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

덤프버전 :

파일:external/f.hatena.ne.jp/20091101152228.jpg
원래 애꾸눈이지만 두 눈이 그려진 초상화. 이유는 아래 '생애' 문단에 서술한다.

伊達政宗(だて まさむね)(이달정종)
1567년 9월 5일 ~ 1636년 6월 27일(음 5월 24일)

파일:external/www3.omn.ne.jp/masamune.jpg
미야기센다이시에 있는 다테 마사무네 기마 동상.[1]

파일:다테 가문 문장.svg
다테 가의 문장. 센다이 대나무(仙台笹) 문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적으로는 '대나무에 참새(竹に雀)'로 더 많이 불린다.[2]

출토된 유골로 복원한 얼굴. 얼굴만 떡하니 나와서 약간 놀랄 수도 있다.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관위 변천
4. 가족
5. 평가
5.1. 전술가로서 마사무네
5.2. 내정, 외교가로서 마사무네
6. 취미 및 성격
7.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
8. 기타 사항
9. 후손
10.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독안룡(獨眼龍)

16세기 말 ~ 17세기 초를 살다간, 일본 전국시대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무장이자 무츠, 데와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

오슈 후지와라의 후예로서 1584년(18세)에 다테家의 17대 당주로 취임하였고, 당주가 된 지 불과 5년 만에 오슈 최대의 다이묘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당주가 되기 불과 2년 전인 1582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고, 그가 도호쿠 지방의 패자가 되었을 땐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머지 일본을 거의 다 통일한 뒤였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를 두고 "10년(혹은 5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고도 평한다. 다만 아래 문단에서 자세히 언급하듯, "너무 고평가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유골로 분석해보니 신장 160 cm, 혈액형은 B형이라고 한다.

일본에서 몇 안 되는 100만 석 다이묘였다.


2. 이름[편집]


아명은 본텐마루(梵天丸).[3] 통칭 토지로(藤次郎)[5]라 불렸다.

마사무네라는 이름은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다테 가(家) 중흥의 선조라고 불렸던 9대 당주 다이젠다이부(大膳大夫) 마사무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사실 원래 다테 가문은 무로마치 막부쇼군의 이름자 한 글자를 물려받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는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테루(輝) 자를 물려받은 거고, 할아버지 하루(晴)무네는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에게, 증조부 타네(稙)무네는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에게... 그런 식이었는데, 정작 마사무네 시대엔 이미 무로마치 막부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망해버렸기 때문에 관습을 지키지 못해 선조에서 따서 작명하였다.

이 때문에 간혹 9대 마사무네와 구별하기 위해 다테 토지로 마사무네로 부르기도 하지만, 17대인 이 문서의 토지로 마사무네가 워낙 대중적으로 보나 여러 면에서나 지명도가 더 높기에, 특별한 언급 없이 다테 마사무네라고 하면 대개 9대가 아닌 17대를 말한다.


3. 생애[편집]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한쪽 눈을 잃었다. 그 몰골이 추하다고 하여 친모인 요시히메와 동생 다테 코지로(伊達小次郎)[6]에게 미움을 받았고 심지어는 살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결국 어머니와 동생이 그를 독살하려 했던 사실이 밝혀져 결국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내쫓아버렸다.[7] 이런 개인사 탓에 하나뿐인 눈은 다테 마사무네 평생의 컴플렉스가 되었다. 컴플렉스가 얼마나 심했는지 화공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적에 반드시 두 눈을 모두 멀쩡하게 그리도록 지시했다고 한다.[8] 외눈박이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현재 남아있는 대부분의 초상화나 목상 등에선 양쪽 눈이 모두 멀쩡한[9] 것은 사실 이 때문으로, 애꾸눈으로 그려진 초상화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1px-Date_Masamune02.jpg
애꾸눈으로 그려진 몇 안 되는 초상화 중 하나. 또한 마츠시마에 있는 사찰 즈이간지(瑞巌寺) 경내에는 마사무네 목상이 있는데, 이 상도 애꾸눈으로 조각되어서 마사무네의 생전 모습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로 취급받는다. 즈이간지의 목상은 1652년 마사무네의 17번째 기일을 앞두고 정실 메고히메가 명을 내려 제작되었는데, 남편의 진짜 모습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메고히메의 뜻에 따라 애꾸눈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물론 일가가 모두 마사무네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다테 테루무네는 마사무네의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에[10] 미워하기는커녕 그를 보호하고 교육하는데 힘써 스승으로 임제종 승려 코사이 소이츠(虎哉宗乙, 1530~1611)를, 심복으로 카타쿠라 코쥬로를 심복으로 붙였고 1584년(18세)에는 일찌감치 가문까지 물려주었다. 장성하자 아버지에게서 마사무네란 이름을 받았다. 본래 다테 가에는 쇼군의 이름 한 자를 받아서 가독에게 주는 습관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쫓겨난 탓에 이름을 받아올 수 없었다.[11]

가문을 물려받은 다음 해(1585), 회견을 마친 니혼마츠 요시츠구(二本松義継, 1552 ~86)가 아버지 테루무네를 납치하여 인질로 내세웠으나,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아버지와 요시츠구를 철포대로 일제 사격하여 죽였다. 일설에는 테루무네가 자기는 상관하지 말고 함께 사살하라고 소리쳤다고도 하지만, 이제 와서 사실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니혼마츠 요시츠구와 한 교섭 시도도 미진했고 아버지가 있는데도 철포 사격을 한 일 등등 때문에 일본의 연구가 중에서는 '다테 마사무네가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자 아버지를 일부러 죽였다!' 하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 NHK에서 방영된 마사무네의 진실편에서는 이 설을 소개하고, 아버지 덕분에 다이묘가 된 다테 마사무네가 그럴 리 없다며 반박하는 설을 함께 실었었다. 다만 당대에 다테 마사무네와 싸웠던 오나미히메는 '마사무네 5역'이라며 다테 마사무네의 5가지 잘못을 포고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죄였고, 강항간양록에도 다테 마사무네를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음험한 자라고 소개하였으므로 최소한 적국에서는 다테 마사무네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받아들여진 것 같다.

어쨌든 아버지와 니혼마츠 요시츠구의 죽음 이후 완전한 적국이 된 니혼마츠 가문에서는 아들 니혼마츠 요시츠나(二本松義綱, 1574~89)를 당주로 옹립, 다테 마사무네에게 대항하였다. 그에 맞서 다테 마사무네는 부친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바로 군사 1만 3천을 편제하여 아버지 공양을 위한 전투라며 니혼마츠 가를 쳐들어가 공성전을 벌였다. 여기에 오슈 남부의 사타케 가문의 일명 '귀신' 사타케 요시시게가 오슈의 맹주이던 다테 가문에게 동맹 or 종속으로 맺어져 있던 아시나, 이와키, 시라카와 유키 등등 가문을 규합한 다음 도합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적으로 참전, 다테 마사무네와 일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오슈의 패권을 걸고 히토토리바시 전투(人取橋の戦い)가 일어났다.[12] 사타케 요시시게와 다테 마사무네 사이 가문의 명운을 건 전투였지만, 병력 차로든 경험으로든 다테 군이 밀렸기에 결국 다테 마사무네의 병력이 거의 전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사무네는 다테 시게자네의 분전 덕분에 갑옷에 화살 한 대와 총탄 5대를 맞고도 간신히 살아서 모토미야 성으로 도망쳤고, 다테의 중신이던 오니니와 요시나오는 후미를 맡아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이때 사타케와 간토 지역의 패권을 다투던 후호조씨가 갑작스럽게 사타케 령으로 쳐들어왔기에 사타케 군이 퇴각했다. 이 때문에 이후 남 오슈 지방과 아이즈는 사타케 가문의 세력권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특히나 아이즈의 아시나 가문에서는 3살이었던 영아 당주가 급사하여 다테 마사무네의 동생 코지로를 당주로 삼을지,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 요시히로를 당주로 삼을지를 두고 큰 분란이 일어났는데, 히토토시바라시 전투에서 다테 가문이 패배하자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 아시나 요시히로를 당주로 삼으며 사타케 가문 밑으로 들어갔다. 결국 다테 하루무네, 이후 3대를 내려오며 다테 령의 남오우 지방 통치체제는 완전히 붕괴했다. 다만 이후 사타케 가문은 관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력을 더욱 확대하던 호죠 가문과 싸우며 오슈 지방에는 관심을 두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다테 마사무네는 아내인 메고히메의 가문인 타무라 씨 등과 연합하고 지속적인 공격 끝에 간신히 니혼마츠 가문의 본성을 빼앗는 데 성공했으나 문제는 그치지 않았다. 다테 가문의 아들을 후계자로 들이는 등 사실상 다테 가문에게 종속되어 있었던 오사키 가문이 친 모가미 중심의 독립파+친 다테 파로 나뉘면서 내분 후 반란... 다테 마사무네는 1만의 병력을 동원하나, 많이 내린 눈에 의해 행군이 방해받고, 쿠로카와 하루우지 등의 배반과 오사키 가문의 명장인 난죠 타카노부, 80대의 노장이었던 이치쿠리 호규[13]에게 격퇴되었다. 다테 가문은 크게 패배하여 심지어 중신을 오사키 가문에게 인질로 바쳐며 화의를 맺으며 오사키 가문의 독립을 허용하였다.

문제는 오사키 가문의 뒤에는 오사키 가문의 딸을 정실로 삼았던 데와의 여우, 모가미 요시아키가 있었다는 것. 다테 마사무네가 오사키 가문에게도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모가미 요시아키는 아시나/니카이도 가문을 남쪽에서, 본인도 대병력을 데리고 다테 령을 침공했다. 다테 가문 자체가 멸망할지도 모를 대위기였으나 다테 마사무네의 어머니이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여동생인 요시히메가 직접 가마를 타고 진중에 방문하여 모가미 요시아키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사실 이때 모가미 가문도 혼죠 시게나가로부터 쇼나이 지방을 위협받는 참이었기에 모가미 요시아키는 다른 조건 없이 퇴각했다.[14] 이 때문에 다테 가문과 모가미 가문은 이후 세키가하라오사카 성 전투, 모가미 가문 멸망 전까지 상당히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였다.

그렇게 모가미 가문과 동맹이 된 후, 다테 마사무네를 계속해서 귀찮게 하던 아이즈의 아시나, 니카이도 가문을 침공. 아이즈의 명가 아시나 요시히로는 총 1만 8천에 사타케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다테 마사무네는 병력 2만 1천을 동원하여 전투를 일으켰다. 병력차 자체는 비슷하였으나, 사실 아시나 가문의 당주인 아시나 요시히로는 아시나의 핏줄이 아닌 앞서 말했듯이 사타케 요시시게의 아들이었던 탓에 가신들이 이탈했거니와 본인의 정치력도 형편없었는지, 배반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나오며 이후 벌어진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아시나 가문은 패배하여 멸망했다. 이렇게 다테 마사무네는 아이즈 전역을 손에 넣으며 본령인 오슈의 일부와 무려 50만 석에 달하는 아이즈 전역을 손에 넣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혼슈 대부분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전에 내렸던 총무사령[15] 위반이었다. 도요토미군에게 다테군은 체급이 워낙 차이가 났기 때문에 감히 대들지 못하고, 마사무네는 다음해에 히데요시에게 새로 얻은 땅들을 몰수당했다. 이 땅은 가모 우지사토에게 포상으로 내려진다.

어쨌든 비록 후에 영토는 빼앗겼지만 스리아게하라 전투는 사실 전국시대 최대 수준의 대전 중의 하나기도 했고, 다테 마사무네 인생 최대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는 전투였기 때문에 다테 마사무네는 후에 말하기를 "가문의 명운을 건 전투였다."라고도 자주 자랑했다고 하며, 후에 도쿠가와 이에미츠도 당시 전투 승리자인 다테 마사무네와 패배자라 할 수 있는 사타케 요시노부를 불러 이 전투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 때 다테 마사무네는 신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사타케 요시노부는 한 마디도 안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테루무네의 시절부터 동맹 관계이자, 간토 평야를 지배하던 호죠 가 측은 도요토미에 대한 철저 항전의 방침을 세우지만, 호죠 가와 다테 가의 전력을 합치더라도 일본 중부부터 서쪽 끝까지 장악한 도요토미 세력에 대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터라 미래는 매우 암울했다. 이에 호죠 가에 대한 의리와 다테 가의 존속 사이에서 장시간 고민하던 마사무네는 도요토미의 계속된 재촉에 굴복하여 결국 호죠를 버리고 도요토미 밑으로 들어간다. 그 직후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단이 늦은 것에 압력을 넣었으나 언변에 능했던 마사무네는 히데요시가 다도에 흥미가 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16] 자신 역시 다도에 깊은 관심이 있다는 식으로 어필하여 무사히 빠져나왔으며, 이후 히데요시는 다테 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오슈 지방의 다이묘로 군림하는 것을 허락했다. 반면 다테 측의 원군을 기다리던 호죠는 도요토미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는데, 이 호죠 가를 두고 히데요시는 영지 대부분을 몰수하나 그래도 1만 석을 허락하여 다이묘의 이름만은 지킬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1590년 동생인 다테 코지로(마사미치)가 급사하는데, 에도 시대의 자료에서는 모친과 코지로가 작당하여 장남인 마사무네를 독살하려 했다고 적혀 있으나 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보니 호사가들이 적당히 지어낸 이야기란 의견도 있다.[17] 그럼에도 사극에서는 마사무네의 삐뚤어진 가족 관계가 클라이막스를 맞이하는 시점이기 때문에 모친의 독살 시도설은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여하튼 확실한 것은 마사무네가 1590년 동생인 다테 코지로 마사미치를 죽이고, 당주의 권한으로 7대 동안 절연을 선언했다는 것. 실제로 마사무네에서 7대가 지난 200여년 후가 되어서야 다테 가문 당주의 손에 다테 코지로가 정식으로 사면받아 가문의 일원으로 제사가 치러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일어난 카사이 오사키 잇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징계로 개역된 카사이 가와 오사키 가의 잔당들이 일으킨 반란 - 의 배후에 마사무네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니혼마츠 사건 당시 순사했던 한 부하의 아들이 자신의 대우에 불만을 품고 마사무네가 카사이 오오사키 잇키 선동을 했다는 상소문과 그 증거인 마사무네의 편지를 올리는 사건이 벌어지자 히데요시는 문책을 위해 마사무네를 수도로 호출한다. 이에 마사무네는 '어차피 죽을 거라면 화려하게 죽자'는 의미로 수의인 하얀 옷을 입고, 금박을 칠한 십자가를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18] 사실 이것은 마사무네가 정말로 죽을 생각이 있었다기보다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청문회장에서 마사무네는 자신은 편지를 쓸 때 바늘로 미세하게 구멍을 뚫어 그것을 '자신만의 숨겨진 사인'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는데, 증거로 올라온 편지를 살펴보니 정말로 바늘 구멍이 있었고, 이를 본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고, 전봉[19]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그쳤다고 한다. 물론 정말로 히데요시가 마사무네의 결백을 믿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실상 마사무네가 잇키 사건에 관여한 것은 거의 확실했으나, 간신히 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들려는 시점에서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를 함부로 제거하자니 너무 꺼림칙하고,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자신의 관록과 너그러움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매우 너그러운 처분을 내렸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이 전봉 결과 카사이 오사키 잇키가 일어난 키무라 가문의 영지를 받은 대신 할아버지 다테 하루무네 이래 본거성인 요네자와 성이 있는 오키타마 군과 가문의 발상지인 다테 군 등을 가모 우지사토에게 넘겨줘야 해, 그냥 고쿠다카로만 따져도 영지가 줄었고 실제로는 새로 받은 땅은 반란으로 황폐해졌기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봤다. 새로운 거성으로는 원래 오사키 가문의 가신 우지이에씨의 거성인 이와테야마성을 택해, 이름도 이와테자와로 고쳤다.

그 뒤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고 조선을 치러 갔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였던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는 '음흉하고 흉포한 왜장'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히데요시는 1500명 정도를 준비하라고 일러뒀지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적극성을 어필하기 위해 그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을 동원하고, 도요토미 측의 식량 원조까지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이 때 출정하는 다테 가의 장비가 너무 훌륭해서 일본어로 멋쟁이를 뜻하는 '다테모노'라는 말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했다.

하지만 정작 전장에 나갔을 때는 병량이 부족하고 전선은 계속 고착되는 통에 별 의욕도 없이 대충 싸웠다고 전해지는데,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별 충성심도 없는 다테 마사무네가 조선에 간 이유가 오로지 비위를 맞춰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었으니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고 당장 간토의 도쿠가와도 핑계 대고 참전 안 하는 마당에, 조선과 완전 반대편인 일본 동북쪽의 다이묘인만큼 많은 전력을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593년 3월 부산에 상륙한 이후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치르고 조선에서 딱 6개월만 채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말하자면 본인은 이미 배부른 호랑이라서 조선을 점령한다고 생계에 영향이 가는 것도 아닌 데다가 영지의 위치마저도 조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다이묘에 쓸데없이 싸우느라 지겹고 짜증나기 때문에 다테 마사무네의 임진왜란 출병은 출병한 티를 내기 위한 출병일 뿐이었다. 그래서 출병할 때는 그 어떤 다이묘보다 요란하게 출병했으며 전투 역시 제2차 진주성 전투 딱 하나만 참전하고 나 싸웠다.라고 티만 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기존까지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양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그 파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문제는 마사무네 역시 히데츠구 쪽과 상당한 교우 관계를 가졌다는 것인데, 본격적인 숙청이 시작되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빼면서 마사무네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도요토미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었다. 장녀 이로하히메를 이에야스 6남 타다테루에게 시집보내어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에야스는 자신의 편에 서는 대가로 7개국 50만 석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뒤 약속 이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약속을 백지화시켰다. 전쟁 중 다테 마사무네가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같은 동군인 난부 토시나오(南部利直, 1576~1632)의 영지에 속한 잇키(과거 와가 히에누키 잇키(1590)를 일으켰던 와가 타다치카가 세키가하라 전투 중에 일으킨 이와자키 잇키)를 몰래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대해선 이에야스 측이 59만 석을 주기 아까워 하여 마사무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도 있다. 에도와 가까운 다테 세력이 커지면 이에야스 본인의 가문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봤다는 해석도 있다.

원래 다스리고 있던 영지가 약 60만 석, 여기에 50만 석을 더하면 110만 석짜리 다이묘가 될 수 있었기에, 마사무네는 이 일을 못내 아쉬워 했다. 결국 평생 개간 사업에 열중한 끝에 말년에는 100만 석 영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20] 인간 승리라고 해야 할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거성 이전을 허락받아 센다이시에 새 거성으로 센다이성을 쌓았다. 그래서 다테 가문의 번을 센다이 번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세력이 컸던 만큼 견제를 받아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후에도 다른 다이묘들이 차례차례 귀국을 허락받는데도, 혼자서만 귀국을 허락받지 못했다. 에도 성 내부 정비와 에도 성 축성 공사를 명 받아서 센다이 번에서 에도 성 공사로 인력 42만 명력을 동원했고, 공사비로 2만 7천 량(현재 돈으로 36억 엔) 남짓한 돈을 지출해야 했다. 1603년 8월, 2년이 지나서야 겨우 고향으로 가도 좋다고 허락을 받고 돌아와보니 센다이의 영지는 황폐해졌고 재정은 빈털털이였다.

해결책으로 범람하던 키타가미 강(北上川) 물줄기를 돌리는 치수 공사를 15년간에 걸쳐 실시해서 새로운 농지를 개간했다. 여기서 나오는 쌀은 에도에 팔아서 재정을 확보했다.

어쨌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대들었다는 의심을 받아본 걸 마지막으로, 에도 막부 설립 이후로 마사무네의 야망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순순히 막부의 유력한 다이묘로 남게 된다. 저항해 봤자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알자, 2대 쇼군이 된 이에야스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다섯 번이나 다도회에 초대해서 친목을 쌓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에야스가 병으로 쓰러지자 마사무네가 모반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한 다이묘들도 있었다. 1616년 2월 마사무네는 직접 이에야스가 있는 스루가의 슨푸 성으로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3월 30일 이에야스는 그를 불러 아들 히데타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고 한다. 마침내 이에야스의 신뢰를 얻은 순간이었다.

이에야스가 사망한 후, 막부의 원로로 대접받았으며, 히데타다는 죽게 되자 임종의 자리에 아들 이에미츠와 마사무네를 불러 놓고 이에미츠에게 마사무네를 자신[21]처럼 여기라고 당부했을 정도.

이에미츠가 쇼군으로 임명 받으면서 특별대우 폐지를 선언하고 절대적인 쇼군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 것도 마사무네의 조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이에미츠가 모든 다이묘는 이제 자신의 가신이라고 해서 아래의 각본을 만들어서 말을 하게끔 조언하게 된다.

내 조부 이에야스와 내 아버지 히데타다는 그대들의 친구였으며, 그대들의 힘을 얻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에도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 때로는 직접 마중나가셨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쇼군의 신분이었다.

앞으로는 그대들을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대할 것이다.

만일 이것이 불만이거든, 돌아가서 3년 내에 막부에 대항하라, 그러면 미약하지만 이 이에미츠가 상대하겠다.


마사무네는 다음과 말을 하게 된다.

이에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이 마사무네에게 토벌을 명해 주십시오


이에 주변에 있던 도자마, 후다이, 신판 다이묘들이 얼어붙었다고...[22]

다만 이제까지 해온 짓이 있었기 때문인지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아이즈번의 와카마츠 성[23]을 마사무네를 감시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축하기도 했다. 당근과 채찍이라고 해야 될 듯.

1636년에 70세로 사망했다. 사세구는 다음과 같다.

흐림 없는 마음의 달을 앞세워 속세의 어둠을 비추고 가네

曇りなき 心の月を 先だてて 浮世の闇を 照してぞ行く


3.1. 관위 변천[편집]


  • 1585년 윤(閏) 8월: 종오위하(従五位下)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임명

  • 1586년 사쿄노다이부(左京大夫) 임명

  • 1591년 시종(侍従)에 천임(遷任)과 미마사카노카미(美作守) 겸임

  • 1597년 종사위하(従四位下)로 승진, 우콘에노곤노쇼조(右近衛権少将)와 에치젠노카미(越前守)로 전임(転任)

  • 1608년 무츠노카미(陸奥守)로 전임 및 겸임

  • 1615년 어려가지 공로로 참의(参議)으로 승진하지만 같은 시기에 조정에 사직상소를 제출.

  • 1626년 고미즈노오 천황(後水尾天皇)의 니조성 행행(二条城行幸)에 대한 공로가 있어서 조정에서 종3위(従三位) 곤츄나곤(権中納言)으로 승진

  • 1901년 정3위(正三位)으로 증직(贈職)

  • 1918년 종2위(従二位)으로 증직


4. 가족[편집]


정실 메고히메 말고도 적어도 일곱 명의 측실을 더 두었다. 스페인 출신의 서양인 첩 미나미츠키노카타(南樹の方, 본명은 마리아)도 두었다지만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나온 내용이라고 한다. 자녀로는 이로하히메 등 10남 4녀를 두었다. 이밖에 사생아로 1남 1녀가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실인 메고히메가 낳은 적자는 요절한 아이까지 포함해 기록이 남아 있지만, 측실이 낳은 서자는 성인 한 명밖에 기록에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고, 또 측실도 마사무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은 여성만이 정식으로 기록되어 실제로는 그 밖에도 관계를 가진 여성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다.

서장자인 히데무네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친해서 다테 종가를 잇지 못하고 대신 이요 우와지마 20만석의 번주가 된다.[24] 다테 종가는 차남인 타다무네가 잇는다. 후손들은 대대로 센다이 번주를 지냈다. 다테 지카무네 또한 그의 후손이다.


5. 평가[편집]



5.1. 전술가로서 마사무네[편집]


애꾸눈인 덕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지만, 조부인 다테 하루무네+부친에게 물려받은 오슈 탄다이직 및 북동 지역 최고+전체 수위권의 병력 동원력을 부리고도 굵직굵직한 전투 대부분에서 패배하거나 크게 밀리는 등, 군재가 그닥 뛰어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약소 가문인 오사키 가문을 상대로도 패배하고, 비슷한 전력인 사타케나 모가미를 상대로는 가문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다.

이렇게 마사무네의 전과가 좋지 못한 데에는 본인의 군재 부족도 있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동북 지역은 중심지에서 멀어 옛 전통이 상대적으로 잘 유지된 편인데다 서로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적대 세력을 무력화하고도 몰살시키거나 영지를 전부 빼앗지 않고, 그 대신에 가문을 유지시켜주고 영향권 안에 넣는 게 상례였다.[25]

그런데, 마사무네는 이러한 동북의 관습을 깨고 승자가 패자의 영지를 빼앗아 직할령으로 삼고 패자에 대한 처분을 마음대로 하던 중앙의 '최신' 정복 방식을 써먹었으니 동북 전체가 연대해 결사항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마사무네는 동북 최강의 세력을 갖고도 본인의 급진성과 부족한 군재 때문에 오래도록 애를 먹었다.

이렇다보니 뛰어난 내정 능력을 가지고도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전국 과대사천왕에 당당하게 뽑힐 정도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이었던 다테 군은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단번에 패배했고, 결국 마사무네는 도망가는 기병들 틈에 섞여 우에스기 군의 칼날을 몇 차례나 받아야 했다. 이 때, 마사무네를 쫓던 우에스기 군의 오카 사나이[26]는 후에 자신이 추격했던 인물이 마사무네란 사실을 알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고 한다. 게다가 마사무네가 입은 갑옷이 꽤나 명품이었다는 모양.

이 때문에 마사무네는 요네자와에 전봉된 우에스기 가문에게 내내 짓궂은 놀림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의 지략가로 명망이 있던 나오에 카네츠구가 마사무네를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칠 일이 있었다. 일개 가로와 다이묘의 신분 차이상 카네츠구가 멈춰서 인사를 올려야 했음에도 무시하고 지나가자, 화가 난 마사무네가 나오에를 불러 세워 따졌다.

그러자 카네츠구는 "아이쿠, 마사무네 공인지 몰라 뵈었습니다. 얼굴을 뵌 적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마사무네의 얼굴을 모를 리 없던 카네츠구가 이리 대답한 것은 "싸움에 지고 도망치는 뒷모습만 봐서 얼굴을 몰랐네요."라는 조롱이었고, 마사무네는 얼굴을 몰랐다고 사과하는 상대에게 따질 수도 없어서 얼굴만 붉힌 채 자리를 떴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선 전초전부터 양측 주력 부대가 갑작스럽게 조우하는 예상 외의 일이 발생했는데, 사나다 노부시게는 이런 무의미한 전투로[27] 병력상의 피해가 발생함을 막기 위해 부대를 다급히 후퇴시켰다. 만약 이때 다테 마사무네가 마음 먹고 추격전을 벌였다면 유키무라 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겠지만, 마사무네는 유키무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공격을 포기하고 전황을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또한 당시 유키무라는 아군의 사기도 올릴 겸 다테 진영을 향해 "관동 무사 중엔 한 사람도 사내가 없느냐!" 하며 마구 조롱했을 정도.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사에게 겁쟁이라는 말만큼 지독한 욕설도 없다. 하지만 마사무네로서는 내심 유키무라가 이에야스를 잡아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테니 단순히 유키무라가 무서워서 덤비지 못했다고 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그나마 내세울 만한 부분이 있다면 말 위에서 화승총을 쏘는 기마 철포대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이다. 모 게임 등에서 다테 가문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지만, 사실 실제 운용은 오사카 여름의 진 딱 한 번밖에 없다. 이조차 그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크게 패배하여 두 번 다시는 운용하지 않는다. 얼핏 생각하면 기병의 돌진력에 화승총의 화력이 더해지니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부대가 탄생할 것 같지만, 당시 화승총은 이동하면서 사격할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28] 기존보다 기동력이 우수해진 화승총 부대에 불과했다. 실제 운용을 살펴보면 말을 타고 달려가서 말에서 내린 후 총을 사격하여 적진을 교란하고, 이후 보병들과 함께 근접돌격을 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29]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묘지 전투에서 이 기마 철포대를 적극적으로 전면에 내세우는데, 일단 고토 모토츠구의 병력이 괴멸당하자 구원을 온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등을 상대로 카타쿠라 시게나가가 기마철포대를 포함한 군대로 반격하나, 사나다 유키무라가 창병들을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한다. 당시 사나다 유키무라는 조총으로는 누운 적을 명중시키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바닥에 붙은 채 창으로 말을 찌르는 전술을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상대가 중국이나 유럽의 기마대였다면 바닥에 누워있어 봤자 기마대 특유의 돌진력에 처참히 짓밟힐 뿐이었겠지만, 돌진을 하지 않으며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일본식 기병 스타일이었기 때문에[30] 가능했던 일.

결국 사실 기마 철포에서 기마 부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31] 그렇게 봤을 때 이 기마 철포대가 진정으로 대단한 건 '기마 철포대'라는 발상이 아니라, 그 발상을 진짜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 있다. 기마 한 마리를 유지하는 비용이 일반 보병의 3배에 달하는 시대에 기마 철포대까지 창설했다는 건 그만큼 다테 마사무네가 엄청난 국력을 보유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마가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 그의 영지였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물론 오사카 전투 이후에 다테 가문에서 기마 철포를 양성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5.2. 내정, 외교가로서 마사무네[편집]


무장으로서는 다른 다이묘들에 비하여 상당히 떨어지지만, 내정가 혹은 외교가로서는 가히 전국 다이묘 중에서도 최고라고 해도 될 만큼 대단하다.

우선 내정 부분에서는 센다이 평야를 개간하며 부하들에게도 개간 사업을 장려, 운하를 건설하는 등 내정에 힘을 쓴 끝에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58만 석이었던 영지를 말년에는 실질 백만 석으로 늘렸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계속해서 개발 사업을 장려하여 백년 후에는 무려 석고가 2백만 석까지 늘어나 일본 최대의 번이 되었다.[33][34] 또한 대형 항구를 만들어서 에도에 이 쌀들을 판매하는 해상 판로를 개척했다. 쌀 판매는 대단히 활발하여 에도 시내에서 소비하는 쌀의 절반이 센다이 지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을 정도이다. [35]

내정도 대단했지만 특히나 대단한 부분은 외교였다. 물론 약간 실패도 있었고 운이 따른 적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 최초로 다테 가문이 망할 뻔했던 위기였던 사타케 가문과 벌인 대전에서 사타케 가문에게 패배하였으나, 당시 선대로부터 동맹이었던 호죠 가문을 움직여 가문의 멸망을 막았다. 이후로도 호죠 가문과 계속해서 친선하며 강적인 사타케 요시시게를 호죠와의 싸움으로 묶어두었고, 메고히메를 아내로 맞으며 타무라 집안과 혼인 동맹을 맺었으며, 니혼마츠 가문을 압박하고 협박하여 성을 무혈 개성하고 아시나 가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 오사키와의 전투에서 패배 후 벌어진 모가미 가문과의 대전에서는, 다테 요시히메를 직접 전장에 오게 하여 강화를 이루었고, 이후 모가미와의 동맹을 맺어 후방을 안정시켜 아이즈 정벌에도 성공했다.

이후 히데요시와의 상대에서는 호죠와 맺은 동맹 때문에 고민하다가, 오다와라 공방전에 늦게 참전하며 히데요시에게 감금당하기도 했으나 다수의 병력을 동원하여 히데요시를 만족시켰고, 또 센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며 접근하는가 하면 본래 자신을 처벌할 생각이던 히데요시를 구워삶아 비록 아이즈는 빼앗겼지만 세력을 상당부분 보존하였다.[36]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는 잇키를 선동했다는 의혹을 받으며 심지어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히데요시에게 "니가 반란을 하려고 했던 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자발적으로 참여했으니 목숨만은 살려준다. 다만 너는 다시는 네 영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나 어쨌든 영지 이전과 함께 용서받았다. 단, 이 당시의 영지 감봉은 다테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히데요시의 토지 측량법 변경으로 인해 세금 징수가 상당히 가혹해진데다가 고향과 달리 황량한 땅이 주어진 덕분에 제대로 된 소출을 낼 수 없어서 개간을 할 때까지 수입을 내기 힘들어 가신들과 분쟁이 이어지고, 히데요시의 전매특허인 이간질 때문에 가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한 마사무네와 가신들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 모니와 츠나모토[37] 다테 시게자네[38] 등 여러 중요 후다이 가신들이 이 시기에 마사무네 곁을 떠났다가 한참 후에서야 복귀하게 된다.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의 처형이 벌어진 축생총 사건에서도 사촌이라는 이유로 모가미 요시아키와 함께 반란 혐의를 썼으나 용서받는다. 반면 요시아키 쪽은 연금 처분.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서 굳건히 버텨낸 마사무네는 히데요시가 죽을 무렵에는 비록 오대로 목록에는 끼지 못했지만 전국 고쿠다카 5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히데요시 사후, 이번에는 도쿠가와와 연합하여 사돈 관계를 맺으며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까지 동군으로 참전하여 하세도우 전투 등에서 우에스기 가문과 싸웠으며, 댓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백만석으로 영지를 늘려줄 것이라는 약속장을 받는다.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테가 동군 측인 난부 가문의 영지에서 반란을 선동했다는 트집을 잡아 약속을 백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에 서며 막부측의 경계심을 적절히 이용해 대규모 영지를 유지하고 막부의 원로 지위를 획득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후견인이 되어 이에미쓰를 쇼군으로 세우는데 성공하며, 심지어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사석에서는 다테 마사무네를 아버지(또는 할아범)로 부를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된다.[39] 이러한 연표들을 종합해봤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센고쿠 시대의 또 다른 승리자.

6. 취미 및 성격[편집]


어려서부터 외국,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후엔 직접 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에스파냐인들의 도움으로 유럽의 갤리온을 본따 "산 후안 바우티스타"라는 함명을 가진 서양식 배를 만든 뒤 로마 교황청으로 사절단을 보내 무역 허가서까지 얻어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탓에 이 무역 허가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덤으로, 이 때 유럽에 보낸 사절단을 이끌던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교황 바오로 5세 및 여러 귀족과 왕을 알현했을 뿐만 아니라, 루벤스를 만나 멋진 초상도 남겼다. 자세한 것은 하세쿠라 츠네나가 항목 참조.

파일:宮城スタジアム_20150630143347.jpg

트레이드 마크는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붙은 투구로 이곳저곳에서 곧잘 오마쥬 등으로 사용된다. 센다이 시에 위치한 미야기 스타디움 역시 이런 마사무네의 투구 장식을 본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다만, 미야기 스타디움은 미적 측면만 지나치게 우선한 나머지 일본에서도 스포츠를 관전하기 어려운 구장이 되어 버렸다.[40]

이런 투구 말고도 멋을 잘 부렸는지, 당시엔 멋쟁이 남자를 두고 '다테男'이라 부르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테가 진짜 멋져서 그리 부른 것이 아니라 막부 등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목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뿌려대며 환심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겉치레나 허세를 뜻하는 伊達(다테)의 어원이 됐다는 설도 있다. 마사무네는 평생 상대를 기겁하게 하는 허풍과 과격한 언동 및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계략 및 뒷공작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외에도 당시 남자들로서는 상당히 깨는 취미였던 요리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사들이 먹을 전투식량을 개발하다가 취미로 변했다는 모양. "요리란 모름지기 제철 재료를 자연스레 꺼내서 주인이 직접 조리하여 대접하는 것이다." 하는 명언을 남겼고, 센다이 근처의 몇몇 요리학교는 다테 가의 비전 요리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정도. 정월의 오세치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다테마키'[41] 역시 다테 마사무네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란 설이 있는데, 이는 유독 다테 마사무네가 '다테마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리에는 조예가 깊었지만 술에는 약했고 음주 습관은 매우 나빴던 모양으로, 숙취 때문에 쇼군과 한 약속을 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끔살이다.

애연가로, 그의 시종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담배를 시간표를 정해 놓고 정해진 시간에 하루 4번 피웠다고 한다. 그가 사용한 담뱃대가 보존되었다.

프라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높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기준으로 수억 엔에 달하는 다기를 감상하다가 떨어뜨릴 뻔해서 허겁지겁 잡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까짓 다기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이 괘씸해져 다기를 그대로 박살냈다는 일화[42]나 전장에서 좀 오버 액션으로 총알을 피했는데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총알 날아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43]

너무 거만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작당하여 도이 토시카츠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특히나 마사무네를 싫어하는 무장 4명을 마사무네와 함께 초대하여 같은 자리에서 저녁밥을 먹게 했다. 하지만 큰 싸움이 벌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사실을 알아 보니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자리란 걸 눈치 챈 마사무네가 요리사를 시켜 그들의 국을 전부 매우 뜨겁게 끓여놨고 그걸 마신 4명은 혀를 데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44]

겉보기와 달리 자신의 군사들은 유달리 아꼈다고 한다. 동맹을 제안하러 사신으로 보낸 병사가 타국에서 기습받아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그 적국을 초토화시켰고 병사 몇 명이 포로로 되었을 때도 그 상대국을 쳤다고 한다. 또 카타쿠라 카게츠나를 비롯해서 심복들이 죽어나가자 '내 생명을 가져가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고 메이겐슈에 기록되어 있다.

도쿠가와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막부의 원로가 되고 나서도 묘한 포지션을 유지했으며, 얕볼 수 없는 노련한 책략가로 경계받았다.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된 여러 군인과 예수회 성직자들의 편지에는 대개 마사무네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던가, 언젠가 천하를 쥘 사람이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일화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른쪽 눈은 어쨌느냐?"라고 묻자, "나무에서 떨어져서 오른눈이 튀어나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이기에 그만 먹어 버렸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2대 쇼군 히데타다를 센다이 저택으로 초대해 요리를 대접했는데, 계략가였던 마사무네가 쇼군을 암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 중신이 "마사무네 님이 먼저 (독이 들었는지) 맛을 보시오"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며 "(막부의 기반이 약했던) 10년 전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반란을 일으켜서 싸웠으면 모를까, 비겁하게 독살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독살을 왜 하냐는 이 엽기적인 대답에 히데타다는 껄껄 웃으면서 마사무네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타다의 사자들이 센다이로 와서 "이번 정월엔 쇼군께서 이러이러한 선물을 받고 싶어하신다."라고 넌지시 귀뜸을 하자 "천하의 쇼군께서 어린아이처럼 구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윗사람에게 올리는 진상품은 아랫사람이 고르는 법인데 이 마사무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거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3대 쇼군 이에미츠가 매사냥을 너무 좋아해 사냥하다 해가 지면 아무 데서나 노숙하기도 해서 호위에 문제가 생기자, 슬그머니 이에미츠에게 "매사냥은 위험합니다. 저도 (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에야스 공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등골이 서늘해진 이에미츠는 다시는 매사냥을 하지 않았단 일화가 있다. 이 경우 단순히 이에미츠가 마사무네를 히데타다의 유언으로 아버지처럼 모셨기 때문에 따랐을 개연성도 있지만, 마사무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쇼군 앞에서 칼을 차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받았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특히 이에야스보다 후대의 인물인 만큼 그의 사후에 쇼군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아왔고 측근으로서 역대 장군들을 쭉 섬겼기 때문에 에도 막부 초기의 중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장수로서보다는 행정가나 정치가로서 더 유능하고, 유명해진 인물이다.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인지, 평소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와 서찰이 수천 통이 넘게 남아있어서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거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편지에서도 여러 모로 우스운 내용들이 발견된다는 게 문제. 특히 여러 부끄러운 이유로 '읽거든 태워버려라'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서찰들이 현대까지 고이 보관되어 있는 점이 정조 어찰첩을 연상케 한다. 물론 마사무네의 가신들은 보험 삼아서 서찰을 보관해두진 않았겠지만.

글씨가 더러워서 미안하다. 새벽에 종자들과 함께 팔씨름을 하느라 팔이 후들거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나이 값도 못하고 부끄러우니 읽거든 태워버려라(卽火中).


한밤중에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용이 다소 산만하다. 읽거든 태워버려라.(추신이 2개 써 있는 편지)

또 그의 편지 덕에 현대인들이 알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부하인 카타쿠라 카게츠나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카게츠나가 주군인 마사무네에게 아들이 아직 없는데 자신이 먼저 아들을 얻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아들을 죽이려고 해서, 이것을 듣고 경악한 마사무네가 카게츠나를 급히 뜯어말렸다는 일화가 있다.[45] 이외에도 달을 감상하는 시회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구름이 껴서 달을 못 보게 되는 바람에 모임이 침울한 분위기로 끝났고 그 때 달이 나오지 않는 아쉬움을 소재로 쓴 시의 시어를 일부 수정해서 모임의 한 참석자에게 나중에 보낸 편지도 남아 있어서 문화인으로서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2017년 1월 11일 미야기 현 오오사키 시에 기증된 마사무네의 다른 편지가 토호쿠 지역 일간지 카호쿠신보에 공개되었다. 마사무네가 1610년 시나노 마츠모토 번주 이시카와 야스나가에게 보낸 것으로, 이시카와의 초대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과 편지이다. 그런데 초대에 응하지 못한 이유가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술을 들이붓듯 마시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뻗어버려서였다고. (기사)[46]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터뜨리는 사고뭉치의 이미지는 그가 죽을 때까지 늘 따라다녔는데, 나이가 든 후에도 갑자기 에도 성 안에서 막부의 중신이자 로주(老中) 신분인 사카이 타다츠구를 질질 끌고 가서 스모를 하겠다며 시비를 걸어 엎어치고 메친 끝에 지거나, 보고 싶었던 공연이 끝나버렸다는 이유로 갑자기 노 배우들에게 "배우와 관객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처음부터 다시 공연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원 죽여버리겠다"라면서 땡깡을 부리는 등 배우는 그렇다고 쳐도 관객은 뭔 죄 황당하기 그지없는 에피소드들이 다른 다이묘들의 기록에 남아 있다. 본래부터 별난 행동, 돌출행동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도 있지만, 에도 막부의 초기는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시비를 걸 구실이 생기면 다이묘를 가이에키[47] 처분하는 철권통치였기 때문에 과거의 위험인물 1순위인 마사무네가 일부러 막부측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웃기는 사건을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의 행동이 정말 끔찍한 사건으로 번진 케이스도 없지 않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아군인 진보 데와노카미 시게스케의 부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전부 쓸어버리라고 명령해서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벌집으로 만들었을 정도. 살아남은 진보 가문의 가신들이 막부에 항의하자 '도주하는 아군을 방치하면 아군 전열까지 무너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으냐?(=죽은 놈들이 먼저 겁쟁이처럼 행동한 게 잘못 아니냐?)'라고 역으로 따지고 들어서 무마했다고.[48]

서양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교역을 위해 일본에 온 에스파냐 탐험가 세바스티아노 비스카이노(1548~1624)가 그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통상을 위해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한 직후 에도성 거리에서 마사무네 일행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49] 역시 탐험가 일행을 알아본 마사무네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위해 축포를 쏴 달라'라는 부탁을 하자 세바스티아노는 이에 부하들을 시켜 축포를 쐈다.[50] 총소리에 놀란 말들 때문에 실었던 짐들이 떨어지고 타고있던 사람도 떨어져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장을 본 마사무네는 미친듯이 소리내서 웃었다고. 보는 사람은 개꿀잼 당한 사람은 골탕 어쨌든 본인은 이 상황에 흡족했는 듯 자신이 직접 말에서 내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51] 에도 성내 자신의 집으로도 초빙한 이후 마사무네가 유럽식 갤리온을 건조하는 데에 세바스티아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성격이 대단히 재미있었는데 이후 그 후손인 다테 지카무네 대에 이르러서는 당사자는 슬프지만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7. 다테 마사무네의 유훈[편집]


인(仁)이 지나치면 약해지며
의(義)가 지나치면 완고해지되
예(禮)가 지나치면 아첨이 되나니
지(知)가 지나치면 거짓을 말하게 되고
신(信)이 지나치면 손해를 입느니라.
느긋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검약하여 재화를 쌓을지어다.
검약하는 방법은 자유롭지 못함을 견딜 줄 앎에 있으니,
이 세상에 객으로 온 것이라 생각한다면 무엇이 힘들겠는가.
세 끼의 식사가 맛없더라도
맛있게 먹을지어다.
원래 객의 신분이라 함은
찬의 맛있고, 맛없음에 따질 수 없는 것이니라.
오늘이 흘러감을 배웅한 후
자손형제들에게 두루 인사를 고하고
이 속세에 휴식을 청할지라.
사실 마사무네는 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유학 자체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막부가 지배 수단으로 유학을 장려하던 것을 비꼬려는 의도였으리라 생각된다.


8. 기타 사항[편집]


'1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천하를 잡을 수 있었다.'는 말이 알려져 있으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싸움을 별로 못했기 때문에 10년이 아니라 50년을 일찍 태어났어도 다테 가문의 천하 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하후돈. 둘 다 싸움을 엄청나게 못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애꾸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싸움을 잘한다는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마사무네가 아니라 아버지 테루무네의 이야기라는 설도 있으며[52] 드라마 천지인에서는 나오에 카네츠구가 이 말을 하면서 마사무네를 놀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5ch 등지에선 전국시대의 거품 중 하나로 취급된다. DQN 4천왕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 다만 과대사천왕으로 놀리는 측에서도 50만석을 실질 백만석으로 만든 그 정치력이나 영지 경영 능력만은 진퉁, 아니 오히려 과소평가됐다고 치는 편.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정치가 혹은 사업가에 좀더 어울리는 인물이 군인의 이미지로 알려지고 있는 셈.

워낙 말도 안 되는 짓을 많이 저지른 탓에 '삽질의 제왕'이라고도 불리며, 호소카와 타다모토 등의 편지 기록에는 다테 마사무네가 오늘 또 기묘한 짓을 저질렀다 등등의 기록이 남겨져 있다.[53] 남자 애인(!)에게 '젊었을 때는 몸에 상처를 내서 내 마음을 증명해 보이기도 했는데 이제 그런 짓까지는 못 하겠다. 대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알아 줄래?'라는 내용의 편지가 남아 있어[54] 역사로까지 수비 범위를 넓힌 부녀자들의 좋은 떡밥이 되기도 한다.[55] 가장 유력한 사람은 시종인 타다노 사쿠쥬로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카타쿠라 시게나가(카타쿠라 카게츠나의 아들)에게도 뽀뽀를 시전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남자 애인이 오직 다테 마사무네만의 특이한 취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건 와카슈도 항목을 참조하자. 그렇다고 남색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여색도 화려했다.

가문 자체가 혼인 외교를 잘 구사하던 가문이라, 일본판 합스부르크 여성과 정말 인연이 많은 편. 특히 상당히 강한 여성들이 많았던 것이 특징. 친모인 요시히메를 비롯하여, 니카이도 가문에 시집 가서 다테 마사무네와 싸웠던 고모인 다테 오나미, 부인 메고히메[56], 사타케 요시시게의 부인도 다테 마사무네의 고모였다.

한국에선 일본식 청주(淸酒)의 일종인 정종(正宗)이 다테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든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존재한다. 근거인 즉슨 마사무네의 이름을 한국 식으로 읽으면 "정종"이기 때문이라고. 나름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 청주인 正宗과 政宗은 한자부터가 다르다. 더욱이 正宗은 혼슈 남쪽 지방의 술이고, 마사무네는 혼슈 북쪽 지방 사람.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다면 정종 문서를 참조하자.

이름을 영어로 쓰면 Date Masamune가 되는데 데이트 마사무네라는 해괴한 발음이 나버린다. 실제로도 센다이의 FM라디오 방송국 이름이 바로 'DATE FM'이다.

다만 당대에 유구사절단을 통해 로마 교황 앞으로 보낸 서간에는 Idate Masamune라는 표기가 있어서, 이를 토대로 원래 발음이 '이다테 마사무네'였음이 밝혀졌다. 이다테와 다테 두 발음이 한동안 공존하다가 다테 쪽으로 굳어져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고 있다.

본인은 초승달 장식의 멋진 투구를 썼지만, 정작 병사들의 투구는 괴상하기 짝이 없다. 꼬깔콘이라던지, 트래픽콘#라든지 하는 식으로 까인다. 게다가 출전이 임진왜란기 조선 출정식을 묘사한 그림으로, 조선에도 저 모양으로 왔을 것이다.

다테 마사무네가 즐겨 사용하던 마상총이 의병에게 노획되어 그 집안의 가보로 내려왔는데, 그것을 다시 박정희의 경호실장인 박종규[57]가 직접 감정한 뒤 사들였다는 소문이 국내의 전통 군사 관련유물 수집가들 사이에서 나돌았던 적이 있다.(#) 다만 진실이 확인되지 않은 일화이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강항이 쓴 간양록에서도 마사무네가 언급되어 있으나, 일본어를 몰라서였는지 형과 자식을 살해했다는 오기(誤記)가 있다. 아마 아버지인 다테 테루무네가 니혼마츠 요시츠구에게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마사무네가 조총수들을 시켜 두 명을 쏴 죽여버린 일과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사실을 알게 하여 동생을 살해하고 어머니를 내쫓은 일을 잘못 알아들은 듯.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무덤 일부가 파괴되었다.[58] (#)

그의 영구가 모셔진 신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폭격을 받아 산산조각이 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74년에 그의 유골이 발굴되었는데 양쪽 눈 두개골이 멀쩡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오슈-센다이 지방의 다테 가문, 그 중에서도 마사무네의 인기는 대단해서 센다이시의 상징처럼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때문에 일본인들이 센다이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대부분 다테 마사무네이다. 이름난 전국무장이 지역의 상징이 되는 것이 이 지역만의 일은 아니지만, 독안룡 술, 마사무네 떡, 마사무네 도시락, 마사무네 파르페(…) 등등 다양한 특산품이 존재한다고 하니 말 다한 셈. 심지어 라인 캐릭터샵이 센다이시에 생겼을 때도 다테 마사무네를 소재로 인테리어를 했을 정도.

파일:센다이 라인 캐릭터샵 인테리어.png
브라운이 다테 마사무네를, 샐리카타쿠라 코쥬로 역할을 맡았다.

파일:attachment/다테 마사무네/img_984714_43868031_2.jpg
게임 전국 바사라 3다테 마사무네 제 2복장이 보라색 바탕에 원색의 땡땡이물방울 무늬인 바람에 많은 유저들을 뿜게 했는데, 실제 마사무네가 즐겨 입었던 물방울 무늬 진바오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59]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스핀오프작 노부가의 야망[60]의 다테 마무네도 이 진바오리를 입고 있다.

파일:external/www.city.sendai.jp/04b4.jpg

이것이 센다이 시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실물.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일본 내의 팬들 반응은 "마사무네 공, 웃어서 죄송해요" 또한 이 진바오리가 의외로 유명한지, 다테 마사무네 관련 굿즈들 중에는 이 진바오리의 물방울 무늬를 사용한 것이 은근히 많다.

다테 마사무네가 모티브가 된 캐릭터들이 꽤나 많은 편이다. 저 유명한 다스 베이더부터 시작해서 로보트킹[61] 등 여러 캐릭터들이 다테 마사무네를 모티브로 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동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함께 벌인 삽질은 명성이 높다. 그리고 그 전투 후 다테 마사무네는 땅을 여기저기 주워모아서 기어이 100만석의 대다이묘가 되었으며 이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많은 영지였다. 대충 시마즈 가문이나 마에다 가문의 영지와 비슷하다. 이들도 대체로 100만석 규모를 유지했다. 참고로 도쿠가와는 자기 직할령 400만, 하타모토의 영역 300만 해서 총 700만 정도다. 일본 전체의 총 석고는 공식적인 수준으로 따지면 2800만 석이다.

이 사람의 후손인 다테 지카무네는 센다이 번의 번주가 되자마자 사망해서 센다이 번의 폐지를 막기 위해 그의 이복동생[62]인 다테 나리무네가 대신 다테 지카무네 행세를 하며 3년 동안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겨야 했다. 이렇게 다테 지카무네의 죽음을 숨기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한 센다이번 다테 가문의 가신단이 벌인 활약은 은근히 코메디이다. 다만 이 꼼수를 막부 측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센다이 번이 워낙 크고 중요한 지역이어서 함부로 폐번하기엔 막부로서도 부담스러워서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는 해석도 있다. 재미있게도, 이 지카무네의 증조부인 다테 무네무라가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다른 가문인 호소카와 가문을 구한 선례가 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개그 콤비 샌드위치맨의 다테 미키오가 이 사람의 후손이다. 다만 종가가 아니라 분가 쪽 혈통. 모친 쪽 가계가 다테 종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개그맨을 할 거면 가명을 쓰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91년 센다이 아야시 천체관측소에서 발견된 소행성에 다테 마사무네의 이름이 붙어 있다.

페르소나 3에서 등장하는 월광관 학교 고등부 역사교사인 오노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투구도 똑같은 걸 쓰고 있다.

현재 대전 시티즌의 플레잉 코치인 김은중베갈타 센다이에서 활약하던 당시에 얻은 별명이 다테 마사무네의 별명인 독안룡이었다. 베갈타 센다이의 홈은 마사무네가 활약했던 지역인 미야기 현인데다 김은중 역시 다테 마사무네처럼 한쪽 눈이 안 보이기 때문.[63]

다테 마사무네가 가지고 있던 일본도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 오오쿠리카라, 타이코가네 사다무네가 현재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 셋은 모두 웹게임 도검난무-ONLINE-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구체관절인형 회사인 보크스에서도 돌피 모델로 등장하였다.센다이 돌파 2에서 한정 돌피로 발매되었다. # 또 하나는 하세쿠라 츠네나가라고. 다만 한국에서는 발표만 했다하면 보크스의 우익 논란으로 뜨거워진다고.

2019년에는 일본인 12,000명[64]이 뽑은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인 인물 순위에서 6위를 기록했다. #[65]

9. 후손[편집]


다테 가문은 이후 센다이 번을 지배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좌막파에 섰고 패배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후손으로 다테 야스무네가 있다.


10. 창작물에서[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다테 마사무네/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원래의 동상이 따로 있었으나 태평양 전쟁 당시 동상째 공출당하는 바람에 전후에 새로 만들어진 게 현재의 동상. 센다이 박물관 앞마당에 옛 동상의 흉상만 남아 있다.[2] 게임 전국 바사라 시리즈의 로고 배경에 쓰인 문장이 이것이다.[3] '본텐마루'란 이름은 브라만(梵)을 남성형으로 인격화한 힌두교의 창조신을 뜻하는 '범천(梵天)'에 '丸' 자를 붙인 듯하다. 중세 일본에도 불교는 대중적인 종교였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다.[4] 지금의 미야기현 ~ 이와테현 일대.[5] 일본어로 차남을 의미하는 지로(次郎)란 단어가 붙었지만 실제로는 장남이다. 다테 가(家)의 장남은 '토지로'라는 이름을 대대로 썼다고 한다. 앞에 붙는 '토(藤)'는 다테 가가 무츠(陸奥)[4] 후지와라(藤原) 가의 후예이기 때문이다.[6] 다테 마사미치(伊達政道)(1568 ~ 1590)[7] 사실 독살설은 후대의 창작이나 코지로를 죽이기 위한 핑계였다는 말이 많다. 특히나 어머니는 결국 친가인 모가미 요시아키 령으로 가기는 하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동생 코지로를 처형하고 8년 뒤 일이다.[8] 컴플렉스 때문이 아니라 마사무네가 설령 병으로 잃었다 할지라도 부모에게서 받은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불효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초상화나 목상에 두 눈을 모두 그리거나 조각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도 한다.[9] 항목 상단의 초상화에서도 오른쪽 눈이 왼쪽 눈보다 약간 작게 묘사되었다.[10] 5살인 마사무네에게 부동명왕은 험상궂지만 자비롭다고 말했는데 마사무네는 "다이묘의 모범이구나."라는 대답을 했고 이에 테루무네는 아들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간파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11] 비슷하게 오다 노부나가도 가신들이나 가족들에게 그리 평판이 좋지 못했지만 노부히데는 결국 가독을 노부나가에게 상속했다.[12] 양력으로 따지면 해를 넘겨서 1586년이지만, 음력으로 따지면 아직 해가 넘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즉 당대 사람들 입장에서 히토토리바시 전투는 마사무네가 가문의 당주가 된 이듬해 일어났다.[13]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통솔, 지력 80이 안 되는 애매한 명장들이다. 천도에서 호규는 제사지사라는 고급전법을 가지고 있어서 쓸 만은 하다.[14]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때 자신의 여동생이 진중에 도착했다고 하자 직접 자신의 아들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고모에게 인사시킨 후 그 모습을 보며 아니 이렇게 사이가 좋은데 왜 싸워야 하나 하면서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무조건 강화 이후에 요시히메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그대를 생각해서 강화한 건 아니었다..."[15] 다이묘 간 사적인 분쟁을 금지하는 명령. 1586년에 내려졌다.[16] 히데요시는 자신의 낮은 신분을 평생토록 수치스럽게 여겼고, 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의 출생 배경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당시 고급 문화였던 다도에 빠져 비싼 자기 등을 사들였다.[17] 그도 그럴 것이 모자 간의 사이가 나쁘긴 커녕 도리어 자기 어머니와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문헌 상에 남아 있으며, 이 독살 시도 이후 8년 후에나 어머니가 야마가타로 이봉한다.[18] 십자가 하면 가톨릭을 떠올리지만 원래부터 일본에는 십자가형이 있었다.[19] 봉지, 즉 자신의 임지-영지를 옮기는 것. 보통 행정이나 처벌적인 의미로 명령되며 이 경우 사실상 땅을 빼앗겼다.[20] 명목상 고쿠다카는 64만 석이었지만, 실질적인 수입이 거의 1백만 석에 달했다고 한다.[21]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22] 마사무네의 군사적 능력은 많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나 이에미츠의 시기에 마사무네와 맞먹는 경험을 지닌 대영주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때문에 마사무네의 지지 선언은 상당히 무게감 있는 것이었다.[23] 츠루가 성이라고도 불린다.[24] 막말 4현후 중 한명인 다테 무네나리가 그 후손이다.[25] 마사무네의 선조인 타네무네가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양자, 혼인 정책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오사키, 카사이, 모가미, 루스씨, 타무라씨 등 동북의 주요 세력들을 다테 가문의 영향권 안에 넣었다.[26] 본명은 오카 사다토시. 우에스기 가문이 미츠나리와 함께 이에야스를 협공하기 위해 군비를 갖출 때 영입한 인물로서 유명한 수전노였지만, 나중에 우에스기 군이 전비 충당이 힘들어 곤란을 겪자 주군인 카게카츠에게 재화를 헌상하고, 우에스기가 전봉당하자 예전에 동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빚 문서들을 싸그리 불살라버린 호걸이었다.[27] 당시 유키무라는 처음부터 이에야스의 본진을 노리는 작전을 세웠다.[28] 유럽처럼 권총인 피스톨이 일본엔 없었다.[29] 스즈키 마사야의 일본의 기마 군단 돌격 부재 설에 따르면, 보병들과 함께 말에서 내려서 근접돌격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조실록 등에 나온 일본 기병의 모습처럼.[30] 왜냐면 일본은 기병 전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명나라 기병한테 붙는 족족 박살이 났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군마는 조선이나 명의 군마에 비해 너무 작았다. 그 때문에 기마돌격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조선군이나 명군의 기병이 전차였다면 일본군의 기병은 기계화보병에 가까웠다.[31] 다만 용기병을 생각해보면 기마대가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당시 일본의 전투 환경에 용기병식 전술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는 않았을 듯. 사실 용기병식 전술은 유럽처럼 상대가 선형진을 폈을 때나 쓸모가 있다.[32] 센다이시의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이 지역은 아직까지 많이 미개발된 지역으로 당시 기준으로 일본 중심부에서 떨어져 있던게 에도인데 그 에도보다도 한참 떨어져 있다. 이쯤되면 그냥 변두리 시골인 셈. 물론 그렇기에 반대로 개발하여 키워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33]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다테 마사무네》에서는 마사무네가 싸워 얻은 영지를 히데요시가 무력 개입하여 대폭 감봉시켰다고 부들거리는 마사무네에게 마사무네와 묘한 친분관계가 있던 이에야스가 '자네 영지는 실질 고쿠다카가 굉장히 과소평가되었고 미개발 상태[32]라서 개발 사업만 잘 하면 백만 석 정도까지 거둘 수 있는 곳이다. 그런 좋은 영지를 히데요시가 미처 몰라서 준 건데 왜 화를 내는가?'하고 조용히 타이르기도 한다. 잠재력 있는 땅을 줄테니 키우는건 니가 하라는 소리[34] 이렇게 센다이 번이 강성한 번이 된 만큼 그만큼 영향력도 세져서 가령 에도에서 소비하는 쌀은 절반이 센다이산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35] 거대한 생산력을 통해 구축한 경제력과 비교적 명군들이 많이 나왔던 센다이 번은 상당 기간 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7대 시게무라의 대에 와서는 소빙기가 야기한 온갖 자연 재해와 기근, 잇키, 막부의 국역 부과, 에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화재로 에도 저택들이 잦은 소실된 것 등 온갖 악재에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시게무라가 통치하던 센다이 번의 채무는 60만 냥에 달했고 에도에 쌀을 수출한다는 번에서 쌀을 2만 석 넘게 빌리고 있었다. 게다가 시게무라 말년에 와서는 일본 최악의 기근 중 하나인 텐메이 기근이 터져 센다이 번에 큰 피해를 입혔다. 텐메이 기근이 끝난 뒤에도 센다이 번에는 자연 재해나 잇키가 잦았고, 8대 ~ 11대까지는 다이묘들이 평균적으로 10년 이상 통치하지 못하고 급사하는 일이 많아 번정이 혼란스러워졌으며 재정도 나빠져서 채무가 70만 냥이 넘었다.[36] 히데요시는 자신을 천하의 패자로 선언한 뒤 센고쿠 시대를 끝낸다며 '소부지레이'를 선포하여 다이묘 간의 모든 싸움을 사사로운 것으로 엄금했는데, 마사무네는 이걸 어긴 혐의를 받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대규모 토벌로 인해 같은 혐의를 받은 시마즈 씨 등의 세력이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호조씨는 아예 멸망해버렸음을 생각하면 마사무네는 선방한 편이다.[37] 원래 성은 '오니니와(鬼庭)'였으나, 그를 만난 히데요시가 "마당(庭)에 오니(鬼)가 있다니 재수가 없다. 수풀이 우거진 마당이라는 뜻의 모니와(茂庭)로 바꾸도록 해라"라고 해서 모니와로 성을 바꾸었다. 이 당시 히데요시는 73살로 전사한 아버지 요시나오가 요절한 것으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대로 장수하는 그의 집안 내력을 듣고 장수 비결을 물어보기도 했으며, 장수 비법이 쌀가루를 따뜻한 물에 타서 한 잔씩 마시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두고두고 따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히데요시와 가까워지고 히데요시가 아예 가신으로 들이려고까지 해서 마사무네에게 의심받자 사이가 벌어져서 가문을 탈주했다가 후일 복귀했다.[38] 다테 시게자네 같은 경우 탈주한 후 성을 접수하러 간 마사무네의 가신들과 구 시게자네의 부하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시게자네의 가신단이 살해당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단 드라마처럼 가족들까지 죽임을 당했다는 비극적 이야기는 설화에 불과하고, 시게자네는 복귀 후 다시 마사무네와 양호한 관계가 되었다.[39]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에선 동생만 총애하는 어머니에게 미움받은 일로 두 사람이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때 마사무네는 자신들과 비슷한 입장인 오다 노부나가의 예를 든다.[40] 이 때문에 J리그 팀인 베갈타 센다이는 시내 나나키타 공원에 위치한 축구전용 구장인 유어텍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41] 계란에 생선살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으깨어 술과 함께 섞고 달게 간하여 두툼하게 부친 뒤, 그것을 김밥처럼 돌돌 만 음식.[42] 이 일화는 다테 마사무네의 일화가 아니라 중국 불교 선종의 경전에 나오는 일화이다. 해당 일화에서는 자기를 박살낸 사람이 중국의 장군으로 나오며 이 책은 당연히 다테 마사무네의 생존 시기보다 더 오래 전에 출간됐기 때문에 이 일화는 선종 계열의 불교가 일본 사무라이 계층에 널리 퍼지면서 마사무네의 일화로 오해된 경우인 듯하다. 이와 같이 일본 센고쿠 시대의 수많은 일화들이 알고보면 다른 원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난세라는 센고쿠 시대의 특징으로 공신력 있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뤄졌던 시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화들이 각 가문들의 자화자찬용 기록에서 나온 것들을 조합한 것이다 보니 신뢰성이 떨어지는 일화들이 많다.[43] 우에스기 켄신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호조 가문을 정벌할 당시 화살이 닿는 성문 앞에 가서 털썩 앉아 차를 따라 마셨다고 한다.[44] 일본식 식사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국을 수저로 떠 먹는 게 아니라 좀 작은 국그릇을 들고 쭉 마시는 식으로 먹기 때문에 국을 저리 뜨겁게 데우면 당연히 혀를 덴다.[45] 단, 편지 내용에 '하도 아들을 죽이겠다 말하고 다닌다고 들어서 급하게 편지를 쓰는 바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서, 바로 죽이지 않고 죽이겠다고 주변에 공언하고 다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군의 인기 상승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가능성도 있다.[46] 기사 본문에 이 편지의 실물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술 취해서 쓴 것마냥 괴발개발 휘갈겨 쓴 필체로 쓰여 있다.[47] 영지를 몰수하고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분. 즉 죽지만 않을 뿐 가문이 멸망하는 것이다.[48] 그런데 진보는 영지가 다이묘의 기준인 1만 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세력만을 가진 무사였기 때문에 적의 본대에게 밀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고, 그런 진보 부대를 밀린다며 쏴버린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잔인무도한 행동이다. 진보에 비하면 다테의 영지 규모가 깡패여서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어영부영 넘어간 것.[49] 참고로 이 통상 협상 자체는 꽤 진전이 이루어졌음에도 결국 가톨릭 포교 문제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50]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살상 용도는 아니였지만 이런 행동은 목숨 거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추신구라 참고.[51] 이에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라고 평을 남겼다.[52] 마사무네 본인도 한참 뒷 세대지만, 아버지 테루무네도 노부나가보다는 조금 더 어린 세대다.[53] 다만 이건 당대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근기지방, 오사카·교토의 사람들은 이외의 지역을 상당히 무시했고, 덕분에 동북지방의 다이묘들은 일반적인 다이묘들보다 더욱 더 높은 교양을 갖추고 다도를 배우며, 예컨대 모가미 요시아키 같은 경우에도 상당한 문화인이었다. 다테 마사무네 같은 경우에는 기행을 했다고도 한다. 물론 동북지방의 경우 오슈의 광활한 토지를 기반으로 많은 고쿠다카(石高)를 보유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비록 데와국과 합친 것이긴 하지만 혼슈 전체 면적의 30%를 차지할 정도이니.[54] 이 말고도 '오늘 누구랑 뽀뽀했는데 절대 바람 핀 게 아니니 안심해라.'(...)라는 편지도 있었다 한다.[55] 이 때문인지 일부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다테 마사무네의 정실인 메고히메가 졸지에 Bitch 취급을 받는 일도 간혹 있다고 한다.[56] 교토 취락제에 인질로 가 있을 당시 마사무네에게 편지를 통해 교토의 정세를 알리는 등 다테 가의 외교관 역할을 했는데, 이 당시 남편에게 보낸 서찰 중 늘 비수를 품고 있어서 결코 치욕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니 걱정 말고 계시라는 내용이 있다.[57] 일명 피스톨 박이라고 불리던 총덕후로 유명한 인물이다.[58]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1979년에 복원되었다.[59] 스핀오프작 전국 바사라 사나다 유키무라전의 개그 무기 중 하나가 이 물방울 무늬가 들어간 부채다.[60] 본편의 인물들이 고양이로 등장하는 소셜 카드게임 형식의 번외작이다.[61] 이건 다테 마사무네를 모티브로 한 다른 캐릭터를 표절한 것에 가깝다.[62] 나이는 동갑인데 생일은 몇 개월 차이 난다. 부친은 동일 인물이지만 모친이 다른 인물인 이복 형제이다.[63] 다만 마사무네가 오른쪽인 반면 김은중은 왼쪽이다.[64] 조사 대상은 10대~60대 남성, 여성.[65] 1위 오다 노부나가(1,059표), 2위 사카모토 료마(1,047표), 3위 스기하라 지우네(603표), 4위 쇼토쿠 태자(582표), 5위 사나다 노부시게(561표), 6위 다테 마사무네(508표), 7위 우에스기 겐신(458표), 8위 도쿠가와 이에야스(440표), 9위 히지카타 토시조(426표), 10위 구로다 요시타카(380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순위권 안에 들지 못한 것은 인터넷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이것이 일본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1 10:30:10에 나무위키 다테 마사무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