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개요 == [[중국]]의 정치인. [[중국 공산당]] 2세대[* [[마오쩌둥]] 시대가 1세대, 덩샤오핑 시대가 2세대, [[장쩌민]]이 3세대, [[후진타오]]가 4세대이며 2012년 당 대회에서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5세대가 출범했다.] 중 가장 주요한 인물로, 일명 부도옹(不倒翁, [[오뚝이]])[* 직역하면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 몇 번이나 권력에서 쫒겨났어도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 데서 유래.] 혹은 작은 거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국의 다른 지도자들처럼 공산당의 1인자인 당 총서기나 국가 원수인 국가주석 자리에 앉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중앙고문위원회[* 미네무라 겐지라는 일본 르포 기자가 쓴 '13억분의 1의 남자'라는 책에 따르면, 은퇴한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모임으로, 덩샤오핑이 이 위원회의 주임을 맡던 시절, 중국에선 법치나 제도에 의한 통치보다 '사람에 의한 통치'가 더 중시되던 시기였으므로, 마오쩌둥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이 원로들의 발언력은 중국 공산당의 수뇌부인 상무위원회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실 꼭 이 케이스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케이스다. 물론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보긴 어렵다.] 주임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지금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 기구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라고 볼 수 있다. 중국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조직이기 때문인데, 인류의 정치사를 되돌아봐도 특히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은 독재 국가의 경우 군 통수권을 가진 자가 곧 권력자인 경우가 많았다.] 1978~1992년 중국의 최고 실권자로 군림해왔다. 이후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죽기 전까지 사실상 중공에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면 된다. 20세기 후반 [[중국 공산당]]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끈 인물로, 현대 중국 언론에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칭한다. [[흑묘백묘론]]으로 알려진[* 사실 이 말은 [[저우언라이]]가 먼저 한 발언을 이후 덩샤오핑이 인용한 것이다.] 실사구시적 태도를 취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융합을 시도했다. 일명 '''중국 특색 사회주의'''.[* 중국 공산당에선 이부분에 대해 덩샤오핑을 20세기 중국--공산당--을 중원에서 살려 낸 거인, 일명 '백년소평'으로 평가한다.]로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정치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당독재를 지속,[* 덩샤오핑은 (죽을 때까지 영향력은 행사했지만) 일단 표면상으로나마 1인 [[독재]]는 원치 않았는지, 임기제 확립이나 65세 이상 공직 금지 같은 몇몇 원칙들을 세웠다. 허나 세월이 흘러 이런 원칙들이 다수 무너지며 사실상 [[시진핑]] 종신집권으로 가는 분위기인 2010년대 후반의 중국 정치의 형세를 보면, 실질적인 견제와 감시 기능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소위 원칙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수도 있다.] 이에 반발하며 발생한 중국 인민들의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를 탄압하고 [[민중]] [[학살]]을 자행한 직접적인 최종 책임자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