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번(제후국) (문단 편집) == [[일본]]의 번 == 일본 역시 중국의 번국(藩國)으로 책봉을 받은 기록이 존재한다. [[왜나라|왜]](委)의 경우, 한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는 책봉을 받았고,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책봉을 받았다. 그리고 [[고훈 시대]]에는 왜 5왕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았다.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조공(견수사, 견당사)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 막부의 아시카가 정권이 명나라에 칭신하고 일본국왕(日本國王)에 책봉된 뒤 조공을 바쳤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으로 내부가 혼란해지자 외교에 신경쓸 처지가 못 되었고, 센고쿠 시대 이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강화교섭 당시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2007_005|#]] 일본 내부에서 사용하던 번(藩) 제도는 [[막부]] 시대 영주([[다이묘]])가 다스리던 [[영지(역사)|영지]]를 의미했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C%EB%B3%B8%EC%9D%98_%EB%B2%88|#]] 일본식으로는 'はん'(한)이라고 읽는다. 센고쿠 시대에는 [[성(건축)|성]]의 유무, [[광산]] 같은 특수한 자원, 군사적인 입장 등을 고려하여 정해졌지만, 중요점은 경제력으로 3~4년 평균을 잡아 영지 내에서 한 해 수확되는 쌀이 10,000섬이 넘는 경우 번으로 분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말인 만석꾼이란 말이 여기에 기인한다고 한다. 번의 영지는 [[율령국]]의 구니(国)의 영역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고쿠다카]]가 전국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큰 대번들은 대부분 2~3개 국을 지배했고, 그외 대부분의 중소번들은 1개 국의 영역보다 작은 영지를 지배했다. 히젠 국에 사가 번, [[히라도]] 번, [[카라츠]] 번이 있는 식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2%88_%EB%AA%A9%EB%A1%9D|위키백과 번 목록 문서]]에서 각 율령국별로 존재했던 번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면 크기상 율령국보다 번이 더 작은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역사상 이런 [[봉건]] 영지가 흔히 그렇듯 수많은 [[월경지]]로 인해 영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데다, 영지가 2개 이상의 율령국 사이에 걸쳐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번의 이름을 율령국에서 따온 경우에도 실제 영지의 영역은 해당 율령국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카가 번]]은 [[카가]] 국에서 번명을 따왔으나 카가 국 뿐만 아니라 [[노토]] 국, 엣추 국까지 지배했고, 조슈([[나가토]] 국) 뿐만 아니라 [[스오]] 국까지 지배한 [[조슈 번]], [[사쓰마]] 국 뿐만 아니라 오스미 국, 휴가 국 3국을 지배한 [[사쓰마 번]] 같은 경우도 있었다. 본래는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다이묘]]의 영지에 대해 상술한 중국의 역사 용어를 차용하여 번국(藩國)이라 칭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번(藩)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영주에게 명령을 내릴 땐 해당 영주의 가문을 직접 언급해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가문의 성씨와 대표 관위를 붙여서 불렀다. 마에다씨의 카가 번은 막부로부터 마츠다이라씨를 하사받았고, 대표 관위가 참의였기 때문에 마츠다이라 카가재상(재상은 참의의 당명이다)이라고 불렸고, 우에스기씨의 요네자와 번은 우에스기 탄정대필이라고 불렸다. [[쿠로후네 사건]] 전후로 점차 사용빈도가 늘며 공적인 자리에서 언급되기도 했으나, 번(藩)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공식적인 명칭이 된 것은 [[판적봉환]]을 시행한 [[1869년]]부터, [[1871년]] [[폐번치현]]이 되기 전 2년간뿐이다. 덧붙여 번(藩)의 [[사무라이|무사]]라는 뜻인 번사(藩士)라는 용어도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다. 조슈의 [[카츠라 코고로]]를 예로 들면, 실제로는 "모리 가문의 가신, 가쓰라 코고로(毛利家家臣桂小五郎)"라는 식으로 통성명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