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후국)

덤프버전 :

1. 중국의 번
2. 한국의 번
3. 일본의 번
3.1. 목록
4. 인도파키스탄의 번
5. 같이 보기



1. 중국의 번[편집]


번()은 본래 주나라의 통치 제도에서 천자국제후국을 일컫는 용어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중국 영토가 아닌 영토 바깥의 독립적인 외부 국가들이 중국 왕조와 교역을 하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조공책봉 체제가 작동하여 중국 왕조에서 책봉을 내리고 명목상 신하로 삼았다.

번속국(藩屬國)은 황제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은 조공국을 의미하며, 번속국(藩屬國), 번국(藩國), 속국(屬國), 번방(藩邦), 속방(屬邦), 번속(藩屬), 번병(藩屛)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울타리 번(藩)·병풍 병(屛) 자 등을 쓴 것은 '천자국의 울타리'라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체제가 오래 지속되었다보니 지금도 자치구나 대만에 대해선 번국의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이 많다. 희한한 것은 자치구민이나 대만인들도 자신들을 번국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상한 것은 아니고 중국의 역사에선 번국의 역사가 너무나 길었고 황제에 반기를 들고칭제한 번왕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2. 한국의 번[편집]


봉건제가 시행된 적 없는 한국에서는 번(藩) 제도가 드물게 이용되었다.

신라의 경우,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보덕국을 번병(藩屛)으로 삼은 기록이 있다. 그 외에도 제주도의 탐라국과 울릉도의 우산국을 속국(屬國)으로 삼았다(至是降爲屬國)는 기록이 있다.

고려왕조는 오등작을 받아 제후로 봉해진 왕족 및 신하들이 번(藩)을 하사받은 것으로 취급하여 자체적인 해동 천자국으로서 군림했다. 고려 원종의 경우, 자신의 유조에 번(藩)이 함부로 이동하지 못하게 조치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원 간섭기에는 약 100년 동안 실질적인 원나라의 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1]

조선왕조에는 명나라청나라 측 기록을 보면 중화사대 정책의 영향으로 해당 국가에서 조선을 번국(藩國)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왕조 내에서 사대주의자들은 조선을 중국의 번방(藩邦)이라 칭했는데, 서인에 속하는 신경(申炅)이 집필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라는 책은 그 제목이 상국(上國) 명나라가 번방(藩邦) 조선을 다시 만들어 준 기록(재조지은)이라는 뜻이다.


3. 일본의 번[편집]


일본 역시 중국의 번국(藩國)으로 책봉을 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委)의 경우,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책봉을 받았고,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그리고 고훈 시대에는 왜 5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견수사, 견당사)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 막부의 아시카가 정권이 명나라에 칭신하고 일본국왕(日本國王)에 책봉된 뒤 조공을 바쳤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으로 내부가 혼란해지자 외교에 신경쓸 처지가 못 되었고, 센고쿠 시대 이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강화교섭 당시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

일본 내부에서 사용하던 번(藩) 제도는 막부 시대 영주(다이묘)가 다스리던 영지를 의미했다. # 일본식으로는 'はん'(한)이라고 읽는다. 센고쿠 시대에는 의 유무, 광산 같은 특수한 자원, 군사적인 입장 등을 고려하여 정해졌지만, 중요점은 경제력으로 3~4년 평균을 잡아 영지 내에서 한 해 수확되는 쌀이 10,000섬이 넘는 경우 번으로 분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말인 만석꾼이란 말이 여기에 기인한다고 한다.

번의 영지는 율령국의 구니(国)의 영역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고쿠다카가 전국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큰 대번들은 대부분 2~3개 국을 지배했고, 그외 대부분의 중소번들은 1개 국의 영역보다 작은 영지를 지배했다. 히젠 국에 사가 번, 히라도 번, 카라츠 번이 있는 식이다. 위키백과 번 목록 문서에서 각 율령국별로 존재했던 번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면 크기상 율령국보다 번이 더 작은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역사상 이런 봉건 영지가 흔히 그렇듯 수많은 월경지로 인해 영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데다, 영지가 2개 이상의 율령국 사이에 걸쳐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번의 이름을 율령국에서 따온 경우에도 실제 영지의 영역은 해당 율령국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카가 번카가 국에서 번명을 따왔으나 카가 국 뿐만 아니라 노토 국, 엣추 국까지 지배했고, 조슈(나가토 국) 뿐만 아니라 스오 국까지 지배한 조슈 번, 사쓰마 국 뿐만 아니라 오스미 국, 휴가 국 3국을 지배한 사쓰마 번 같은 경우도 있었다.

본래는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 상술한 중국의 역사 용어를 차용하여 번국(藩國)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번(藩)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영주에게 명령을 내릴 땐 해당 영주의 가문을 직접 언급해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가문의 성씨와 대표 관위를 붙여서 불렀다. 마에다씨의 카가 번은 막부로부터 마츠다이라씨를 하사받았고, 대표 관위가 참의였기 때문에 마츠다이라 카가재상(재상은 참의의 당명이다)이라고 불렸고, 우에스기씨의 요네자와 번은 우에스기 탄정대필이라고 불렸다. 쿠로후네 사건 전후로 점차 사용빈도가 늘며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되기도 했으나, 번(藩)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공식적인 명칭이 된 것은 판적봉환을 시행한 1869년부터, 1871년 폐번치현이 되기 전 2년간뿐이다.

덧붙여 번(藩)의 무사라는 뜻인 번사(藩士)라는 용어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다.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를 예로 들면, 실제로는 "모리 가문의 가신, 가쓰라 코고로(毛利家家臣桂小五郎)"라는 식으로 통성명을 했다고 한다.


3.1. 목록[편집]


  • 고쿠다카는 1869년 조사한 우치다카(실질 고쿠다카) 기준
  • 인구수는 부번현제 시행 당시(1868 ~ 1871) 조사한 인구조사 기준
번명
별칭
가문
고쿠다카
인구
비고
카가 번(加賀藩)
가나자와 번(金沢藩)
마에다(前田)
1,338,083석(1위)
1,065,910명(1위)

센다이 번(仙台藩)
다테 번(伊達藩)
다테(伊達)
1,018,818석(2위)
204,964명(45위)
[2]
조슈 번(長州藩)
야마구치 번(山口藩)
모리(毛利)
978,004석(3위)
608,475명(9위)
[3]
오와리 번(尾張藩)
나고야 번(名古屋藩)
도쿠가와(徳川)
913,827석(4위)
917,497명(2위)
[4]
사가 번(佐賀藩)
히젠 번(肥前藩)
나베시마(鍋島)
886,525석(5위)
425,762명(15위)
[5]
사쓰마 번(薩摩藩)
가고시마 번(鹿児島藩)
시마즈(島津)
869,593석(6위)
896,808명(4위)
[6]
구마모토 번(熊本藩)
히고 번(肥後藩)
호소카와(細川)
786,015석(7위)
719,990명(6위)

기슈 번(紀州藩)
와카야마 번(和歌山藩)
도쿠가와(徳川)
615,453석(8위)
528,408명(10위)
[7]
후쿠오카 번(福岡藩)
치쿠젠 번(筑前藩)
구로다(黒田)
571,141석(9위)
388,409명(17위)

도사 번(土佐藩)
고치 번(高知藩)
야마우치(山内)
495,486석(10위)
516,867명(11위)
[8]
오카야마 번(岡山藩)
비젠 번(備前藩)
이케다(池田)
494,956석(11위)
358,327명(21위)

히로시마 번(広島藩)
게이슈 번(芸州藩)
아사노(浅野)
483,580석(12위)
914,157명(3위)

도쿠시마 번(徳島藩)
아와 번(阿波藩)
하치스카(蜂須賀)
442,735석(13위)
714,022명(7위)

돗토리 번(鳥取藩)
인슈 번(因州藩)
이케다(池田)
428,169석(14위)
378,734명(18위)

아이즈 번(会津藩)
와카마츠 번(若松藩)
마츠다이라(松平)
403,563석(15위)
199,211명(47위)
[9]
구루메 번(久留米藩)

아리마(有馬)
366,271석(16위)
262,085명(31위)

번(津藩)
아노츠 번(安濃津藩)
도도(藤堂)
358,020석(17위)
244,252명(36위)

요네자와 번(米沢藩)

우에스기(上杉)
336,645석(18위)
129,753명
[10]
후쿠이 번(福井藩)
에치젠 번(越前藩)
마츠다이라(松平)
336,194석(19위)
202,511명(46위)

쿠보타 번(久保田藩)
아키타 번(秋田藩)
사타케(佐竹)
332,038석(20위)
435,267명(13위)

모리오카 번(盛岡藩)
난부 번(南部藩)
난부(南部)
316,697석(21위)
137,825명

미토 번(水戸藩)

도쿠가와(徳川)
313,415석(22위)
259,344명(33위)
[11]
마츠에 번(松江藩)
이즈모 번(出雲藩)
마츠다이라(松平)
288,029석(23위)
296,750명(26위)

히로사키 번(弘前藩)
츠가루 번(津軽藩)
츠가루(津軽)
287,733석(24위)
288,842명(27위)

츠루오카 번(鶴岡藩)
쇼나이 번(庄内藩)
사카이(酒井)
222,385석(25위)
95,356명

마에바시 번(前橋藩)
우마야바시 번(厩橋藩)
마츠다이라(松平)
217,709석(26위)
176,149명

고쿠라 번(小倉藩)
카와라 번(香春藩)
오가사와라(小笠原)
212,770석(27위)
117,835명

히메지 번(姫路藩)

사카이(酒井)
211,224석(28위)
222,661명(42위)

히코네 번(彦根藩)

이이(井伊)
203,887석(29위)
172,545명

타카마츠 번 (高松藩)

마츠다이라(松平)
201,714석(30위)
299,223명(24위)

도야마 번(富山藩)

마에다(前田)
159,297석(31위)
132,415명

마츠야마 번(松山藩)

마츠다이라(松平)
157,184석(32위)
211,882명(44위)

야나가와 번(柳河藩)

타치바나(立花)
155,394석(33위)
119,708명

타카다 번(高田藩)

사카키바라(榊原)
154,104석(34위)
171,056명

코리야마 번(郡山藩)

야나기사와(柳沢)
152,912석(35위)
99,970명

쿠와나 번(桑名藩)

마츠다이라(松平)
144,439석(36위)
64,868명

오시 번(忍藩)

마츠다이라(松平)
141,752석(37위)
113,703명

시바타 번(新発田藩)

미조구치(溝口)
139,102석(38위)
192,591명

니혼마츠 번(二本松藩)

니와(丹羽)
133,487석(39위)
37,307명

사쿠라 번(佐倉藩)

홋타(堀田)
132,941석(40위)
119,129명

오가키 번(大垣藩)

토다(戸田)
131,106석(41위)
78,901명

오다와라 번(小田原藩)

오쿠보(大久保)
124,853석(42위)
92,883명

마츠시로 번(松代藩)

사나다(真田)
123,570석(43위)
148,589명

나카츠 번(中津藩)

오쿠다이라(奥平)
119,994석(44위)
100,403명

요도 번(淀藩)

이나바(稲葉)
113,314석(45위)
65,439명

타나구라 번(棚倉藩)

아베(阿部)
112,997석(46위)
30,451명

후쿠야마 번(福山藩)

아베(阿部)
112,728석(47위)
187,300명

오바마 번(小浜藩)

사카이(酒井)
106,599석(48위)
111,975명

츠야마 번(津山藩)

마츠다이라(松平)
104,576석(49위)
106,337명

우와지마 번(宇和島藩)

다테(伊達)
100,402석(50위)
169,512명

아카시 번(明石藩)

마츠다이라(松平)
90,304석
76,004명

다이쇼지 번(大聖寺藩)

마에다(前田)
83,772석
48,736명

쓰시마 후추 번(対馬府中藩)

(宗)
52,174석
83,771명
[12]
마츠마에 번(松前藩)

마츠마에(松前)
30,000석
79,742명
[13]
류큐 번(琉球藩)

(尚)

132,678명


4. 인도파키스탄의 번[편집]


일명 Princely State. 영국인도식민지로 만든 후 지방 제후국을 번으로 삼았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 번왕국 문서 참고.


5. 같이 보기[편집]



[1] 고려가 여진을 번으로 삼았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이는 울타리 藩(번)이 아니라 우거질 蕃(번)을 써 동번(東蕃)이나 서번(西蕃)으로 부른 경우다. #, # 일제가 대만 원주민을 생번(生蕃)으로 부른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2] 오우에쓰열번동맹 공동맹주[3] 삿초 동맹, 시모노세키 전쟁, 금문의 변, 조슈 정벌[4] 고산케[5] 사가의 난[6] 삿초 동맹, 사쓰에이 전쟁. 아마미 군도까지 지배했으며 류큐 왕국을 속국으로 두었다.[7] 고산케[8] 삿토 맹약[9] 9대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교토수호직을 맡아 신센구미 지휘. 오우에쓰 열번 동맹, 아이즈 전쟁[10] 오우에쓰열번동맹 공동맹주[11] 고산케, 미토학의 발상지.[12] 조선 외교를 담당하는 관계로 실제 석고와 관계없이 10만석 국주격 대우를 받았다.[13] 에도 시대 본거지가 홋카이도 안에 있었던 유일한 번. 당시 기술로서는 쌀 농사가 거의 되지 않았기에 실제 고쿠다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아이누와의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다이묘 대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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