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평가 ==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기 [[대약진운동|정]][[문화대혁명|책]] 실패 등으로 휘청거린 중국을 개혁개방 체제로 돌려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생산력을 확보할[*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완성된 후에야 자본주의가 이룩한 최고 수준의 생산력을 토대로 실현될 수 있다(때문에 [[마르크스]]도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상대적으로 덜 발전한 [[러시아]]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더 빠르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은 [[자본주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회혁명으로 사적 소유가 폐지되어 버렸기에, 생산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이 발목을 잡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덩샤오핑 노선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채택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생산력 수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라는 주장. 문제는 그걸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도 훌륭하게 이룩한 [[북유럽]] 같은 지역도 있는데 중국은 여전히 일당독재라는 것. ~~사실 북유럽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만 받아들인 특이 케이스이다.~~] 새로운 성장의 길을 이끈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로 대표되는 중국 내 [[자유]], [[민주주의]] 운동과 [[양극화|내부 불평등]],[* 이런 점 때문인지 일부 [[마오쩌둥]] 지지자들에겐 현대 중국의 [[양극화]]를 낳은 주범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마오쩌둥 시절만 해도 중국 대학비는 무료였지만 개방개혁이 이뤄지면서 대학 입학비를 받게 된다. 또 이런 양극화 문제의 핵심은 결국 부동산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못 살던 시절엔 다른건 몰라도 몇년 일하면 집은 살 수 있던게, 도리어 잘 살게 되자 다른건 풍족해졌는데 투기 등으로 집값이 폭등해 몇십년을 일해도 집을 못사게 되는 상황이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 '백가지 꽃이 만개하게 하라, 백 가지 의견이 경쟁하게 하라'라는 뜻으로 원랜 마오쩌둥 통치 시기인 1950년대 후반 쌍백 운동의 방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낚여 많은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와 당, 국가에 비판을 가했지만, 정도가 과했는지 어쨌는지(...) 빡쳐버린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직후 반 우파 투쟁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게 된다.]을 외치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또 범죄소탕, 부패척결이란 명분 하에 수많은 목숨을 단번에 날려버린 1983년 [[엄타]](嚴打) 운동 같은 사례처럼, 덩샤오핑의 통치기는 [[법치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지는 문혁 이후 흐트러진 공권력, 치안 강화였으나, 문제는 반대 의미로 너무 강하다보니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했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쌓이게 된다. 또 그런 와중에도 권력층은 유유히 [[꽌시|처벌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 스스로 임기제를 확립하고 그 임기를 지킨 후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해 1인 지배체제로 굴러가던 [[중국 공산당]]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말장난일 뿐이란 반론도 있다. 또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철저한 숙청으로 인해 마오쩌둥 사후 특정 인물 한 명이 당을 완벽히 장악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말년의 남순강화와 같은 공산당 원로들의 권력 다툼으로도 보일 수 있는 행보를 죽을 때까지 한 것.] 사실상 덩샤오핑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2010년대 들어선 [[시진핑]]이 1인독재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집단지도체제도 점차 형해화되고 있다. 여전히 일당독재인 중국에선 중국인 개개인의 속은 알 수 없으나, [[중국 공산당]] 차원에선 개혁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좌우를 떠나 부국강병을 우선하는 쪽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언론의 자유, 사회적 자유와 민주정 지지를 우선하는 쪽에서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보수성을 띠는 경제 관련 언론에서 덩샤오핑을 치켜세우다가, 정치 쪽 사설이나 서적에서 덩샤오핑을 독재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이런 맥락.[* 보수 우파인 [[조갑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진중권]]은 천안문 사태에 대해 철없는 부르주아 학생 난동을 진압했다며 중공을 조심스레 옹호하던 일부 구좌파나 군부독재를 찬양하는 한국 우익의 멘털리티가 묘한 교감을 이룬다며 이를 비꼬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흑묘백묘론]] 같은 실사구시적 태도나 외교술 같은 부분은 호평하지만, 인권 문제 등에 있어서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를 거부한 [[독재자]]이지만 서방에서 호평이 많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결단력과 통찰력을 보았다며 덩샤오핑은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고[* 다만 2010년대 낸 자서전에선 [[저우언라이]]를 자신이 만난 중공 최고의 인물로 표현했다. 덩샤오핑은 처음엔 너무 까칠해보여 별로 안좋아했는데, 말은 무뚝뚝해도 열심히 하려는걸 보고 진정성을 느꼈다고.],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덩샤오핑을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경제 대변혁을 이룬[* 근데 아이러니한게 후쿠야마의 조국인 미국만 봐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FDR 시절 방임주의에서 정부 개입을 긍정하는 혼합체제적 성격으로 경제 변환을 이룬 사례가 있다. 자본주의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유럽권도 있고. 좀 웃픈 말이긴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며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각해졌지만 대기업의 전문화와 벤처기업육성 등 경제 체질은 강화되는 변혁을 이루어냈다.] 위대한 '황제'[* 말 그대로 그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아닌 황제, the Great [[대제]]라고 부른 것이다. 왕조 시대의 지도자로 규정한 셈. 봉건전제왕정을 디스하던 공산당 입장에선 칭찬과 동시에 욕이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과거 중국 왕조 시대에도 위대한 [[황제]]들이 있었음을 언급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권력 견제가 없는 체제라도 황제가 좋은 사람일 때는 나라도 잘 되지만 그러나 늘 이런 좋은 지도자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마오쩌둥]]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황제가 절대 권력을 장악해 [[폭군]]이 된 것을 예로 들었다.] 반면 좌파 성향의 중국학자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덩샤오핑을 혹평했는데, 부작용이 많은 중국 [[관료]] 자본주의의 형성에 그가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 [[천안문 6.4 항쟁]] 역시 이런 관료 자본주의로 인해 득세한 관료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양극화를 목도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덩샤오핑은 어찌됐든 표면적으론 말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란 말을 칭찬처럼 사용하고 부르주아를 비판한 [[사회주의]]자였다. 덩이 주창한 것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첫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순으로 가야 하는데 현실은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진정한 공산주의는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를 추구하지만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으며 자본주의도 [[사회주의]] 실현의 수단이라는 공식적 견해를 버리지 않았는데, 이러한 노선은 덩샤오핑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친화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중국의 자본주의 체제는 엄밀히 말하면 국가, 더 정확하게는 공산당의 주도로 행해지는 체제였고, 이런 지나친 정부 간섭이나 관치 경제가 이후 중국내 시장 체제의 왜곡을 불러왔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성장기야 어느 쪽이건 다 겪었던 일이고. 대외적으로는 일명 ''''도광양회''''라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덕에 냉전 이후 중국은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로 이미지가 잔뜩 실추된 후에도 [[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도광양회가 다른 의미로 재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시진핑]]이 팽창정책을 피며 세계적으로 어그로를 끌다가, 기회를 보던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에 [[미국-중국 무역 전쟁|미중무역]]을 빌미로 확전 양상을 보이는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 덩샤오핑 시대에 비하면 시진핑 시대의 중국의 힘이 커졌다고는 해도 미국에 맞서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중 무역전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에 불리하게 흘러가고있다.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중국을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들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 이들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공산당을 짝퉁 공산당 취급하며, 2008년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이라는 정당도 만들었지만 현재는 반체제 세력으로 찍혀 금지된 상태다.(...) 심지어 이들 중에선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야 마오쩌둥이 한게 아니니까~~ 외부에서 싸잡아 보는 시선과 달리 내부에선 그들끼리도 나름 다툼이 치열한 모양.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