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즈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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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会津藩 (あいづばん)
현재 후쿠시마현 서부의 아이즈 지방을 지배한 일본의 옛 이다.

2. 역사[편집]


아이즈 지방은 센고쿠 시대에는 아시나 가문의 영지였으나, 북쪽으로 아이즈와 이웃한 오키타마 지방(야마가타현 남부 일대)에 근거지를 둔 다테 가문의 다테 마사무네가 아시나 가문을 멸망시키고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을 무시한 것이었으므로 히데요시가 아이즈 지방을 몰수해서 가모 우지사토에게 하사했다. 이후 다테 마사무네가 잇키 선동 혐의를 받으면서 오키타마 지방까지 몰수되어 가모령 아이즈 번에 더해져, 총 91만 9천 석이 되었다. 가모 우지사토는 아시나 가문의 거성이었던 구로카와 성(黒川城)을 개축하고 와카마쓰 성(若松城)으로 이름을 고쳐, 이후 아이즈 번의 번청이 된다. 가모 우지사토 사후 분란이 발생하여 후계자 가모 히데유키는 다시 우쓰노미야(宇都宮)로 감/이봉(12만 석)되고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에치고에 있던 우에스기씨(上杉氏).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사도 섬과 쇼나이 지역(야마가타현 북부 일대)은 그대로 보유한 채 에치고를 반납하고 아이즈를 본거지로서 받은 것이기에, 아이즈 번의 관할 구역은 아이즈 + 오키타마 + 사도 + 쇼나이 등 120만 석 규모로 불어났다. 그러나 우에스기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오키타마 30만 석[1]으로 전락하게 되고, 쇼나이 지역은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뜯겼고, 사도 섬은 에도 막부의 직할지가 되었다. 남은 60만 석 규모의 아이즈 번에는 옛 주인 가모 히데유키가 복귀했다.

이후 가모가는 가모 히데유키의 아들 가모 타다사토가 후사 없이 급사하여 단절될 위기에 처했으나, 타다사토의 어머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인 점이 참작되어, 동생 가모 타마토모가 가모 가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가로 이요 마츠야마로 감/이봉(24만 석)되고, 후임으로 가토 요시아키가 40만 석으로 들어오지만, 아들 가토 아키나리가 막부 법령 무시 및 폭정, 가신과의 불화를 이유로 가이에키 당하고,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배다른 동생이자 공처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내가 무서워 숨겨둔 자식인 호시나 마사유키[2]가 영주가 된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20만 석의 야마가타 번[3]을 다스리고 있다가 3만 석이 늘어난 23만 석 규모로 아이즈 번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가토 요시아키가 아이즈 번에 옮겨왔을 때 시라카와 10만 석을 떼어 니와 나가시게(니와 나가히데의 아들)에게 줬고, 니혼마츠 3만 석과 미하루 3만 석을 지번으로 분리해 각각 요시아키의 사위(마츠시타 시게츠나)와 3남(가토 아키토시)에게 봉했는데, 가토 아키나리가 가이에키될 때 니혼마츠 번과 미하루 번도 모두 가이에키되고 각각 니와 가(위의 나가시게의 아들 미츠시게) 아키타 가(안도 지카스에의 손자 도시스에)가 옮겨와, 아이즈 번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면서 니혼마츠 번은 7만 석, 시라카와 번은 4만 석, 미하루 번은 2만 석 증가했는데, 17만 석이 감소한 아이즈 번과 대비된다.

9대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교토 치안유지를 담당하여 신센구미의 상관으로도 유명하다. 이 영향으로 폐번치현 이후에도 일본 경찰조직에 아이즈 계의 영향력이 상당했다(물론 대놓고 번벌로 위세를 부렸던 삿쵸와 달리 고위층들은 날아가서 실무진 정도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아이즈 번은 보신전쟁 당시 신정부군의 주적이 되기도 하였다. 토호쿠 지역 번들과 오우에쓰 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을 결성하여 신정부와 대항했으나, 이때 여성들까지 총을 들고 나와 싸우거나[4], 본대가 패전했다는 헛소문을 들은 소년병 집단 백호대가 쓰루가 성 근처 이모리 산에서 자결하는 등 안 좋은 일이 많았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기도 다카요시는 아이즈 번 인구의 대부분을 혼슈 섬 최북단 토나미 번(아오모리 현 무쓰 시)으로 강제이주시킨다. 1871년 10월까지 4,332가구 17,327명이 이주되었으며 아이즈 번에 잔류한 사람들의 신분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1928년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의 손녀 마츠다이라 세츠코[5]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비(妃)로 맞이하는 등 일본 황실에서는 아이즈 번 및 마츠다이라 가문과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현재도 구 아이즈 번 지역 사람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이 없다고 하며 실제로 메이지 유신 당시 주축이 된 조슈-사쓰마 세력의 후신들이 중심인 자유민주당의 세력이 다른 도호쿠 현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을사늑약의 공범 중 하나인 하야시 곤스케의 고향이 이곳이다. 또한 이곳에서 일어난 백호대 자결 사건은 러일전쟁과 2차대전 시기 '사무라이 정신'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 널리 이용됐다.

덧붙여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은혼의 등장인물 마츠다이라 카타쿠리코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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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에는 오키타마 지역의 중심 도시인 요네자와(米沢)의 이름을 따서 요네자와 번으로 부른다. 오키타마의 위치는 아이즈 번 최북단이다.[2] 마츠다이라(松平) 성은 서자인 3대 번주 마츠다이라 마사카타 때 회복[3] 아이즈 번의 이웃으로 위의 모가미 요시아키의 영지였다가, 요시아키 사후 가중소동으로 모가미 가가 쫓겨나면서 4분된 번이다. 모가미 대신 도쿠가와 막부의 후다이 도리이 가문이 들어왔으나 후사가 끊겨 호시나 마사유키가 번주가 됐다.[4] 드라마 야에의 벚꽃의 주인공인 니이지마 야에(新島八重)도 이때 참전했다고 한다.[5] 신정부와 아이즈 번의 불편한 관계와는 달리, 세츠코 비는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로부터 가장 총애받은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