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城高鐵甕千尋 / 성은 높아 천 길의 철옹이고
雲繞蓬萊五色 / 구름은 봉래 오색을 둘렀구나
年年上苑鶯花 / 해마다 정원에는 앵화 가득하고
歲歲都人遊樂 / 세세로 도성 사람 놀며 즐기네
정도전,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 中 도성궁원(都城宮苑)
한성부는 조선 수도이자 최대도시며 현 서울특별시의 전신이다. 이와 동시에 이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언론 등에서 '서울시'라는 단어를 지역으로서의 '서울특별시'를 일컫는 단어로 사용함과 동시에 '서울시청'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하는 것과 같은 용례이다.
1394년 11월 21일 부로 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1395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에서 한성부(漢城府)와 양주군으로 분리, 개편된 이래 1910년 10월 1일 경성부로 개칭되기 전까지 만 515년 간 존속한 행정구역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한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기 때문에 한성부가 분리 설치된 이후에도 관습적으로는 한양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서울이라고 널리 불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도성(都城), 경조(京兆), 경도(京都), 경성(京城)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모두 '서울(일반명사, 수도)'라는 의미로, 중국 남경, 북경 별칭과 (각각 금릉, 북평 등을 제외하고) 같다. 일례로 북경대학은 경조학당이었다.
조선후기 기준으로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중에서도 종로구와 중구 전지역, 동대문구 대부분(장안동 제외), 서대문구 거의 전지역(남가좌동, 북가좌동 각일부 제외), 성북구 전지역, 용산구 전지역, 강북구 대부분(우이천 이북지역 제외), 성동구, 마포구 대부분(상암동, 망원동 일부 제외), 은평구 대부분(수색동, 증산동, 신사동 일부 및 진관동 제외)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한양에 해당되는 지역들이다. 이외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효자동도 해당된다.
한성부는 전주부, 경주부, 평양부 등 다른 부(府)와 다르게 도(道)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행정구역이다. 상위 행정구역을 두지 않았다.
한성부는 정2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다스렸다. 해당 관직은 조선 초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라는 명칭으로 처음 등장했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명칭이 바뀌고, 1567년(명종 22년)에 판윤으로 격상된 것이다. 본래 부윤은 종2품인데, 한성부는 수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판서와 같은 정2품에 놓였던 것이다. 서울특별시장이 광역자치단체장임에도 불구하고 1961년부터 다른 광역시장이나 도지사들과 같은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으로 대우를 받는것과 같다.
2. 역사[편집]
2.1. 조선 이전[편집]
한성부의 전신은 고려 남경(南京)이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남경천도론이 몇 번 거론될 정도로 이 일대는 도읍지로서 눈에 띄던 곳이었다. 입지가 워낙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문종은 양주목(楊州牧)을 남경으로 격상하여 고려의 삼경(三京) 중 하나로 삼고, 현재 청와대 부지에 남경 별궁을 지었다. 이 당시 남경의 영역은 양주목 영역을 그대로 승계했기 때문에 현재 서울특별시 강북 지역과 구리시, 남양주시 일부까지 관할하는 형태였다.
원 간섭기가 시작되면서 제후국은 천자국에서만 쓸 수 있는 경(京)을 쓸 수 없다고 하여 1304년(충렬왕 34년)에 모두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때의 옛 이름으로, 개경(開京)은 개성부(開城府)로, 서경(西京)은 평양부(平壤府)로, 동경(東京)은 계림부(鷄林府)로, 남경은 한양부(漢陽府)로 일제히 격하되었다.
공민왕은 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하였으나 도중에 공민왕이 피살되면서 천도는 흐지부지되었다. 1382년(우왕 8년)에 잠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이듬해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고,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한양으로 천도했으나 이듬해 또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다.
2.2. 조선 초의 한양 천도[편집]
그 이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며 태조는 고려 말의 천도 분위기(외적 방어, 풍수지리, 도참설 등)의 영향으로 강하게 천도를 추진한다. 이 당시 신료들은 대체로 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태조는 처음에는 고려 말에 가장 주목받았던 한양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천도를 명하였으나 이후 신하들의 반대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신료를 파견하여 길지를 조사시키고 두 차례 순행을 단행하는 정성을 보여 "천도는 무조건 할 것이되, 어디로 할지 정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신료들이 "꼭 해야한다면 한양이 가장 좋다"고 물러나면서 한양이 수도로 낙점되었다.
태조는 즉위한 뒤 한 달만에 한양 천도를 명하였으나[3] 당시 시중(侍中)이었던 배극렴(裵克廉), 조준(趙浚) 등이 아직 궁궐과 성곽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폐가 될 수 있으므로 천천히 하자고 하여 미뤄진다.[4]
이듬해 1월 태실 증고사[5]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온 권중화(權仲和)가 (아마 수도 입지 조사를 겸해서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鷄龍山) 일대에 대한 도읍 지도를 바쳤고[6] , 태조는 이달 19일 계룡산으로 행차하여 지세를 살피러 갔다. 당시 대신들은 이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태조는 이러한 태도를 이해한다면서도 천도에 대해서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7] 결국 그 자리에서 계룡산이 새 도읍으로 낙점이 되었고, 행정 구역을 정하고 궁궐 건설까지 추진하였다.[8] 이 때, 태조가 왕사(王師) 자초(自超, 무학대사)에게 터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만 답하였다고 한다.[9] 이곳은 지금의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이다. 신도안이라는 이름 자체가 '새로운 도읍'이라는 뜻이다.
이 때 경기도관찰사 하륜이 나서서 계룡산이 남쪽에 치우쳐 있으며 부지가 너무 좁고 근처에 큰 물이 없어 도읍으로는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권중화, 정도전, 남재 등이 의견을 검토한 결과 하륜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계룡산 공사는 중지되었다. 이와 함께 태조는 다시금 도읍 부지를 물색할 것을 명하였다.[10]
다음 수도 후보지는 무악(毋岳)이었다. 1394년 2월 태조는 조준과 권중화 등을 보내 무악 땅을 살펴보게 하였고[11] , 이들은 돌아와 땅이 좁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홀로 무악이 협소하기는 하나 개경의 강안전(康安殿), 평양의 장락궁(長樂宮)에 비교하면 넓은 편이고, 당시 유행하던 도참서나 풍수지리가 말하는 것과도 부합한다며 옹호하였다. 이외에도 서운관(書雲觀)의 윤신달(尹莘達)과 유한우(劉旱雨)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료들은 천도에 반대하였으나[12] , 결국 태조가 다시 직접 행차하여 살펴보기로 결심하였다.[13]
태조는 8월 8일 무악에 친히 행차하였고, 서운관의 윤신달과 유한우 등이 다시금 반대의견을 말하자 빈정이 상하였는지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라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를 보아 태조는 도참설에 다소 의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서운관에서는 도참을 모른다고 하자 태조는 "그러면 지리법으로 말해보아라"라 하였는데, 유한우는
라며 역시 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대해 태조는고려 태조가 송산(松山) 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 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 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
등의 발언으로 천도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강하게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서운관에서는 "우리 나라 내에서는 부소(扶蘇, 개경) 명당이 첫째요, 남경(南京, 한양)이 다음입니다."라고 의견을 내었다.[14]"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 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삼국 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
다음 날 태조는 재상들을 모아 도읍에 대한 의견을 올리라 하였는데, 각자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주요 논점은 볼드체)
이처럼, 무악은 지리적으로 볼 때 국토 중앙에 있으며 한강을 낀 것은 장점이지만 너무 좁다는 것이 지적되었으며, 외적으로는 민력을 지나치게 들인다는 점, 지리적으로 개경보다 좋은 땅이 없다는 점 등이 공통적으로 지적되었다.
태조는 이미 천도할 생각을 굳혔기 때문에 재상들의 이러한 반대 의견에 언짢음을 표했고, 그 다음 남경(지금의 사대문 안)으로 행차하였다.
임금이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 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떠냐?"
윤신달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 북서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개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20]
이외에 무학대사에게도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고[21] , 다른 재상들도 "꼭 옮기려면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만 줄곧 무악을 밀던 하륜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라며 다시 홀로 반대하였다.
결국, 돌고 돌아 결론은 한양이었다. 한양은 고려 말 가장 유력한 천도 후보지였으며, 태조 또한 즉위하자마자 한양 천도를 명한 바 있었다. 이 때 겨우 재상들의 (수동적) 찬성 하에 한양 천도가 일차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태조는 양원식(楊元植)이 제안한 광실원(廣實院) 동쪽의 계족산(雞足山), 민중리(閔中理)가 제안한 도라산(都羅山), 임진현 북쪽의 신경(新京) 등을 살펴보았으나 모두 후보지로 삼기 어려워 그만두었다.
(8월 18일) 도라산 : "이렇게 더럽고 습한 곳이 어찌 도읍이 될 수 있단 말인가?" - 태조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요(堯)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하(夏)나라는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 상(商)나라는 박(亳)에, 주(周)나라는 풍호(豊鎬)에, 한(漢)나라는 함양(咸陽)에, 당나라는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22]
이후에도 태조는 11월 한차례 더 무악을 다시 알아보라는 명을 내린 적이 있으나, 신하들이 좁다고 반대하여 그만두었다.[23] 이 시기에 올린 것으로 보이는 상소(시기는 일치한다.)가 조선 초 문신 류관(柳寬, 1346~1433)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00년(정조 24년)에 간행한 하정유집(夏亭遺集)에 『태조조논무악정도소』(太祖朝論毋岳定都疏)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정보원문
여기까지는 실록에 나오는 정사이고, 한양 천도에 관해서는 무학대사와 관련한 유명한 야사가 있다.
태조는 무학대사를 보내 한양 땅을 살펴 보게 했는데, 본래 왕십리에 수도를 삼으려고 하다가 한 노인이 지나가면서 소에게 "이 무학 같이 미련한 소야!" 라고 하는 것을 들은 무학대사가 깜짝 놀라 노인에게 물으니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도읍으로 삼을 땅이 있을 것이오." 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10리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과연 도읍으로 삼을 만했고, 그곳이 지금의 경복궁 자리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한양은 수도로 낙점되어 1394년 11월 21일에 천도를 단행한다.
그 이듬해인 1395년 6월 6일에는 한양부를 옛 수도였던 개성부의 전례에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옛 양주를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현과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고양군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에 두었다.
태종 시절까지는 옛 개성부를 가리키던 말인 개경에서 따와 한경(漢京)이라고도 불렸다.
2.3. 한양천도 이후[편집]
공식적으로 한성부로 개칭하는 동시에 한양도성 내를 5부 52방으로 나누었다. 이때에 이르면 한성부는 어느 정도 건설이 끝나고 경복궁, 사직단, 종묘, 종로, 남대문로 등이 완성되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묘사된 당시 한양도성의 구조. 처음 천도될 당시의 구조이므로 창덕궁이나 덕수궁은 물론 경희궁 등 태종 이후에 지어진 대궐들은 없다.
그러나 정종이 즉위한 직후 다시 개성으로 환도했다. 2년 후 태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한양으로 환도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때 하륜은 무악(지금의 신촌)을 수도로 삼을 것을 주청했고, 기존의 한양도성과 무악이 후보지에 올랐다. 당시 개성 잔류나 무악 천도 의견이 대세였고 한양 환도는 태종이 주장했다. 한양을 원했던 태종은 개경 도읍을 유지하되 종묘와 사직은 한양에 두자는 절충안을 내놓기도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태종은 종묘에 들어가 엽전을 던져서 길흉을 점쳐 볼 것을 제안했다. 총 9번 던져서 점을 쳐 보니 한양이 2길(吉) 1흉(凶)이었고, 개성과 무악은 각각 2흉(凶) 1길(吉)이었다. 그 결과 다시 한성으로 환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본 이가 없기 때문에 태종이 이미 의중을 다 정해 놓고 점괘를 짜맞췄다는 이야기도 있다.
5부 52방으로 나누었던 한성부의 행정구역은 세종 대에 서부의 영견방(永堅坊), 인지방(仁智坊), 취현방(聚賢坊)을 폐지하며 5부 49방으로 줄었다.
1424년(세종 6년)에 이르면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공신들에게 나눠 줄 땅이 모자라게 됨에 따라 흥인지문과 남소문[24] 바깥 지역을 한성부에 편입하고 동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 남부 정심방(貞心坊)과 예성방(禮成坊) 성신방(誠身坊)에 편제했다. 이것이 성저십리의 시초이다.
당시 편입된 지역은 둔지산 동쪽의 현 용산구 이태원동부터 성동구 성수동까지, 북쪽으로는 동대문구 수유동에 이르렀고, 신당동, 행당동 이남 지역은 남부에, 왕십리 이북 지역은 동부에 들어갔다. 1461년 2월 27일에는 지금 용산구, 마포구 대부분(합정동 서부-양화진-, 망원동, 성산동, 상암동 제외), 서대문구 대부분(가좌동 제외), 은평구 응암동, 불광동, 녹번동까지가 모두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1426년(세종 8년)에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으나 성저십리의 인구는 6,044명으로 전체의 5.5%에 불과하였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개경에서 이주해 온 조선의 핵심 세력들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았고, 원래 성 안에 살고 있던 중인 계급의 사람들은 이들에게 밀려 도성 밖 성저십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상경한 사람들이 성 밖에 정착하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성 밖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났고 성저십리가 확장되었고, 대부분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수도 서울이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789년(정조 13년)에는 성저십리 인구가 무려 76,782명으로 전체 인구의 40.6%로 증가하였다.
1503년에 연산군 때 인접한 양주목, 광주목, 고양현 등을 소개하고 영서역과 덕수원의 위치를 조정하여 유행처(놀이터)로 만들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원상복구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며 선조는 개성으로 몽진했고, 한성은 그야말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선조는 1년 만에 한성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에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이 불타 조선 전기의 건축물들은 거의 사라졌고, 선조는 초가집에 머물다가 말년에 가서야 창덕궁을 임시로 복구해서 들어간다. 임진왜란 때의 피해가 워낙 커서 복구사업은 무려 인조 때까지 이어졌고, 그마저도 경복궁은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방치되다가 조선 말엽에 가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된다.
2.4. 조선 후기~대한제국[편집]
1751년(영조 27년)에는 동부 12개 방에서 6개 방(연희방·천달방·덕성방·서운방·관덕방·흥성방)이 폐지되었고 남부는 정심방, 예성방, 성신방이 폐지되고 둔지방(屯芝坊), 한강방(漢江坊), 두모방(豆毛坊)으로 다시 나누었다. 서부는 신화방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을 신설하여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고, 북부에는 명통방을 폐지하여 9개 방에서 8개 방이 되었다. 따라서 동부 6개, 남부 11개, 서부 9개, 북부 9개, 중부 8개, 총 43개 방이 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년)에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어 총 44개 방이 되었으나, 경모궁방은 갑오개혁 때에 폐지된다.
1895년 6월 23일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8도를 폐지하고 23부제가 실행하였다. 한성부는 기존 한성부 지역과 고양군, 파주군, 교하군, 적성군, 양주군, 포천군, 영평, 가평, 연천, 광주군를 포함하게 되었고, 구 한성부 지역은 한성군(漢城郡)이 되었다. 동시에 기존의 5부(部)가 5서(署)로 바뀌고 여러 동리가 개편됨과 동시에 지금의 광진구와 면목동, 잠실 등도 두모방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6년 8월 4일 자로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 체제로 전환되며 한성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 10월 1일, 한성부는 경기도로 편입되며 이름을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장관직은 한성부판윤에서 경성부윤(京城府尹)으로 바뀌었다.
2.5. 폐지 이후[편집]
1911년 4월에 성저십리 지역 10개 방은 면(面)으로 바뀌었다. 이때 한강방과 둔지방이 합쳐져 한지면(漢芝面)이 되었고, 연은방과 상평방이 합쳐져 은평면이 되었다.
1914년에 부군면 통폐합이 이루어지며 기존 성저십리 지역 대부분이 고양군에 편입되었고, 5부, 37방, 계가 폐지되었다. 이때 고양군은 경성부를 둘러싼 도넛 모양이 되었다. 1915년에 고양군으로 편입된 성저십리 지역에 동리통폐합을 단행했다. 이때 행정구역 변동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경성의 인구가 1930년대를 전후하여 대폭 증가하며 1936년에 다시 옛 성저십리의 절반 정도를을 경성부에 편입하였다. 단, 가장 늦게 편입되었던 성수동, 광진구, 잠실, 면목동 지역은 고양군 뚝도면 산하에 남아 고양군의 월경지가 되었고, 이 지역은 해방 후인 1949년에 가서야 서울특별시에 재편입된다.
3. 지리[편집]
3.1. 자연지리[편집]
한강이라는 큰 강에 면한 지역으로,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내사산(內四山)이 도시를 감싸고, 밖으로는 북한산, 앵봉산, 봉산, 배봉산, 천장산, 개운산 등이 성저십리의 경계가 되었다.
성 안에는 당시 개천(開川)이라 불리던 청계천이 동서로 관통하였고, 성 밖에서는 중랑천, 만초천, 홍제천, 불광천등이 흘렀다. 특히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는 지금의 성동구 일대는 큰 범람원이 발달하여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고, 한성부의 식량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3.2. 인문지리[편집]
당시 양반들이 모여 살던 한성부 안에서도 특히 양반들은 3개 지구에 모여 살았는데, 북촌(北村), 서촌(西村), 남촌(南村)이 있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 안국동, 삼청동, 재동, 계동, 원서동 일대이고, 서촌은 경복궁 서쪽의 사직동, 통인동, 통의동 일대이다. 남촌은 청계천 이남에서 남산 기슭에 이르는 곳이다. 이 지역은 현재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다.
4. 상권[편집]
지금의 종로는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렸는데, 육의전이 이곳에 있었다.
숭례문으로 들어오면 칠패가 있었는데, 지방에서 올라오는 건어물이나 농산물 등을 팔던, 지금으로 따지면 농수산물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다가 6.25 전쟁 이후에는 구호물자 등을 파는 곳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의 남대문시장이다. 지금도 숭례문에서 염천교 가는 길은 칠패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성 밖에는 왕십리 일대의 상권이 컸다. 이는 강원도나 충주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치는 곳이었는데, 이런 이유로 왕십리에는 상인 계층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5. 생활·문화[편집]
5.1. 문화[편집]
정월 대보름이면 석전놀이를 했는데, 아현리과 왕십리가 서로 대항하는 형태였다고 한다.
5.2. 언어[편집]
서울 방언이라는 특유의 방언이 있다. 본래 서울 방언은 경기 방언의 하위 방언인데, 수도라는 특성상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 덕택으로 여러 방언이 섞이기도 하였으며, 특히 왕실에서 쓰던 말이 일반 계층에서도 쓰이며 경기 방언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방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특히 상류층에서 사용하던 말과 하층민들이 쓰던 말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걸랑'과 같은 어미가 왕십리 일대의 중인들이 쓰던 말씨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서울 방언에서는 'ㅗ' 발음이 'ㅜ' 발음으로 변하는 현상이 있는데, 의문형 어미가 '~노'가 '~누'로 바뀌고, '고초'나 '호초'가 '고추', '후추' 등으로 바뀌어 현재는 아예 표준어로 정립되었다.
이 지역의 방언을 토대로 해방 이후에는 현대 표준어가 제정되었고, 평양을 수도로 삼은 북한도 서북 방언이 아닌 서울 방언을 기준으로 문화어를 제정했다.
옛 한성부 지역이었던 지금의 종로구와 중구 일대에서 오랫동안 살던 서울토박이들의 경우는 더러 구한말 때부터 쓰던 서울 사투리를 현재도 구사하는 편이며, 1963년 이후 서울로 편입된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 같은 경우는 서울 방언보다는 경기 방언을 사용하는 편이다.
6. 행정구역[편집]
- 1395년
- 동부 12방
- 서부 11방
- 남부 11방
- 북부 10방
- 중부 8방
- 1776년
- 동부 6방
- 서부 11방
- 남부 11방
- 북부 8방
- 중부 8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