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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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 후기 국왕 용보.svg 창덕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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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121호

122호

123호
사직단
창덕궁
창경궁




창덕궁
昌德宮 | Changdeokgung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면적
550,916㎡
지정연도
1963년 1월 1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404년(태종 4년)
링크
공식 홈페이지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Changdeokgung Palace Complex
Ensemble du palais de Changdeokgung

지정번호
816
등재연도
1997년
등재기준
(ii)[2], (iii)[3], (i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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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wikitree.co.kr/img_20110629210840_37988cb8.jpg

창덕궁 전경
파일:창덕궁 인정전.jpg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仁政殿)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Korean_art-Donggwoldo-Changdeokgung_and_Changgyeonggung-Dong-A_University-01.jpg
순조 때 그린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당시 모습을 그렸다.
파일:창덕궁 3D 복원도.jpg
위 〈동궐도〉를 바탕으로 3D로 복원한 창덕궁 전경
1. 개요
2. 역사
2.1. 13세기~16세기
2.2. 임진왜란 이후 (16세기~19세기)
2.3.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섭정기) 이후
3. 변별적 특징
3.1. 뛰어난 원형 보존성
3.2. 경복궁보다 유구한 전통성
3.3. 특이한 건물 배치
5. 창덕궁 후원
6. 관람
6.1. 궐내각사 관람
6.2. 후원 특별 관람 예약
7. 교통 및 지리·행정
8. 이야깃거리
8.1. 구설수
8.2. 정궁과 법궁 간의 용어 혼용 문제
8.3. 기타



1. 개요[편집]




서울관광재단에서 제작한 영상 - 〈서울도보해설관광 체험영상_창덕궁편〉
조선 - 대한제국시대의 궁궐.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에 있다. 지번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이다.


2. 역사[편집]



2.1. 13세기~16세기[편집]


태조는 조선 건국 3년차인 1394년(태조 3년)에 한양으로 천도해 정궁(법궁)으로 경복궁을 지었지만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즉위한 정종1399년(정종 1년)에 옛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겼다. 그러나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한양으로 재천도를 결정했다. 재천도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태종은 향교동에 이궁(移宮) 건설을 명해 1404년(태종 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405년(태종 5년)에 완공했다. 그 궁이 바로 창덕궁이다. 그러나 한양에 이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새 이궁을 짓는 것은 태종이 경복궁에서 머물기 싫다는 의미였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兩闕體制)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태종은 창덕궁을 완공하기 직전에 개경을 떠나 한양에 도착하는 그 길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했다.[5] 1405년(태종 5년) 한양으로 돌아온 이래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주로 창덕궁에서 거처했다. 태종은 자신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곳이라 그런지 경복궁을 기피했다. 다만, 커다란 국가 중요행사들은 주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등에서 열었다.

1405년(태종 5년) 창건 당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 규모였다. 궁궐로 기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들은 일단 다 갖춘 상태였지만, 일단 완공한 이후에도 창덕궁 증축 공사를 계속 했다. 1412년(태종 12년)에는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세웠다.

일단 궁궐의 필수 건물을 완공한 후 1406년(태종 6년)부터 태종은 창덕궁의 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종은 후원을 자주 이용하면서 애착을 보였다.

창덕궁은 처음에 작은 규모로 지은데다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필요한 건물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의례를 위한 건물인 정전을 비롯한 외전(外殿) 역시 매우 조촐했다. 처음 완공 당시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고작 3칸 규모였다. 때문에 태종은 1418년(태종 18년)에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 아들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창덕궁 정전 일대를 개축하는 공사를 단행했다.

공사를 하면 백성들이 힘들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태종은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내가 안고 해야겠다."면서 태종과 세종 시대에 많은 공사를 감독했던 박자청에게 공사를 명했다. 이 공사를 세종이 즉위하고 난 후까지 지속했는데, 이 때 인정전이 5칸으로 규모가 커졌고 정전 일대가 정비되어 비로소 제대로 궁궐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줄곧 경복궁에 머무르면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문종 이후 조선 전기 동안 여러 왕들은 창덕궁을 애용했다. 우선 세종 이후 바로 단종 대에 인정전 및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증개축했다. 또한 세조는 후원을 크게 확장하는 공사를 벌이면서 민가 73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세조 대를 거치면서 창덕궁 후원 규모는 태종 때보다 규모가 3배 더 커졌다. 성종 때는 창덕궁 옆에 있던 수강궁(壽康宮)을 개축하여 창경궁이라 명했다.

왕들이 창덕궁을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걸맞아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두 궁을 다 가보면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인다. 게다가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있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판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도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으니.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는데 ·대의 황제들은 예법을 철저히 준수해서 빡빡하게 지어진 자금성을 부담스러워해 많이 머물지 않았고 자금성 옆에 위치해 있고 넓은 호수와 정원이 갖추어져 있어 한결 여유로운 중난하이에 많이 머물렀다. 또한 경복궁에서 피비린내 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꺼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2.2. 임진왜란 이후 (16세기~19세기)[편집]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한성을 떠나 파천하면서 궁을 버리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탔다. (주동자가 백성인지 왜군인지 기록은 분명하지 않다.) 1593년(선조 26년)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는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저택을 개수한 정릉동 행궁에 기거했다. 전란이 끝난 후 선조는 경복궁을 중건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물자가 소모될 것으로 예측되자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창덕궁을 먼저 중건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죽기 3년 전인 1605년(선조 38년)부터 창덕궁 중건 공사를 시작했다.

창덕궁 중건 공사는 광해군 즉위 후인 1609년(광해군 1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중건 직후 광해군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보수 공사를 명했으며, 1년 후인 1610년(광해군 2년)에야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을 법궁으로 선포했다. 이렇게 버려져있던 시기, 불 타 폐허가 된 창덕궁과 버려진 후원은 경희궁과 함께 들이 낮 동안 몸을 은거하던 장소였다. 호랑이보다는 표범으로 보인다. 과거엔 호랑이와 표범을 모두 '범'으로 통칭했다.]

이에 창덕궁과 경희궁은 곧 재건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이전까지 재건되지 못한 경복궁은 2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표범들의 서식지로 전락했다.# # #

그러나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은 인정전을 제외하고 상당부분, 특히 서쪽 궁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창경궁은 비교적 무사했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 역시 내전 구역이 완전히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인조 치세의 창덕궁 중건 공사는 매우 서서히 진행되어 1647년(인조 25년)에야 공사가 끝났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이 지나치게 궁궐 공사를 벌여 민생을 파탄에 빠뜨렸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광해군이 남기고 간 인경궁경희궁이 기존의 창덕궁과 창경궁보다 더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인조는 이들 새 궁전을 이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 경희궁에 주로 거처했다.

비록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궁궐병이었지만, 재위 초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가치와 권위로 인해 이들 궁전을 복원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큰 이견이 없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 점을 언급하며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까지는 왕실 이미지 복구를 위한 리모델링 사업 정도로 인정해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쪽 대신들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을 위해서 인경궁과 경희궁을 다시 헐어낼 것을 주장했고, 다른 대신들은 실리적인 견지에서 애써 지은 인경궁과 경희궁을 사용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차후에 복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인조가 인경궁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인경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인조는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연루된 저주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어떻게든 인경궁을 써보자는 입장이었다.

인경궁의 처리 및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을 놓고 조정에서도 오랜 정쟁이 있었지만, 1632년(인조 10년)에 소성대비(인목왕후)가 엮인 저주사건이 터진 이후 인조는 인경궁을 헐어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도록 지시했다. 이미 지어놓은 궁전을 굳이 헐고 그 자재를 옮겨다 새로 짓는 것도 생각보다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대신들이 그냥 인경궁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인조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중건하면서 인경궁은 해체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모두 헐렸다.

광해군 이후 창덕궁은 흥선대원군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했으며, 조선 후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의 배경이 창덕궁이었다. 한마디로 창덕궁은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의 주 거처로 쓰인 궁궐이다. 그렇기에 조선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궁궐이기도 하다. 고증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던 과거에는 경복궁에게 그 입지를 많이 빼앗겼지만.

순조 시절 대화재로 창덕궁 상당 부분이 다시 한 번 전소되었다. 불타기 전 창덕궁 건물 대부분은 인조인경궁을 헐어다가 중건한 것이었기 때문에 청기와 건물도 많고 화려했다고 전해지나 순조 때 화재로 청기와 건물은 선정전을 제외하고 전부 사라지고 말았다.


2.3. 19세기 말 (흥선대원군 섭정기) 이후[편집]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중건하면서 창덕궁은 정궁(법궁)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종과 왕실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오가며 거주하는 등 여전히 창덕궁을 중요한 궁으로 인식하고 활용했다.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청군의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897년(건양 2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 경운궁(덕수궁)을 황궁으로 사용했으나,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39년 만에 도로 정궁이자 황궁이 되었다. 단순히 임금이 머문 것만을 기준으로 하면, 1894년(고종 31년) 이후 13년 만이다.

1910년(융희 4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구 대한제국 황실이 창덕궁을 소유하여 거주했다. 전 황제였던 순종이왕(李王)으로 강등당했고, 창덕궁은 순종의 궁호로도 쓰였다. 1912년 일제는 후원 및 인정전 등 창덕궁 주요 전각을 일반에 공개했다. 1917년의 화재로 내전 일곽이 전소해 조선총독부에서 경복궁의 전각을 옮겨다 재건하기도 했다.

의외로 덕수궁(경운궁), 경복궁 못지 않게 근대화 시기의 영향을 받았던 궁궐 중 하나이다. 궐 내부에 덕수궁 석조전 같은 양관이 세워지지 않았을 뿐 서양 문물의 영향이 물들어 있다. 주요 전각들의 내부는 서양식 형태이며, 정전인 인정전이나 임금의 집무실 격인 선정전, 생활 공간인 희정당대조전 내부에는 전구가 달려 있다.

일제가 패망한 후 1947년에는 미군정에서 몰수하여 정부 소유가 되었다. 그후 대한민국 정부(문화재청)의 소유가 되었지만, 정부의 배려로 1960년대 이후 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덕혜옹주 등 구 황실 일족이 일부 전각(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했다. 그러다 1989년 4월에 이방자의 별세를 끝으로 완전히 구 대한제국 황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그렇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했다. 즉,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구 황족들의 거처 역할을 했다.


3. 변별적 특징[편집]



3.1. 뛰어난 원형 보존성[편집]


한양 5대 궁궐 중 그나마 원형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비원)에 예약 관람 신청을 하여 가봤다면, 가이드가 초반부터 입에 닳도록 하는 말일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꼽아야 한다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농담삼아 나오기도 한다.

경복궁 대부분의 전각들은 길어야 19세기에 새로 지은 것이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가 대다수를 허물었다가 광복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새로 복원한 것이라 깔끔하다 못해 다소 인위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래선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없게 됐다.

반면에 창덕궁 전각들은 인정전을 포함한 대부분이 원형이라서 궁궐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기염을 토했다. 창덕궁 돈화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유네스코 기념비가 나오는데 '창덕궁Palace' 라고 적혀있다. 한국말로 창덕궁궁. 특히 돈화문(敦化門),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등 많은 건물들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의 가치도 높다. 달리 말하면 다른 조선 궁궐들보다 상대적으로 창덕궁의 가치가 높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창덕궁 전각들은 무겁다 못해 매우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2. 경복궁보다 유구한 전통성[편집]


경복궁이 한양 5대 고궁 중 대중성이 압도적인 나머지 그 역사성까지 압도할 것 같으나, 이러한 민간 통념과 달리 경복궁의 역사성은 창덕궁보다 훨씬 짧은 편이다.

창덕궁은 경복궁보다 갑절이나 넘는 시기 동안 왕의 주요 궁궐(편의상 '정궁') 지위를 유지한데다, 상기했듯이 경복궁은 사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는) 275년 간은 복구하지도 않았던 궁궐이며, 조선왕조 500년간 경복궁에서 왕이 정사를 보던 시기는 150년 안팎이다. 즉 경복궁은 조선 초기와 고종 시기에만 궁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반면에 창덕궁은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계속 원형을 보존하며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다.

그런데도 대중들의 대우는 다소 박한 편이다. 창덕궁이 경복궁보다 접근성이 한참 뒤지는 것도 한몫한다. 실제로 경복궁 인근엔 청와대정부서울청사,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광장 등 중요 시설과 인접해있는데다가, 지하철역과 바로 연결되어있는데 반해서, 창덕궁은 주요시설과 인접해있지도 않고 안국역에서 좀 걸어가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궁궐 덕후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궁 맛(!)을 제대로 보려면 경복궁보단 창덕궁 / 창경궁에 가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경복궁은 대중성이 넘사벽인지라 인파가 인산인해하지만, 창덕궁이나 창경궁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산한 편이라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차라리 창덕궁에 가라는 나름 궁덕후들의 꿀팁이 있다.

3.3. 특이한 건물 배치[편집]


경복궁은 중앙축을 중심으로 한 건물 배치를 중시하는 등 전례를 엄격하게 존중해서 지은 궁이다. 하지만 창덕궁은 건물들이 지형을 따라 자유롭게 흩어져 배치되어 있는 궁이다. 심지어 궁궐의 정문정전이 완전히 틀어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창덕궁의 지형이 주변 언덕과 어우러지고자 했으며, 특히 창덕궁 바로 남쪽에 위치한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치는 다른 동양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며, 그래서 창덕궁은 한국만의 독특한 궁궐 건축 배치를 보여주는 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과감한 창덕궁의 배치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심지어 1419년(세종 1년)에 상왕 태종이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하옥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태종이 박자청에게 인정문 밖의 마당을 똑바로 직사각형으로 만들라고 했는데도 박자청이 뒤에 있는 산세를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고집을 부려 명을 어기고 사다리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태종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했다는 명목으로 하옥시켰고 상량까지 한 행각(복도로 쓰이는 건물)을 부숴버리라 명한 뒤 그곳에는 담만 쌓게 했다. 하지만 결국 한 달 후에 박자청은 풀려나 이후로도 계속 이런저런 공사들을 맡았고, 끝내 박자청의 의도대로 사다리꼴 모습으로 행각을 지었다. 즉,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박자청이란 인물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의 의도된 설계였다는 것이다.


파일:external/s9.postimg.org/a0053134_538e19e28e5b2.jpg

1560년 ~ 1561년에 그린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에서 묘사한 창덕궁 인정전 권역.
현재 남아있는 자료 중 시기적으로 박자청이 설계했던 창건 당시의 모습과 가장 가깝게 묘사된 그림이다. 당시에는 인정문이 중층이었고 좌우 행랑에 현재는 없는 중층 십자각이 있었다.

태종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창덕궁 바로 동쪽에 수강궁(壽康宮, 현재의 창경궁)을 지어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단 태종이 창덕궁 증축 공사를 벌였지만, 실질적인 공사 관리를 담당한 것은 새로 임금이 된 세종이었다. 다만, 박자청 하옥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배후에서 태종이 항상 매의 눈으로 공사 진행을 지켜보았다. 어쨌든 태종은 창덕궁 공사 관리 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세종을 가까운 창덕궁에 붙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행적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세종은 창덕궁보다 경복궁을 훨씬 선호했다. 세종은 태종의 승하 직후 경복궁 개축 공사를 명했고, 집권 중기 이후 경복궁을 치세의 중심지로 삼았다. 특히 세종이 자신의 정치의 핵심으로 삼았던 집현전을 활용하기에 경복궁이 더더욱 적합했을 것이다. 실제로 세종은 경복궁에다가 커다란 집현전 건물을 지었는데, 이는 비좁은 창덕궁의 집현전보다 훨씬 컸다.


4. 건축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건축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창덕궁 후원[편집]


창덕궁의 아름다운 풍경 중 하이라이트는 궁 북쪽의 정원인 창덕궁 후원(後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이 정원의 명칭은 '후원'이 가장 많고 이외에도 '금원(禁苑)', '북원(北苑)' 등이 있다. '금원'은 '아무나 못 들어가는 정원'이라는 의미이고 '북원'은 '궁궐 북쪽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정원의 이름을 두고 갑론을박이 꽤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한동안 이 정원을 칭했던 이름은 '비밀의 정원'이라는 뜻의 '비원(秘苑)'이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 정원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창덕궁 관련 문건에도 후원을 칭하는 명칭은 비원(Piwon, the Secret garden)이라고 표기돼 있다. 일각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조선 궁궐의 격을 낮추고 특히 창덕궁 후원을 낮춰부르기 위해 비원이라고 명명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일제가 비원이라는 이름을 부르도록 강요했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다. 그래도 오래 전부터 정사에 등장하는 명칭이 후원인 만큼 비원보다는 창덕궁 후원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비원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 때 붙여진 이름이다. 그 근거로는 대한제국기의 법령을 모아 발간한 "법규유편" 제1권 관직항목에 창덕궁후원을 "비원"이라고 칭하고, 비원을 관리할 관리의 직책과 인원을 규정하였었다. 해당 법규유편은 대법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대법원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국역하여 무료제공하고 있다


6. 관람[편집]



6.1. 궐내각사 관람[편집]


2010년 5월 1일자로 후원 등 일부를 제외하고 전면 자유 관람으로 바뀌었다. 대신 종묘가 시간제 관람으로 바뀌었다(토요일 제외). 자유관람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창덕궁 전체구역을 시간제관람으로 진행했는데, 연경당낙선재는 번갈아 가며 관람이 진행되었다. 즉, 요일을 정해서 특정요일은 후원의 연경당을 관람하고 또 다른 특정요일은 낙선재를 관람하는 식으로 번갈아 진행되었다.

야간관람으로는 "창덕궁 달빛기행" 이란 테마로 매년 상반기, 하반기 두 달 정도 티켓 사전예매 식으로만 진행하고 있다. 티켓가는 3만원이다. 한동안 특별관람으로 개방하다가 2011년 이후로 개방하지 않는 낙선재의 뒷뜰(상량정 부분)도 짤막하게나마 들어갈 수 있으므로 관심이 있고 아름다운 창덕궁의 야경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참고하자.

전각 입장권과 하기되는 후원 특별관람 입장권은 2021년 기준 1인당 도합 8000원(궐내각사 3000원+후원 관람 5000원)이다.


6.2. 후원 특별 관람 예약[편집]


후원관람을 위해서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후원 특별 관람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기본이다. 홈페이지에서 관람일 6일 전 오전 10시 정각부터 시간당 50명씩 예약이 가능한데 친절하게도 예매 사이트에 서버 시계가 있다. 시간당 100명의 관람이 가능한데 나머지 50명은 현장 판매 분량이다. 만약 후원관람권 현장구매를 원한다면 최소한 전각관람권은 미리 사놓길 추천한다. 주말에 아침 9시 30분만 되어도 돈화문쪽 입구엔 줄이 길게 늘어서 있기에 후원입구까지 가는데도 시간이 걸리게 된다.

특히 단풍철인 11월은 후원 관람의 최고 성수기에 해당해서 인터넷으로 예매하려면 광클은 필수다. 창덕궁 일대는 서울에서 가장 늦게까지 단풍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보통 11월 초중순이 북한산이나 관악산의 단풍 절정기라면 창덕궁의 단풍 절정기는 이보다 1~2주 정도 늦은 11월 중하순이다. 가장 비추천하는 시기는 습한 여름철이다. 길가에는 송충이 시체들이 바글바글한데다가 흡혈벌레들까지 들끓어서 관람을 크게 방해할 수도 있다.

오전 10시 정각에 접속해도 5분 내에 전 시간대 입장권 예매가 매진되곤 한다. 예약 취소분은 현장에서 판매하지만 봄, 가을같이 날씨가 좋은 철에는 예매 경쟁이 치열해서 준비 없이 가면 입장하지도 못하고 창덕궁 궐내각사만 보고 와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원 특별관람 예약을 완료했다고 해서 관람 준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원입구가 창덕궁 내부에 위치해 있기에 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창덕궁 내부를 가로질러 가야한다. 따라서 창덕궁 후원관람을 위해서는 전각관람권도 반드시 끊어야 한다. 후원관람권을 어렵게 예매하고 전각 관람권이 없어 입구 앞에서 실갱이를 벌이는 어르신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물론 현장에서 온라인으로 바로 예매하거나 매표소에서 구매하면 되지만 주말의 경우 줄이 어마어마하게 긴 경우가 있으며 이에 후원관람시간을 놓치는 경우도 발생 할 수 있다.

후원(금원)의 경우 정해진 시간마다 해설사를 동행하여 약 100여 명의 일정한 인원만이 입장 가능하며 관람 시간은 약 2시간 정도다. 사실상 창덕궁의 명소로 꼽히는 곳은 후원이기 때문에 창덕궁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자유 관람뿐만 아니라 해설사와 같이 들어가는 코스도 가봐야 한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이렇게 제한을 둬서 출입을 통제시키는 게 불편한 점도 있지만, 출입이 통제된 만큼 내부 환경, 특히 자연경관의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간단한 음료수 이외의 음식물 반입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후원 내에도 매점이 있기는 하지만 단가가 높은 편(6,000원에서 8,000원 사이를 왔다갔다하므로, 여기서 파는 음료수 등은 물가에 비해 비싸다.)이므로 음료수나 물은 미리 준비해 챙겨가는 편이 좋다. (특히 여름에 매점에서 판매하는 부채의 경우 같은 물건을 바로 밑의 인사동에서 반값에 팔고 있다. 매점에서 해당 부채 정가의 2배를 받고 있다. 기념품을 사고 싶다면 인사동이나 후원 입장 전의 기념품관에서 사면 된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 코스가 준비되어 있다. 내국인은 한국어 이외의 코스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괜히 예약하고 헛수고하지 말자. 외국인 동반 시에는 내국인 2명까지 입장 가능하다. 외국인은 한국어 코스에 입장할 수 있다.

돈화문에서 후원 입구까지는 거리가 생각보다 멀기 때문에 관람 공지에서도 출발 20분 전까지는 도착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매 표에서는 시간을 초과하면 취소된다고 하지만 사실 그런 거 없고, 예매 표만 인터넷에서 출력해가면 판매는 한다. 단 해설사는 지각자를 기다려주지 않으므로... 최소한 출발 정각 전까지는 가야 따라 들어갈 수 있다. 돈화문으로 입장 후 우측으로 꺾고 쭉 길을 따라가면 카페매점을 지나 매표소가 하나 더 나온다. 매표소 좌측에 두개의 입구가 있는데 좌측 입구가 창덕궁 후원입구이며 여기서 정시까지 대기하면 된다. 우측 입구는 창경궁으로 통하는 입구이며 만약 창경궁으로 연속관람을 원할 시에는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면 된다.


7. 교통 및 지리·행정[편집]


대중교통으로는 정문인 돈화문 인근에 109, 151, 162, 171, 172, 272, 601, 710, 7025, 종로12가 정차한다. 도시철도는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 가장 가깝다. 3번 출구에서 돈화문까지는 4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보 5분 거리이다. 자가용으로 올 경우 종로소방서 임시청사 뒤편 등 주변의 민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다만 입지가 서울의 한복판 1급지인 만큼 비싼 주차요금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카카오 T 주차 서비스를 잘 이용하면 1일 종일권을 6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돈화문 주변 주차장의 요금이 5분당 500원, 10분에 1000원, 1시간에 6000원임을 감안한다면 엄청나게 싼 금액이다. 이 점을 활용하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다.

후원을 따라 쭉 올라가면 북악산성균관대학교가 나온다. 물론 일반 관람객은 갈 수 없다.

지금은 입장 통제 등의 이유로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가 권역상으로도, 행정관리 상으로도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저 3곳을 하나의 큰 권역으로 인식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담장 하나를 맞대고 선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하여 두 궁을 합쳐 "동궐 東闕"(경복궁의 동쪽 궁궐)이라 불렀다. 종묘의 경우 제례공간으로써 일상생활과 정치를 펼치는 궁궐과 성격상은 판이하게 다르나, 북한산북악산에서 뻗어나와있는 야트막한 같은 봉우리에 함께 위치하여 지맥地脈을 공유하는 하나의 권역으로 인식했다. 담장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조선시대에도 담장은 있었다. 공간 인식을 현재처럼 아예 분리해서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현재 창덕궁에서 관리하는 낙선재도 본래는 창경궁의 부속으로 출발했고, 후원의 경우도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서도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했다. 담으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지금도 통하는 문이 있다. 춘당지 뒷쪽으로 있는데 단, 후원과 연결되는 문들이 관리차원에서 굳게 닫혀있는 상황이다.

같은 지맥을 공유한 한 권역으로 인식했던 종묘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율곡로를 뚫으면서 지맥을 훼손하고 길을 뚫어 강제로 분리됐다. 이 일화가 눈물나는데, 순종 생전에 도시계획에 율곡로 개통을 포함하여 보고했더니 순종이 그것만큼은 정말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매우 격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상황이더라도 명목상 이왕으로 있던 순종을 의식하여 반대를 무릅쓰고까지 강행하진 못하다가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붕어한 순종이 반대했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바로 다이렉트로 도로를 뚫어버렸다. 현재는 율곡로를 지하도로화해서 끊어져 있는 종묘와 창덕궁 권역을 서로 잇는 공사를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2021년 현재 시점으로써는 언제 끝날지는 요원하다.][* 물론 지맥 운운하는 것은 쇠말뚝과 마찬가지로 근거없는 주장이다. 일본 제국은 풍수지리를 미개하다고 봐서 조선의 문명화의 근거로 삼으면 삼았지 그걸 이용하고자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남산의 조선신사도 조선총독부에선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현재는 물리상으로나, 행정관리상으로나 모두 분리되었다는 얘기이다.


8. 이야깃거리[편집]



8.1. 구설수[편집]


  • 창덕궁 내부에 개인 소유 2층 주택(종로구 와룡동 3 (창덕궁길 30)이 있고 그때문에 일부 훼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사1, 기사2가 나왔다. 1960년대 창덕궁 관리소장의 관사로 사용되다가 문화공보부 간부가 사유지로 사들였다고 한다. 나라의 문화재가 사유지로 팔렸다는 것도 황당한데 담장을 헐고 철문을 짓는 등의 훼손이 이루어졌음에도 법적으로 해결 할 방안이 없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초기 (2008년) 문화재청에서 1517억의 매매가를 제시했으나, 건물 소유주 측에서 더 높은 가격(30억원 정도)을 요구했다고 한다.

  • 창덕궁 후원 서쪽 궁궐 외곽 담에 접해있는 무허가 자생주거지에 관한 논문이 2002년도에 발표되기도 했다.

  • 2015년 7월, 문화재청낙선재 권역을 외국인을 위한 고가(1박에 300만 원)의 숙박시설로 개방하는 ‘궁 스테이’를 추진해 논란이 일어났다. 결국 그해 9월에 사실상 무산되었다.


8.2. 정궁과 법궁 간의 용어 혼용 문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법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궁이 곧 법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궁과 법궁은 엄연하게 다르다. 그 근거로는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임영대군의 집으로 이어하면서 동궁문종이 법궁인 경복궁 경내에 어디에 머물고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에 대한 세종대왕의 직접적인 지시사항에 관한 내용이다.

"강녕전(康寧殿)·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사정전(思政殿) 같은 것은 이른 바 정궁(正宮)이고, 함원전(咸元殿)·교태전(交泰殿)·자미당(紫薇堂)·종회당(宗會堂)·송백당(松栢堂)·인지당(麟趾堂)·청연루(淸燕樓)는 내가 세운 자그마한 집인데 정궁(正宮)이 아니니"

《세종실록》 124권, 세종 31년 6월 18일 병인 1번째기사

임금의 침소인 강녕전과 그 부속 건물을 정궁이라고 세종은 명시하였고, 강녕전 뒤에 있는 중전의 침소인 교태전과 그 부속건물은 정궁이 아니라고 명시하였다. 이는 현대 용어로 치면 법궁인 경복궁 안의 왕의 관저(강녕전)와 집무실(사정전) 권역이 정궁이며, 그 외의 궁궐 공간은 정궁이 아니라는 뜻이다.

'법궁'은 그 나라 국가의 근간이 되는 단 하나의 궁이다. 따라서 정궁과 법궁은 아예 다른 개념이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고, 이런 인식은 왕조 초기부터 말기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간 경복궁이 중건되지 못했어도, 법궁의 지위는 경복궁이 가지고 있었고, 조선왕조나 대한제국을 통털어서 경복궁을 법궁의 지위에서 혁파한다는 왕이나 황제의 명령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 후기에 경국대전을 고쳐서 경복궁을 지키는 관직을 병조 산하에 신설하여서 유지하였고, 내부 건물은 고종 전까지 복원하지 못하였어도 궁장은 계속 수리하고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문소전[6]터를 조선왕조 후기 역대 왕들이 참배하고 추모식을 거행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의 창덕궁은 경복궁의 지위인 법궁의 지위를 대행한 대행 법궁의 지위이자, 임금이 거쳐하고 있는 궁궐이라는 의미로서 정궁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조선 후기의 법궁이 아니다.[7]

사실상의 법궁 역할을 했던 창덕궁은 정식 법궁의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 시기의 창덕궁을 가리키기 적절한 단어는 바로 임금이 주로 사용하는 궁이라는 의미의 '정궁'이다. 더 헌대적인 언어로 풀어서 말하자면, 조선 후기의 창덕궁은 경복궁이 보유한 법궁이라는 법적 지위를 대행한 대행법궁이고, 임금이 계속 거주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서의 정궁인 것이다.

조선 국초에 경복궁 터를 잡고 나서 좌묘우사 즉 좌쪽에는 종묘를 우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그 사이에 육조거리를 설치하는 것이 동아시아권역에서의 법궁의 배치도와 법궁이 위치한 곳의 도시기본계획이었다. 만약 조선 후기에 창덕궁이 법궁의 지위를 가졌다면, 종묘와 사직단을 창덕궁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이전하여 새롭게 설치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법궁은 정문으로부터 법전까지를 일직선으로 하여 법전이 남면을 향하도록 하는 성리학적인 이념에 맞추어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인정전과 인정문과 일직선이 되도록 배치를 했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애초에 창덕궁을 건축한 목적이 경복궁의 이궁으로 건축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더군다나 법궁의 변경은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의미하는 것이 당시의 이념이자 생각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 본궐인 만월대를 법궁의 지위에서 혁파하고,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경복궁을 제일 먼저 자리잡은 것만 보더라도 법궁을 새롭게 선포한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의미하는 것인데, 선조와 광해군 이후로 창덕궁이 법궁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면, 선조와 광해군 이후의 왕들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부정하고 자신들이 새롭게 왕조를 창설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성리학적 지배이념의 시대를 살던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몰랐을 리가 만무하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는 인조반정과 병자호란등의 영향이 있었고, 반정이라는 쿠테타 세력에 의해 편찬된 기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그 이유는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인터넷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 "법궁"이라는 검색어로 광해군 시대를 살펴보면, 법궁이라는 용어를 굉장히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창덕궁을 법궁이라고 하면서도 경복궁을 또 법궁이라고 하는 기록도 다수인데다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완료하고 난 후에도 수선도감을 설치하여 경복궁인 법궁의 재건을 위해 10년을 목표로 목재와 청기와를 차근히 준비하라는 광해군의 지시가 있기도 하다.

거기에 인목대비의 서궁유폐에 관련된 상소문인 광해군일기(정초본) 123권, 광해 10년 1월 29일 기축 8번째기사에 보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은 법궁입니다"라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광해군 시대에는 법궁이 창덕궁, 경복궁, 경운궁 이렇게 3곳이나 되는 모순점이 발견이 된다.

왕궁에서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한 사람들이 거의 없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기의 왕실과 황실의 생활 및 관련 용어들의 본래 뜻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용어 '법궁'과 '정궁'을 혼동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를 찾아보면, 고전번역원에서 제공하는 국역 조선왕조실록의 각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데, 각주에서 법궁=정궁 또는 정궁=법궁 이라고 처리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8.3. 기타[편집]


  •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느낌표〉에서 도시에 사는 너구리들을 관찰 카메라를 여러 대 설치해서 추적을 하는데, 양재천은 물론 창덕궁과 종묘를 연결하는 강철 다리를 야밤에 난간을 따라 보일 듯 기어서 빠르게 지나가는 너구리가 몇차례 방송되었다.

  • 대부분의 조선 궁궐들이 그러하지만 창덕궁에도 꽤 많은 숫자의 길고양이가 살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덕궁에 사는 고양이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대 왕인 숙종의 재위 당시의 일인데 숙종 임금은 창덕궁에서 치즈 태비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이 고양이를 거둬 '금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금덕과 새끼 금손이는 대를 이어서 숙종과 지냈는데 특히 금손이는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을 보살펴준 집사의 부재를 알았는지 식음을 전폐하고 울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정확한 핏줄 확인까지는 어렵겠지만 영역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침입자가 없는한 자신의 영역을 오랫동안 지키는 고양이의 종족 특성상 창덕궁에 살고 있는 치즈 태비 고양이라면 아주 먼 조상 고양이 중 하나가 숙종 시절의 '퍼스트 캣' 내지는 '로열 캣'인 금덕-금손 모녀의 자손일 수도 있다.

  • 2018년 9월 10일에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맞이하는 초청 국빈 행사가 열렸다. # 창덕궁에서 국빈 환영식이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행사를 계기로 앞으로도 자주 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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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서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정작 경복궁을 지은 태종의 아버지인 태조 역시 1408년(태종 8년)에 창덕궁에서 죽었다.[6] 태조 이성계신의왕후 한씨, 태종 이방원원경왕후 민씨의 위패를 모신 전각.[7] 비슷한 예시로 대통령의 탄핵 이후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더라도 아주 일부만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경복궁과 동급으로 법궁이라는 법적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