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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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중앙군사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中央军事委员会 )는 인민해방군을 포함한 중국내 모든 무장력(Armed Forces)[4] 을 총괄·지도하는 기관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닌 중국공산당의 당군이다. 국공내전 승리 후 정부를 조직하면서 1954년에 국무원 산하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를 설치하였고 1982년에 헌법개정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개정 당시 당의 군사력 통제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이는 행정적인 것임을 천명하였다. 실질적으로 '한 기관 두 이름(一个机构两块牌子)' 제도에 따라 중앙군사위원회라는 하나의 조직이 당 조직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당중앙군사위원회)와 국가 조직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두 가지 명칭을 가진다. 이는 구조와 인원이 선출 시기에만 차이가 날 뿐 동일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5] 군사 관련 업무는 중군위에서 총괄하고 행정적인 부분(모병 등)만 국방부에서 담당한다. 따라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휘권은 중군위에 있다.
2016년 1월 군 지휘 체계가 대폭 개편되어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의 수도 11인에서 7인으로 대폭 줄었고, 기존의 총참모부와 총정치부, 총후근부와 총장비부의 4대 부서도 15개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기능부서로 개편되어 중앙군사위가 직접 관할하게 되어 당연히 시진핑의 군에 대한 장악력도 대폭 강화되었다. 현재 중앙군사위의 구성원(위원)은 다음과 같다.
주석을 제외하면 모두 현역 상장들이다. 중국은 장성 계급이 3개뿐이라서 최고 계급은 상장(上將)이며 실질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전구 사령원들도 모두 상장이다. 전구 사령원은 2016년 군제 개편 이후 중앙군사위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상장은 General로 번역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국방부장은 개국 때부터 1981년까지 모두 원수가 맡았으나, 현재는 상장이 맡고 있다. 하지만 원칙상 민간인이 맡으며 통수권자를 제외하면 군내 서열이 가장 높은 타국의 국방장관과는 달리 중국의 국방장관은 그저 여러 상장 중의 한 명에 불과할 뿐이며, 군의 행정 업무에만 관여한다. 펑더화이나 린뱌오 시절 때의 국방부장은 군의 2인자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지만, 현재는 제복군인의 1인자 역할은 두 명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들이 수행하고 있다.[6]
원래는 군인만으로 구성된다는 법은 없었고, 1970년대까지는 당이나 정부 인사들이 많이 참가했으나[7] 1989년 장쩌민 이후에는 주석을 제외하면 전원 군인으로만 구성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단, 실질적인 후계자로 여겨지던 시절의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후계자 수업 차원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역임했던 적이 있다.
2012년 11월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 군인이 차지한 부주석 자리 2석 중 1석에 창군 이래 최초로 공군 소속인 쉬치량 공군사령원이 임명되었다. 스텔스 전투기 J-20, J-31 개발 성공에 대한 포상의 의미로 추정된다.
2017년 가을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는 쉬치량이 유임되고, 장유샤가 새로이 부주석에 올랐다. 장유샤는 장비발전부장을 맡고있었으며 아버지 세대부터 서로 알고지낸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2022년 10월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장유샤가 유임되었고 허웨이둥이 새로이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허웨이둥은 동부전구 사령원을 맡았다가 연합참모부 작전국으로 이동하였고 이번에 부주석이 되었다.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급은 각 전구, 각 군 사령원[8] 으로 이루어진 정전구급보다 한 급 위에 위치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 휘하 부서들은 다음과 같다.
이 자리는 정년이나 임기가 없어서 죽거나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으며 국가주석, 당 총서기가 중앙군사위원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이 사실상의 이원집정부제 국가처럼 운영되는 기이한 광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정치적 실책 등으로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면서도 죽을 때까지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만큼은 내놓지 않았으며,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우며 자신에게 반기를 든 후임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실각시키는 등 계속해서 최고지도자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 사후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1인자가 된 덩샤오핑도 당 총서기나 국가주석 자리에는 앉지 았았지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움켜쥐고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국가주석은 리셴녠과 양상쿤이 맡았지만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연이어서 당 총서기를 맡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도 덩샤오핑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실무 책임자에 불과했다.[15] 그래서 덩샤오핑 시절에는 덩샤오핑이 중국의 공식적 국가원수인 국가주석도, 공산당 최고지도자인 총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부수반 뿐 아니라 국가원수 노릇을 했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 등 각국의 정상들과 회담을 한 사람이 덩샤오핑이었던 것만 봐도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은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국가주석, 당 총서기,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모두 장쩌민 한 명이 겸임하도록 내정하면서 당/정/군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였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배려 속에 장쩌민은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국무원 총리 자리에는 리펑을,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에는 류화칭을 내정하여 여차하면 장쩌민을 견제해 줄 세력들을 심어놓았고 실제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에 장쩌민 대 리펑의 파벌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같은 상하이방이었지만 계파가 달랐던 차오스 당시 전인대 상무위원장도 경쟁자 중 하나였지만 얼마 못 가 정계를 은퇴했다. 장쩌민이 확고하게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는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차오스 상무위원이 실각하고 난 뒤였다.
장쩌민은 자신에게 배정된 임기를 다 마치고 2002년에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자리를 덩샤오핑이 살아있을 때 정해준 후임자 후진타오에게 제때 넘기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는 그 이후로도 1년 10개월 동안이나 시간을 질질 끌면서 넘겨주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문단 상단의 사진과 같은 광경도 나올 수 있었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상하이방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는 관측이 팽배한데, 하여튼 후진타오는 집권 2년차까지는 군 통수권이 없는 반쪽 짜리 지도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결국 2004년에 후진타오는 중앙군사위 주석까지도 장쩌민으로부터 넘겨받았지만 장쩌민은 그 대신 자신의 측근이었던 쉬차이허우를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올려놓아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를 장악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방해했고, 그 때문에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넘겨받은 뒤에도 이미 군 고위층이 전부 장쩌민계 일색이라서 후진타오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외신 기사가 여러차례 나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은 주요 정치 행사 때마다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동일한 의전을 받는 등 퇴임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과는 달리 후임자 시진핑에게 국가주석, 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까지 모두 통째로 이양하였다.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반쪽 짜리 권력(당 총서기, 국가주석)만 이양하고 후진타오 측으로부터 자기 파벌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은 후에야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준 것에 비하면 심히 대조되는 모습.[16] 이에 대해 일본의 중국 전문 르포 기자인 미네무라 겐지가 쓴 '13억 분의 1의 남자'라는 책에 따르면, 원래 후진타오도 장쩌민처럼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만 시진핑에게 넘겨주고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자기가 갖고서 상왕 정치를 하길 원했지만, 전임자이자 정적이었던 장쩌민과의 알력 다툼에서 끝내 이기지를 못하자 장쩌민과 동귀어진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자리를 시진핑에게 넘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바라던 대로 장쩌민의 세력을 반부패 운동을 명분으로 숙청해 주면서 덩샤오핑 때부터 시작된 상왕 정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뒤에는 자신의 종신 집권 시대를 열었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사망할 시 관에는 오성홍기가 아닌 중국공산당기를 덮는다.
현재 생존 중인 전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후진타오 한 명 뿐이다.
역대 주석 중에서 가장 장수한 주석은 장쩌민이다. (향년 96세)
1. 개요[편집]
중앙군사위원회(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닌 중국공산당의 당군이다. 국공내전 승리 후 정부를 조직하면서 1954년에 국무원 산하에 중화인민공화국 국방부를 설치하였고 1982년에 헌법개정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개정 당시 당의 군사력 통제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이는 행정적인 것임을 천명하였다. 실질적으로 '한 기관 두 이름(一个机构两块牌子)' 제도에 따라 중앙군사위원회라는 하나의 조직이 당 조직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당중앙군사위원회)와 국가 조직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두 가지 명칭을 가진다. 이는 구조와 인원이 선출 시기에만 차이가 날 뿐 동일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5] 군사 관련 업무는 중군위에서 총괄하고 행정적인 부분(모병 등)만 국방부에서 담당한다. 따라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지휘권은 중군위에 있다.
2. 설립 근거 및 구성[편집]
상기했듯이 국가중앙군사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는 동일한 기관으로, 위원회 구성은 전적으로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보통 매5년 가을에 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새 중앙위원회가 출범하면, 중앙위원회 1차 전원회의(1중전회)에서 새 당중앙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이후 다음해 3월에 개막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당중앙군사위원회와 동일한 인적구성으로 새 국가중앙군사위원회를 선출한다.
3. 조직[편집]
2016년 1월 군 지휘 체계가 대폭 개편되어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의 수도 11인에서 7인으로 대폭 줄었고, 기존의 총참모부와 총정치부, 총후근부와 총장비부의 4대 부서도 15개 중앙군사위원회 직속 기능부서로 개편되어 중앙군사위가 직접 관할하게 되어 당연히 시진핑의 군에 대한 장악력도 대폭 강화되었다. 현재 중앙군사위의 구성원(위원)은 다음과 같다.
- 주석: 시진핑 (국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부주석 (2인): 현역 군인(공산당 중앙정치국원)
- 위원 (4인) 국방부장, 연합참모부장(합참의장격), 정치공작부 주임, 기율위원회 서기
주석을 제외하면 모두 현역 상장들이다. 중국은 장성 계급이 3개뿐이라서 최고 계급은 상장(上將)이며 실질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전구 사령원들도 모두 상장이다. 전구 사령원은 2016년 군제 개편 이후 중앙군사위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상장은 General로 번역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에 해당하는 계급이다.
국방부장은 개국 때부터 1981년까지 모두 원수가 맡았으나, 현재는 상장이 맡고 있다. 하지만 원칙상 민간인이 맡으며 통수권자를 제외하면 군내 서열이 가장 높은 타국의 국방장관과는 달리 중국의 국방장관은 그저 여러 상장 중의 한 명에 불과할 뿐이며, 군의 행정 업무에만 관여한다. 펑더화이나 린뱌오 시절 때의 국방부장은 군의 2인자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지만, 현재는 제복군인의 1인자 역할은 두 명의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들이 수행하고 있다.[6]
원래는 군인만으로 구성된다는 법은 없었고, 1970년대까지는 당이나 정부 인사들이 많이 참가했으나[7] 1989년 장쩌민 이후에는 주석을 제외하면 전원 군인으로만 구성된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단, 실질적인 후계자로 여겨지던 시절의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후계자 수업 차원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역임했던 적이 있다.
2012년 11월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 군인이 차지한 부주석 자리 2석 중 1석에 창군 이래 최초로 공군 소속인 쉬치량 공군사령원이 임명되었다. 스텔스 전투기 J-20, J-31 개발 성공에 대한 포상의 의미로 추정된다.
2017년 가을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는 쉬치량이 유임되고, 장유샤가 새로이 부주석에 올랐다. 장유샤는 장비발전부장을 맡고있었으며 아버지 세대부터 서로 알고지낸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2022년 10월 단행된 중앙군사위 인사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장유샤가 유임되었고 허웨이둥이 새로이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허웨이둥은 동부전구 사령원을 맡았다가 연합참모부 작전국으로 이동하였고 이번에 부주석이 되었다.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급은 각 전구, 각 군 사령원[8] 으로 이루어진 정전구급보다 한 급 위에 위치해 있다.
중앙군사위원회 휘하 부서들은 다음과 같다.
3.1. 기능 부서[편집]
[ 펼치기 · 접기 ] #000000,#e5e5e5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판공청]] [br]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연합참모부]] [br] ,,(정전구급)[br]前 [[총참모부]],, || [[중앙군사위원회 정치공작부|정치공작부]] [br] ,,(정전구급)[br]前 [[총정치부]],, || [[중앙군사위원회 후근보장부|후근보장부]] [br] ,,(부전구급)[br]前 [[총후근부]],, || [[중앙군사위원회 장비발전부|장비발전부]] [br] ,,(부전구급)[br]前 [[총장비부]],, || [[중앙군사위원회 훈련관리부|훈련관리부]] [br]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국방동원부|국방동원부]] [br] ,,(부전구급),, || |||||| [[중앙군사위원회 기율검사위원회|기율검사위원회]] [br] ,,(정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정치법률위원회|정치법률위원회]] [br]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과학기술위원회]] [br] ,,(부전구급),, || |||| [[중앙군사위원회 전략규획판공실|전략규획판공실]] [br]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개혁편제판공실|개혁편제판공실]] [br]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국제군사합작판공실|국제군사합작판공실]] [br]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심계서|심계서]] [br]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사무관리총국|기관사무관리총국]] [br] ,,(정군급),, || ||<-7><bgcolor=#ee1c25> {{{#ffff00 {{{-2 [[틀:중국공산당의 구성|{{{#ffff00 중국공산당의 구성}}}]]}}}}}} ||
-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9]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연합참모부[10] (정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정치공작부[11] (정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후근보장부[12]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장비발전부[13]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훈련관리부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국방동원부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기율검사위원회 (정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정치법률위원회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부전구급)
- 중앙군사위원회 전략규획판공실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개혁편제판공실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국제군사합작판공실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심계서[14] (정군급)
- 중앙군사위원회 기관사무관리총국 (정군급)
3.2. 전구 당국[편집]
- 중국 인민해방군 동부전구 (정전구급)
- 중국 인민해방군 서부전구 (정전구급)
- 중국 인민해방군 남부전구 (정전구급)
- 중국 인민해방군 북부전구 (정전구급)
- 중국 인민해방군 중부전구 (정전구급)
3.3. 군 조직[편집]
3.4. 직속 부대[편집]
- 중앙군사위원회 연근보장부대 (부전구 급)
3.5. 합동작전사령부[편집]
- 중앙군사위원회 합동작전지휘센터 (정전구 급)
3.6. 직계 대학[편집]
- 중국 인민해방군국방대학 (부전구 급)
- 중국 인민해방군군사과학원 (부전구 급)
- ’56년 원수(元帥) 예젠잉(葉劍英)의 창설 제의로 ’58.3.15 베이징에서 공식 개원
-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이론 연구 관련 고등 연구기구로서 전 군의 군사학술 연구센터 역할을 수행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직속기관
- 2017. 7월부 국방개혁 일환 전군 유사조직 통·폐합 및 개편. 10,000 여명 핵심인력 보유
- 연구원(8) : 전쟁, 군대정치공작, 군사법제, 시스템공정, 국방과기혁신, 군사의학, 화학방어, 국방공정
- 센터(2) : 평가논증연구, 군사과학정보연구
- 중국 인민해방군국방과학기술대학 (정군급)
- 1953년 창건된 ‘하얼빈 중국인민해방군 군사공정학원’이 전신
- 2017년 기존 국방과학기술대학, 국제관계학원, 국방정보(信息)학원, 시안(西安)통신학원, 전자공학학원, 이공대학기상해양학원 등 통합
- 2020년 현재 문리학원, 계산기(컴퓨터)학원, 전자과학학원, 지능과학학원, 첨단분야통합학원, 계통공정학원, 공천(우주)과학학원, 국제관계학원, 정보(信息)통신학원,전자대항학원, 기상해양학원, 군사기초교육학원 등 보유, 중국 군사과학기술 학술연구교육의 핵심기관
4. 주석[편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주석은 중국 군사력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어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 간주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중국의 최고지도자들은 모두 이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에 앉았다. 중국의 법적인 국가원수는 국가주석이고, 중국 공산당을 이끄는 건 당 서열 1위인 총서기지만, 실세는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다. 존재감이 약한 화궈펑도 일단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은 최고지도자 대접을 받았다.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이 자리는 정년이나 임기가 없어서 죽거나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 있으며 국가주석, 당 총서기가 중앙군사위원회를 장악하지 못하면 일당 독재 국가인 중국이 사실상의 이원집정부제 국가처럼 운영되는 기이한 광경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오쩌둥은 정치적 실책 등으로 국가주석에서 물러나면서도 죽을 때까지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만큼은 내놓지 않았으며,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우며 자신에게 반기를 든 후임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실각시키는 등 계속해서 최고지도자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오쩌둥 사후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1인자가 된 덩샤오핑도 당 총서기나 국가주석 자리에는 앉지 았았지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움켜쥐고 중국을 통치하였다. 이 시기에 국가주석은 리셴녠과 양상쿤이 맡았지만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연이어서 당 총서기를 맡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도 덩샤오핑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실무 책임자에 불과했다.[15] 그래서 덩샤오핑 시절에는 덩샤오핑이 중국의 공식적 국가원수인 국가주석도, 공산당 최고지도자인 총서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부수반 뿐 아니라 국가원수 노릇을 했다. 히로히토 일본 천황,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 등 각국의 정상들과 회담을 한 사람이 덩샤오핑이었던 것만 봐도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정부수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은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국가주석, 당 총서기,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모두 장쩌민 한 명이 겸임하도록 내정하면서 당/정/군의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였다. 덩샤오핑의 이러한 배려 속에 장쩌민은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국무원 총리 자리에는 리펑을,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에는 류화칭을 내정하여 여차하면 장쩌민을 견제해 줄 세력들을 심어놓았고 실제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에 장쩌민 대 리펑의 파벌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같은 상하이방이었지만 계파가 달랐던 차오스 당시 전인대 상무위원장도 경쟁자 중 하나였지만 얼마 못 가 정계를 은퇴했다. 장쩌민이 확고하게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는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차오스 상무위원이 실각하고 난 뒤였다.
장쩌민은 자신에게 배정된 임기를 다 마치고 2002년에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 자리를 덩샤오핑이 살아있을 때 정해준 후임자 후진타오에게 제때 넘기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는 그 이후로도 1년 10개월 동안이나 시간을 질질 끌면서 넘겨주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문단 상단의 사진과 같은 광경도 나올 수 있었다.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상하이방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는 관측이 팽배한데, 하여튼 후진타오는 집권 2년차까지는 군 통수권이 없는 반쪽 짜리 지도자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결국 2004년에 후진타오는 중앙군사위 주석까지도 장쩌민으로부터 넘겨받았지만 장쩌민은 그 대신 자신의 측근이었던 쉬차이허우를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올려놓아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를 장악하지 못하게 계속해서 방해했고, 그 때문에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넘겨받은 뒤에도 이미 군 고위층이 전부 장쩌민계 일색이라서 후진타오의 영향력이 제한적이라는 외신 기사가 여러차례 나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은 주요 정치 행사 때마다 후진타오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동일한 의전을 받는 등 퇴임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과는 달리 후임자 시진핑에게 국가주석, 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까지 모두 통째로 이양하였다.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반쪽 짜리 권력(당 총서기, 국가주석)만 이양하고 후진타오 측으로부터 자기 파벌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은 후에야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준 것에 비하면 심히 대조되는 모습.[16] 이에 대해 일본의 중국 전문 르포 기자인 미네무라 겐지가 쓴 '13억 분의 1의 남자'라는 책에 따르면, 원래 후진타오도 장쩌민처럼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만 시진핑에게 넘겨주고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자기가 갖고서 상왕 정치를 하길 원했지만, 전임자이자 정적이었던 장쩌민과의 알력 다툼에서 끝내 이기지를 못하자 장쩌민과 동귀어진하기로 결심하고 모든 자리를 시진핑에게 넘긴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후진타오가 바라던 대로 장쩌민의 세력을 반부패 운동을 명분으로 숙청해 주면서 덩샤오핑 때부터 시작된 상왕 정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뒤에는 자신의 종신 집권 시대를 열었다.(...)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사망할 시 관에는 오성홍기가 아닌 중국공산당기를 덮는다.
4.1. 생존 중인 전직 주석[편집]
현재 생존 중인 전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후진타오 한 명 뿐이다.
역대 주석 중에서 가장 장수한 주석은 장쩌민이다. (향년 9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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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상] [1] 건물명인 팔일(八一)은 중국공산당이 건군 시점으로 잡는 난창 폭동 발발일에서 유래했다.[2] 진록색이 육군(무장경찰+전략지원부대 포함), 하얀색이 해군, 청색이 공군, 검은색이 로켓군이다.[3] 1990년대의 장쩌민 국가주석 이후 역대 중국의 국가원수는 대부분의 공식 석상에서 서양식 정장을 입지만,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참석하는 행사는 반드시 인민복을 입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사진 속에서 시진핑의 복장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것.[4] 사회주의 국가의 'Armed Forces'는 단순히 군대만이 아닌 군사력, 공안력, 민병대 등의 국가 내 모든 무장력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고로 '군'이 아니라 '무력' 또는 '무장역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자국의 육해공군을 비롯한 무장력을 '무력'으로 합쳐 최고사령관직에 김정은을 앉힌 사례나 베트남에서 국가주석이 전통적으로 인민군, 인민공안, 자위민군을 합친 개념인 '인민무장역량'의 총사령직을 겸하는 사례, 쿠바 또한 전반적 무장력인 쿠바 혁명무력이 존재하고 그 최고수위에 국가주석을 추대한 사례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소련무력으로부터 내려오는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총동원전 교리에서 유래한 것이다.[5] 위키백과 중문판의 경우 두 위원회가 중앙군사위원회라는 문서명으로 같이 서술되어 있다.[6] 이들은 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에도 참여한다.[7] 반대로 당 정치국, 심지어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도 린뱌오, 예젠잉 등 현역 장성들이 다수 참여했다. 정치장교였던 덩샤오핑이 군에 강력한 입김을 갖고 있던 것도 그렇고, 신중국 수립 이전에는 군사행동과 정치행위가 서로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인과 군인의 구분도 흐릿했던 것.[8] 중국에서는 사령관을 사령원이라고 부른다. 이는 예전 무계급제의 흔적으로, 대부분의 권위주의적인 명칭을 모두 평범하게 바꾸었다.[9] 사무국[10] 합동참모본부[11] 공작은 사업을 뜻한다[12] 물류지원부[13] 발전은 개발을 뜻함[14] 감사실[15] 후야오방은 급진적인 정치 개혁을 주장하다가 덩샤오핑에 의해 당 총서기 자리에서 한 방에 짤렸다. 그리고 후야오방이 1989년 사망하자 전국에서 추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게 바로 천안문 6.4 항쟁의 시작이 됐다. 후야오방의 후임자였던 자오쯔양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가 숙청됐고 장쩌민이 후임 총서기가 되었다.[16] 다만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의 임기가 불일치하기 때문에 시진핑은 당 총서기에 취임하면서 먼저 공산당 중군위 주석 자리를 넘겨받았고 이듬해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직도 함께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