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 [[파일:external/i0.sinaimg.cn/U2882P112T3D235140F48DT20080505145421.jpg|width=50%]] [br] 1921년 프랑스에서 삼촌 덩샤오성(鄧紹聖)[* 소련에 유학 중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과 덩샤오핑. || 덩샤오핑은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벽돌집으로)의 장남으로 출생해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 (근면히) 일하면서 (검소히) 공부한다는 뜻으로 1918~1920년에 약 1500명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로 [[유학]]한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의 상황과 맞물려 생긴 일로, 이중 200명이 후에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 중 20명은 미래에 중국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근공검학에는 그 근본부터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했다. 프랑스는 '(근)공'에 초점을 둔 반면에 중국은 '(검)학'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을 꽤 박하게 대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던 어린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자가 된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자신이 프랑스로 유학한 이유를 "중국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런데 동시기에 마오도 프랑스로 유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그는 가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 저자가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지 마오에게 묻자 마오는 '''"중국 문제의 해결책은 중국에서 찾아야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마오가 매우 비범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 생각은 적중해서 중국 인민을 정확하게 파악한 마오는 조각조각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운동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때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한다. 그런데 1차 대전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은 둘째치고 프랑스의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프랑스 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간 덩샤오핑은 이 시기에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쯤에 '중국 공산 청년 동맹'[* 공산당과는 약간 다르다. 1920년 초에 이미 존재했던 조직으로 덩샤오핑이 청년 동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뒤 프랑스 경찰을 피해 동지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는 1926년까지 유지된다. 덩샤오핑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모스크바로 간 뒤의 일이다. 또한 [[저우언라이]]와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평생 동안 덩샤오핑을 후원했고 덩샤오핑도 6살 차이의 저우언라이를 항상 '''큰형님'''이라 생각했다고 한다.]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를 포함하여 청년 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덩샤오핑이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24~1925년 사이에 적광에서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어조는 강렬해도 저우언라이의 글에 비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나 문장의 퀄리티는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프랑스 예비 유학생으로서 준비하던 시절에도 항상 성적이 중간에서 맴돌았던 인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덩샤오핑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자기가 일했던 자동차 공장과의 계약을 해지했는데 당시 공장장의 평가는 이랬다고 한다. "사직 이유: 귀국, 근무 성적: 괜찮음, 전반적 태도: 양호함"] 그 뒤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어차피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해야했던지라 경유지 비슷하게 하여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물론 이는 모스크바가 공산주의자에게 갖는 상징성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에 간 덩샤오핑은 1926년 초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일종의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으로 여기에서 공부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후에 중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런비스, 녜룽전 [[장징궈]] 등이다. 그리고 그 외의 유명 인물들로는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호찌민]] 등이 있다.]에 입학했고(이 무렵 [[장징궈]]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마침 1920년대 초부터 중국인들이 러시아로 유학을 많이들 왔는지 1925년에 설립된 중산[[대학]](中山大學)[* '중산'은 [[쑨원]]의 자(字)로 중국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일개 하류 노동자 취급을 받았던 그들이 러시아에서는 혁명 동지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도 꽤 신경을 썼는지 중산대학 초청 강연자 중에 '''[[레프 트로츠키]]'''까지 있다.]으로 1926년 중순 쯤에 거처를 옮겼다. 덩샤오핑은 여기서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배웠는데 이것도 깊게 배우질 않고 프랑스 시절처럼 어중간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된 것으로 보인다.(아예 덩샤오핑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커갔던 인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권 당시 결정적인 우를 범해 반쪽의 한계를 증명하고 말았다.]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간 덩샤오핑은 정치적 선동 부분의 일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는데 펑위샹은 소련과 연계하면서도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합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한 펑위샹은 덩샤오핑을 군에서 내쫓았고[* 덩샤오핑은 후에 펑위샹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는데, 펑위샹이 마음만 먹었으면 자기 부대 안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면서도 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줬다.] 1927년 7월, 덩샤오핑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 여기서 이름도 바꾸게 된다. '소평(小平)'이라는 이름은 덩샤오핑의 세번째 이름으로 태어날적 이름은 '선성(先聖)', 청소년기 이름은 '희현(希賢)', 그리고 마지막 이름이 '샤오핑(小平)'이다. 뜻 풀이가 재미난데, 태어날 때 이름은 "옛 성인과 같이 되어라."이고 두 번째 이름은 "현명해지기를 바람."이고 마지막 이름인 소평은 "작고 평범함."으로 점점 이름의 뜻이 소박해진다. 참고로 앞서 두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소평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지은 것이다.] 그리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그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덩샤오핑도 같이 따라가고 1928년 초에 중산 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장시위안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