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톈안먼 사건([[천안문 6.4 항쟁]]) ===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br]- 덩샤오핑이 총리 [[리펑]]에게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덧붙인 말. [[리펑]]의 회고록에서 언급. >'''"20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20년 간의 평화를 손에 넣자"'''[BR]천안문 6.4 항쟁을 진압하면서 남긴 말이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국가주석이나 당 총서기직에 앉았던 적이 없었지만, [[중국군]]을 지배하는 권한을 가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설파하였다. 덩샤오핑도 충실하게 이 주장을 따라 군 인사권을 가진 군사위 주석이라는 자리와 당의 최고 원로 중 한 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산당과 중국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자신이 미는 이들을 요직에 앉혀 후일에 대비했다. 그래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에는 류덩군 시절부터 친구였던 원로 [[리셴녠]]을 앉히고, 행정부의 수장인 국무원 총리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는 [[후야오방]][* 1980년대 한때 덩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다당제 등의 강력한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에 보수파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추모 대열이 시위로 번지면서 시작되었다.]이 맡았다. 자오나 후는 당시 후계자로 거론되어 있었다. 그러나 덩은 무조건적인 서방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서 드러났다. 학생 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며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한편, 당시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원로들이 이런 학생 운동이나 대중 운동에 대해 특히 콤플렉스를 보인 것은, 민주화에 따른 [[중국 공산당]] 실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외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겪은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문화대혁명 역시 당시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 물론 [[홍위병]]의 실질적 배후는 언론을 통해 이들을 선동한 [[마오쩌둥]] 및 [[4인방]]이었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당시 덩샤오핑의 진압 성명문이나 [[자오쯔양]]의 회고록에서도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전개되어 제2의 문혁 같은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다른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로 끌려가서 삽질하며 개박살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중 운동을 더욱더 불신하고 있었다.[* 일부에선 문화대혁명을 소련식 [[대숙청]]과 같은 정부 주도의 변란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최고 지도자 마오가 정권을 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며, 정부 기관은 한켠으로 물러 서 있는 가운데 순수 민간조직인 홍위병이 언론 기관을 장악한 4인방의 선동에 이끌려 나선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문혁 때 무지막지 고생한 당시 중국 지도부들은 대부분 대중 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의 두려움이나 경험을 살려(?) 천안문 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이 당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허나 이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있었는데, 당시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총리 [[자오쯔양]]은 덩의 지시로 군 투입이 결정되자 천안문 광장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군이 곧 투입될 것이니 빨리 해산해주십시오"[* 말이 웃긴 것 같지만 자오쯔양은 이때 절망적이었다고...[[자오쯔양]] 항목에 보면 당시 사진이 있는데, 정말로 울면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때 자오쯔양의 옆을 지킨 사람이 이후 [[후진타오]] 국가주석 체제에서 2인자격인 국무원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곳에 모인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탱크를 앞세운 진압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결국 수천~수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와 시위대로 오인 받은 [[중국]] 국민들이 덩샤오핑이 보낸 진압군에 의해 살해당한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시위대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자오의 이런 행동은 그가 시위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때문에 덩의 눈밖에 나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모든 직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국 [[자오쯔양]]은 권좌에서 축출당한 후 사망시까지 약 20년 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장이 거의 옳았다고 믿었다.[* 이는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을 비판한 구술 녹음 테이프가 자오쯔양의 사망 이후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는데, 자오는 감시원의 의심 및 수색을 피하기 위해 이 녹음 테이프들을 자신의 손자가 가지고 놀던 낡은 곰 인형 속에 숨겨놨었다. 그러다 2005년 1월 그가 사망하자 또 다시 시위가 벌어질까 우려한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 등 주요 지역에 무장 경찰을 배치하고, 언론 보도 또한 통제하였다. 기타 자세한건 자오쯔양 항목 참조.] 어쨌든 이렇게 축출된 후와 자오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다고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 시위를 유혈 진압한 [[후진타오]]를[* 당시 티베트 지역 당 서기였던 후진타오는 반중국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현장에서 철모를 쓰고(...) 직접 강경 진압을 진두 지휘하였다. 덕분에 개방에 유화적인 태도와 함께 내부 문제에선 강경파로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에게 인정받았다.]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 천안문 민주화 운동으로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방에 회의적이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장쩌민의 후임은 개방을 적극 지지하던 후진타오로 내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국가주석]] 직은 1988년 [[리셴녠]]이 죽자 군부의 대표자 [[양상쿤]]을 앉혀 군부를 달랬다. 헌데 지금 중국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총칼과 탱크로 진압한 것에 대한 비난은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 바가지로 먹는 감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고 수행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군권은 모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하수인에 불과한 리펑 입장에선 좀 억울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개방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보수파들이 [[리펑]]의 뒤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군중들에게 대피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자오쯔양]]과도 비교당하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와 같은 욕을 신나게 먹었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 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주범은 [[마오쩌둥]]이었지만, 정작 신나게 까인 건 [[4인방]]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