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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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 공산주의의 약화
3. 발단 :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
3.1. 페레스트로이카의 개혁 과정
3.1.1. 계획 측면 개혁 과정
3.1.2. 가격 결정권 및 시장 판매 과정
3.1.3. 국가예산납부권 및 소득 분배권
3.1.4. 자금조달권 과정
3.1.5. 금융 개혁 과정 및 농업 개혁 과정
4. 전개 : 흔들리는 소비에트권
4.1. 개혁의 실패와 동유럽의 붕괴
4.2. 소비에트 연방에 미친 영향
5. 절정 :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6.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영어:Glasnost/Perestroika.
러시아어:Гласность(개방, 직역하면 공표 혹은 발표)/Перестройка(재건 혹은 재편성 이라는 뜻)

소련 공산당의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펼쳐진 일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결국 본인의 실각과 소련 해체, 냉전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2. 배경 : 공산주의의 약화[편집]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혹은 그 외의 어떠한 형태이든, 공산주의를 채택한 국가들에 내재된 문제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점차 가속화되는 몰락의 중심에는 공산권의 핵심인 소련이 있었다.

소련은 관료제 사회의 내재적인 계급모순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이론적으로 정치사상적인 면에서의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한다면 공산주의는 자유를 제한하는 대가로 평등을 추구한다. 실제로 서방세계의 다수 국가들은 "비효율적이고 무자비한 공산주의가 그럭저럭 돌아가게나마 하는 원동력은 청백리같은 고위 간부들 때문이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론은 소위 '공산귀족', 즉 노멘클라투라 계급의 부상으로 철저히 논파되었다.

물론 당시의 관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서방의 68혁명의 여파로 헝가리[1], 체코슬로바키아[2], 폴란드[3] 등에서 벌어진 일련의 개혁적 시도들은, 동유럽권의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한 소련의 강경노선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로는 사실상 의미있는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더하여 이러한 강경노선은 동유럽의 공산정부가 가졌던 최소한의 지지와 정통성마저 상실하는 연쇄작용을 불러왔다. 계속되는 위기 속에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만이 공산정권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의 경제 상황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소련식 공산주의 및 계획경제가 제3세계에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이 단기간에 가난한 농업국에서 세계 2위의 공업국[4]으로의 변신을 성공적으로 끝마쳤기에 가능한 일이었다[5]. 그러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련은 연 평균 경제 성장률이 1%에서 2%를 웃돌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은 수출품의 38%가 천연가스, 나머지는 중공업, 화학 제품이었다.[6]

막대한 군비경쟁도 문제였다. OPEC석유 가격담합으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일시적으로 호황을 누린 소련[7]은, 마침내 198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미영에 대항하여 석유 생산을 급속히 늘리는 바람에 석유값이 급속하게 떨어지자 경기기 다시 후퇴하였다. 게다가 소련은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지출을 강요당했던 반면, 미국은 서서히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나마 중앙계획이 어느 정도 가능했던 소련 및 일부 위성국들에서는 1980년대 초 일시적으로 경기 회복현상이 나타나기는 했으나[8], 근본적인 개혁이 실패한 이상 이러한 호조가 지속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9] 개혁에 실패한 관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라고는 고작해야 영토 내에 묻혀 있는 천연자원들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해나갈 돈을 벌면서, 한편으로는 계속되는 생활고와 역사적 민족감정이 맞물려 점증하는 자국 인민들의 불만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억제하는 정도밖에 없었다.

이제는 공산주의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들조차 현 체제가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앞서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3. 발단 : 고르바초프의 취임과 개혁[편집]


1985년,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마침내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 고르바초프의 급진적인 개혁은 소련의 사회 전반에 폭풍우를 몰고 오게 되고, 이는 1991년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적인 해체와 본인의 실각으로 이어진다.

고르바초프가 청년기를 보낸 흐루쇼프의 집권기는, 강력한 통제와 억압으로 점철된 소련의 역사 속에서 잠시나마 해빙의 분위기가 사회를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경험에 더해 소련의 경직된 관료 사회를 몸소 겪었던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소련의 공산주의를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모델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찌감치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Glasnost)

정보의 자유와 공개를 의미한다. 당시 소련에 만연해 있던, 언론 검열 및 어용화, 사상 탄압 등 경찰국가주의에 대한 변혁을 의미한다. 흔히 '개방'으로 번역되고 있다.

  •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Perestroika)

정치와 경제적 개조를 의미하고 있으며 부패한 관료제 타파, 공산주의 경제의 체제적 한계점을 개선하고 점진적인 시장 자유화를 추구하는 등의 정책을 포함한다. 흔히 '개혁'으로 번역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모스크바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공식적인 간섭권을 명기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는 한편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정책 지시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10]

이어 경제 규모가 소련의 2배에 달하는 미국과의 군비경쟁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각종 군사용 무기 감축을 시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3.1. 페레스트로이카의 개혁 과정[편집]



3.1.1. 계획 측면 개혁 과정[편집]


1987년 국유기업들에게 주어진 경영상의 자율권은 기존의 생산지표제도를 국가주문제도로 대체하고 개별 기업들의 소득 중에서 세금 및 기타 의무적인 납부금을 제외한 금액을 사내유보금으로 인정함으로써 크게 향상되었다.
1985년 기업에 대한 위로부터의 직접적 규제는 감소되었으며 이윤부분 중 기업유보분의 비율도 상당히 높아지는 등 기업의 자유재량권이 확대되었으며 1990년 국유기업의 임대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임대된 기업은 기본적인 소유 관계에 있어서는 국가소유가 유지되고 임대기업은 임대계약에 체결된 국가주문생산을 제외하면 생산과 판매 활동을 직접적인 국가통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행하여졌다.


3.1.2. 가격 결정권 및 시장 판매 과정[편집]


또한 1986년 3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은 기존의 공급 및 유통조직을 도매상업방식에 의한 공급방식으로 전환시키는 문제를 심의하고 1987년부터 자재 및 기계 등 생산재의 기업간 직접 거래를 허용하는 조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기업은 복잡한 설비를 제외한 모든 물품의 공급 문제를 자재 및 기계국가위원회의 지역관리국과 교섭하며 기업간 직거래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자재 및 기계공급위원회의 도매상업기구화가 추진되었다.
상품유통의 경우에는 1987년 소연방 국유기업법의 제정으로 생산지표의 하달 체제가 국가주문체제로 바뀌고 국가 주문의 양이 점차 축소되기 시작하면서 기업이 자율적으로 생산 및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이 증가하게 되었다.
소매유통의 경우에는 이미 1988년부터 협동조합기업의 설립과 국유상점의 대여를 통하여 일찍부터 이 분야에 대한 국가 통제력의 약화가 진척되고 있었으며 소비재의 도매유통부문에 있어서는 각 지방에 거점을 둔 기존의 공공조직이던 1,800여 개의 도매유통조직들이 국가의 직접적인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또한 1990년 5월 모스크바에 처음으로 조직화된 상설상품거래소가 설립된 후 상품거래소는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3.1.3. 국가예산납부권 및 소득 분배권[편집]


구소련의 조세제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은 1990년 6월의 기업조세법 개정을 통해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 법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기업소유형태를 막론하고 단일한 세율 45%로 일괄 적용하기로 한 이윤세의 도입이었다.
개정된 기업세법에서 또한 자본소득세를 신설하고 있으며 1991년 초에는 판매세가 도입되어 재화와 용역의 판매에 대한 판매 총액에 5%의 단일세율이 부과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도입하는 판매세는 기존의 거래세를 유지한 상태에서 거래세 수입에 대한 보조적인 재정 수입원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임대기업에서 생기는 소득은 임대계약에 따르는 임대료와 조세 등 의무적 납부금을 제한 후에 전액이 임차인의 소득으로 귀속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임대기업의 노동자들에게 배분하고 있다.


3.1.4. 자금조달권 과정[편집]


1990년 6월에는 주식회사 및 유한회사에 관한 규정과 유가증권에 관한 규정을 제정함으로써 기업자산전액에 상응하는 주식 발행을 통한 본격적인 주식회사의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1986년 11월 개인 및 가족기업법이 채택되었으며 이 법은 소비재, 수공업 및 서비스 부문에서 법률에 구체적으로 금지되지 않은 분야를 제외하고는 민간의 생산 활동을 합법적인 것으로 허용하는 것이었으나 고용 노동은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 소유 기업의 발전은 대체로 농업과 소규모 수공업 등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1991년 10월 현재 숫자는 44개로 그 숫자는 미미하였으며 1988년 5월에 채택된 협동조합법은 1986년 11월 개인노동활동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일부 가내수공업, 개인 택시, 자동차 수리 등 일부 서비스 부문에 한해 개인 영업이 허용되었던 것을 보다 확대 및 진일보 시킨 것이다.
그러나 1990년 8월에는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해고하는 권리를 포함하는 개인기업활동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조치를 시행하여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조항이 수정되었다.
1988년 5월에 채택된 협동조합법은 1986년 11월 개인노동활동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일부 가내수공업과 개인 택시, 자동차 수리 등 일부 서비스 부문에 한해 개인 영업이 허용되었던 것을 보다 확대를 시킨 것이다.
협동조합은 3인 이상의 집단에 의해 설립하며 1986년 11월 개인 및 가족기업법과는 달리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으며 생산수단의 임차 및 구매권을 허용하고 있어 비국가적 소유 형태 출발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협동조합은 국유기업의 노동 집단이나 공장 단위로 구성하고 있으며 국유기업을 모기업으로 삼아 임대계약에 기초해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독자적인 기반을 갖춘 협동조합은 많지 않아 본질적으로 입지가 매우 취약하였다.
협동조합은 3인 이상의 조합원이 자산과 정관을 마련하고 등록을 하면 설립할 수 있으며 노동력의 고용은 물론 법에 의해 명백히 금지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분야에서 생산 활동을 허용하고 있다.
1990년 10월 현재 약 520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대략 215,000개의 협동조합기업이 존재하며 이들의 국내총생산은 GDP의 약 5 - 10%에 달하고 협동조합기업의 약 39%가 제조업과 건설 부문에 종사하고 있어 이들은 협동조합기업이 공업총생산의 약 50%를 책임지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모 국영기업과 일종의 임대차협정을 기초로 하여 운영되고 있어 협동조합기업의 국영기업의 이러한 의존은 구소련 경제에서 중앙집권적 계획의 지속적인 지배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소련의 경우 많은 협동조합기업들은 거의 무상으로 국가소유의 자산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으며 그에 따라 협동조합기업의 경영자들은 장기적인 기업의 성장성과 기업자산가치를 끌어올리는데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단기적인 이득을 목표로 추구하는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협동조합기업이 국영기업의 이러한 의존은 구소련의 경제에서 중앙집권적 계획의 지속적인 지배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었으며 협동조합법과 국영기업법 등을 대체하여 소련시대 기업법의 총 결산으로 나온 법이 1990년 6월에 채택하였던 소비에트 연방 기업법이다.
이 법에는 소유 형태에 따라 개인기업과 가족기업 등의 소연방 시민의 소유에 기초한 기업과 협동조합, 사회 조직 등이 소유한 집단적 소유에 기초한 기업 그리고 각급 정부가 소유한 국가적 소유에 기초한 기업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기업들이 자체 활동의 조정을 통해 콘체른과 기업 연합 및 기타 형태의 기업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허용하여 기업이 국가통제조직인 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경영할 수 있게 된 점과 노동자를 고용 및 해고하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1.5. 금융 개혁 과정 및 농업 개혁 과정[편집]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경제개혁의 진행과 더불어 기업의 투자결정권한이 강화됨에 따라서 중앙에서 배분되는 투자액의 비중이 크게 감소하였고 그 결과 은행제도의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어 1988년 은행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은행제도의 개혁은 기존의 은행 체계를 5개의 특수국립은행으로 전문화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공업건설은행, 농공은행, 대외경제관계은행, 주택 – 사회투자은행, 저축은행 등이 그것이며 동시에 협동조합 및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은행을 조직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1990년 말 현재 250개의 상업은행 및 협동조합은행이 설립되어 많은 자유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소련의 경우에 따르면 고르바초프는 농가에 의한 토지임차를 주로 강조하였으며 1989년의 최고회의 법령은 주로 농장부문에서의 임차를 위한 틀을 제공하게 되었으며 대신 소련은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급진적인 결정은 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하의 소련의 농업개혁은 국영농장의 폐지를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직의 생산효율성을 제고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농장의 기본구성단위에 대한 인센티브를 도입함으로 국유의 생산조직 내에 좀 더 큰 사적동기부여의 요소들을 주입하고자 하였다.
국영농장은 지주, 고용주, 투입요소공급자, 그리고 생산물의 구매자로서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임대차협상에서 임차인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1989년의 공식적인 보증과 장려에도 불구하고 대지를 임차한 농장노동자들은 거의 없었다고 밝히고 있으며 통계상 보면 1990년 말까지 운영중인 개인농은 40,600개가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4. 전개 : 흔들리는 소비에트권[편집]



4.1. 개혁의 실패와 동유럽의 붕괴[편집]


냉전의 한 축을 이루는 소련 최상층부에서 쏟아져나온 혁신적인 정책들은 이념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엄청난 평지풍파를 몰고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많은 사람들은 막연히 개혁·개방이 공산권을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게 하리라라고 기대했을 뿐, 그 최종적인 결론, 즉 냉전의 종결에 대해서는 함부로 예상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개혁의 한계는 바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단기간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으며,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즉 정보의 자유화가 여기에 필요한 대중적 지지를 이끌어내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부패를 숨기고자 하는 관료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체제의 경직성이 맞물리면서 글라스노스트는 오히려 중앙권력의 추진력을 갈수록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 큰 문제는 열린 사고를 가진 개혁가들조차, '글라스노스트'가 '페레스트로이카'보다 훨씬 더 명확한 강령이었다는 점이다. 정보의 자유화나 민주 질서의 수립은 기본적으로 '통제' '허용'의 문제였지만, 오래 전부터 수렁에 빠져 있던 정치·경제적 지표들을 재건하는 일은 나아가야 할 방향조차도 뚜렷하지 않았다. 소련의 주요 재정적 기반인 석유수입은 석유값은 1986년 중하반기 들어 다소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미 고점에 비해 반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라 이미 망가진 재정을 재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미국영국 등지에서 온 경제 전문가들은 무조건적인 시장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이미 내적 균형이 붕괴된 경제가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자본주의의 바다 속에 떠밀려갈 경우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리고 탈냉전소련 붕괴 이후 그 결과로 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보리스 옐친 정부 하에서 극심한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확대, 복지체계 붕괴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몇개 공화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수십년간 공산당의 강력한 탄압에 억눌려 있던 연방의, 페레스트로이카(정치·경제적 개혁)가 뒷받침되지 못한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사회적 혼돈으로 이어졌다. 동유럽의 지도자들은 곧 정권의 힘만으로는 끝없이 불어나는 대중의 힘을 통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소련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일찌감치 폐기함으로서 이미 위성국의 공산당에 대한 보호를 사실상 철회한 상태였다.하긴 제 코가 석자인데 결국 1989년에서 1991년 사이 동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은 격변기를 거쳐 민주정부로 이양하게 된다.[11]


4.2. 소비에트 연방에 미친 영향[편집]


소비에트 연방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던 사회주의 공화국들에서는 상황이 사뭇 달랐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던 일부 개혁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성대한 환영을 받았던 반면, 예상외로 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에게는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경험도 그의 행보에 영향을 주었다. 혁명 영웅이던 레닌스탈린, 무학(無學) 광부로 출세한 흐루쇼프오오 인간승리, 공산당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제철소 기사였던 브레즈네프와는 달리, 고르바초프는 국립 모스크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 계층의 인물이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기존의 서기장들과는 달리 서민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이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급진적인 개혁안만을 내놓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혁이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급격한 체제 변화에 대한 혼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1920~30년대 사이 나름대로 짧은 시기로나마 비공산주의 국가였었던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등 다른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는 달리,[12] 대다수의 소련인들[13]1917년 러시아 제국의 멸망 이후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고 소련으로 이어지는 기억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 말기에는 초고령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자신도 소련인으로 태어난 처음이자 마지막 서기장이었고.

고르바초프가 취임하던 1985년을 기준으로 40세 이상의 모든 폴란드인들이 비(非) 공산주의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가 공산체제 하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서(1956년, 1970년) 정권을 뒤엎은 경험까지 가졌던 반면에 68세 이하의 모든 본토 출신 소련인들은 공산주의 외의 사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다. 당대 소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혁명이란 러시아 제국의 차르가 소련의 서기장으로 바뀐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대다수 소련인들이 정권과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은, 서구 사회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삶의 질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를테면 이들은 유가 폭등으로 막대한 흑자를 벌어들인 70년대 말을 즈음하여 국민적 생활수준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던 기억을 잊지 못했고, 당시의 실질적인 국가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설령 알 수 있더라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소련의 일반 대중에게 지지받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혁신적인 삶의 질 향상이 뒤따라야 했으나, 이미 석유값이 고점에 비해 절반에 못 미치던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5. 절정 :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편집]


자본주의화는 이미 경쟁력 없는 소련의 경제에 치명타를 가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생필품의 생산을 늘리기 위해 국영기업들의 경영을 자율화시켰지만 막상 국영기업들은 경영자율화를 기회삼아 생산되는 상품의 생산량을 늘리기보다는 몇배의 가격으로 시장에다가 비싸게 팔아치우기 시작하면서 국영상점에 납품되는 물건수가 줄어드는 바람에 소비자들은 더 긴줄을 서야했고, 결국 소련 당국에서 돈을 더 찍어내야했기 때문에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서구 소비재들의 수입이 늘어났지만 이는 무역역조 현상을 심화시켰다. 마침 허용된 언론과 발언의 자유는 그동안 억눌렸던 대중적 분노에 불을 붙였다. 국제적으로도 소련의 영향력은 동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놀라운 속도로 사라져갔고, 마침내 1990년 동독서독에 흡수 통일되기까지 이른다.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면서 각지에서 폭동과 민란이 일어났고, 지방 행정단체의 수장들은 권력을 이용해 무너져가는 경제 속에서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고르바초프는 급증하는 혼돈 속에서 그 자신이 닻을 올렸던 "민주적 공산주의"를 성공적으로 완주시키기에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1991년 초까지도 (발트 3국몰도바, 조지아, 키르키즈스탄을 제외한) 9개 공화국은 연방 해체에 반대했다. 이들은 각 공화국들이 동등한 주권을 인정받는 연합체로서 소련의 존속에 찬성했다. 1991년 3월의 국민투표에서 고르바초프는 76%의 지지를 얻어 소련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복고적 쿠데타가, 조금씩 안정화되어 가던 소련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된다.


6. 참고 자료[편집]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에릭 홈스봄 저, 이용우 역, 까치출판사
  • 왜 구소련은 실패했고 중국은 성공하였는가 - 이근 | 러시아 연구 | 1994
  • 북한의 개혁개방정책 추진 전망 - 임강택 | 통일연구원 | 2001.12
  • 러시아의 체제 전환과 자본주의의 발전에 관한 연구 - 박제훈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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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1956년에 일어난 일이라 68운동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이때의 임레 너지니키타 흐루쇼프와 정치적 성향이 비슷했지만 고무우카가 집권한 폴란드와는 다르게 아예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탈퇴하고, 중립화 선언을 검토 하는 등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기에 흐루쇼프가 위신실추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 군대를 내보내서 정권을 뒤엎게 된 것.[2] 프라하의 봄 참조[3] 폴란드/역사 레흐 바웬사 참조. 단, 폴란드는 1950년대 중반에서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타 공산권 국가에 비하면) 온건파가 집권했었기는 했다. 경제가 침체일로에 벗어나지 못했다는게 문제지.[4] 1위는 미국.[5]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 참조[6] "80년대 소련 수출 비중 정보". 2018년 10월 24일 확인[7] 쉽게 간과할 수 있겠지만, 소련-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천연자원 생산국이다.[8] 1981년에서 1984년간 외채가 약 35~70%가량 하락[9] <Kollo>, p.41[10] 이는 고르바초프가 1987년 11월 4일, 러시아 혁명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각국 사회주의 국가 사절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밝힌 것으로 자신과 다른 견해의 수용을 거부하는 오만과 폐쇄성은 생산적인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보도 내용[11] 그런데 선거가 허용되자마자 공산당이 다시 여당으로 당선된 케이스도 있다.그런데 사실 원래도 일단은 민주주의긴 했으니 뭐… 인민민주주의[12]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한때 공산권에 속해 있었던 동유럽의 국가들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군에게 두들겨 맞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다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정치 권력 체제로 되돌아가려고 하던 중 동유럽 일대로 밀고 들어온 소련 군대에 의해 원하지 않게 공산주의 정치를 강요당했다.[13] 독소 불가침조약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확장된 일부 영토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