 사진[17]은 모든 공공장소, 사무실, 몇몇 가정, 심지어 극장 스크린의 양쪽 끝마다 걸려 있었고 광장이나 문화 회관, 공장, 기차역, 운하, 거리, 공원, 도시[18], 상(賞), 산[19] 등에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으며 공공장소와 당 사무실은 물론이고 도시의 중심, 마을 광장, 도로의 종점, 기차역, 공원, 광장, 정원, 학교 부지, 병원 캠퍼스, 고등 및 중등 교육 기관을 넘어 심지어 산꼭대기와 깊은 숲속에까지 스탈린의 흉상과 동상이 배치되었다.

한 도시에 스탈린의 동상이 두세개씩 있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제3세계의 주축 격이었던 유고슬라비아김일성 우상화에 여념하던 북한 정도를 제외한 모든 공산권 국가에는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심지어 스탈린 사망 2년 후에도 러시아에 스탈린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 중 압권은 1952년 7월 27일에 볼고그라드볼가-돈 운하 입구에 세워진 57m 높이의 스탈린 동상이었는데[20] 이는 그 유명한 평양의 김일성 동상의 2배를 거뜬히 넘는 거대한 동상이었다.[21] 그리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스탈린의 동상은 1937년에 모스크바 운하 입구에 건립된 37m 높이의 동상으로[22], 이 동상을 모방한 스탈린의 동상이 거의 모든 소련의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을 정도였다고 한다.[23]

그리고 스탈린은 레닌의 적통 후계자로 간주되면서[24] '비할 데 없는 천재', '위대하고 사랑받는 스탈린', '세계 혁명을 이끄는 수장이자 명석한 이론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남자', '우리 국민과 전 세계 노동자들이 가장 사랑하고 친애하는 남자', '인류의 뛰어난 천재', '공산주의의 위대한 건축가', '인간 행복의 정원사', '전지전능한 지도자', '국가의 수호자', '선지자, 사도 및 교사', '새로운 사회주의 세계의 건설자', '진보적 인류의 지도자', '우리의 길잡이 별', '아버지, 선생님, 친구', '위대한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이자 스승', '~의 가장 친한 친구', 특히 '국가의 아버지' 등 온갖 호칭들이 붙었고 심지어 '그는 우리들의 경애하는 아버지이자 우리의 절친한 안내자요 교사이며 모든 시대, 모든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정권 속의 소련 국민들은 스탈린 정권 하에서 살 수 있었던 '행운'을 누렸다'는 아부의 극한을 보여주는 찬양도 생겨났다. 게다가 스탈린이 쓴 책들은 무려 7억 600만 부나 팔렸으며 스탈린 찬양 서적은 미취학 아동 버전과 노인 버전까지 나왔다. 물론 소련 안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 덕이었고 모든 작품은 '스탈린의 천재성' 덕분에 나온 것이었으며 과학 서적은 물론이고 요리책에까지 스탈린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다게스탄 공화국의 한 여인이 '하늘보다 높은 사상과 태양보다 빛나는 지성을 가진 지도자'라며 스탈린을 찬미하는 시를 짓는 등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와 노래, 영화들도 수두룩하게 만들어졌고 공설 잔디밭에도 스탈린의 모습을 본뜬 꽃밭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후 스탈린에 대한 우상화는 더욱 고조되어 1949년에는 공산권에서 스탈린의 생일을 축하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서명과 선물로 산을 이루었고[25] 스탈린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흉상이 중앙아시아의 38개 산봉우리에 배치되기도 했다. 게다가 스탈린은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자상한 지도자의 모습을 좋아했기에 자신의 사진을 보육원, 고아원 및 학교의 출입문 위에 걸고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주신 스탈린 동지에게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외치게 했으며 학교에서는 스탈린이 '소련 아이들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야 했다.

1936년 1월 27일에 8살이었던 부랴트인 소녀 엥겔시나 '겔리야' 마르키조바(Engelsina "Gelya" Markizova, 1928~2004)가 크렘린에서 열린 소련의 지도부와의 회의에 참석한 스탈린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주고 스탈린이 자상한 표정으로 겔리야를 품에 안은 모습을 담은 사진은 소련 전역에 수백만 장이 인쇄되어 유포된 것을 넘어 학교, 고아원, 유치원, 어린이 도서관, 모스크바 중앙 어린이 극장의 벽에 그림으로 그려지기까지 했으며 이 사진의 모습을 묘사한 대리석 조각이 공장에서 300만 점이나 생산되어 학교 운동장, 공원, 광장 및 기타 기관에 설치되었고 이들의 만남을 다룬 동화책도 10만 부나 인쇄되기도 했다. 이 사진은 ''행복한 어린 시절'의 살아있는 상징'이자 스탈린에게 '어머니처럼 팔에 아이를 안고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으로 여겨졌다. 겔리야와 스탈린의 사진[26] 사실 이 사진 외에도 스탈린은 종종 소련의 다른 민족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하거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사진을 찍고는 했다.

심지어 대숙청을 주도한 니콜라이 예조프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의 이름을 '스탈린의 선물'이라는 뜻의 '스탈리노다르'로 바꾸자고 했고 극단적인 추종자들은 소련의 역법예수가 태어난 연도가 아니라 스탈린이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했지만 스탈린도 이를 견디지 못하고 거절했다. 이렇듯 스탈린 본인은 자신의 우상화가 도가 지나치다며 불평했으나 한편으로는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눈감아 줬다.

스탈린 사후에는 격하 운동이 일어나면서 우상화가 점차 약해졌다. 니키타 흐루쇼프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기쯤 되면 일반인들은 지도자 가지고 농담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통제가 풀렸다. 그리고 소련 붕괴러시아에서는 더 자유로워져서 러시아 인터넷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대상으로 희화화도 어느 정도 한다. 방사능 홍차 밈이 있지만 사실 푸틴은 의외로 자신이 비판에 관대하다는 쿨한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러시아 일반인들이 농담이나 가벼운 비판을 하는 정도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아직 레닌 동상은 러시아 여기저기 많이 남아있긴 한데 소련 시대와는 다르게 역사의 흔적이자 러시아의 위인 중 한 명으로 보는 정도다.


2.4.2. 이탈리아 왕국 (멸망)[편집]


무솔리니는 늘 옳다(Il Duce ha sempre ragione)

무솔리니가 집권할 적에 내세운 구호.


베니토 무솔리니는 대규모 우상화를 자행한 거의 최초의 독재자라고 할 수 있으며 우상화의 질적 수준도 가히 엄청났다.

  • 지도자 자신을 신의 대리자가 아닌 신의 화신 그 자체로 보이도록 했다.
  • 로마 진군 10주년이었던 1932년 10월 28일에는 '혁명 전시관'을 열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혁명'과 관련된 전시품들을 전시하게 했는데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약 400만 명이 이 전시관을 방문했다.
  • 그의 출생지인 작은 마을 프레다피오도 '국가적인 성지'로 탈바꿈해 매일 수천 명이 '순례자'들이 이 마을을 찾게 했다.
  • 1933년부터 1943년까지 무솔리니의 우상화 선전에 쓰인 금액은 4억 1천만 리라[27]였다.
  • 당시 이탈리아의 교과서 첫 문장에는 '나는 검은 셔츠단을 설립한 위대한 두체와 그의 유일한 후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문구가 적혔고[28] 모든 학교의 벽에는 '무솔리니부터 이탈리아의 어린이들까지'라는 슬로건이 적혔으며 학생들이 사용하는 습지책의 표지에까지 무솔리니의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 무솔리니의 부모는 '성모 마리아와 요셉'으로 칭송되었고 학교, 병원, 다리, 교회 등에 그들의 이름이 붙었다.
  • 자신을 '매일 14~16시간을 일하며 새벽까지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지도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 잠든 지 한참 후에도 사무실의 불을 켜 놓기도 했다.
  • 1936년 2월에는 에티오피아 아두와 계곡에 군인들이 무솔리니의 거대한 두상을 조각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미래의 후손들에게 제국의 창건자를 보여 주기 위해' 로마의 피에트라라타 산의 바위에 150m 크기로 무솔리니의 옆모습이 조각되기도 했다.[29] #1 #2
  • 1927년부터 그레고리력이 '부르주아적'이라며 주체연호의 원조격으로 무솔리니가 총리에 취임한 1922년 10월 29일을 파시스트 달력(Era Fascista) 1일로, 1923년을 파시스트 달력 원년으로 삼기까지 했다.
  • 심지어 무솔리니는 그 북한보다도 먼저 최고지도자를 초능력자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1937년 3월에 이탈리아의 신문은 무솔리니가 에트나 산을 방문하는 동안 용암의 흐름을 막고 가뭄으로 고통받는 리비아에 비를 불러일으키는 등 기적을 행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벙어리 소년이 군중 속에서 무솔리니의 연설을 들은 후 말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기도 했다.
  • 당시 이탈리아의 초등학교는 교육 시간의 20%를 아이들이 '좋은' 파시스트가 되도록 가르치는 데 할애했으며 교사가 이에 따르지 않으면 그 교사는 즉시 해고되었다.

이러한 그의 우상화에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이 세뇌되어 무솔리니 우상화의 전성기였던 1930년대 중반에는 파시스트당의 횡포와 그로 인한 파시스트당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커질수록 도리어 '두체가 알기만 하면!'이라는 말을 하면서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를 더욱 공고히 했고 심지어 '파시스트당에 대한 불미스런 소식은 아랫사람들이 일부러 사실을 알리지 않거나 거짓 보고를 했을 뿐 무솔리니는 나무랄 데 없는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며 아예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으로 무솔리니의 사진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닌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였다.[30]

물론 1939년을 기점으로 무솔리니의 인기는 급격히 시들었고 1943년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으로 인해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 수립된 북부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연합군이 통치하게 되었고 1945년 무솔리니가 국민들에게 처참하게 처형된 후 무솔리니의 우상화와 관련된 상징물들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2.4.3. 나치 독일 (멸망)[편집]


나치당이 곧 히틀러이며 독일이 히틀러인 것처럼 히틀러가 바로 독일이다!

루돌프 헤스, 1933년 11월 독일 국민투표 후에 열린 나치당 연례 대회에서


독일인은 그들이 땅 위를 걷는 한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다. 세계 대전 당시에 무명소졸로 싸웠던 그는 결국 총통의 자리에 올랐고 궁지에 몰린 독일을 구했다.[31]

1935년에 안네마리 슈틸러(Annemarie Stiehler)가 쓴 '독일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야기' 중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받는 아돌프 히틀러 역시 자신을 우상화했는데 히틀러는 도로[32]나 광장, 학교, 경기장, 다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모든 정부 기관의 사무실과 교실에 자신의 사진을 걸게 했으며[33] 히틀러의 생일은 중요한 공휴일로 지정되어 공개적으로 축하 행사가 열렸고[34] 자신의 자서전인 나의 투쟁은 신혼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의무적으로 1권씩 선물하게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숭배해야 할 신에 가까운 거의 초인간적 자질을 가진 천재'로 선전되었고 심지어 어린 학생들에게도 히틀러에 대한 우상화 교육을 시켜 히틀러유겐트에 모든 독일의 청소년들을 강제로 가입시켜 히틀러를 찬양하게 했으며[35] 몇몇 학교에서는 학생들로 하여금 매일 신에게 히틀러를 지켜달라는 기도를 하게 했고 이 '위인에 대한 숭배'를 우상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밖에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사진 작가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n, 1885~1957)이 찍은 자신의 사진들을 사진집으로 출판해 탁상용 대형 호화판에서부터 군인들이 휴대하기 쉬운 축쇄판까지 다양한 판형으로 보급하게 했으며 1937년부터 연례행사로 열리던 독일 예술 대박람회에서는 호프만이 촬영한 히틀러의 사진을 묘사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의지의 승리와 같은 히틀러 우상화 영화도 만들어졌다. 다만 히틀러는 자신의 동상은 세우지 않았는데 이는 히틀러는 자신이 '미래의 통치자'라며 동상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거의 인물을 위해 남겨 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36]

물론 히틀러가 패망하고 자살한 후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무관심하다는 반응을 보인 데다 슬퍼 보이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히틀러의 추종자들이 슬퍼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2.4.4. 스페인 (프랑코 정권)[편집]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공식적으로는 '국가 원수 각하'로 불리며 비공식적으로도 '마지막 십자군의 지도자', '공산주의 및 공범에 대한 해방 전쟁의 지도자'로도 불렸고 그의 집권기에 스페인의 어린 학생들은 '신의 섭리가 스페인을 혼돈, 무신론, 빈곤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프랑코를 보냈다'고 배워야 했다.


2.4.5.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 (멸망)[편집]


엔베르 호자는 세계 최초의 '무신론 국가'를 선언할 정도로 극단적인 종교 탄압을 벌이면서도 자신의 우상화는 스탈린을 모방해 종교적 수준으로 열중했는데 호자는 '알바니아 공산주의의 창시자', '최고의 동지', '유일한 힘', '위대한 스승' 등의 호칭으로 불리며 문화에서 경제, 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해 논평하는 천재로 널리 묘사되었고 도시마다 호자의 동상이 수십 개씩 세워졌으며 모든 학생들에게 그가 쓴 책을 읽게 했고 심지어 알바니아의 모든 교과서에는 공부하는 주제에 대한 호자의 인용문이 1개 이상 들어가 있어야만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호자의 우상화는 '스탈린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를 넘어 '김일성만큼 극단적인 강도다'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37] 다만 호자의 기념물 상당수는 호자의 사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2.4.6.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멸망)[편집]


공산 루마니아 역시 우상화 정책을 펼쳤는데 이 우상숭배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집권기에서 절정을 이뤘다.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북한의 우상화의 영향을 받아 다음과 같은 해괴망측한 우상화를 펼쳤다.

  • 본인은 물론이고 아내 엘레나 차우셰스쿠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했다. 물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생일인 1월 26일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취급되었다.
  • 차우셰스쿠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 페리클레스, 올리버 크롬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표트르 대제, 에이브러햄 링컨 등의 역사적 위인들에 비유되었으며 1978년에 차우셰스쿠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집필된 ''경의를 표합니다'에서 차우셰스쿠는 이디 아민, 김일성, 엔베르 호자, 마오쩌둥과 동렬로 취급되었다. 그런데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차우셰스쿠에 대한 굉장히 적절한 비유인 셈이다.
  • 차우셰스쿠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흥시킨 천재적인 사상가로 포장되었다.[38]
  • 관공서는 물론 학교 교실마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모든 교과서의 첫 장에는 차우셰스쿠의 초상화가 인쇄되었으며 심지어 모든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차우세스쿠 부부의 컬러 사진이 인쇄되었다.
  • 법에 따라 루마니아의 모든 서점들은 차우셰스쿠의 연설집을 진열해야 했다.
  • 168cm였던 차우셰스쿠의 키를 돋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차우셰스쿠의 사진 기사들은 모두 차우셰스쿠보다 키가 작은 사람만 할 수 있도록 했다.
  • 그가 60세를 맞이한 1978년에는 무려 '루마니아의 반신반인'이라는 제목의 책이 그리스에까지 출판되었다.
  • 책을 출판하려면 차우셰스쿠의 어록을 일정량 포함해야 출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 북한처럼 글을 쓰는 중 문단이 넘어갈 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엘레나 차우셰스쿠'라는 이름이 분리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2.5. 아프리카[편집]



2.5.1. 중앙아프리카 공화국[편집]


장 베델 보카사의 집권기에는 모든 공공 장소에 많은 훈장으로 장식된 보카사의 사진을 달았고 교과서의 앞 페이지에도 보카사의 사진이 실렸으며 수많은 학교와 병원, 도로, 정책에 보카사의 이름이 붙었다. 심지어 보카사는 아예 스스로를 국부라고 선언했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에 중앙아프리카 제국이라며 잠깐 황제를 참칭했을 때는 라디오에서는 '황제 폐하를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따위의 내용으로 황제를 찬양하는 방송만 방송할 수 있었고 화폐를 넘어서 학생들의 연습장 표지에도 보카사의 얼굴이 인쇄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카사는 교복에까지 자신의 모습을 새긴 후 이를 학생들에게 엄청난 고가로 강매하려고 했으나[39] 이에 반발한 학생들의 시위를 유혈 진압했고 결국 황제가 된 지 3년 뒤인 1979년에 보카사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쫓겨났다.


2.5.2.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편집]


모부투 세세 세코가 집권하던 시절에는 모든 공공 장소에 모부투의 초상화가 걸린 것은 물론이고 모든 출판물의 첫 페이지와 모든 자이르의 화폐의 앞면에는 모부투의 얼굴이 인쇄되었으며 언론은 모부투가 아닌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게 금지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맡은 직책 정도만 언급할 수 있었다.[40] 심지어 모부투는 이것도 모자라 법령까지 만들어서 TV의 저녁 뉴스를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부투의 모습으로 시작하게 했다.

물론 모부투에게는 "조국의 아버지", "메시아", "혁명의 인도자", "조타수", "창시자", "인민의 구세주", "최고의 전투원" 같은 온갖 호칭이 붙었고 초등학생들은 아침에 등교할 때마다 모부투의 이름을 외치며 춤을 춰야 했으며 모든 대통령 보도 자료에서 모부투의 이름은 대문자로 표기되었고 심지어 모부투가 일곱 살 때 맨손으로 사자를 죽였다거나 '자이르의 적들'과 싸울 때 가슴에 총알과 창이 튕겨져 나왔다거나 그가 공식석상에 들고 다니는 흑단 지팡이가 마법의 힘이 깃들어 있고 너무 무거워서 일반적인 사람이 들 수 없다는 등 그의 '초자연적 재주'에 대한 공식적인 소문도 유포되었다. 이쯤 되면 북한과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사실 모부투의 우상화는 1974년에 북한을 방문했을 때 받은 감명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2.5.3. 에티오피아[편집]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멩기스투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고 식당과 술집에까지 멩기스투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전국 각지에는 멩기스투의 흉상이 세워졌고 멩기스투에게는 '훌륭하고 관대한 에티오피아의 구세주', '예수의 재림' 등 아부성이 강한 호칭이 붙었다. 그리고 멩기스투 본인도 사람을 만날 때는 금박을 입힌 의자와 높이 올린 연단에 따로 앉아 자신의 권력을 강조했다.


2.5.4. 우간다[편집]


이디 아민엔테베 작전의 여파로 영국이 우간다와의 모든 외교 관계를 단절했을 때 자신을 '대영제국의 정복자'로 선포하고 모든 공문서에 적히는 자신의 이름 앞에는 "각하, 종신 대통령, 군 원수, 모든 지상 동물과 바닷속 모든 물고기들의 군주,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서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41]"라는 긴 호칭을 붙이게 했고 이를 우간다의 모든 국민들에게 막힘없이 달달 외우게 했으며 이를 못 외운 측근들은 처형당했다.


2.5.5. 적도 기니[편집]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인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우상화는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어느 정도였는지 심지어 북한도 능가하는 수준이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 미사, 수업, 축구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응게마를 찬양하는 행위를 해야 했다.
  • 전직 부통령마저 집에 걸린 응게마의 초상화가 찢어져 있었다고 수용소에 끌려가 살해당했다.
  • 국민들에게 응게마가 초자연적 힘을 가지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존재로 인식하게 했다. 그 일례로 응게마가 수도인 말라보를 떠날 때면 '전기는 응게마의 마법의 힘으로 생산된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 말라보의 모든 전기 공급이 차단되었다.
  • 어린이들에게 "신이 마시아스의 명령으로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같은 내용을 배우게 하는 등 학교를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곳으로 바꾸었다.[42]
  • 성당에도 '신이 마시아스 덕분에 적도 기니를 창조했다. 마시아스 없이는 적도 기니도 없다.'는 문구와 함께 응게마의 사진을 걸게 했으며 고문당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시아스만이 참된 신이다"라는 말을 암송하도록 강요했다.[43]
  • 1978년에는 아예 국가의 모토를 대놓고 마시아스 응게마 외에 신은 없다(No hay otro Dios que Macías Nguema)로 바꾸었다.[44]

게다가 1979년에 이러한 삼촌을 몰아내고 처형한 후 집권한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도 나을 바가 없어 2003년 7월에는 국영 라디오에서 응게마를 '인간과 사물에 대한 모든 권세를 가진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같다'고 한 것도 모자라 '하느님께서는 응게마 대통령과 영구적으로 접촉하시고 그에게 힘을 주시고 있으며, 따라서 응게마 대통령께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고 살인을 결정할 수 있다.'는 아부성 멘트를 덧붙였으며 이후에도 오비앙 응게마는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자', '적도 기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정한 혁명을 추진한 철학자의 돌', '적도 기니를 민주화한 지도자[45]' 등으로 묘사되었다.


2.5.6. 소말리아[편집]


시아드 바레는 자신을 '승리의 지도자(Guulwade)', '선생님', '지혜의 아버지', '자유를 사랑하는 낙타'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게 하고 공개 행사, 거리, 공공장소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초상화와 함께 자신의 초상화를 걸게 했다. 이 때문에 1991년 바레가 쫓겨나자 소말리아인들은 곳곳에 걸린 바레의 초상화를 불태우거나 기관총을 난사하며 화풀이를 했다.


2.5.7. 짐바브웨[편집]


로버트 무가베도 자신을 우상화했는데 무가베는 '아프리카의 선지자'라고 불리며 천사, 예수, 신에 비교되었고 무가베의 생일은 예수의 생일에 비교되면서 성대한 생일잔치가 열렸고 마을에 있는 도로마다 무가베의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2016년에는 짐바브웨의 조각가인 도미닉 벤후라(Dominic Benhura, 1968~)가 무가베의 3.7m 높이 동상을 조각하기도 했다.[46]


2.5.8. 말라위[편집]


초대 대통령이었던 헤이스팅스 반다96세에 퇴진할 때까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철권통치를 일삼으면서 자신의 우상화에도 열중했는데 당시 말라위의 모든 사무실의 벽에는 반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어떠한 것도 반다의 초상화보다 높은 곳에 올릴 수 없었으며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는 말라위 국가와 함께 반다가 국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영상이 나왔다고 한다.


2.6. 아메리카[편집]



2.6.1. 도미니카 공화국[편집]


라파엘 트루히요는 수도와 다리, 공공 건물, 산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자신의 동상을 전국 곳곳에 세웠으며 심지어 교회조차 'Dios en cielo, Trujillo en tierra(천국의 신, 지상의 트루히요)'라는 슬로건을 개시하게 했다. 더욱이 이 슬로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구의 순서가 '지상의 트루히요, 천국의 신'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트루히요의 지지자들은 1955년 12월 29일에 트루히요의 집권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1/3인 3천만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3.1억 달러) 이상을 들여 열린 '평화 박람회'에서 반문맹이었던 트루히요의 아내를 '작가이자 철학자'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트루히요의 몰락에 크게 기여한 미라발 자매의 아버지는 겨우 집에 트루히요의 초상화를 걸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어 투옥된 후 석방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2.6.2. 아이티[편집]


프랑수아 뒤발리에도 우상화로 악명이 높았는데 실제로 '파파 독'의 집권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뒤발리에의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나는 그를 선택했다'고 적힌 포스터가 제작되었고 모든 집에는 뒤발리에의 초상화와 플라스틱 흉상이 전시되었으며 뒤발리에 본인이 직접 주기도문의 신을 찬양하는 구절들을 자신을 찬양하는 구절로 바꾼 뒤 이를 '혁명의 교리문답'이라고 출판하기도 했다. 심지어 '파파 독은 르와[47],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과 함께하는 하나의 존재다.'라며 삼위일체를 지도자 우상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뒤발리에는 '국민들을 가짜 뉴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언론탄압을 일삼았는데도 정작 본인은 자신을 세계적인 지도자로 포장하기 위해 대통령궁 소속 작가를 시켜 외국인 지도자가 자신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는 내용의 가짜 뉴스를 유포하기도 했다.


2.6.3. 파라과이[편집]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수도인 아순시온의 중앙광장에 '스트로에스네르: 평화, 힘, 그리고 안녕(安寧)'이라는 내용의 대형 네온사인을 설치한 것은 물론이고 그의 생일을 공휴일로 지정했고 도로, 광장, 학교, 공항 등에 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모든 관공서와 대부분의 상점, 심지어 정적들의 집에까지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다.

게다가 스트로에스네르는 동부 국경 지역에 자기 이름을 붙인 선전도시 푸에르토프레시덴테스트로에스네르를 건설했으나 이 도시는 스트로에스네르가 축출당한 1989년에 '시우다드델에스테'로 개칭되었다.


2.6.4. 칠레[편집]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도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가행했는데 칠레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었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만이 보유할 수 있었던 대령 계급이 피노체트를 위해 부활했고 피노체트의의 제복 모자는 다른 장교들보다 높게 재단되었으며 신문은 피노체트가 '좋게 보이는' 사진만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피노체트는 '군대와 국가의 수호신인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은 존재'로 선전되었다.


2.6.5. 베네수엘라[편집]


파일:Crisis in Venezuela_009.jpg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빠진 베네수엘라 또한 우상화로 악명 높은 국가 중 하나다. 특히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가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 하에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베네수엘라 연합사회당은 공식적으로 차베스를 볼리바리안 혁명의 영원한 최고사령관으로 칭하고 있으며 국가 경축일 행사에서 부르는 국가 또한 차베스가 부르는 베네수엘라 국가에 맞춰 부를 정도다.베네수엘라 208주년 독립선언일 기념식

차베스에 대한 우상화는 상술한 박정희와 비슷하게 사망 후에야 대대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2013년 대선 기간 동안 차베스를 예수의 뒤를 이어 베네수엘라를 보살펴 줄 존재로 묘사하며 그를 신격화했으며 차베스가 서거한 지 1주년이 되는 2014년 3월 5일에는 북한의 영생탑처럼 그의 영생을 기념하는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여러 우상화 요소를 국가 전역에 배치하였는데 차베스의 눈을 디자인화하여 건물이나 벽, 계단 등에 그리기도 하고(영어 위키백과 문서) 차베스가 쿠데타를 시도한 2월 4일과 생일인 7월 28일, 서거일인 3월 5일에는 차베스의 영묘인 군사박물관에서 각각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물론 전국 각지에 차베스를 소재로 한 벽화가 그려졌다.구글 검색 결과


3.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1 01:55:54에 나무위키 우상화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실제로 가수나 배우를 지칭하는 의미로서의 아이돌도 이 단어에서 따왔다.[2] 영어권에서는 idolization보다는 cult of personality(개인숭배)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영어 위키백과 표제어도 cult of personality로 되어 있다. Cult가 교주라는 뜻도 있다.[3] 사실 북한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폭력적인 국가였던 민주 캄푸치아를 제외하면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가장 기형적이고 극단적인 체제를 유지한 나라였다. 엔베르 호자알바니아도 북한 이상으로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이긴 했으나 호자가 지독한 스탈린주의자였기에 역으로 스탈린주의의 정통(?)을 지키기는 했다.[4] 그 일례로 민주 캄푸치아폴 포트는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싫어해서 집권 2년 뒤인 1977년에야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였기에 초상화를 거는 것 이외에 폴 포트 개인에 대한 이렇다 할 우상화는 자행되지 않았다. 대신 폴 포트는 크메르 루주 수뇌부를 '조직'을 의미하는 '엉까'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아이들을 세뇌시켜 친부모 대신 엉까를 진정한 부모로 섬기게 했다.[5] '아타튀르크 모욕죄'가 있긴 하지만 튀르키예 국민들의 아타튀르크에 대한 존경은 진심이다.[6] 정확히는 본체 높이는 7m, 기단 높이는 18m였다. 척 단위로 환산하면 81척인데 이승만의 80세 생일을 축원하는 의미로 80척을, 여기에 진일보한다는 뜻으로 1척을 더해 81척으로 세웠다고 한다. 동상 제막식에서 이승만은 끝에 스스로 만세삼창을 하고 밤에는 서울에 축하 불꽃놀이를 열었다. 당시 사진 참고로 이 동상은 이승만의 사임 후인 1960년 8월 19일 철거되었는데 동상이 워낙 큰 나머지 중장비의 힘을 빌려서 철거했다고 한다.[7] 실제로 헌릉로의 전신격이었던 도로의 이름이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로'였고 서울 남산공원과 부산 용두산공원은 '우남공원'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문화회관의 건설 당시 이름도 '우남회관'이었다.[8] 물론 박정희는 이와 동시에 4월 19일도 임시공휴일로 정하며 자신의 쿠데타를 '4.19 학생혁명의 뜻을 이어받았다'고 정당화하려고 했다.[9] 이미 사랑제일교회는 전광훈을 신격화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 활동, 2020년 사랑제일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을 일으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 되었다. 건전하고 개념 있는 개신교인들은 사랑제일교회를 정상적인 교회로, 전광훈을 정상적인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10] 여담으로 이발로이족들은 마르코스가 1986년에 쫓겨나자 이 흉상에 깃든 마르코스의 영혼에 대한 퇴마 의식을 하기 위해 돼지와 물소를 도살하여 얻은 피를 이 흉상에 부었다. 그리고 이 흉상은 마르크스가 사망한 해인 1989년에 좌익 반군의 폭격으로 왼쪽 귀가 손상되었으며 2002년 12월 29일 새벽에 이 흉상 안에 '야마시타 골드'의 일부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보물 사냥꾼들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11] 여담으로 니야조프는 만 8살 때 대지진으로 어머니와 두 형제를 잃었다.[12] 참고로 투르크메니스탄 국가는 니야조프가 전체 가사를 썼으며 이 부분은 니야조프의 사후인 2008년에 개사되었고 다시 '1절-후렴' 순으로 부르는 것으로 변경되었다.[13] 하다못해 북한 고려항공 기내에 김일성, 김정일 부자 초상화를 걸지는 않는다.[14] 한국에서의 세종대왕, 이순신가볍게 능가하는 수준.[15] 그러나 후세인이 몰락한 후에도 이라크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기에 철거 몇 시간 전에 이 동상을 망치로 부수려다가 실패한 레슬링 선수 카뎀 샤리프(Kadhem Sharif, 1952~)는 2016년 인터뷰에서 "사담은 떠났지만 이제 그의 자리에는 1,000명의 사담이 있다. 그 조각상을 지나갈 때면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담은 결코 이유 없이 사람을 처형하지 않았다. 그는 벽처럼 단단했다. (당시 이라크는) 부패나 약탈이 없었고 안전했다.",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킨) 토니 블레어조지 W. 부시가 재판에 회부되기를 바란다."며 이 시도를 후회했다. 물론 이 발언들의 뉘앙스를 보면 후세인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자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의 준동으로 인한 혼란상 때문에 후세인이 상대적으로 양호해 보여서 그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16] 다만 레닌은 자신에 대한 우상화가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구축하려는 모든 노력을 격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17] 스탈린이 직접 승인한 것이어야 가능했는데 사실 스탈린은 어릴 적 마차 사고를 겪었기에 왼쪽 팔이 온전치 못했던 데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어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18]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진 스탈린그라드가 유명하며 이 도시 외에도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가 소련에만 적어도 4곳이 있었고 2차 대전 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가 생겨났다.[19] 소련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였던 이스모일 소모니 봉은 물론이고 불가리아와 슬로바키아(이자 모든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에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으며 심지어 캐나다로키 산맥에 있는 산에까지 '스탈린 산(Mount Stali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다른 산들은 스탈린 사후에 스탈린의 이름이 지워졌지만 심지어 캐나다의 '스탈린 산'은 1987년까지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한 우크라이나 이주민들의 항의로 마운트 펙(Mount Peck)으로 변경되었다.[20] 정확히는 동상 자체의 높이는 27m고 받침대의 높이는 30m였다.[21] 이 동상은 1962년 3월에 철거되었고 이후 레닌 동상이 세로 세워져 1973년 4월에 완성되었다.[22] 이 역시 동상 자체의 높이는 25m고, 받침대의 높이는 12m였다.[23] 이 동상 역시 1962년에 철거되었고 옆에 똑같은 크기의 레닌 동상이 같이 세워졌기에 스탈린 동상 터는 2018년에야 설치된 기념 명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24] 이를 위해 스탈린의 지지자들은 러시아 혁명의 2인자가 레온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이라고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으며 스탈린의 권력이 최정점에 이른 후에는 다른 참여자들의 역할이 대폭 축소된 것을 넘어 소련 혁명이 사실상 레닌과 스탈린 두 사람만의 역사로 수정되었다.[25]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약 900만 명이 서명한 축하 메시지가 336권으로 출판되었고 북한에서도 정확히 1676만 7,680명의 서명으로 이루어진 400권의 축하 메시지를 보냈으며 직접적인 생일 축하 편지와 전보는 전 세계에서 100만 통 넘게 왔다고 한다. 스탈린은 자동차 몇 대와 비행기 1대는 기본에 중국에서 쌀알 한 톨에 새겨진 본인의 초상화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만들어진 집무실에 있는 본인을 묘사한 70제곱미터짜리 양탄자, 250점의 동상과 500점의 흉상 등 온갖 생일 선물을 받았다.[26] 아이러니하게도 부랴트 지방의 농업인민위원회 위원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 사진 촬영으로부터 얼마 되지도 않은 1938년 7월에 '일본 스파이, 트로츠키주의자, 테러리스트, 스탈린에 대한 전복 음모'라는 거짓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으며 어머니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1년간 투옥되었고 남부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후 한동안 소아과 의사로 일하다가 2년 후에 의문사했고 겔리야는 고아가 되어 모스크바의 친척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겔리야와 찍은 사진의 선전 효과가 워낙 좋았던 나머지 소련의 선전가들은 사진 속에서 하루아침에 '국민의 적'의 자식이 된 겔리야의 모습을 지우지는 못했고 대신 '공식적으로는' 목화 따는 일로 훈장을 받은 맘라카트 나캉고바(Mamlakat Nakhangova, 1924~2003)라는 타지크인 소녀가 어릴 적에 스탈린과 함께 촬영한 것으로 변경된 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널리 쓰였다. 이후 겔리야는 중국과 인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되었으며 2004년에 튀르키예에서 사망했다.[27] 당시 미화 환율로는 약 2천만 달러였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는 약 3억 5천만 달러다.[28] 보다시피 미사의 '신앙고백'의 첫 구절을 본뜬 것이다.[29] 참고로 전자는 1941년에 에티오피아인들에게 파괴되었고 후자도 2차 대전 후 빨치산에 의해 파괴되었다.[30] 이런 시절에 무솔리니 면전에서 파시스트 당가 조비네차의 지휘를 거부한 것을 넘어 "내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무솔리니를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무솔리니를 증오한 명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사람은 극히 드문 케이스인 것을 넘어 문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31] 물론 실제로는 이와 정반대로 흘러가 2차 대전 후 태어난 모든 독일권 사람들은 이전에는 흔한 이름이었던 '아돌프'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32] 그의 집권 중반 이후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구내에 의무적으로 히틀러 거리가 있어야 했다고 한다.[33] 다만 총리였을 시절에는 마치 스탈린의 초상화가 레닌과 함께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사진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걸려 있었다.[34] 특히 히틀러가 50세 생일을 맞이한 해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1939년에는 높은 연단에 올라 독수리와 철십자 훈장으로 장식된 커다란 캐노피 아래서 붉은 플러시 천으로 덮인 '왕좌'에 앉아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10차선의 '승리자의 대로'에서 열병식을 사열하며 그 위세를 과시했고 1942년에는 본인의 생일 전야제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전설적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생일 축하 기념 공연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하게 했다. 베토벤 9번의 합창 가사에 쓰인 '환희의 송가'의 주제가 다름아닌 인류의 화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의미에서는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선곡인 셈.[35] 실제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한때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으나 강제 가입이었기 때문에 큰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36] 물론 히틀러가 죽은 후 히틀러의 동상을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만들고자 한 사람도 이디 아민 정도밖에 없다.[37] 물론 그런 호자도 김일성의 우상화를 보고 '과거나 현재 어느 곳에서도 유례가 없는 수준에 이른 지도자 숭배'라면서 기겁했다.[38] 정작 차우셰스쿠는 간단한 전치사도 헷갈렸던 데다 최고 권력자가 된 후에도 그가 쓴 글들을 '정확한 루마니아어'로 교정해야 했을 정도로 무식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남이 쓴 논문을 훔치고 해외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구걸하듯이 얻어가면서 저명한 화학자 행세를 하던 엘레나는 한술 더 떠 물의 화학식이 H2O라는 것조차 몰랐다고 한다.[39] 이 교복 가격이 당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40] 쉽게 말하자면 당시 자이르 언론은 '조국의 아버지이신 모부투 세세 세코 각하께서 재무부 장관에게 이러이러한 지시를 내렸고 이를 내무부 장관도 들었다' 식의 기사만 쓸 수 있다.[41] 원문은 His Excellency, President for Life, Field Marshal Al Hadji Doctor Idi Amin Dada, VC, DSO, MC, CBE, Lord of All the Beasts of the Earth and Fishes of the Seas and Conqueror of the British Empire in Africa in General and Uganda in Particular.[42] 참고로 응게마는 크메르 루주와 유사한 반지성주의 정책을 펼쳤으나 정작 자신의 장남은 본인의 생전에 쿠바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응게마는 쿠데타 직전에 나머지 자식 3명을 북한으로 보내긴 했지만 이들이 만경대혁명학원에 들어간 것은 응게마의 처형 후이므로 유학을 보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43] 참고로 응게마는 1978년에 적도 기니를 알바니아에 이어 세계 2번째의 '무신론 국가'로 선언할 정도로 종교, 특히 가톨릭을 극단적으로 탄압했다.[44] 이는 북한으로 치면 '강성대국'이 아니라 '백두혈통 외의 신은 없다'를 국가 모토로 삼은 셈이다.[45] 오비앙 응게마도 극악무도한 독재자이긴 했지만 마시아스 응게마는 아예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고 불릴 정도의 최악의 독재자였으니 어떻게 보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다만 마시아스 응게마의 행각들을 보면 문자 그대로 당시 적도 기니에 유신 시기 박정희 수준의 독재를 펼친 독재자가 집권했어도 민주화된 것처럼 보일 수준이었다.[46] 참고로 무가베는 자신의 사후에 세워질 동상 2개의 추가 제작에 500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47] Loa. 부두교에서 정령을 통칭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