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칭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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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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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부주석
쑹칭링
宋庆龄 / 宋慶齡 | Soong Ching-ling


파일:soongqingling.jpg

이름
간체: 宋庆龄 / 정체: 宋慶齡
한국 한자음: 송경령
출생
1892년 1월 27일
청나라 상해
(現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
사망
1981년 5월 29일 (향년 89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종교
개신교 (감리회)
학력
웨슬리언 칼리지 영문학
가족
아버지 쑹자수
언니 쑹아이링
여동생 쑹메이링
남동생 쑹쯔원
남편 쑨원
1. 개요
2. 생애
2.1. 성장기
2.2. 중국 국민당의 반대자
2.3.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3. 기타
4. 매체에서
5. 주요 경력
6. 관련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Sun_Yat-sen_and_Sung_Qing-ling_1911.jpg
[1]

중화민국의 혁명가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었다.

1930년대 중국의 인권 보장 및 국민당 일당 독재를 비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노력했다. 이로 인해 얻은 별명이 중국의 잔 다르크, 인민을 사랑한 여인이었다.[2] 또한 명예직이긴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 국가주석이었다.


2. 생애[편집]



2.1. 성장기[편집]


1892년 1월 27일, 감리회 목사 출신의 무역업자인 아버지 쑹자수(찰리 쑹)와 중국인 기독교도 집안 출신의 어머니 예계진의 3남 3녀 중 차녀로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신식교육을 받았던 아버지 쑹자수는 "여자도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세 딸에게 공부를 독려했고, 쑹칭링은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언니인 쑹아이링, 동생인 쑹메이링과 함께 15살때 미국에서 학교 공부를 했다. 이때 그녀는 영어 이름인 '로자몬드'(Rosamond)[3]를 가지게 되었고, 미국 조지아 주웨슬리언 여자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딴 뒤 귀국했다.

한편 쑹자수는 쑨원의 조력자로서 자금을 지원하는 사이였고, 이때문에 쑨원과 쑹칭링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둘의 나이 차이는 30살에 가까웠지만 둘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결혼을 결심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군에게 패배한 뒤 일본도쿄로 망명을 간 쑨원과 결혼했다. 당시 쑹칭링이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만 이에 격노한 아버지는 쑹칭링을 가두어버렸으나 시녀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한 뒤 밀항선을 타고 도쿄로 가 그 다음날 결혼식을 올렸다.(...)[4]

사실 맨 처음 쑨원이 반했던 것은 자신의 전 비서이자 쑹칭링의 언니였던 쑹아이링이었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 쑨원은 쑹자수에게 딸을 달라고 간청했지만 유부남[5]인데다가 기독교도이면서 중혼(重婚)을 요구하는 쑨원에게 격노하여 결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쑨원과 다시 만나지 않겠다.라며 그를 내쫓았다.


2.2. 중국 국민당의 반대자[편집]


"당신이 쑨원의 아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당신을 죽여버렸을 것이오."

-다이지타오


결혼 이후 쑹칭링은 주로 쑨원의 비서로서 남편의 연설문이나 원고를 영어로 번역하는데 주력했다. 제1차 호법운동, 호법전쟁, 제2차 호법운동 중에 쑨원의 곁에 있었으며 1922년 군벌인 천중밍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총통부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간신히 탈출하여 홍콩을 경유해 상하이의 쑨원에게 합류할 수 있었다. 이때 유일한 아이를 유산하면서 불임이 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이후 요페 회담 등에 참여하며 제1차 국공합작을 지지했다.

1925년 3월 20일, 봉천군벌 장쭤린과의 회담을 위해 베이징에 갔던 쑨원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으면서 모든 재산을 아내 쑹칭링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재산은 책 2,000여 권과 상하이의 집 한 채가 전부였으나,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자격은 이후 평생동안 쑹칭링의 정치 인생에 큰 밑천이 되었다. 쑨원 사후인 1926년 1월, 중국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한편 1927년 12월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이 결정되자 동생에게

장제스는 푸른 수염 같은 자다. 한 번 결혼한 사람과 또 결혼하는 건 불행하게 되는 일이다.

라고 말렸지만 쑹메이링은 언니 칭링이 아버지에게 그러했듯이 그 말을 씹었다.

이후 쑹칭링은 국민당 좌파로서 연소용공정책의 유지와 여성의 사회 참가 증진을 표방했으나,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를 통한 청당으로 쑹칭링은 장제스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1927년 왕징웨이마저 국공결렬을 결정하자 이에 항의하여 국민정부를 이탈, 덩옌다천유런과 함께 소련의 모스크바로 건너가게 되었고, 중국공산당이 일으킨 난창 폭동때는 장파쿠이와 함께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소련에 거주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중국으로 귀국하여 장제스에게 협조하라는 강압적인 요구를 받았으며, 자신과 친한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천유런과의 염문설 증폭에 큰 충격을 받고 1928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망명지를 옮겼다. 이후 국제반제동맹의 명예주석에 추대되었고, 1929년 5월에 쑨원의 장례식 참가를 위해 임시로 귀국했으나 다음해 다시 베를린에서 1년을 더 머문 뒤 1931년 6월에야 영구 귀국을 했다. 망명 상태에서도 1929년 3월, 국민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귀국 이후 쑹칭링은 중국민권보장동맹 등에서 활동하면서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비판했고 고문, 연좌제, 사형 제도의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국민정부는 이러한 행위가 매우 고까웠으나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상징 탓에 그녀를 건들 수 없어 결국 그녀를 감시하는 선에서 일을 멈추었다. 이후 서안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1937년 2월 10년만에 다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참가해 국공합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쑹칭링은 1937년 11월 홍콩으로 떠났고, 1938년 6월에 보위중국동맹을 설립해 구호품과 돈을 모집하며 중국 공산당을 지원했다. 이후 1940년 4월 사천성의 충칭에서 그녀의 가족들이나 장제스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여 국공통일전선을 선전하기도 했다.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영국령 홍콩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민정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탈출했다.

1945년 8월의 종전 이후 국민정부는 직위를 승진시키면서 정부에 협조하기를 요구했으나 쑹칭링은 거부하고, 공산당으로 전향해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초기 명예주석을 맡았다.


2.3.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편집]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1103101643_1.jpg
1958년, 김일성과 찍은 사진

국부인 쑨원의 미망인이라는 상징성과 유창한 영어 덕분에 초창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 각종 요직을 꿰찼다. 1949년 신정치협상회의 결과 주더, 류사오치, 리지선, 장란, 가오강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겸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전국부녀연합회 주석, 전인대 부의장, 문화대혁명 당시 주석 권한대행 등을 지냈다.

그는 공산당 치하에서의 대규모 숙청과 폐단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했다. 수천만 명이 대기근으로 아사한 대약진운동 시기에는 토법고로를 직접 집에 건설하기도 했고, 마오쩌둥의 세계 인구의 절반을 없애야 한다는 말에 활짝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한편 마오쩌둥 주석의 특사로 수많은 나라를 방문해 외교관으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이때문에 문화대혁명 당시 옛 국민당 계열 인사들이 대거 홍위병들의 조리돌림 대상이 되었을 때도 저우언라이의 보호를 받았을 정도였다.

죽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의 명예주석과 중국 공산당 입당 허가가 내려졌고, 그 직후 백혈병으로 영면했다. 위독해졌을 때 동생인 쑹메이링을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고, 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던 쑹메이링을 중국으로 초청했다. 하지만 쑹메이링이 중국공산당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쑹칭링은 동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6] 6월 1일, 타이베이 전신국은 베이징에서 보내온 쑹칭링의 사망 급전을 수신 거부했다.

3. 기타[편집]


중국공산당 계열에서는 당연히 높게 평가하지만, 국민당 계열에서는 혹평 일색이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시기에는 국민당 특히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민생 파탄을 혹독하게 비판했지만 정작 대륙을 차지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 정권이 장제스는 저리가라 할 정도의 인권 탄압과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면서 대기근으로 수천만 명이 굶어죽을 정도로 무능하다는 사실에는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고, 오히려 동조했다는 점이 비판거리이다. 사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남편의 유지를 잇는다면서 꾸준히 정치 활동을 했지만, 뚜렷한 업적을 남긴 것은 없으며,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에 이용만 당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쑨원의 적자인 쑨커 또한 장제스의 독재에 대립각을 세웠지만 계모인 쑹칭링을 싫어했고, 쑹칭링이 공산당과 결탁하여 아버지의 삼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대만에 거주하는 쑨원의 자손들은 중국공산당이 삼민주의를 왜곡하고 있고, 쑨원의 사상을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일생 동안 꾸준히 중국 여성 인권의 증진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받기도 한다.

문화대혁명의 수괴인 장칭은 쑹칭링에게는 매우 공손하고 사근사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쑹칭링은 장칭의 잔악함을 몰랐으나, 문화대혁명의 폭력성을 거론하자 바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장칭이 마음만 먹으면 남들에게 얼마든지 매력적으로 굴 수 있었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쑹칭링의 아버지인 쑹자수(宋嘉樹)를 '반동 매판 부르주아'로 공격하면서 홍위병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바로 장칭이었다.

4. 매체에서[편집]


파일:external/takeoharada.files.wordpress.com/3soon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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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작 중국 영화 <송가황조>에서 장만옥이 맡아 열연했다. 전반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한 편이다. 종반부에서 임종 직전 미국으로 이민간 막내 동생 쑹메이링에게 마지막으로 만날 것을 부탁하는 전문을 보내고 기다렸지만, 끝내 재회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7] 병상에서 동석한 과거의 하인(쑹칭링이 결혼하기 전부터 쑹칭링 집안에서 일했던 사람)이 "부인, 만약 부군이신 쑨원 선생께서 몇 년만 더 오래 사셨다면, 우리 중국의 역사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요?"라고 질문하자,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숨을 거둔다.

2009년작 중국 영화 <건국대업>에서는 허청이 연기했다.

파일:쑹칭링(Hearts of Iron IV Kaiserreich).png
<Hearts of Iron IV>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국민혁명이 분쇄된 이후 프랑스 코뮌이나 바라트 코뮌 등 해외로 망명한 다른 주요 인사들과 달리 중국에 남았고, 푸젠성 남부의 산간으로 들어가 게릴라 운동을 지휘한다. 쑹칭링의 공으로 국민당 좌파는 푸젠성 남쪽 끝의 룽옌에 해방구를 건설할 수 있었고, 이 해방구는 쑨촨팡의 죽음으로 중국 남부가 엉망이 되면서 국민당 좌파가 궐기할 때 그 기반지가 된다. 또한 쑹칭링 자신은 풀뿌리 민주주의 및 소수민족 자치권 존중 등을 내세우는 계파인 '민권파'의 수장으로 급진사회주의인 왕징웨이의 '민생파' 다음가는 세력을 갖추게 된다. 0.24 패치 전까지는 사회민주주의 계파로 분류되었지만 패치 후 급진사회주의에 통합되었다.


5. 주요 경력[편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원수
2대

공동대행

단독대행
류사오치

쑹칭링, 둥비우
(1968년 10월 31일 ~ 1972년 2월 24일)

둥비우

대행

대행

대행
주더

쑹칭링
(1976년 7월 6일 ~ 1978년 3월 5일)

예젠잉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초대




쑹칭링 (1981년 5월 16일 ~ 1981년 5월 28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대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개최
쑹칭링
(1949년 10월 1일 ~ 1954년 9월 27일)


6. 관련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쑹 가문의 세 자매(宋家姐妹, 宋氏三姐妹)
쑹아이링 - 쑹칭링 - 쑹메이링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6 11:09:08에 나무위키 쑹칭링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25년, 쑨원 총통과의 마지막 사진.[2] 중국에서 은행업자로 악명이 높았던 쿵샹시와 결혼한 언니 쑹아이링돈을 사랑한 여인,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이 된 동생 쑹메이링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고 불렸다.[3] 쑨원은 평생 이 이름으로 그녀를 불렀다.[4] 참고로 쑨원은 죽을 때까지 아내 루씨와의 혼인관계를 법적으로 정리하지 않았다.(...)[5] 쑨원은 고향에 부인 루(盧)씨와 1남 2녀가 있었다.[6] 이에 대해서 쑹메이링이 본인의 뜻으로 거절했다는 설도 있지만, 쑹메이링은 언니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했으나 의붓아들인 장징궈가 격렬하게 반대하여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7] 영화에서는 쑹메이링이 언니가 위중하다는 전보를 받고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예약한다. 병석에 누워있었던 쑹칭링은 뉴욕발 베이징행 비행기의 1등석을 누군가 한꺼번에 예약했다는 말을 듣고, 쑹메이링이 자기를 만나러 오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하지만 쑹메이링이 출발하기 전에 쑹칭링이 사망하여 자매는 만나지 못한다. 다만, 실제 역사에서는 쑹메이링이 언니를 만나러 오라는 중국 공산당의 초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베이징행 비행기를 예약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