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 == '''그리고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 이데올로기적 신봉만이 아니라 실무 능력도 우수했고 인망도 높았기 때문에 유언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 유언은 화궈펑의 조작이었다는 루머가 있다.]이 문화 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 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이것이 화궈펑이 오래 집권하지 못한 원인이다.]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 수습이 어려웠으므로[* 당시 중국의 여론은 문혁으로 인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하방정책으로 농어촌지역의 노동력이 과잉상태였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던지라 문화대혁명에 몹시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오는 물러가시오!'''와 같은 구호가 나왔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나온 사건이 제1차 천안문 사건.],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이 당시에도 이미 서방 외교관들은 화궈펑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전제적인 황제였다."고 할 정도. 여담으로 화궈펑은 권력에서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대략 우리나라 국회의원 급)으로 20년 동안 활동하고 후에도 원로로 잘 대우받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 권력에서 축출되어도 어느 정도의 지위와 대우를 받게 된 최초의 케이스. 이후 [[자오쯔양]]과 같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중국 공산당 내의 권력 다툼은 지더라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