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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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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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국가주석
양상쿤
(Yáng(Shàng(kūn(楊尙昆, 양상곤) | Yang Shangkun


출생
1907년 5월 25일
쓰촨성 충칭 (現 충칭시)
사망
1998년 9월 14일 (향년 91세)
중국 베이징시
재임기간
제4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1988년 4월 8일 ~ 1993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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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리보자오(李伯钊, 1911년 ~ 1985년 4월 17일)
자녀
아들 양사오쥔, 양사오밍
딸 양리
학력
모스크바 손중산대학
종교
무종교 (무신론)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중국의 제4대 주석. 제12기, 13기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덩샤오핑 시기 중공의 의사결정을 막후에서 좌지우지하던 소위 8대 원로의 일원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천윈, 보이보[1]와 함께 서너손가락 안에 꼽히던 거물이었다. 다만 편의상 8대 원로로 묶이기는 하지만 덩샤오핑, 천윈, 넓게 봐도 덩샤오핑, 천윈, 리셴녠 등 3인과 나머지 원로들의 경력와 위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2]

2. 생애[편집]


쓰촨성 충칭시 출신으로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원래는 모스크바의 손중산 대학에서 유학한 28인의 볼셰비키의 일원으로 농촌혁명과 유격전을 주장하던 마오쩌둥과 대립하였다. 소련유학파들이 당권을 장악한 이후에 마오쩌둥주더를 대신해 홍군을 지휘하였다. 이때 기존의 유격전을 버리고 중국국민당군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나 화력에서 밀리면서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1935년 대장정 중 열린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함으로써 마오쩌둥 지도체제 확립에 기여를 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과 중앙군사위 비서장을 지내면서[3] 권부 핵심에 올랐으며, 1956년총서기로 취임한 동향 출신 덩샤오핑과 지근거리에서 일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65년 기밀누설죄를 뒤집어쓰고 중앙서기처 주임에서 해임되었고, 해서파관 사건베이징 시장 펑전, 참모총장 뤄루이칭 등과 함께 5.16 사건으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반혁명집단으로 몰렸으며, 마오쩌둥으로부터 위연이라는 비판을 받고 1965년 중앙판공청 주임에서 해임, 5.16 사건으로 직무 정지를 당했으며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서기처 후보서기에서 해임된다.

1978년 복권되며 광저우 시장을 맡았고, 1982년 정치국에 입성하며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역임한다. 1988년 리셴녠의 뒤를 이어 제4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제4대 주석에 올랐으나 현재의 국가주석과는 달리 실권을 지닌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덩샤오핑이, 총서기는 자오쯔양이 맡고 있었기에 당내에서든, 국가적으로든 1인자는 아니었다. 또 천안문 사태 이후에는 장쩌민이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직위를 전부 이어받았기 때문에 양상곤의 입지는 더 미묘해졌다. 다만 양상곤은 개국 초기 중앙군사위에서 비서장을 맡았고, 국가주석과 함께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겸임했다. 거기에 더해 이복동생인 양바이빙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었는데, 그는 군에서 총정치부장을 맡다가, 양상쿤의 주석 재임시기에는 중앙군사위 실무를 총괄하는 비서장직에 올라 양상쿤 형제는 군내 인맥과 영향력이 매우 두터웠다. 때문에 덩샤오핑만큼은 아니어도 양상쿤은 중국 인민해방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세로서, 국가주석 직함에 걸맞는 권력은 갖고 있었다. 따라서 최고지도자가 아니었을 뿐 리펑, 차오스 등 장쩌민의 막강한 경쟁자들 중 군내 영향력까지 있어 가장 버거운 상대였으니 바지사장이라는 것은 오해에 가까운 이야기.

나이가 엇비슷한데다가 동향인이었기 때문에 덩샤오핑과 매우 친한 친구였고, 1966년 실각해서 12년간 수감생활을 하던 양상쿤을 다시 불러서 복권시켜준 것이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실제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할 당시에도 가장 먼저 연락한 원로가 양상쿤이었고 양상쿤 또한 이에 호응하여 덩샤오핑이 있던 선전시를 방문하여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만 연배도 그렇고 역임한 직위도 그렇고 덩샤오핑이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고, 정치개혁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기도 하는 등 언제나 의견을 같이한 것은 아니었으니 덩샤오핑의 부하라기보다는 파트너에 가까운 관계였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다음 세대인 장쩌민,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던 덩샤오핑의 뜻에 반발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4]하려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넘겨가면서 강력하게 밀어붙인 덩샤오핑의 뜻에 밀려 세대교체는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된다. 대신 덩샤오핑은 양상쿤을 달래기 위해 그의 동생 양바이빙을 중앙군사위 비서장에 임명하고, 양상쿤이 은퇴한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는 양바이빙을 정치국 위원으로 승격[5]시켜준다. 양상쿤을 비롯한 중공의 정치원로들이 은퇴하는 대신 2선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통로였던 중앙고문위원회도 1992년 폐지되었으며, 1993년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난 양상쿤은 5년 뒤인 1998년에 사망한다.

2017년에 공개된 영국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양상쿤의 동생인 양바이빙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아들이 지휘관을 맡고 있던 제27집단군이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유혈진압을 자행한 부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양상쿤의 주치의였다가 후에 반체제인사가 된 장옌융은 양상쿤이 자신에게 "천안문 사태는 당의 커다란 실수다. 나중에 재평가될 것"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3. 기타[편집]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주석 자격으로 정상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당시의 정상회담을 다룬 경향신문 김상택 화백의 만평에는 양상쿤이 자신을 중국집 '지배인'(명목상의 국가원수)이라고 소개하며, 중국집 손님으로 묘사된 노태우는 '주인'(실권자 덩샤오핑)이 안 나왔다며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1992년 9월 29일자 경향신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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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체의 신비전 괴담으로 유명한 태자당 보시라이의 아빠다. 보시라이는 한때 최초의 태자당 출신 주석 후보로 손꼽혔지만, 수많은 비리 혐의로 후진타오 정권때 숙청되어 감옥에 살고 있다. 감옥에서 암 선고를 받았는데, 암 수술에 성공하여 완치되는 바람에 지금도 살아있다. [2] 덩샤오핑은 문혁 이전 10년간 당 총서기였고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등 개국 원수와 같은 급의 군공이 있다고 평가 받았다. 천윈 역시 문혁 전에 당의 부주석이었고 덩샤오핑보다도 먼저 당의 최고 지도부에 진입했다. 반면 양상쿤의 경력은 덩샤오핑이나 천윈에 밀렸던 게 사실이다.[3] 마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당과 중앙군사위의 실무를 보는 보직이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장격의 요직이었던 셈. 이후 덩샤오핑이 총서기로 부임해온 다음에는 덩샤오핑의 부사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된다.[4] 상당한 무리수였던 게 국가주석직을 내려놓고 은퇴하던 시점의 나이가 이미 만 85세였다. 이러니 아무리 혁명원로고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초에 대한 보상의 성격으로 은퇴를 늦췄다고 해도 결국 세대교체론이 힘을 얻을 수밖에 없던 것.[5] 다만 군 출신 정치국 위원이 보통 중앙군사위 부주석을 맡는 것과 달리, 양바이빙은 정치국원을 맡는 대신 퇴역해야 했으며 정치국 위원 외에 다른 보직이 없었다(...). 사실 양상쿤 형제를 달래기 위한 좌천성 승진에 가까웠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