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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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bgcolor=#cd0000><width=15%> 초대 ||<width=35%>
인민위원장

블라디미르 레닌 ||<bgcolor=#cd0000><width=15%> 제2대 ||<width=35%>
이오시프 스탈린 ||
||<bgcolor=#cd0000><width=15%> 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bgcolor=#cd0000><width=15%>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bgcolor=#cd0000><width=15%>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bgcolor=#cd0000><width=15%>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bgcolor=#cd0000><width=15%>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bgcolor=#cd0000><width=15%>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미하일 고르바초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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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초대 대통령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파일:gorvachev.jpg
출생
1931년 3월 2일
소련 러시아 SFSR 북캅카스 지방 메드베젠스키군 프리볼노예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 지방 크라스노바그데이르스키군 프리볼노예)
사망
2022년 8월 30일 (향년 91세)
러시아 모스크바 쿤세보구 티모셴코 중앙임상병원
묘소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6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85년 3월 11일 ~ 1991년 8월 24일
제11대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1988년 10월 1일 ~ 1989년 5월 25일
초대 소련 최고회의 주석
1989년 5월 25일 ~ 1990년 3월 15일
초대 대통령
1990년 3월 15일 ~ 1991년 12월 25일
서명
파일:미하일 고르바초프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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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
어머니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1]
배우자
라이사 막시모브나 고르바초바 (1953–1999, 사별)[2]
자녀
딸 이리나 미하일로브나 비르간스카야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
학력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사실상 러시아 정교회)[3]
신체
175cm
주요 서훈
노벨평화상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레닌훈장 (3회)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정치인
2.3. 페레스트로이카
2.4. 퇴임 후
2.5. 사망
3. 평가
3.1. 정치
3.2. 경제
3.3. 중국과 비교
3.4. 지역별 평가
3.4.1. 서구권
3.4.2. 러시아
3.4.3. 동유럽
3.4.4. 북한
3.4.5. 한국
4. 여담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5.2. 게임
5.3. 기타
6. 소속 정당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소련러시아의 정치인.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6대 서기장,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과 최고회의 주석[1]을 거쳐 소련의 최초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최고 권력자로 재임하면서 소련 내 개혁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추진했다. 동시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던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이자 소련 해체를 야기한 정치인으로써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1931년 캅카스 산맥 인근에 위치한 스타브로폴 프리볼노예에서 농부였던 세르게이 안드레예비치 고르바초프와 마리야 판텔레예브나 고르바초바 사이에서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당시 스타브로폴 지방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고르바초프의 외가는 우크라이나카자크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

공산국가에서 중요시하는 출신성분은 농민으로서 사회적 계층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표방하는 소련에서 그의 출세는 아무 걸림돌이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 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도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농장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기도 했다.


2.2. 정치인[편집]


평소 근면하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 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당시 소련 내 엘리트들이 진학하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해 1955년 법학 학위를 받았다. 재학 시절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로써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인 공산당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 스타브로폴 지구당 서기 시절 남들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중앙에서 내려온 금주 조치를 실천한 까닭에 '광천수 서기'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2] 서기 재임 시절 휴양 차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한 고위 당관료들을 성실히 맞이하는 모습이 당시 KGB 주석이었던 유리 안드로포프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드로포프는 다른 관리들과 달리 고르바초프가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더불어 하루에 10시간 정도 근무를 불평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에 높은 평가를 내리고 고르바초프를 중앙 정계에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이렇게 고르바초프는 농업문제에 대해서 브레즈네프나 코시긴에게 직언하는 등 강단이 있는 간부로 여겨졌고, 1978년 11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에 선출, 정치국 후보위원을 거쳐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 되었다. 서기국 책임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도 그를 상당히 높이 평가하여 바로 정치국 위원 자리를 주려고 했고 안드로포프도 그를 아꼈다. 반면 체르넨코는 고르바초프를 전임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인맥으로 생각하여 견제했다.

안드로포프는 고르바초프가 자신의 후임자가 되길 바랬으나 1984년 일찍 사망하면서 원로 정치인이었던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승계한다. 당시 체르넨코는 차후 서기장에 오를 수도 있는 유력자였던 고르바초프를 견제하기 위해 고르바초프를 정치국에서 해임하려고 했으나, 고르바초프에게 우호적이었고, 서기장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던 국방장관인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는 고르바초프를 지지하였다.

1985년 3월 체르넨코가 평소 앓던 지병으로 사망하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새로운 서기장 후보를 두고 고심했다. 당시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미국과 군비경쟁으로 인한 막대한 군비 소모, 경기침체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산재한 상태였다. 따라서 정치국은 이전 전임자들과 달리 장기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체제 개혁을 주도할 지도자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정치국에는 몇십여년 가량 소련 외교를 이끈 안드레이 그로미코등 오랜 시간 동안 소련 정치계를 이끌던 원로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기 전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했던 일을 지켜본 공산당 지도부는 또다시 지도자를 맡은 원로 정치인이 별다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연달아 노환으로 사망하는 일만큼 피하고자 했다. 따라서 당시 정치국원 중 가장 젊으면서도 평판이 좋은 신진인사에 속했던 고르바초프는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따라서 1985년 3월 11일, 정치국은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신임 서기장에 선출했다.


2.3. 페레스트로이카[편집]


고르바초프 개혁의 원본 노선은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였던 소련과 중앙/동유럽을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이였다. 소련 공산당 역시 이전 프라하의 봄 당시 추진되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비슷하게, 공산당 내부에서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순수 계획경제에서 혼합경제로 이전,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는 전과 비슷하게 하고 기업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브레즈네프 이래로 만연했던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는 전반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북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정책은 여러가지 문제를 촉발시켰다.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시장경제 도입을 추진했고, 1990년에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정치체제의 개혁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돼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막장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 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 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혼란이 닥쳤던 것이다. 사실 이전, 그러니까 브레즈네프 집권 이전에도 코시긴이 비슷한 경제개혁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그 결과는 이와 비슷한 폭망이었다. 즉 계획경제에서 갑자기 자율성과 경쟁체제를 도입한 결과는 굉장히 파멸적이었다.

원래 의도는 보조금을 줄이고 고급 상품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일을 줄이는 것이었지만, 막상 경영 자율화를 시켰더니 국영기업들이 국영상점에 싼값에 내놓아야 할 물건을 암시장에 몇배 이상의 가격으로 비싸게 팔면서 수십년간 (강제적으로) 안정화시켜 놓았던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통체계가 난잡해지면서 이전에 줄을 서지 않아도 될 상품을 (값싸게) 사기 위해서 줄을 서야 했으며 줄을 서지 않으려면 시장에서 바가지를 써서 상품을 구해야했다.

또한 물가상승분을 벌충하기 위해 돈을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통화량 증대로 은행에 예금은 넘쳐났고, 구매력도 크게 올랐지만 막상 돈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생산 부문 투자는 그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줄은 더욱 길어지고 지하경제는 더욱 융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전에는 물자부족 문제가 주로 소도시에 집중된 문제였기 때문에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키이우, 민스크 등의 주요 대도시 지역으로 가면 생필품이나 물자들을 값싸게 구할수 있었지만, 고르바초프 중후반기 들어서는 대도시에서 조차도 값싸게 물자를 구하기 힘들어져서 시장에서 비싼 돈을 주거나 줄을 길게 서야 했으며, 고르바초프 후반기에는 배급제가 다시 실시되는 등 계획경제체제의 마비가 뚜렷해지자, 생활경제는 점차 악화되었다.

처음부터 경제개혁이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라서 1988년에 일시적으로 경제성장률이 5.5%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9년 동구권 및 코메콘 붕괴를 기점으로 다시 침체기로 접어들었고 1990년에 대조국전쟁 이래 최초로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또한 경제 불안정과 더불어 소련 루블의 암시장 환율은 급속히 상승했다.

또한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글라스노스트를 계기로 그동안 소련이 억눌러 왔던 다양한 정치적 요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소련 공산당은 날로 증가하는 인민들의 개혁요구를 수용하는데 벅차기 시작했다.[3]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를 마련하는가 하면, 연방 구성국들의 독립이 임박하자 중앙아시아캅카스에서도 나고르노-카라바흐남오세티아, 압하지아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주류민족과 소수민족 사이 유혈사태를 동반한 민족갈등이 발생했다.


결국 1991년 고르바초프는 날로 팽창하는 지하경제와 높아져 가는 물가상승률을 잡으려고 1991년 1월에 50루블과 100루블권 지폐를 무효화하는 방식의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하지만 사전에 화폐개혁 정보를 입수한 당간부 등 노멘클라투라 계층은 미리 대비책을 마련한 뒤라 실질적인 효과는 크지 않았다. 여기에 뒤이은 1991년 8월 쿠데타로 고르바초프는 허수아비가 되고 각 산하 공화국들은 세금을 중앙정부로 납부하지 않고, 각 공화국별로 연계가 되었던 산업시설간의 연계도 끊어지기 시작하며 생필품 공급이 급속히 줄기 시작하며 소련의 경제는 마비되었다.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당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의 저항을 이끌어내면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결국 소련은 1991년 12월 해체된다.


2.4. 퇴임 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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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루이 비통 광고에 출연한 고르바초프 (76세)

이후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보리스 옐친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0.5%를 기록했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명예고문 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퇴임 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대우가 형편 없었다. 나름대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고르바초프도 연금 지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일반 연금 생활자들은 말도 할 것도 없어서 몇 달씩 연금이 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도 수입이었는데[4] 고르바초프는 루이 비통, 피자헛 등 외국 기업의 CF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1일에 드미트리 무라토프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에게 자금 후원을 해 노바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지금도 1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언론사에 들어간 기자들은 정말 육체적 목숨을 걸고 일하고, 언론사에서 기자들에게 개인무장용 권총까지 지급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항목에서 알다시피, 푸틴은 개인이 자신을 욕하는 건 쿨하게 관심도 없다는 듯 넘기지만, 기자와 언론사 레벨로 올라가면 해당 언론사는 탄압당하고, 기자들은 의문사를 당하거나 실종당하는 경우가 많다.

1996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의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소련 부활을 내세운 겐나디 주가노프가 1차 투표에서 옐친과 비슷한 득표율(옐친 35%, 주가노프 32%)을 받은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당대 평판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가끔씩 푸틴을 치켜세우고, 푸틴도 나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라고 훈장도 달아주고 고르바초프의 말에 상당히 많이 대꾸하는 거 보면 서로 애증의 관계다. 반(反) 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 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통합 러시아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 소속 국가두마 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2014년부터는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행정편의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인데 이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상, 다시 러시아에 와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한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2008년 10월 국제환경포럼, 2009년 5월 세계평화의 종 공원 준공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두 행사 모두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2009년 5월에는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참석했다.

2011년 3월에는 러시아 최고 등급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았다. 누가봐도 그냥 요식행위로 준 게 뻔하다.

2011년 8월에는 푸틴 정권이 소련 공산당의 다운그레이드판이며 구태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푸틴을 옐친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12월에는 148%에 대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푸틴은 대통령 2번, 총리 1번 했으면 충분하다며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러시아의 정치 불안이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입국을 금지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당수직을 역임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후에 정의 러시아당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에 합류하는 대신 사회민주연대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2016년 4월에 방한해 제주포럼에 참석했다.

2016년 6월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 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았다. 기사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 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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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6세의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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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나는 여전히 낙관론자》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다.#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 중국의 경제 모델을 호평한 적도 있다.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0년에는 <태양 아래>, <푸틴의 증인들>로 유명한 반(反) 푸틴 영화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이건 2021년에 <고르바초프. 헤븐(Gorbachev. Heaven)>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상영됐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만스키의 작품 자체가 배급금지를 먹었다.

9월에는 대통령 3번, 총리 1번이면 충분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제 물러나야 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하는 등 또다시 푸틴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다.# 하지만 흘러간 정치인인데다가, 고르바초프 본인의 영향력도 거의 없는지라 딱히 푸틴이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2021년에는 2016년에 이어 또 제주포럼에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참석했다.#

2021년 8월 17일, R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탈출하는 미군과 아프간인의 참상에 대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며,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고 평했다.#

다음 날인 8월 18일, 소련 보수파 쿠데타 30주년을 앞두고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정권의 독재적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또다시 푸틴을 건드렸으며, 그럼에도 본인은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어려움, 오류, 좌절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2022년 1월 13일에 소련의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군사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위기가 고조되자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부시가 한 약속을 깬 NATO미국을 비난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본인은 공개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며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

서방언론들은 러시아의 반푸틴 성향 언론인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를 인용하여, 고르바초프는 베네딕토프한테 푸틴은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들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2.5. 사망[편집]


모스크바 현지 시각 기준으로 2022년 8월 30일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 현재 러시아 대통령이 이용하는 모스크바 중앙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1세로 역대 소련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역대 소련 최고지도자들이 묻힌 크렘린 벽 묘지가 아니라 니키타 흐루쇼프보리스 옐친이 묻힌 노보데비치 수도원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크렘린 대변인의 발표와 같이 장례는 완전한 국장은 아니나 의장대와 정부 차원의 지원 기구 설치 등 국장적인 요소가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진행되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오시프 스탈린등의 전임 소련 최고 지도자들의 장례식이 거행된 조합회관(Дом союзов) 콜로니 홀에서 9월 3일 거행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추모를 하였으며, 장례식 당일이 아닌 9월 1일 모스크바 중앙 임상 병원에 방문 및 조문해 붉은 장미를 헌화한 뒤 관에 손을 얹고 있다가 성호를 긋고 자리를 떠났다. 장례식에는 일정상 불참했다.

완전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소련의 최고지도자 중에는 니키타 흐루쇼프도 있다. 그는 실각 후에 격리되어 지내다 1971년 사망하였다.

일반 방문객들의 조문은 3시간 30분 가량 진행되었으며 가디언지에 따르면 조문한 러시아의 자유주의 계열 시민들은 고르바초프를 영웅이라고 칭송하였고, 수천 명의 인파가 고르바초프를 조문하기 위해서 조합회관에 방문하였다. 장례식 당일 모스크바 도심의 경비는 삼엄했는데 무장한 병력들과 차량들이 곳곳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 한편, 발트 3국은 독립 시도를 유혈 진압했던 것을 이유로 추모를 가지지 않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애도를 표했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장례식에 직접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시절 소련과 수교를 맺었던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조전을 보냈다. 윤 대통령은 조전을 통해 "고인은 대립과 갈등의 냉전 시대를 종식시키고 화해와 평화를 끌어낸 지도자이자, 한국과 러시아 간 우호, 협력 관계의 확고한 틀을 마련한 선구자였다"고 평가했다.

소련 최후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가 사망함으로써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냉전을 종식시키고 탈냉전 시대를 개막시켰으나 세계가 다시 신냉전으로 돌입하는 것을 보고 잠들게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면서 러시아와 서방간의 관계가 소련 시절 그 이상으로 최악이 되고말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서 러시아에 암울한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한 고르바초프 사망 후 약 열흘이 지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석 달 이후 장쩌민 전 중국 주석이 사망하면서 고르바초프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주요국 지도자들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3. 평가[편집]



3.1. 정치[편집]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5]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가까스로 화해 했다. 또한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다.[6]

고르바초프의 비간섭 노선은 1989년 동유럽 혁명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소간 긴장 완화로 인해 전세계적인 민주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한국,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및 남미 국가들에서 군사독재가 끝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1989년 12월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정상회담을 가지면서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정치인으로써 고르바초프가 세운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7]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비슷한 사례로 1957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첼랴빈스크-40에서 약 800㎢ 정도 면적의 땅에 7,600㎥ 규모의 방사능 폐기물이 쏟아진 키시팀 사고로 인해 우랄 강이 삼도천으로 변하자, 당시 소련 정부는 24개 마을을 불도저로 쓸어버리고 거주민 1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을 때는 정보 통제로 철저히 묻었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보다 더 급진적으로 소련 사회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정치인으로써 수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동시에 정치인으로써 수많은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선 고르바초프는 선출 때부터 소련 정부 내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지도력이 확고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태생적 약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3월 서기장에 선출될 당시 브레즈네프 시절 KGB 의장이자 브레즈네프 사후 서기장으로 취임했던 유리 안드로포프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당지도부에 진입한 신진인사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할 고르바초프가 속한 19명 정원의 제27기 당정치국에서도 나이순으로 막내였다.[8] 명목상이라도 집단지도체제의 도구였던 당정치국에서 여러모로 고르바초프보다 경력도 많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입지를 쌓은 다른 정치국원들을 고려한다면 고르바초프의 정치력은 기존 원로에 비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개혁에 대한 당시 소련 정치인들 사이 입장 차이도 결국 고르바초프와 동맹격이었던 정치인들을 하나둘씩 떠나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 대표 정치인이었던 니콜라이 리즈코프는 초창기 고르바초프와 협력 관계였으나, 이후 고르바초프와 개혁 진행 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으며 보다 보수적인 접근을 강조하여 고르바초프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의견을 들어준다고 생각한 리즈코프는 고르바초프를 떠났다. 이후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한 외무장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나 고르바초프의 주요 조언가였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등, 고르바초프는 급진개혁파나 개혁파, 온건보수파나 강경보수파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 세력을 편들수록 점차 주위에 있는 우군을 잃어갔다.

고르바초프는 집단지도체제인 당정치국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1980년대 말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소련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만, 이 때는 오히려 소련 공산당을 탈당한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 출신 정치인들로부터 반대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민주화와 선거를 일부 허용하더라도 독립 민족주의가 있는 공화국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방자치를 허용한 것은 실수였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독립을 외치면서 소련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고, 중앙아시아캅카스에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은 지역 정치인들의 갈등으로 소수민족 폭동 사건들이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자, 아르메니아 SSR과 아제르바이잔 SSR 최고소비에트 대표들의 갈등으로 1988년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소련 붕괴 이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이런 난맥상에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8월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


3.2. 경제[편집]


고르바초프가 취임할 당시 소련 경제 상황은 여러가지 사유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우선 아프간 전쟁을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초에 비해 크게 떨어진 유가의 영향으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노빌 사태나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등 여러 대형악재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개혁을 추진할 여건이 못 되었다. 그럼에도 고르바초프는 사회와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급하게 개혁안을 실시해 소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다.

사실 고르바초프의 이전에도 소련 내에는 여러 경제적 문제가 존재했다. 농업이고 공업이고 모두 선진국에 비해서 생산성이 매우 낮은데다가, 루블화의 통화적 지위도 모호했고, 거기다가 매년 수십억 달러의 전비를 쓰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있었고 체르노빌 참사과 같은 인재도 발생했다. 소련이 근본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영미권 논객들이나 일부 고르바초프 옹호자들이 이런 문제들이 고르바초프 내에서 발생된 문제가 아니거나 근본은 이전시대부터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에게는 민생안정 실패, 개혁 실패와 결과적인 소련 해체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정치인의 책임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한 것으로, 고르바초프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것은 젊은 리더쉽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공산당 고위직의 기대로 선출되었던 것이고, 본인이 이런 중책과 권한을 함께 떠맡았으면서도 결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국가의 해체를 불렀으므로 당연히 개혁 실패는 당연히 고르바초프의 책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9] 특히 고르바초프는 조급한 마음에 1987년부터 검증되지 않은 실험적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위태위태하던 소련경제를 완전히 박살냈기 때문에 소련 멸망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고르바초프는 집권 처음 2년간은 점진적인 개혁을 취했는데, 이당시만 해도 소련은 여러 문제를 겪었을지언정 고르바초프 말기의 혼란상은 나타자니 않았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개혁의 결실을 빨리 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집권 2년차인 1987년부터 갑자기 여러 개혁조치들을 한꺼번에 시행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국영기업만 있었는데, 민간기업이나 외국합자 기업투자 허용, 여기다가 정치적 자유까지 보장했다. 의도는 물론 좋은 것이었으나, 사회주의에 길들여져 있던 여러 경제주체들이 갑작스럽게 도입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 못하는 것은 당연한 터였다. 이는 며칠 굶어 있던 사람에게 갑자기 철인3종 경기 출전하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혼란이 계속되는건 당연했는데, 고르바초프는 속도를 늦출 생각을 하지 않고 더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1990년 9월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샤탈린의 제안으로 500일 계획이라는 급진적인 시장 경제 계획을 발동했는데, 이는 500일동안 국유재산의 전부를 사유화, 모든 국유기업의 민영화, 국가가 제공하던 의료, 주택, 교육서비스들의 민영화를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년 조금 넘는 기간동안 사회주의로 돌아가던 소련과 같은 거대 경제를 완벽한 서구식 자본주의로 바꾼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마치 1950년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10년안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망상으로 펼친 대약진운동처럼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결국 이는 1991년 소련 전역에서 아비규환을 불렀다.

500일 계획이 실행된 직후인 1991년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1%를 기록하였으며 인플레이션은 300%가 되었다. 배급으로 돌아가던 여러 생필품들의 공급이 중단되고, 교통과 같은 서비스까지 중단되면서,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운영 자체가 마비될 작정이었다. 여기에다가 정치적 자유를 지나치게 보장한 결과, 자유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여러 소련 인민들이 방종으로 흘렀고, 걸핏하면 시위나 파업에 들어가 혼란이 가중되었다. 더 안좋은 것은 소련 산하 각 공화국에서는 소련에서 독립하겠다는 독립세력들의 운동이 불붙었는데 고르바초프는 수수방관했고 이는 그동안 억눌려왔던 민족갈등까지 폭발하여 여러지역에서 민족간 학살극이 벌어지는 등(위 참조), 국가 전체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1991년 8월 이를 참다 못한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하야시키려고 했으나, 보리스 옐친이 시민을 규합해서 항의를 조직해 실패했고, 옐친의 도움으로 대통령직에 복귀한 고르바초프는 아예 권력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에게 선양하듯이 정권을 넘겨주었다. 옐친의 손에서 소련은 허무하게 해체된다. 그러니까 아예 옐친은 연방체제는 자기 지도력 밖이라고 생각했는지 첨부터 균질하고 경제력이 높은 알짜 지역인 러시아만 가지고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를 밀어내고 집권한 보리스 옐친은 고르바초프가 실행하다가 실패한 샤탈린의 500일 계획을 중단하기는 커녕 이름만 바꿔 그대로 밀어붙였고, 가격 자유화 및 예금동결 정책으로 물가 폭등을 유발하며 예금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서 러시아 서민들의 재산을 완전히 휴지조작으로 만들어버렸고, 소련시절 위태위태하게 돌아가던 사회복지제도도 유명무실해지고 알짜 국영기업들을 헐값에 민영화하며 소수의 올리가르히에게 국부를 넘기는 대신에, 이들 민영기업들이 경영합리화 명목으로 수많은 노동자를 해고하면서 실업률이 급등하여 그야말로 지옥도가 열리게 되었다. 그 결과 옐친이 집권한 1990년대에는 러시아 민중들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던 1980년대보다도 훨씬 더 참혹한 삶을 갈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지향하는 지방 분권화와 경영 자율권 확보는 1920년대 소련, 그리고 1960-80년대의 헝가리에서는 효과를 봤지만 고르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고 거기에다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간에 정치적인 급변 상황까지 겹치며 경제파탄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기에 소련 붕괴 이후로 극도로 벌어진 빈부 격차를 생각하면 경제개혁 실패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자신의 독재를 합리화 하면서 항상 "1990년대로 되돌아 갈수 없다"고 상기하는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경제실패가 얼마나 러시아인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알 수 있다.


3.3. 중국과 비교[편집]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동시기 추진되었던 덩샤오핑의 개혁과 자주 비교된다.

두 나라의 사정을 우선 비교해보면 소련 말기 경제 사정이 상당히 나쁘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 중국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80년대초 중국의 1인당 GNP는 200달러 남짓이였다. 당시 중국은 만성적인 식량부족으로 당간부도 식량배급을 받을 정도로 못살았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은 1985년 소련의 GNP는 3,300불 언저리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당시의 중국보다는 훨씬 더 잘 살았다.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고르바초프는 2000년대 중국 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10]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하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신중하게 추진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냉전 초,중기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많다. 중국이나 소련이나 계획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 반발은 엄청났다.

여기서 덩샤오핑은 군권을 이용해 유혈사태를 감수하면서 민주화 여론을 유혈진압했다. 하지만 동시에 마오쩌둥 사후 마오쩌둥을 '공칠과삼'으로 평가해 문화대혁명을 과로 분류하면서도 공 또한 인정한 것은 덩샤오핑의 교묘한 정치술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볼 수 있다.[11] 덩샤오핑의 뛰어난 정치술 외에도, 덩샤오핑이 마오 사후 당 중앙군사위 주석을 역임하면서 군권을 장악했던 것이 덩샤오핑의 성공 요인이기도 했다. 천안문 사태 역시 이로 인한 부작용과 모순점들이 누적되면서 이에 반발하여 발생한 사건이었지만, 덩샤오핑은 천안문 사태를 무력 진압함으로써 당내외 반대파의 움직임을 잠재웠다. 이후 남순강화 등을 통해 개혁정책을 강화했다. 이렇게 중국은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현재 중국은 30여년에 걸쳐 계획경제를 자본주의로 전환 중이나 아직까지도 토지나 부동산 같은 경우는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중국의 모든 토지는 국가의 소유이며, 지상권의 매매만 가능하다. 지상권이 소유권에 준하는 강력한 권리인데다가, 일반적으로 국가에서 수십년간의 지상권을 보장해주기는 하지만, 실제 본인 소유인 것은 아니므로 중국 부자들이 홍콩이나 해외 부동산 투기에 환장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중국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공산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1998년도에 IMF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고 경기부양을 할 목적으로 공공주택(복리방)의 공급을 축소하고 기존 공급주택을 사유화하거나 민영주택을 대거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지방정부에서 부동산 판매로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바람에 서구권 국가나 러시아처럼 부동산 투기가 사회적인 문제점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3.4. 지역별 평가[편집]



3.4.1. 서구권[편집]


서구권에선 반세기 넘게 세계를 지배했던 냉전 체제를 종결시키고 평화민주주의를 추구한 정치인으로써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재임 기간 중 고르바초프는 서구권에 우호적인 정책을 추구하며, SDI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등 긴장 조성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가져다주던 냉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겪던 동유럽 국가들이 민주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환경오염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방사능 사고가 전세계를 위협하는 일을 예방할 수 있었다.


3.4.2. 러시아[편집]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고르바초프를 소련을 개혁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해체시킨 정치인으로 평가한다. 비록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사후에도 청산되지 못했던 권위주의적인 체제를 개혁하고, 소련 사회를 보다 민주적인 사회로 바꿔나가려 시도했지만, 중국이나 베트남같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무리한 개혁개방 정책을 급격히 추구하면서 소련이 붕괴한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그동안 러시아 국민들이 누려온 복지나 사회 체계가 무너지면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던 중장년 세대는 고르바초프가 원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러시아는 초강대국에서 3류 국가로 추락했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렸다. 군대만 해도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 명이었다.[12] 규모만 놓고 보면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 수가 120만 명으로 쪼그라들고 군용 물자도 줄어들었는데 그나마도 노후화되고 고장난 게 태반이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 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일이 터지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13]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에 비하면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우선 옐친의 소위 '서방으로부터 조언받은 충격요법'을 실시한 후 벌어진 러시아의 참상에 비하면 고르바초프 시기는 그보다는 나았다. 또 고르바초프가 재임했을 땐 이미 브레즈네프 시절에 개입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여기에 '체르노빌 참사'라는 악재까지 겹쳐진 게 일종의 면피 요소는 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2001년 개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아프간에 주둔하다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아프간 전쟁의 조기종전 및 철군을 이끌어 낸 고르바초프의 업적도 재평가받고 있다. 결국 2021년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도 전인 8월 15일에 항복했고, 미국의 철군 및 민간인 이송 과정이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하게 진행되고 있다. 철수 작전이란 당연히 자국 민간인부터 대피시키고 나서 군대 철수를 하는 과정이 정석인데, 군대부터 덜컥 철수하는 바람에 철수 시점에 아직도 1,000여 명의 미국인이 아프간에 남아 있는 판이었다. 그나마 아프간을 탈레반이 완전장악하지 못하고 NRF가 결성되어 내전이 벌어지면서 서방 눈치를 안 볼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들이 인질이 되지는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철군 과정이나 소련 철군 이후에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유지 및 지원이라도 잘한 고르바초프가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물론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무자헤딘에게 정권이 전복당하긴 했지만 옐친이 소련을 해체시키고 아프간에 대한 지원을 끊고 러시아까지 철저하게 말아먹은 탓이지, 이 셋 중 하나라도 안 됐으면 여전히 지원을 하여 나지불라와 휘하 아프간 정부군 장성 및 각료들은 무자헤딘들과 내전 및 준내전 상태를 유지해가면서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유지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고르바초프는 소련이라는 국가를 마지막까지 수호하려 노력했고 8월 쿠데타로 권력을 잃었음에도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좀 더 강화하는 형태, 즉 주권국가연맹 체제로 바꿔서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실제 고르바초프는 정치적으로 보수파의 불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화국들의 자치권을 강화시키는 형태로라도 독립을 저지하고 연방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러시아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에 타격을 준 또다른 원인으로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1960년대 중반 이래로 러시아 평균수명이 침체된 원인 중 하나가 알코올 중독의 증가였다. 여기에 보드카 제조로 인하여 막대한 곡물이 들어가자, 보드카 판매를 규제하면서 세수를 확보하는 한편 평균수명을 증가시키려 했다. 하지만 금주령 정책은 국민들의 평균 수명을 늘릴 수 있었으나 반대로 정치적 인기를 줄어버렸고, 여기에 국제유가 하락으로 소련의 세수가 줄어들면서 보드카 판매까지 규제시켜 놓으니 세금도 줄어들어 버리는 동시에 암시장까지 활성화되고 말았다. 게다가 술을 권장하는 러시아 문화 특성상 사마곤이라 불리는 밀주나 향수 등 대체품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련이 해체되고 자유시장이 도입되면서 보드카 배급 제한은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후 사회복지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러시아의 남성 수명은 57세까지 떨어졌다.

영미권의 시각으로는 소련 붕괴가 고르바초프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고르바초프 집권 이전에도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고르바초프 시기 터져나온 민족주의 및 자치권 요구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형식상으로는 구성국 간 평등한 연합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제 독재국가였던 소련 체제 내부의 모순과 맞닿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순 뒤에는 강압통치라는 부정적인 선례를 만든 레닌스탈린, 스탈린 사후에도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던 전임 지도자들의 책임 역시 크지만, 이 모든 문제점이 터져나온 것이 고르바초프 시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이 무너진 것은 고르바초프의 책임이 아니며, 고르바초프는 그냥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원조라고 할 수 있고 영미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도 이런 시각을 가진 논객이나 언론들이 많다. 이런 입장을 가진 논객이나 학자들은 마찬가지로 중국도 곧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14]

다만 이것은 소련 자체를 악으로 보는 서구권의 시각이며,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의 성급하고 미숙한 서구화 정책이[15] 소련이라는 강대국을 무너뜨렸다는 공감대가 있다. 이렇게 때문에 러시아 현지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추구했던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이 강하며, 이런 정서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좋은 자양분이 되고 있다.


3.4.3. 동유럽[편집]


2017년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 에 의하면 러시아인들 중에서 고르바초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이는 우크라이나(22%)나 조지아(18%), 아르메니아(13%)와 같은 다른 구소련 국가들도 마찬가지.

러시아 본토를 제외한 다른 구소련 국가에서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가 안 좋은 가장 큰 이유는 고르바초프가 각 민족 국가들의 독립 과정에서 유혈 사태로 독립을 저지하려 했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는 여론이 강하기 때문이다.[16] 실제로 소련 해체 과정에서 독립 시위를 유혈진압하려 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는 긍정 평가가 각각 48%, 39%라는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해당 여론 조사가 이루어진 국가들 중 고르바초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50%를 넘긴 구소련 국가는 2차대전 때 소련에 강제로 병합당한 에스토니아(56%)가 유일했다. 과거 위성국 국가들을 포함할 경우 1989년 동유럽 혁명의 직접적인 수혜를 입은 비셰그라드 그룹 국가인 헝가리(54%), 폴란드(51%), 체코(53%)[17]가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개혁을 추진한 지도자로써 높게 평가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독립 과정을 저지하려 했던 연방 지도자로써 평가받는다.


3.4.4. 북한[편집]


당연히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때문에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물론 소련까지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형제국들로부터의 원조가 끊겼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고난의 행군이라는 궤멸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특히 냉전 시기 내내 북한이 공들여 온 중국과 소련 사이 줄타기 외교 전략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 중국에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북한의 "세계력사" 교과서만 봐도 북한은 고르바초프를 현대수정주의자, 사회주의배신자라는 표현을 동원하여 신랄하게 까고 있다. 대내적으로 다당제 도입, 시장경제 도입, 사상문화 분야에서의 자유화, 군대의 비정치화·비사상화를 추진하여 소련을 해체로 이끌었고, 이러한 정책이 대외적으로도 영향을 끼쳐 동유럽 공산 정권이 붕괴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북한 입장에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자체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며,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을 포기한 것이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해체되었다고 보는 것. 북한은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한 시점부터, 흐루쇼프에 대해 수정주의 반동이라는 입장에서 비난한 적이 있다. 특히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뺀 것에 대해 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패배주의적으로 나온 것이라 공격했다.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의 행위도 서방을 이롭게 한다고 보기에 까는 것이라 볼 수 있다.


3.4.5. 한국[편집]


한국에서 고르바초프는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더불어 인지도가 높은 소련 정치인에 속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한 소련 지도자다.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소련 붕괴 직전인 1991년 4월 19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일본 방문 일정을 마치고 바로 귀국하려는 고르바초프를 노태우가 제주도로 초청, 4월 19일 밤에 제주도를 방문하고 4월 20일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가진 후 당일 본국으로 귀환했다. 대한뉴스 보도 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10월 경향신문과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방한이 이루어질 뻔했다가 러시아 정부에서 고르바초프에게 출국 금지 조치를 내리는 바람에 무기한 연기되었고 1994년 3월이 되어서야 방한이 성사되었다. 유달리 방한을, 특히 제주도에서 열리는 포럼에 많이 참석하는데, 첫 방한 장소인 제주도의 풍경이 인상깊었던 듯. 쉬리의 언덕과 사계어촌체험마을 등을 둘러봤으며, 사별한 아내 라이사가 해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담은 동상이 제주도에 남아 있다.

2001년 방한 당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의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는 2012년 버락 오바마가 외대에 방문해 명예동문 자격을 수여받기 전까지 외대 최고 아웃풋이 소련 서기장이란 우스갯이야기가 있었다.

4. 여담[편집]


  • 고르바초프는 역대 지도자 중 유일하게 소련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 제국 시절에 태어났다. 또한 유일하게 러시아인으로 죽은 지도자이기도 하다.

  • 김일성이 혹으로 유명하듯 이 사람도 머리에 있는 점인지 흉터인지 화상 자국인지 정체 모를 모반(birthmark)이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다. 영문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port-wine stain(화염상 모반 또는 포도주색 모반)'이라는 양성종양이라고 한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탈모가 온 이후에 생긴 거라고. 고르바초프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절 사진에는 이 모반이 없는 것으로 봐서 선천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만화 같은 그림에서 이 사람을 묘사하면 실중 팔구 무조건 저 흉터 자국을 무조건 꼭 그려넣는다. 러시아 시사 만화에선 '반점이'라고 나오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묘사도 있었다.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몇몇은 알 수도 있는데 머리에 초콜릿이 흘러내린 것 같다고 해서 한국에서의 별명이 "고르바초코"였다.칸쵸 그러나 서기장 취임 이전 사진에서는 필름에 인위적으로 수정을 가해 반점을 지웠기 때문에 없다. 자세히 보면 모양이 한반도와 만주 쪽 지도를 닮은데다 희미하게 휴전선도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젊은 사람들도 고르바초프가 정확히 뭘 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머리에 지도가 그려져있는 사람'이라고 말할만큼 모반이 상당히 임팩트가 크다.

  • 1997년에는 피자헛 광고에 출연했다.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 등장하자 한 중년 남성이 "저 인간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위기에 빠졌어!"라고 외친다. 그러나 아들과 어머니가 각각 "그래도 우리는 기회를 얻었어요." / "피자헛 같은 곳에 올 수 있게 되었잖아요."라면서 고르바초프를 편들며, 결국 식당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고르바초프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훈훈한 이야기. 실제로 구 소련권에 최초의 피자헛 매장이 들어선 연도는 재임 중인 1990년이었다.
당시 초인플레이션으로 소련 서기장 연금이 2달러 수준으로 떨어지고 옐친의 견제까지 받으면서 재단 활동이 좌절되자 기금 마련을 위해 광고에 출연했다.
훗날 해당 광고를 기획했던 톰 다비샤이어(Tom Darbyshire)에 따르면 당시 고르바초프는 피자 광고 제안에 내켜하지 않았다. 우선 광고 촬영은 러시아에서 하고, 각본은 고르바초프가 동의해야만 했으며 먹는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됐다. 제작진은 광고 촬영을 위해 붉은 광장을 통째로 비워서 촬영을 하고, 배우들도 세대 갈등을 통해 당시 러시아인들의 혼란을 최대한 표현하려 했다. 다비샤이어는 고르바초프가 촬영 당일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미국에서 온 촬영진들에게 추수감사절에 고생한다면서 직접 피자를 나눠주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출처) 워싱턴 포스트
피자헛 광고는 촬영 당시나 오늘날까지도 자주 화제에 오르거나 풍자의 대상이 되지만 고르바초프 본인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맘에 든다고 인정했다. TV 방영 버전 고화질 풀버전 2007년에는 소외층 어린이를 돕기위해 루이비통 광고에 출연했다.


  • 이오시프 스탈린화성인과 싸운다는 정신나간 게임. <스탈린 VS 마샨>의 OST 중에는 러시아에 자유를 가져온 그를 찬양하는 헤비메탈 곡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18]

  •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딴 보드카도 있다. 사실 정치인 고르바초프와는 관계없이 레온토비치 고르바초프(Leontowitsch Gorbatschow)라는 러시아의 귀족이 러시아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192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것. 러시아산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독일산 보드카이다. 베를린에서는 마트나 24시간 매점 등에서 9유로 정도에 700ml 풀 보틀과 미니어처를 흔하 사먹을 수 있다.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마치 러시아에서 생산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은 독일산.

  • 24세 때의 고르바초프의 사진. 흔히 아는 이미지와 달리 젊은 시절에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각도 있는 얼굴을 가진 미남이었다. 게다가 비만을 매우 싫어하여 항상 다이어트를 하여 균형잡힌 몸을 가졌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5.1. 영화[편집]


  • 록키 4 - 데이빗 로이드 오스틴이 분했다. 록키 4가 1985년에 나왔으니 사실상 소련 바깥의 매체에서 묘사된 첫번째 고르바초프. 실존인물과 상당히 싱크로율이 높다.

  • 총알탄 사나이(코미디 영화, 1988) - 1편 극초반부에 등장. 카다피, 이디 아민, 호메이니, 아라파트 등 여러 독재자들과 함께 미국을 엿 먹일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차 나르는 하인으로 변장해있던 주인공 드레빈 형사에게 신나는 음악과 함께(1분 55초부터) 머리의 모반(북베트남 모양이다.)이 지워지고(드레빈 왈, "이럴 줄 알았어!") 벽에 처박혀 친구들과 함께 사이좋게 리타이어. 정신나간 코미디 영화 도입부다운 등장과 퇴장이었다.


  • 테트리스(영화)(2023) - 매튜 마시가 분했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초반부터 악역으로 나오는 로버트 맥스웰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다가, 영화 최후반부에서 주인공을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로 나온다. 고르바초프 사후 처음으로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는 영화이다. 다만 영화 촬영 시기는 고르바초프가 생존해 있던 시기였다.

5.2. 게임[편집]


  • '고르비의 파이프라인 대작전' - 뿌요뿌요 시리즈로 유명했던 컴파일의 게임. 니이타니 마사미츠에 의하면 파이프라인을 잇는 게임 컨셉을 보고 일본이 소련과 파이프로 이어지면 재밌겠다고 생각해 그런 제목을 붙여줬다고 한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로 주목을 받고있던 고르비를 주인공으로 일본에서 모스크바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한다는 스토리의 낙하물 퍼즐 게임. MSX와 패미콤(도쿠마 쇼텐 발매), FM-Towns로 발매되었다. MSX2판 영상 패미컴판의 경우 누군가가 고르바초프만 김정일로 바꾼 해킹롬도 만들어놓았다. 아마 중화권 업자의 불법복제보단 일본쪽 해커가 풍자목적으로 만든것으로 보인다. 후일 온라인 레트로 콘솔게임 서비스 등지에서 재발매될때 민감할수도 있는지 고르바초프에 대한 언급을 전부 삭제한 그냥 '파이프라인 대작전'이라는 제목으로 재판매되는 모양이다.


  • 크레믈린의 위기(게임) - 고르바초프를 주인공으로 소련을 이끌어 갈 수 있다. 1992년 원작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높은 지지율로 2017년 최종 엔딩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하지만 2017년 리메이크작에서는 급격히 개혁했다가는 지지율이 떨어지고 정치적 안정성이 깎여나가 바닥을 기면서 쿠데타로 쫓겨나거나,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더라도 정책에 불만을 가지는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시위로 쫓겨나거나, 선거에서 패배해 사임하면서 게임 오버되기 십상이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 이 게임의 캠페인에서 단역으로 등장한다. 서기장이 되기 이전인 1981년이 배경이라 그냥 정치국원으로서 KGB 본부에서 회의를 열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다만 한국어판에선 서기장으로 오역되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중에 냉전을 종식시키고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내정 간섭을 끝내는 그가 소련과 러시아의 패권을 위해서 온갖 대형사고를 치는 인물을 플레이어에게 소개한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 - 이 게임의 모드인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모스코비엔 국가판무관부의 외무장관으로 등장했었다. 지금은 모스코비엔 붕괴 이후 생겨나는 러시아 민주주의 위원회로 등장한다. 냉전모드(cold war)에서는 1985년중에 지도자로 등장한다.


5.3. 기타[편집]





  • 체르노빌(드라마) - 실화바탕. 서기장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스웨덴계 배우인 다비드 덴시크(David Dencik). 레가소프 교수의 경고에 제법 귀를 기울이는 몇 안 되는 인물이지만, 마냥 긍정적으로 나오지만은 않는다. 초면에 격앙된 어조로 말을 내뱉는 레가소프나 그런 레가소프를 얕잡아보는 셰르비나를 직위와 위엄으로 누르는 장면, 48시간에서 72시간 내로 러시아와 유럽 대륙의 절반이 파괴될 거란 보고를 듣고 충격 받는 모습, 레가소프가 빈정거리자 전화를 끊어버리는 모습 등이 나온다. 에필로그에선 실제 고르바초프가 2006년에 체르노빌 사건에 대해 남긴 글이 나온다.

  • 풀 메탈 패닉! - 고르바초프가 죽으면서 소련의 탈공산화가 실패하여 소련이 남아있게 된다는 냉전 지속 시나리오가 기본 설정으로써 나온다.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다.

  • The World of Difference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 태양계의 4행성이 상당히 커서 대기가 있으며, 푸른 별이라고 해서 미네르바라 불리는 화성에는 생명체가 문명을 이루고 산다는 설정인데, 여기서는 고르바초프가 취임 후 9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사망해서 스탈린주의화 된 소련이 나온다. 극중 소련 우주비행사들의 대사로 봐서는 고르바초프의 사망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설정.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소련 공산당|
]]

195? - 1991
입당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1 - 2022
해산[19]
사망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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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9년 최고회의 상무회(Президиум) 주석에서 최고회의 주석으로 전환되었다.[2] 술을 멀리한 덕분에 장수에 도움이 된 듯. 고르바초프와 동갑인 보리스 옐친은 엄청난 술고래였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다 2007년 세상을 떠났다.[3] 고르바초프 이전 소련 정치인들이 바보라서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소련은 국가 특성상 매우 복잡하고 많은 다민족들이 얽힌 나라고, 특히 소련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어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큰 발트 3국이나 캅카스 3국 등의 경우 소련에서의 독립을 노렸다. 즉 소련 체제 특성상 언론의 자유 보장과 정치적 자유 허용이 소련 해체로 연결될 것을 두려워했다. 어찌보면 고르바초프가 너무 순진했다고 할수도 있다.[4]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이러한 강연료로 떼돈을 벌었다.[5]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미국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고 미국에 누차 경고했다. 당시엔 모두 무시했지만 지금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6] 공산주의권 전체의 이익이 개별 국가의 주권보다 중요하므로 특정 국가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독자행동을 한다면, 무력 개입도 정당하다는 주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이 선언했다. 즉, 이는 중부유럽 공산권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독트린이다.[7]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던 사고 특성 상 사고지역의 정보를 통제했지만, 동시에 재난수습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한 보리스 셰르비나(Борис Щербина)와 발레리 레가소프(Валерий Легасов) 등 현장 실무자의 의견을 적극 경청하면서 필요한 자원을 최대한 지원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전역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건 고르바초프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8] 고르바초프보다 어린 사람은 유리 마슬류코프(1937-2010) 뿐이었다.[9] 한국에서도 IMF 사태의 근본원인은 박정희 시대 이래 한국경제가 부채에 의존해 성장했기 때문이지만, 김영삼 정부가 1993-95년에 부양책을 남발했다가 국가부도사태를 불러왔기 때문에 IMF의 사태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여져지고 있다.[10] 중국 관영 언론 인터뷰에서는 "내가 중국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충고는 ‘민주화’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민주화를 용납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영도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후회를 밝혔다.###[11] 물론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제3자의 기준으로 봐도 공로와 과오 모두 있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12] 이 숫자는 지금의 미군, 중국군, 인도군의 병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숫자다.[13] 물론 아직도 그 경제구조의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푸틴의 잘못도 크다. 2022년 기준, 30년이 지났는데도 러시아수호이, 미그, 에네르기아, 흐루니체프 등 구 소련 시절의 기술력으로만 연명하는 군대나 항공우주 관련 기업들을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대기업도 없이 아직도 한국GDP로 엎치락 뒤치락 하는 실정이다. 그나마 카스퍼스키, 가즈프롬, 라다, 아에로플로트 등 몇개 기업은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져 있으나 한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14] 여기서 더 한걸음 나간 사람들이 아예 무력으로 이런 체제를 무너뜨려야한다고 주장하는 네오콘이다.[15] 반푸틴이자 리버럴한 성향인 한국 귀화 러시아인인 일리야 벨랴코프조차도 고르바초프를 "흐리멍텅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16] 실제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군을 동원해 카자흐스탄, 트빌리시, 바쿠, 두샨베, 빌뉴스, 리가 등지에서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이 중 카자흐스탄, 트빌리시, 바쿠의 경우 비교적 진압에 성공했으나, 빌뉴스리가에서는 경찰 특수부대를 동원해 공화국 최고회의 및 방송사를 점거하려 하다가 텔레비전으로 유혈사태가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취소하였다.[17] 해당 통계표에서는 슬로바키아가 제외되어 있으나 체코와 함께 1992년까지 한 나라였으므로 따로 집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18] 뮤직비디오 맨 마지막에 하늘에서 코카콜라와 함께 떨어지는 노란색 덩어리는 트윙키라 불리는 일종의 크림빵인데 굉장히 달고 기름진 걸로 유명하다. 한 번 단종된 적이 있었으나, 인수합병을 거쳐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19] 소련 해체와 함께 정당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