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덩샤오핑 (문단 편집) === 문화 대혁명 청산 ===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 성분 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 공산 혁명 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 항일전/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게 한 공(功)이 있으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의 과(過)가 있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마오쩌둥의 권위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기존 정책은 싹 엎어버릴 수 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애초에 이 공칠과삼이라는 표현이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평가할 때 쓴 표현이라는 점. --이후 독재자들 전용 변명 표현처럼 된 감도 있다.--]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마오쩌둥을 잃은 문화대혁명 지지 세력에는 권위나 경력에서 덩샤오핑을 상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인 숭배에 빠지지 않았다. 전임 [[화궈펑]]만 하더라도 그 짧은 집권기 동안 자신을 찬양하는 포스터나 노래, 선전물을 무수히 제작하였으나,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를 절대로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선전화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분명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으나, 마오쩌둥을 격하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자신의 전임자]]를 격하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었고 스탈린의 도움없이도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들도 한둘이 아니라서 '스탈린 이 쉐끼가 레닌 유언 어겼고 대숙청으로 수십만명을 넘게 죽었다라면서'라고 맘껏 격하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고 마오쩌둥 이외에 이름을 날린 이들도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을 보좌하면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아무리 덩샤오핑 개인이 마오쩌둥에 당한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해도 격하시키는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인지라 격하시키지는 않았던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