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1차 복권 ==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정치인인 그가 군사위원으로 간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는 국공 내전 당시 정치위원역을 한 적이 있는데다가,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훗날에 정권을 잡을 때도 보이듯이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재부상에 문혁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했다. [[린뱌오]] 사후 국방 부장 직을 계승한 혁명원로 [[예젠잉]](葉劍英)이 덩샤오핑을 옹호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뒤를 가리고 있는 4인방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향한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적 보유만은 허락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