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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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德壽宮 | Deoksugung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93,843.1㎡
지정연도
1963년 1월 1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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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광무 8년) 대화재 이전의 경운궁(덕수궁) 사진 출처
파일:덕수궁_전경(문화재청).jpg}}}
현재 덕수궁
1. 개요
2. 역사
2.1. 월산대군 저택
2.2. 정릉동 행궁
2.3. 경운궁
2.4. 대한제국의 황궁
2.5.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2.6. 일제강점기광복 이후 훼손
3.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 변경
4. 경운궁 궁호 환원 논의
5. 복원
5.1. 석조전 서관(덕수궁 미술관) 문제
7. 여담


1. 개요[편집]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영상
〈덕수궁 1부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이야기하다〉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영상
〈덕수궁 2부 덕수궁, 근대 한국의 문을 열다〉

조선시대궁궐이다. 원래 왕가의 별궁인 명례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직후 행궁으로써 정궁 역할을 했으며, 광해군 때 정식 궁궐로 승격 경운궁이 되었고 대한제국 때는 황궁(皇宮)으로 쓰였다. 1907년 고종 퇴위, 순종 즉위 이후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서울특별시청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던 조선 초가 아니라 구한말에 증건(增建)된 전각들이 꽤 있기 때문에, 即(卽), 眀(明)[2]약자(略字)속자(俗字)가 적힌 편액(현판)들이 다른 4개 고궁보다 많다.

고려시대의 한양부 향교가 있던 장소로 비정된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했으며,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1/3 이하로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덕수궁 주변에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로마네스크)과 성가수녀회 본원, 성공회 서울교구장 공관(양이재라는 이름의 한옥)[3] 주한영국대사관주한러시아대사관주한캐나다대사관, 덕수초등학교[4] 등도 자리한다.[5]


2. 역사[편집]



파일:덕수궁-2021년-교차.png

파일:9851_8176_2443.jpg
▲ ‘현재’와 '대한제국 시기'의 덕수궁 일대 영역 교차 이미지
(녹색과 갈색이 겹쳐진 부분이 공통 영역이다.)

〈대한제국 시기 경운궁 배치도〉
파일:external/www.chpri.org/%EB%8D%95%EC%88%98%EA%B6%81%20%EC%B6%94%EC%A0%95%20%EB%B0%B0%EC%B9%98%EB%8F%84-1.jpg}}}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의 〈덕수궁 추정 배치도〉

2.1. 월산대군 저택[편집]


원래 1469년(예종 1년) 남이의 역모사건에 엮였던 조영달의 집 터였다. 역적의 집이란 이유로 조정에서는 조영달의 집을 몰수했고 1470년(성종 1년)에 성종이 이곳을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6]에게 내려주었다.# 1년 뒤 송씨가 이 집을 다시 왕실에 바치자 이름을 연경궁으로 짓고 왕실의 별궁으로 삼았다.#

1472년(성종 3년)에는 의경세자의 사우인 의묘를 연경궁 후원에 세우기로 했다.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은 제사를 맡으면서 이곳을 하사받았고,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이면서 의경세자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되었다. 이후 1475년(성종 6년) 의묘의 위패를 경복궁 안에 있는 연은전으로 옮겨 모시면서 연경궁은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만 남았다.

월산대군 저택이 된 경위를 다르게 보는 의견도 있다.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인 수빈 한씨가 남편 의경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고[7][8] 궁궐 밖으로 나가 살면서 시아버지인 세조가 특별히 수빈 한씨와 그 자녀들이 거처할 곳으로 지어주었으며, 이후 둘째아들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 어머니인 수빈 한씨도 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가자 오롯이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2.2. 정릉동 행궁[편집]


임진왜란의주목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 내의 궁궐들이(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증축, 연결하여 썼다. 특히, 명종의 처가였던 영의정 심연원의 저택을 종묘로 삼았고, 손자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저택을 세자 광해군이 거주하는 동궁으로 삼았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중 나중인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하고, 즉조당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전각들은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동 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여담으로, 2003년 ~ 2004년에 방영했던 SBS 사극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 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다.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 치세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를 그려냈다. 심지어 동궁(세자궁)은 초가집이었다.[9] 배우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가옥 중 '중부지방 양반가 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했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했다.

2.3. 경운궁[편집]


1609년(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 간 더 정릉동 행궁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동 행궁으로 돌아와 오랫동안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렸기 때문인 듯 하다. 광해군인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기 싫어서였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慶運宮)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자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한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10] 게다가 능양군 측은 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능양군(인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왕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를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렀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11]

즉위한지 3달 후에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12] 인조의 이러한 조치는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인목왕후에 대한 은밀한 견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 생전에는 내내 눈치를 보며 국법까지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인조인데 왕 입장에서 그게 편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목왕후는 가렴주구의 상징으로 여겨 장기적으로 없애자는 신하들과 기왕 지어놓은거 활용해 보려는 인조의 눈치싸움 현장인 인경궁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인목왕후의 만수무강을 위한 것이었다.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전각 2채[13]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이후 왕실에서 왕실 내 토지 및 재산 관리 역할을 하기 위한 별궁 명례궁을 설치한 정도를 빼고는, 별 다른 존재감 없이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힌 궁궐이 되었다.

2.4. 대한제국의 황궁[편집]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274년 후인 1897년(건양 2년) 고종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에 거처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했다.

고종이 아관파천 이후 이어[14]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조차 잊혔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서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明慶宮)'으로 소개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으며 이제는 고작 건물 2채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15] 이 인근은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 외에도 프랑스공사관, 독일영사관[16] 근처에 있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공사관 구역으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을 비롯한 다른 외국인들까지 주로 이 일대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성 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1896년(건양 원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조당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어진을 모신 사성당(선원전)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을 급한대로 지은 상태에서 1897년(건양 2년) 2월에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정전으로는 1902년(광무 6년)에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 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겉으로는 옛 궁궐을 보수 · 중건한다고 했지만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말이 중건이지 그냥 궁궐 하나를 통째로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창덕궁인정전을 본따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의 명정전이나 경희궁의 숭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서양식 건물인 돈덕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도 이 무렵에 지었다. 그리고 서양식 정전으로 활용할 목적의 석조전도 이때 착공했는데 워낙 큰 규모여서 그런지, 후술하겠지만 경술국치 이후에 완공되었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이 포스팅[17] 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건된 건축물들은 회안전, 문경전, 태원전 축대, 흥복전 행각, 다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화당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으로 개축되었다.

1902년(광무 6년) 경운궁 공사는 1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18] 그때까지 5년 동안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이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파일:attachment/KUpalacemain.jpg

공사 중인 중층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아 1902년 경에 촬영한 듯 하다.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경운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파일:서대문 운교.png

경희궁과 연결했던 운교# 돈의문에서 신문로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그리고 경희궁과 연결하는 홍교도 건립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경운궁이 있다. 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홍교의 건립 시기와 건립 의도 이 포스팅에 따르면 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기 위해 건립했으며 1902년(광무 6년) 8월에서 10월 사이에 세웠다고 한다.

2.5.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편집]



파일:attachment/KUpalacefire.jpg

동아시아 제후국[19]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었던 조원문.
대한문 바로 뒤에 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 바로 바깥에 있었다.

1904년(광무 8년) 2월 29일에 경운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석어당도 이때 소실 되었다.

화재 직후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경운궁 주요부를 완전히 복구하기까지 고종은 수옥헌을 침전 겸 편전(사무실)으로 사용했다.

대화재로 사실상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대한제국 정부는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결국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운궁을 재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 창덕궁으로 궁을 옮기는 것에 대해 고종의 반응은 굉장히 신경질적이었던 듯 하다. 윤치호자신의 일기이하영에게 들은, 궁궐 이어에 대한 고종의 반응을 적으며 경운궁에 유달리 집착하는 고종의 모습을 비판했다.

(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재완(李載完)[20]

이 황제에게 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윤치호 著, 《윤치호 일기》, 1904년(조선 개국 513년, 광무 8년, 갑진년) 4월 23일, 흐림.#

1905년(광무 9년)에 경운궁 수옥헌에서 일제의 강압과 을사오적의 매국 행위로 인해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당했다.

1906년(광무 10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규모는 1902년(광무 6년) 전성기 때보다 축소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바뀌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21]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이어서 순종돈덕전에서 즉위했다. 순종은 한동안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4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결국 정궁(황궁)[22]의 지위도 함께 옮겨갔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황제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다.

이후 이완용은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양위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7월 21일 탄핵 하였고 그 작업을 자신의 이복형제인 이윤용에게 맡겼다. 이 이윤용이 다음날인 1907년(광무 11년) 8월 2일 올린 건의에 의해 경운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변경되었다.

1910년(융희 4년)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어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했고(경술국치), 고종은 태황제(太皇帝)에서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당했다. 고종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할 때까지 계속 덕수궁의 주인으로 남았다.

그해 12월석조전이 착공 10년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고종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망국 이후에 완공되었던 것이었다. 완공 후 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고종은 석조전에 불편함을 느껴 함녕전에 주로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 석조전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2.6. 일제강점기광복 이후 훼손[편집]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의 건물들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중화문과 중화전을 빙 둘러 있던 2칸 폭의 행각 역시 헐렸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복원하지 않았다. 30년대 일제가 당시 경성에 기존의 공원으로도 수용할 인원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덕수궁을 공원화할 때 석조전의 앞마당에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 때 방해가 된 것이 중화전의 서쪽 행랑채였다. 또한 덕수궁 권역의 일부를 민간에 매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덕수궁은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으며, 그 권역 역시 무지막지하게 줄었다.

8.15 광복 직후,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기에는 석조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신탁통치에 관한 문제를 여기서 의논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덕수궁에 북한군이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할 상황이 된 것.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 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만약 딜 중위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포격을 했으면 덕수궁은 그대로 잿더미가 돼버렸을 상황(…) 이에 감사의 뜻으로 대한민국 정부1996년 해밀턴에게 정식으로 감사패를 전달했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이후로도 덕수궁은 부분적으로 훼손당했다.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위에 마치 낙동강 오리알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이 문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파일:attachment/1970KUpalacegate.jpg

파일:attachment/KUpalace.jpg
섬처럼 고립된 1970년의 대한문
1911년의 덕수궁 권역
붉은색이 1911년의 덕수궁 권역이다. 파란색은 구 주한미국대사관, 지금은 미국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 녹색은 주한영국대사관의 영역이다. 현재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세워져 있다.[23] 성공회영국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 교파이다. 그래서 한국성공회는 선교 초기에 영국 국교회(캔터베리관구) 산하에 있었으나, 지난 1993년 캔터베리관구로부터 독립하여 현재는 캔터베리관구 소속이 아니고 서울교구, 대전교구, 부산교구성공회 한국관구를 구성하고 있다. 노란색이 현재 덕수궁 영역. 대한문(大漢門)은 원래 지도의 붉은색에서 동하단의 끝에 있었다.


3.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 변경[편집]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호를 변경하게 된 경위에 대해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고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라는 궁호(공덕을 칭송하여 올리는 칭호)를 올린 것이 그대로 궁궐 이름이 되었다.

또 문화재청이 발간한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전략) 궁호에 '수(壽)'가 포함된 것은 선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함이다. (중략) 이들 궁호는 건물이 남아있다고 해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의 붕어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고종의 경우도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양위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궁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때 순종은 태황제의 궁호로 '덕수(德壽)'를 택했고,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은 그 때부터 덕수궁이 된 것이다. (중략) 국민들은 나라를 뺏긴 국민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2009, p.311


그런데 순종실록을 보면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 전부터 쓰이고 있었고, 순종이 덕수를 지어올린 게 아니라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덕수로 정하였고 순종이 윤허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윤용(李允用)이, ‘태황제궁의 호망단자(號望單子)를 덕수(德壽)로, 부(府)의 호망단자를 승녕(承寧)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윤허하였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 궁내부에서 태황제궁의 칭호를 덕수로 하고 부의 칭호를 승녕으로 할 것을 아뢰다#


그리고 8월 6일 신기선의 상소에서 덕수궁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 종묘의 축문에도 옛 규례를 준행하여 ‘신’ 자를 쓰고 폐하께서도 또한 태황제 앞에서 반드시 ‘신’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이번 덕수궁(德壽宮)에 공손히 올리는 책문(冊文) 가운데서도 전례대로 ‘신’ 자를 쓰소서.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6일 양력 2번째기사 1907년 대한 융희(隆熙) 1년장례원 경 신기선이 관례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덕수라 정한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면 이완용에 의해 궁내부 자리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복동생이 이완용으로 그 역시 매국행위로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토는 헤이그 특사를 보낸 고종의 퇴위작업을 이완용에게 일임하였고 이완용 등은 고종에게 황태자에게 정사를 대리할 것을 건의하였다. 강압에 못이긴 고종은 대리청정을 하게끔 하였으나 이완용은 대리를 황제 양위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실제 양위식에 고종도 순종도 당사자는 참여하지 않고 대리인 2명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희한한 즉위식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그 후 내각은 일치하여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날 제3차 어전회의에서 이병무가 칼로 위협하여,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날 결심을 하고 결국 7월 19일 오전 양위식이 거행되었다.[3(1995년 7월 1일). 《친일정치 100년사》. 서울: 동풍. 62-63쪽. ISBN 978-89-86072-03-7.]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 하였다. [24]

각 부문의 유사(有司)들은 자기 직책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겠으나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박영효(朴泳孝), 시종원 경(侍從院卿) 이도재(李道宰), 전 홍문관 학사(前弘文館學士) 남정철(南廷哲)은 직책이 더욱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거세게 직책을 회피하였으니 그 진상을 덮어둘 수 없습니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7월 21일 양력 3번째기사 1907년 대한 광무(光武) 11년이완용, 조중응이 직책을 회피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을 탄핵하다#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조민희(趙民熙)의 보고서를 받아보니, ‘피고 박영효(朴泳孝), 이도재(李道宰), 남정철(南廷哲)의 죄안을 심리한 결과 피고들은 모두 궁부(宮府)의 중임을 띠고서 황태자(皇太子)가 정사를 대리함을 진하(陳賀)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들어와 참가하지 않고 혹은 병을 핑계대기도 하고 혹은 통지를 받지 못하였다는 등의 말들로 공술하였습니다. 더없이 중대한 예식을 태연히 회피하였으니 처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피고들은 모두 《형법대전(刑法大全)》 제226조의 관리들이 임명받았거나 재임 기간에 일을 당하여 사고로 핑계대거나 병이 있다고 핑계하고 회피하는 자는 중한 법조문에 의하여 각각 태형(笞刑) 80대에 처한다는 율문을 적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평리원에서 원래 제기한 법조문에 의거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순종실록 1권, 순종 즉위년 8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


이완용은 대리작업을 회피한다는 이유로 박영효 등 궁내부 대신들을 탄핵하였고 그 자리에 자신의 이복서형인 이윤용을 앉혔다. [25]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가진 덕수궁은 역사적으로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궁궐에 붙여지던 이름들 중 하나였다. 남송의 고종효종에게 양위한 후 머문 궁을 덕수궁이라고 했다.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후 머문 궁의 이름이 덕수궁이었는데, 이 때는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여 덕수궁 역시 거기에 있었으나, 태종 즉위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 곳에서의 이성계의 거처도 덕수궁으로 불렸다. 이처럼 덕수궁은 퇴위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상왕의 거처를 항상 덕수궁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덕수궁 외에도 태종의 퇴위 후 거처인 '수강궁'이나 충렬왕충선왕에게 양위 후 머문 '덕자궁'(德慈宮)처럼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어러한 몇 가지 명칭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덕수궁 명칭은 퇴위한 군주가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붙는 명칭에 가까우며, 해당 상왕(상황)이 사망하면 더이상 덕수궁으로 불리지 않고 원래 궁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이완용이 궁내부에 심은 친일파 이윤용의 의도 하에 고종퇴위작업의 일환으로 물러난 임금에게 부여하는 뜻의 보통명사인 덕수라 이름지은 것이다. [26]


4. 경운궁 궁호 환원 논의[편집]


덕수궁으로 변경된 이유가 이와 같기 때문에 경운궁으로 궁호를 환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지속적으로 일었다.

2010년 문화재청은 사적 명칭 개선 대상에 덕수궁을 지정하였고 2011년 9월 덕수궁의 경운궁 명칭 변경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총 3,008명 중 반대 914명 (30.4%) 찬성 2,015명 (67%) 기권 79명 (2.6%)의 여론결과를 얻었다. 그리고 12월 '경운궁' 환원에 대한 공청회가 개최되었다.# # #

공청회에서 나온 덕수궁 유지 측의 주된 입장은 "100여 년 이상 사용돼 이미 사회적으로 정착된 명칭이므로 이를 바꿀 경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커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 였고, 경운궁 환원 측의 주된 입장은 "1611년부터 300여년 간 사용돼온 역사적인 명칭이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갔다가 경운궁으로 돌아와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명실상부한 법궁이었으나, 1907년 궁궐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해 고종이 황제위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 명칭으로 회복해야 한다"였다.

이후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 노중국)는 2011년 12월 14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덕수궁 명칭 변경 문제를 심의에 부친 결과 경운궁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못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많은 만큼 명칭 변경 안건 심의 자체를 '보류'하였다.#

문화재청의 보류 결정은 창경궁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40여 년 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1986년 창경궁으로 환원해 복원된 것은 그럼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크고 혼란이 아니어서 환원한 것인지의 모순이 있다. #

게다가 태조의 상왕시절 붙였던 덕수는 태조 사후 원래 이름인 소어궁(所御宮)으로 환원되었다. 덕수궁이란 한시적인 기간에 한해 쓰인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닌 것이다. 이 같은 관례를 볼때 덕수궁의 이름이 그 붙여진 과정도 문제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고종 사후에는 원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환원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보류 결정 이후로도 경운궁 환원 요구는 지속되고 있다. #


5. 복원[편집]





1980년대에 돌담을 복원하면서 덕수궁은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8년경희궁지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90년대창덕궁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차차 복원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덕수궁 또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현재 창덕궁의 규장각선원전 권역 복원, 인정전 내.외 행각 복원 등은 완료되었다. 2016 ~ 2017년 사이의 3단계 작업에 중화전 행각 복원, 조원문 복원, 금천교 복원, 광명문 이건 등이 포함되었다. 언제 있지 모르는 4단계 복원에는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용산구로 이전하는 대로 선원전 및 덕수궁의 양관(洋館) 중 하나로 석조전과 함께 평면도가 남아 있는 돈덕전이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까지 문화재청은 덕수궁 복원 사업을 총 4단계에 걸쳐 수립해 놓았다. 1단계인 2010년 ~ 2013년석조전 내부 복원, 덕홍전 주변 행각지 발굴 및 복원, 준명당즉조당 보수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석조전의 경우 2014년 10월에 '대한제국역사관'이라는 타이틀로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만 덕수궁은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다. 4단계 복원 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주한미국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많은 차질이 우려된다. 물론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이전하는 대로 담장을 세우는 등 덕수궁의 궁역을 차례로 복원할 예정이지만, 이미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권역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세워진 구세군 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주한영국대사관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합의를 봐야하는 실정이다.

특히 정동 1-23에 위치한 구세군중앙회관은 덕수궁 옛 궁역 내 건축된 건물이나, 1926년 완공된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진 지정문화재이다. 만일 덕수궁 전역을 복원한다면 이 건물은 창경궁 대온실처럼 남겨 궁내 존치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덕수궁 배치도〉와 현재를 비교하면 구세군회관 자리에도 덕수궁 전각이 있었던 것이 확인 가능하지만,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기존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궐내각사 터가 위치한 동쪽 궁역은 이미 태평로서울광장으로 뒤덮인 상태로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복원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2014년 수립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로가 축소될 계획이라 아직은 미지수. 그러나 완전 복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석조전중화전, 준명당의 서쪽 행랑채, 담장 측면의 배치가 처음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27] 아무리 덕수궁이 동서양의 건축이 한데 어우려져 있다는 평을 받지만 전각 배치가 어긋난 탓에 부조화스러운 일면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중화전이 즉조당 등의 위치에 맞게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중화전은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다. 본디 석조전이 먼저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전통 방식의 건축과 달리 기초 공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고종의 지시로 결국 중화전이 석조전보다 빨리 세워졌다. 결국 중화전 서쪽 행랑채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 외엔 달리 대안이 없다.

그 외에도 복원해야 할 전각이나 양관들이 많지만, 양관들의 경우 현재까지 최소한 평면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돈덕전과 제 위치를 고수 중인 정관헌, 석조전, 중명전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구성헌이나 환벽정 등은 그 평면도 등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 자료가 없어 터만 남겨두었다.

2015년 8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궁역 인근에 위치한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구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을 철거해 그 자리를 시민광장으로 개장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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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28]
철거 이전 변형된 상태
원형이 유지되었다면 그 자체도 역사 유적의 하나라 보존될 가능성이 컸지만, 사진과 같이 사실상 다른 건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철거했고 그보다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을 열어주어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일제 잔재라며 홍보적으로 악용하고, 철거한 자리에서 유적이 발굴되었음에도#[29] 도시재생 주제의 건축전시를 위한 가건물을 짓거나# 박물관을 짓는 등# 다른 현대적 건축물을 지어 홍보 목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자 철거가 올바른 방향이었냐#는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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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시건축전시관. 뒤에 보이는 붉은 지붕 건물은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철거한 자리에 2019년 3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개관했다. 주변 돌담과 뒤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견과 예전부터 존재하던 건물도 아닌데 시대를 벗어나 다소 부자연스럽다는 반응이 공존한다.

2019년 3월 1일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여담으로 광명문 내에 있었던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보물흥천사명 동종의 경우, 어디로 옮길 지에 대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돈덕전1902년(광무 6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30] 예식'을 하기 위한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으며,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장소나 외국사신 접견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1907년(융희 원년)에는 순종이 즉위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이어해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같이 훼철되었고 이후에는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는 2017년에 마쳤으며, 2018년 현재 복원을 위한 설계를 하는 중이다. 2018년 내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하반기에 완공할 예정이다. 복원되면 대한제국과 관련한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선원전고종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광무 4년) 10월 화재로 모두 불타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31]로 옮겨 1901년(광무 5년) 7월 11일에 재건했다. 그러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없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당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광복 이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양도받았다. 2003년 6월 미국공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를 확인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하여 2011년에 소유권이 한국으로 다시 넘어왔다. 이후 교환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했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32] ‘고종의 길’을 2018년에 완공하면서 덕수궁 복원 사업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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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복원 예상도〉
문화재청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을 복원해 나갈 예정이다.
  • 진전(眞殿): 역대 왕의 御眞(어진:초상화)을 봉안한 건물
  • 빈전(殯殿): 왕이나 왕후 승하 후 그 시신을 모셔둔 곳
  • 혼전(魂殿): 발인 후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신주(神主)를 모셔둔 곳


5.1. 석조전 서관(덕수궁 미술관) 문제[편집]


현 덕수궁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쓰고있지만 이것이 맞는건지는 논란이 생길수밖에 없다.

일제시대의 잔재를 철거한다는 의미에서 현재 경복궁내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철거하고 복원중인 경복궁의 사례와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돌아온 창경궁과 비교하면 이 건물을 그냥 놔둬야 하는지는 의문이 들수밖에 없다.

제실 박물관인 석조전의 공간이 부족해서 세운 덕수궁 서관은 역사적으로 석조전과 비교해서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나 연관된 사건이 있는지는 의문이며 덕수궁과 구한말의 미술과의 연개성은 좀 생뚱맞기는 하다.

물론 이곳 덕수궁 서관 일대가 고종시절 당시엔 공터였고 복원할 건물이 있지는 않고 일제시절 건물이라고 무작정 때려 부수는것도 아픈역사의 일부라며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지하게 이 건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수는 있다.


6. 건축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건축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 경운궁 화재의 방화 주체가 일본이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일본군들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사진이 있어서, 가해자들이 즐거워 한다며 대한제국에서는 이를 갈았다 한다. 또한 궁궐의 화재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33]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소 다르다. 경운궁 대화재를 자세히 다룬 블로그 이 포스팅에 따르면 일본군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다는 사진은 실은 사진이 아니라 삽화이며, 현재까지 발견된 경운궁 대화재 당시의 사진은 겨우 1장에 불과하다. 또한 일본군들이 화재 당시 경운궁 밖에서 화재를 밖에서 지켜본건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 왕실 법도상 모든 궁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궁궐 내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일본과 청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서 파견된 소방수들은 불타는 궁궐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다.

  • 덕수궁의 명물하면 돌담길 산책로인데, 옛날에는 돌담길을 연인이 끝까지 걸으면 헤어진다는 도시전설이 있었다. 이는 과거 서울가정법원[34]으로 가는 길목이 이 길을 지나가야만 나왔기 때문에 이혼을 하기위한 부부들이 이 길로 들어가면 이혼절차를 완료한 후 남남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도 했다.

  • 가수 진송남의 노래 〈덕수궁 돌담길〉 이라는 노래가 있다.

  • 가수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의 가사 초반부에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했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수록되어 있다.[35]

  • SBS 드라마프라하의 연인〉은 마지막화를 찍으면서 돌담에다가 본드로 종이 여러 장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짓을 저질러 비판받기도 했다.

  • 2010년경 석조전 내부를 보수공사하는 중에 벽 내부의 배수파이프에 단열재로 새끼줄을 해놓은 것 등이 주목받았다.

  • 서울특별시청과는 악연 아닌 악연을 가지고 있다. 서울시청 설계안이 나올 때마다 문화재인 덕수궁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와 앙각(仰角) 제한 규정, 즉 문화재 담장에서 27도 사선을 그었을 때 100m 경계선 안의 건물 높이는 이 사선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문화재청에 의해 딱지를 맞았다. 높이를 대폭 낮춘 현재의 신청사 이전의 초기 설계안들이 전체적으로 동고서저 형태를 띄는 것도 이 제한 규정 때문.

  • 대한문에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경에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다. 단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로 의식이 열리지 않는다.

  • 태평로는 대한제국 시절 방사형 도시계획의 일환이었고 고종이 다닐 만큼 번듯한 길이었음이 문헌에 남아있다. 흔히들 일제의 도로 개설로 덕수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도로는 이미 당시의 경운궁을 중심으로 개통되었고, 1912년 이래로 도로 확장을 목적으로 대한문이 후퇴되고 궁장이 깎이는 등 궁역이 줄어든 것이다. 8.15 광복 후에도 1960년대 한 차례 확장이 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 또한 덕수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한다고 2013년도에 서울시가 발표한바 있다. 동아시아에 남아있는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궁인데다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니 충분한 이유가 될수 있다. 그런데 아직 세계유산 후보에도 없다.

  • 얼렁뚱땅 흥신소〉에서 고종황제의 비자금 금괴 85만냥이 나뭇잎 형태로 경운궁 지하 우물속에서 마지막회에 발견되는데, 실제로 경운궁 아니면 철원에 고종황제의 비자금이 있다고 《대동칠십일갑사》라는 야사에 나와있다.

  • 통영에서의 하루〉의 주요 촬영지 중 하나이다. 희연(유인영)과 성선(이미도)이 서울의 회사에서 같이 다닐 때, 점심 식사후 봄날의 덕수궁 돌담길을 거니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성선은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일찍 퇴사한다.

  • 어른(만 25세 이상)은 입장료 1,000원을 받고 있으며 매표시간은 20시까지이고 퇴장시간은 21시까지이다. 제한적으로만 야간개장을 하는 다른 고궁들과 달리 항상 야간까지 개장한다.
[1] 정동 5-1[2] 일제가 싫어서 '日'대신 '目'을 썼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3] 이 건물 자체가 본래 경운궁의 전각이었다. 경운궁 안에 있던 건물을 사들여서 축소되면서 새로 둘러친 경운궁 담장 바깥으로 옮긴 것인지, 건물 자체의 위치는 그대로인데 이 건물이 팔리면서 덕수궁 권역과 이 건물 사이에 담장을 둘러친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이 건물의 위치는 덕수궁 내부이다. 즉.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다.[4]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JODK 경성방송국이 위치했던 곳이다. 현 KBS의 전신.[5] 기실 '주변'이라기보다는 훼손된 경운궁(덕수궁)의 옛 부지 위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복원 중인 덕수궁 주변'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6] 영응대군이 성종의 할아버지 세조의 동생이므로, 영응대군의 부인은 성종에겐 작은할머니이다.[7] 과부는 궁궐에서 거처할 수 없었는데 이는 후궁이 그 대상이고, 예법과 궁중법도상 세자빈의 지위는 왕후(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의 종통(同宗統)이 되므로 궁궐에서 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지위에 오를 때에는 역시 왕후와 마찬가지로 상국(上國)인 명나라의 책봉 교지가 필요했다.[8] 한씨(인수대비)의 경우는 신분이 종통인 세자빈이므로 궁궐에서 그대로 살 수 있었고, 또 세조 내외가 며느리 한씨에게 궁궐에서 그대로 살기를 권했으나, 한씨는 거듭 사양하고 궁궐 밖으로 나가서 살았던 것. 이후 과부가 된 세자빈으로 공회빈 윤씨(순회세자빈), 현빈 조씨(효장세자빈, 효순왕후으로 추존), 혜빈 홍씨(사도세자빈, 헌경왕후로 추존), 빈궁 조씨(효명세자빈, 신정왕후)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편을 이른 나이에 잃었지만 모두 궁궐에서 살았다.[9] 보통 도성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의 큰 난리를 겪은 군주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군주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삼국지》에서조차 헌제이각곽사가 제멋대로 마구 전횡을 부리고 자기들끼리 도성 안에 군대를 갖고와서 허구한날 쌈박질하고 도성에 살던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살해당하거나(당연히 이각곽사 무리들이 죽였다.) 도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치는 바람에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인 상황까지 몰렸다. 이 때문에 헌제는 야밤에 이각곽사를 피해 도망쳐야만 했으며 이후 조조가 헌제를 영접할 때까지 일반 개인집 중 하나를 주워다가 (징발이 아니라 주워다 쓴 거다. 왜냐 하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같은 국난이 연달아 일어나서 사람들의 씨가 마르기 일보 직전이라 빈집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임시로 조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추가로 헌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를 따라온 문무백관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0] 실제로 명종 등이 대비(문정왕후)의 지명으로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11] 실거주는 창경궁에서 했다.[12] 즉조당과 석어당은 할아버지 선조가 머물렀던 곳이며, 또한 자신이 즉위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놔둔 듯 하다.[13] 부속 건물까지 합쳐도 4채밖에 안되었다.[14]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다.[15] 고종경복궁에 살던 시절에도 궁 내에 양반집 저택의 형태를 띤 건청궁을 지어 거처했다.[16] 1903년(광무 7년)에 공사관으로 승격.[17] 이 포스팅의 명성왕후 표기는 역사적으로 완벽한 오류임으로 이를 감안하고 읽어야한다. 명성황후의 왕비시절을 지칭할 때에 왕후로서 사망하고 명성이라고 시호가 정해졌다는 점을 근거로 명성왕후가 맞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명성이란 시호는 황후로서 책봉된 이후에 시호 반포가 이뤄졌기에 명성왕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다. 명성황후의 왕비 시절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소혜왕후 한씨의 대비시절 존호가 "인수"여서 인수대비로 우리가 부르듯이, 명성황후의 왕비시절 존호는 "효자"였음으로 효자왕비 민씨로 부르는 것이 정확한 호칭법이다[18] 창덕궁 인정전(정면 5칸 측면 4칸)을 본 따 만들었다.[19] 대한제국을 선포했어도 궁궐 관제 자체는 예전과 같게 유지했던 듯 하다. 굳이 중국과 똑같이 모방할 필요도 없었다.[20] 고종의 사촌동생.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이다.[21] 참고로 중화문도 중층이었다가 낮아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화문은 처음부터 단층이었다.[22] 덕수궁을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한제국 선포는 조선의 법통을 잇는다고 고종이 선포하고 태조와 정조 등 고종의 4대조를 황제로 추승하였다는 점과 경복궁을 법궁의 지위에서 폐지한다는 고종황제의 조칙이 없는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경복궁의 법궁의 지위는 대한제국 시기에도 변함은 없었다[23] 다만, 서울주교좌성당은 1911년 이전인 1892년부터 한옥형태로 저 자리에 존재하였으며, 또한 지금의 서울대성당 부지는 영국대사관이 구입한 부지가 아닌 1892년 당시 초대 한국교구장이였던 찰스 존 코프 주교가 구입한 부지이다.[24] 순종의 개인적 의지는 궁내부와 내각의 친일관료는 둘째치더라도 일본인 관료들에 의해 왜곡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순종이 보위에 오른 것은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의 강제적인 고종의 양위로 이루어졌으므로 내각은 물론 궁내부의 관원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17) 서영희, 2003,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360~362쪽.[25] 일본군의 출동으로 시위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내부 대신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박영효를 처벌하라는 상소를 새 황제 순종에게 올렸다. 이완용은 상소문에서, "이번에 황제의 위를 물려주신 것은 태황제의 순수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며 종묘사직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될 기초가 여기에 있으므로 경사롭게 여기고 기뻐하지 않은 신하와 백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박영효가 그 직책을 회피했으니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사태를 완전히 왜곡하는 주장을 했다. 순종은 물론 그대로 허락했다. 순종이 한일병합 때까지 3년여 동안 황제로 재위한 기간에 내각에서 올린 상소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수정 또는 보완을 지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올린 대로 처리하라."는 것이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순종은 그것을 거부하거나 보완을 지시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토가 기를 쓰고 그를 황제로 올린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윤덕한, 《이완용 평전》 (중심, 2005) 262페이지[26] 1907년 6월 고종이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을 특사로 파견한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일제는 고종에게 황제위에서 물러나도록 강요하였다. 고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는 조서를 내렸으나, 일제와 이완용 등 친일파는 대리청정을 선위로 바꾸어 발표해 버렸다. 하는 수 없이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순종이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일제는 순종이 고종의 영향을 받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 고종은 덕수궁에 머물게 하고 순종은 창덕궁으로 임어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물러난 황제 고종에게 덕수라는 궁호를 붙였다. 덕수는 조선 초 정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태조에게 올렸던 궁호였다. 말하자면 덕수라는 이름은 물러난 왕에게 덕을 누리며 오래 사시라는 뜻으로 올리는 일종의 보통명사였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덕수궁이라는 이름은 궁궐의 명칭이 아니라 고종에게 강요된 이름이었던 것이다(김종헌, 2004: 113)# [27] 훼손이나 복원 과정에서 어긋난 게 아니다![28] 건물 옆에 하얀 탑을 둔 건물은 현 서울특별시의회가 사용 중인 서울특별시의회 본관이며, 과거에는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의 사당인 '덕안궁'(德安宮)이 있었고, 저 당시에는 '부민관'이란 부립극장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국립극장국회의사당, 세종문화회관 별관 등으로 사용되었다.[29] 기사에도 적혀 있지만, 문화재청은 '보존가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서울시는 보존 후 전시 결정을 내렸다.[30] 축하의 의미[31] 정동부지, 옛 경기여자고등학교[32] 이는 논란이 있다. 고종이 아관파천 당시 이용했다는 뚜렷한 근거가 없다는 것. 문화재청에서는 역사적 고증을 최대한 거쳐 복원했다고 주장한다.[33] 공교롭게도 그 해에 러일전쟁이 발발, 1년 후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34]서울시립미술관. 법원 건물을 리모델링 후 계속 사용중[35] 덕수궁 월곡문 뒷편 정동길에 〈광화문 연가〉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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